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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ㅏ진인생/DS5ZWK
탁영(김일손)선생연보_하권 본문
↑ 탁영 김일손 선생이 사용하던 거문고 "탁영금" 대구국립박물관 에 보관되어 있다
탁영선생(김일손) 은 "사진인생"의 16대 조부 이시다.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자계서원 이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濯纓先生年譜 下
탁영선생<휘일손>연보 하(1/2)
<原文: 濯纓先生年譜 金大有 著 高宗11[1874]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2511-10-25, 參考譯文: 增補濯纓先生年譜 2006.9.30. 感慕齋宗中, 解釋 : 2008. 8.15. 金順大, 編輯 :金乙泰>
○ 八年{廢主燕山君元年} 乙卯{先生三十二歲}
1495년 을묘 (연산군 1년) 선생 32세
春二月丙子有疾辭職不 允
<1495년> 춘 2월 병자(22일) : 질환(疾患)이 있어 사직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成廟上賓先生哀慟不自勝主居喪多失德益憂歎成病遂請解職主以爲 大行在殯非臣子辭職之日不許
성묘(成廟)가 하늘의 빈객(賓客)으로 오르니 선생은 애통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였고 거기다가 폐주(燕山)가 거상(居喪)하는데 많은 실덕을 하여 근심과 탄식을 더 함으로써 병이 되어 마침내 해직을 청하게 되었다.
폐주는 “대행대왕(大行大王 : 죽은 임금의 시호 올리기 전 존칭)이 아직 빈소에 계신데 신하 된 사람들이 사직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先生遇知於 成廟每進言必虗懷嘉納優批褒寵除拜之際多有特恩 上嘗於經筵謂參贊官曹偉曰金馹孫文學俱優在器兼備風采魁偉氣節正直論議峻整可以肅臺閣之風謨猷宏遠可以寄廊廟之責予欲聞其言而屢任栢府薇坦之職欲究其學而久處經席翰苑之班雖除他官必兼經史之任將欲大用以爲輔相之官而但其年少而志大性太峻氣太銳言太直疏太高當俟其老成而用之
선생은 성묘(成廟)에 뜻이 맞고 인정을 받아 은총을 입었었다. 진언할 때마다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너그럽게 비답(批答)하며 친찬하고 총애했다. 관직을 제수할 때도 특별한 은총을 베푼 적이 많았다. 주상은 경연에서 참찬관 조위(曺偉;1454~1503)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문장과 학문이 모두 뛰어나며 재능과 기량을 겸비하였고 풍채가 장대하며 기절이 바르고 곧으며 논의 또한 준엄하고 정연하여 가히 대각(臺閣 :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솔할 풍모가 있고 지략이 넓고 깊어 가히 낭묘(廊廟 : 의정부의 별칭)의 직책(즉 재상)을 맡길 만하다. 나는 그의 언론을 듣고자 하여 누차 백부(栢府 : 사헌부의 별칭)의 요직을 맡긴 바 있고 그의 학문을 연구하고자 경연의 직임과 한원(翰苑)의 직위에 오래 있게 했으며 비록 다른 관직에 제수하더라도 반드시 경사(經史)의 직임(홍문관과 춘추관의 직임)을 겸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장차 보상지관(輔相之官 : 대신을 거느리고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관원, 즉 수상)으로 크게 쓰고자 함이다. 그런데 다만 그의 나이가 젊어 그의 뜻은 크고 성품은 너무 준엄하고 기상은 너무 날카롭고 언론은 심히 곧으며 행적은 너무 고상하니 마땅히 그의 노성(老成)을 기다려 쓸 수밖에 없구나.”
先生聞之感恩刻骨厲志益堅知無不言言無不盡論思諫諍必極懇至有古大臣之風至是 上遽賓天先生失聲慟哭曰天乎天乎不欲使我東復見堯舜之治歟胡爲而至於斯也胡爲而至於斯也不惟蒼生無福某之無福亦已甚矣因而疾發乞退
선생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뼈에 새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 굳게 하였다. 선생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하게 되면 다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생각한 바를 논하고 간(諫)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간곡하고 극진하여 예스러운 대신의 풍모가 있었다.
이제 주상이 하늘의 빈객(賓客)이 되어가니 선생은 실성통곡하며 울부짖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우리 동국(東國;조선)으로 하여금 요순(堯舜)의 치세(治世)를 다시 보려 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는고!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는고! 오직 창생(蒼生)의 무복(無福)만이 아니라 그 누구의 무복이라 해도 이것은 너무 하오이다!”
이로 인하여 병이 발생하고 퇴관(退官)할 것을 간절히 주청하였던 것이다.
三月己丑上疏陳戒辭十條因乞免官不報
<1495년> 3월 기축(6일) : 상소하여 10개 조목의 경계해야 할 사항을 진언하고 인하여 면관(免官)을 주청하였으나 회답이 없다.
歷擧新政闕失語甚切直主心怒之留中不答
새 정사에서 궐하였거나 잘못된 점들을 일일이 열거하여 심히 절실하고 정직한 언사로 상소하였는데 폐주는 마음 언짢아하면서도 속으로 묻어둔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癸巳上疏自劾乞鐫職名放歸田里蒙 允
<1495년 3월> 계사일(10일) : 스스로를 탄핵하며 직명(職名)을 깎고 향리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주청하는 소를 올려 윤허를 받다.
先生以疏辭㘦直忤於主遂以言不能格君而苟充祿位自劾待罪請罷職從之
선생은 소(疏)의 언사가 매우 강직하여 폐주를 거슬렸다. 드디어 진언(進言)으로써 임금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녹 먹는 자리만 채우고 있다고 스스로를 탄핵하고 대죄(待罪)하며 파직을 주청하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甲午又疏請還納 賜第不報翌日卽行
<1495년 3월> 갑오일(11일) : 또 상소하여 하사 받은 저택의 반환을 주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자 다음 날 바로 귀향길에 오르다.
留奴婢二人守第所以重 上賜也
임금의 하사물이므로 중히 여겨 집을 지킬 노비(奴婢) 두 사람을 남겨두고 떠났다.
渡漢江有詩曰微臣此去歸何日回首終南已暮春 讀之無限感慨無限悽愴
한강을 넘을 때 지은 시 한 수가 남아있다.
<一馬遲遲渡漢津(필마로 느릿느릿 한강 나루 건너니),
洛花隨水柳含嚬(떨어진 꽃잎 물 따라 흐르고 버들은 찌푸린듯․․․)>
⇒추록2구절
微臣此去歸何日(미신 이제 가면 언제 또 돌아오리까!)
回首終南已暮春(남산을 돌아보니 이 봄도 이미 저물어가네.)
이 시구를 읽으면 한없이 감개가 일고 한없이 구슬퍼진다.
庚子過堤川縣訪權子汎有癡軒記
<1495년 3월> 경자일(17일) : 제천현(提川縣)을 지나면서 권자범(權子汎)을 방문, 「치헌기(癡軒記)」를 짓다.
子汎卽君饒名景裕性剛毅不喜作爲癸丑辭弘文校理乞外爲是縣先生以敎化說送之至是新其客館之西序而軒之請先生以記之{敎化說見文集一卷癡軒記見文集三卷}
자범(子汎) 또는 군요(君饒)는 경유(景裕)의 字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고 의연하며 가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축년에 홍문관 교리를 사임하고 외직을 구걸하여 제천현감(提川縣監)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 선생은 교화설(敎化說)을 지어 송별한 적이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객관 서쪽 채를 새로 신축하여 선생에게 헌기(軒記)를 청함에 치헌(癡軒)이라 이름하고 헌기(軒記)를 지었다. (敎化說은 문집 1권 및 속동문선 18권, 癡軒記는 문집 3권 및 속동문선 14권 참조)
丁未抵雲溪
<1495년 3월> 정미일(24일) : 운계에 당도하다.
先生自筮仕之初便有以身殉國之意及是時知世道之不可有爲退還鄕里杜門不出浩然有謝世之志而愛君憂國之心未嘗一日弛也
선생은 자신의 점대 점을 쳐본 적이 있는데, 벼슬살이 초반에는 편안하겠으나 일신은 순국(殉國)할 운세가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선생은 세상 도의(道義)가 유익한 일을 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서는 두문불출, 호연한 심정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을 뜻을 가졌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단 하루도 버리지를 못하였다.
宣陵輓詞成未果上
선릉(宣陵 : 성종의 연호) 만사(輓詞)를 지었으나 올리지 못하다.
宣陵因山將近先生以侍從臣當進輓詞會有罷官之命不得進呈詞凡五篇哀慟惻怛之忱溢於辭表有不敢言天道無由答 聖恩之句
선릉(宣陵)의 인산(因山;國葬日)일이 가까워옴에 선생은 시종하던 신하로서 마땅히 「만사회(輓詞會)」에 나아가야 하나 퇴직 명을 받은 터라 「만사(輓詞)」를 올리지 못했다.
「만사(輓詞)」는 무릇 다섯 편으로 애통하고 측은하며 슬퍼하는 정성이 넘쳤으며 그 표현 속에는 감히 할 수 없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성은(聖恩)의 대답 말씀을 듣게 해줄 이가 없었다.
冬十月甲子有疾風知勁草賦
<1495년> 동 10월 갑자(15일) :「질풍지경초[35]부」를 짓다.
[35]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란 강한 바람이 불 때 약한 풀은 다 쓰러지므로 비로소 굳센 풀이 눈에 뛴다는 뜻으로 ‘간난(艱難)을 당하여 비로소 굳은 절개를 알게 됨’을 비유한 것.
時群小亂政導君爲惡擧朝風靡無人敢言先生作此賦以歎之{賦見文集一卷}
당시 많은 소인배가 정사를 어지럽히고 임금으로 하여금 악정(惡政)을 행하도록 인도하며 온 조정을 휩쓸고 있었으나 감히 말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생은 이 부(賦)를 지어 탄식하였다. (문집 1권 참조)
十二月庚申除獻納有 旨促召再辭不 允
<1495년> 12월 경신(11일) : 사간원 헌납에 제수하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用吏曹判書魚世謙薦也○魚公知先生忠鯁勤懇遇事必言有諍臣風栽可以退佞人輔新政上箚力薦有是 命
이조판서 어세겸(魚世謙,1430~1500)이 등용하도록 추천했다. 어공(魚公)은 선생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여 어떤 사건에 당하면 반드시 진언(進言)하는 쟁신(諍臣)의 풍모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물러난 유능한 인사로써 신정부(新政府)를 보필하도록 차자(箚子)를 올려 강력히 추천, 재가를 받음으로써 이 명이 내려지게 된 것이었다.
○九年丙辰{先生三十三歲}
1496년 병진 (연산군 2년, 선생 33세)
春正月辛卯又有 旨促召壬辰乘馹赴 召庚子次城外辛丑拜 命袖疏陳時政因辭職不許
<1496년> 춘 1월 신묘(12일) : 재촉하여 부르는 교지가 또 내려 임진일 역마를 타고 상경, 경자일(21일)에 성 밖에서 묵고 신축일(22일)에 배명한 다음 시정(時政)에 대한 상소문을 직접 올리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先生方欲力辭魚公又以書勸起不得已就召旣肅謝入侍袖疏論時政闕失劾任士洪尹弼商李克墩等奸邪因辭職名優批不許
선생은 곧 강력히 사직하려 하였으나 어공(魚公)이 또 서신을 보내어 관직에 출사(出仕)할 것을 권하므로 부득이 부름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정중한 사례를 다한 다음 입시(入侍)하여 직접 소장(疏章)을 올려 시정의 잘못되고 모자라는 점을 논하고 임사홍(任士洪,1445~1506), 윤필상(尹弼商,1427~1504), 이극돈(李克墩,1435∼1503) 등 간사한 무리들을 탄핵한 후 사직을 청하였는데, 너그럽게 비답하며 사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癸卯與諫僚上箚請復 昭陵不 允
<1496년 1월> 계묘일(24일) : 간료(諫僚 : 사간원 관료)들과 더불어 차자(箚子)를 올려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주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다.
<昭陵復位 聯箚>
先生在 成廟朝嘗以忠淸都事請復 昭陵事寢不行至是又與大司諫金克忸司諫李宜茂正言韓訓李冑等聯箚獻議略曰 文宗元妃權氏之殂在於 魯山遜位之前而一時追廢使 文宗獨享於 宗廟此禮之欠缺而事之惻然者也 成宗嘗以籍沒藏獲還給 魯山夫人宋氏以資其生原其族從皆通仕籍 成宗之至意加見伏願亟復 昭陵廟主還配 文廟宗祐幸甚啓下吏曹判書韓政亨等回啓言自古廟無獨主而 文宗獨享於 廟於義非不未安但 昭陵 祖宗廢之已久今不可輕易復立云云
선생은 성묘조(成廟朝) 때 충청 도사(都事)로 있으면서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소청한 바 있었는데, 그 사안은 잠잠해지고 행하여지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또 다시 대사간 김극뉴(金克忸,1436~1496), 사간 이의무(李宜茂,1449∼1507), 정언 한훈(韓訓, ?∼1504), 이주(李冑,?~1504) 등과 연대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문종 원비(元妃) 권씨(權氏)는 노상군(魯山君)의 손위(遜位)가 있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나 그 뒤에 폐위되어 종묘에서 문종 홀로 향사를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법상의 흠결이며 사리(事理)상으로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성종은 일찍이 몰수한 재산을 도로 환급하게 하시어 노산부인(魯山夫人) 송씨(宋氏)의 생계의 자산으로 하게 하시었으며 그 친족들을 용서해 주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시었는데, 이는 성종의 지극한 뜻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속히 소릉(昭陵)을 복위(復位)하시고 묘주(廟主)를 문묘(文廟) 감실 배위(配位) 자리에 돌아가게 하소서. 그러면 심히 다행하겠나이다.”
이에 예조판서 한치형(韓致亨,1434~1502) 등이 임금의 재가를 받아 회신하여 이르되, “자고로 묘(廟)에는 독주(獨主)가 없는데 문종만이 종묘에서 독향(獨享)되니 의리상 미안하지 않은 바 아니나, 다만 소릉(昭陵)은 조종(祖宗)께서 폐한 지 이미 오래된 일이라 지금 경솔하게 바꾸어 복위(復位)함은 불가하다. ․․․” 운운하였다.
丙午 文宗廟室夜有火光丁未上疏復申前箚不報戊申又疏辭職不 允
<1496년 1월> 병오일(27일) : 밤 문종(文宗) 묘실(廟室)에서 불빛이 나타난 일이 생겨 다음날 상소하여 전에 올린 차자(箚子) 내용을 다시 품신했는데, 회답이 없어 무신일(29일) 또 상소하고 사직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昭陵復位獨疏>
左議政魚世謙以 文宗室有光恠請命禮官行慰安祭先生又疏請復 昭陵其疏曰孔子以繼志述事爲武王周公之達孝盖謂先人志事可以繼述者繼述之也非謂其不必繼述者亦繼迷之也夫事固有可行有不可行時亦有可行有不可行豈可泥於古而行之委於古而不行也
좌의정 어세겸(魚世謙)이 문종(文宗) 묘실(廟室)에서 있은 불빛이 괴이하여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위안제를 올리도록 임금에게 주청하였다. 선생은 또다시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소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공자(孔子)는 선인(先人)의 유지(遺志)를 이어 받들고 선인의 사업을 이어 완성한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을 달효(達孝 : 한결같이 변함없는 효도)라 했는데 대체로 이 말은 선인의 유지와 사업이라도 계승할 만한 것이어야 계승하는 것이지 꼭 계승될만한 것이 아닌 것도 계승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저 일이란 본디부터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시기(時期) 역시 실행할 수 있는 때가 있고 실행할 수 없는 때가 있는 법인데 어찌 선인들의 일이라 핑계하여 지체하고 미루어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臣竊伏惟 顯德王后卽 文宗元妃而德儀兼備大爲 英廟眷慈年二十四誕魯山致病七日而薨葬于安山是爲 昭陵昭陵之廢已四十年矣其廢也臣未知其緣何事端而事在難言臣敢不爲國諱爲尊諱以法春秋之義乎然臣伏念 顯德王妃初不得罪於 宗社則黜之 太廟可乎亦非見黜於 文宗則葬以庶人可乎生不見黜於 文宗而配體至尊後乃被廢於 光廟而禍及重隧者雖由於六臣謀變而 后之母弟俱誅勳臣密贊而 魯山中道隕逝之故而此誠有人國以來所無之大變也竊伏聞發 陵之時夜有哭聲遷瘞海濱頗著靈異土人村珉口傳一抔秋江竹淚長久騷人之句寒食麥飯空呑野老之聲蓬蒿荒沒孤兎躑躅天荒地老哀恨難旣安知夫無限幽寃飄蕩無依不盤礡鬱結於泉臺之下又安知 文宗在天之靈其肯安於心而洋洋陟降獨享夫禴祀烝嘗不飮泣垂憐於梵然之孤魂耶
신(臣)이 삼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현덕왕후(顯德王后), 즉 문종(文宗) 원비(元妃)는 덕망과 예의를 다 같이 크게 갖추었었는데 영묘(英廟 : 세종) 치세 시 연세 24에 노산(魯山)을 낳고 병을 얻어 7일 만에 별세하여 안산에 장사 지내고 소릉(昭陵)이라 하였습니다. 소릉이 폐위된 지 이미 40년이나 지나 신(臣)은 그 폐위가 무슨 사단(事端)에서 연유된 것인지 잘 모르오며 그 사건에는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신이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정신을 본받으면서 감히 나라를 위하여 기휘(忌諱)하지 아니하고 존상(尊上)을 위하여 기휘(忌諱)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엎드려 생각하니 현덕왕후(顯德王后)는 처음부터 종사에 죄를 지은 바 없는데 태묘(太廟 : 종묘)에서 내쳤으니 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또한 문종에 의하여 내침을 당한 사실이 없는데 서인(庶人)으로서 장례하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생전에 문종에게서 내침을 당한 바 없어 배위(配位)의 몸으로 지존(至尊)한데 후에 광묘(光廟 : 세조)에 의하여 폐함을 당하였고 화는 무덤길까지 거듭하여 미쳤습니다. 비록 육신(六臣)의 모변(謀變)에 연유한 것이기는 하나 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은 모두 처형을 당하였고 훈신(勳臣)들의 비밀폭로로 노산군(魯山君)이 중도에 서거하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사람의 나라가 생긴 이래 전례가 없는 대변고(大變故)이었습니다. 신이 은밀히 들은 바로는 능을 파헤칠 때 밤에 곡성이 있었고 바닷가에 옮겨 묻을 때에는 매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토착 촌백성들이 단지 언덕 같은 한 무덤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을 강에 뿌린 죽누(竹淚 : 피눈물)는 오래도록 문인들의 시구(詩句)에 오르고 식은 음식, 보리밥은 속절없이 시골 늙은이의 목소리를 삼켰습니다. (그 무덤이) 쑥대 풀에 파묻혔고 여우와 토끼들이 어슬렁거리니 하늘이 황폐하고 땅이 늙어도 애절한 한은 끝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한(恨) 많은 원혼(冤魂)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다가 지하에서 답답해함이 없는지 어찌 알겠으며 하늘에 계신 문종(文宗)의 영혼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르내리며 사시(四時)의 제사(祭祀 : 禴嗣烝嘗)에 흠향하실 때 눈물을 삼키며 외로운 고혼(孤魂)을 슬퍼하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습니까?
禮本於情情施於禮古今之通義也自天子至於庶人立廟之制雖有五廟七廟一世三世之殺焉然未聞有無配位之廟矣惟我東方素稱禮義之邦而 聖祖受命五禮畢擧 列聖相承是繼是述典章法度侔擬中華獨於 太廟之內乃有無配位之室人情斁矣廟禮缺矣因徇三世迄未追復而
예(禮) 근본은 정(情)에서 비롯되고 정은 예에서 베풀어진다는 것은 고금을 통하여 통용되는 이치입니다. 천자(天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사당의 제도를 세우고 있는데 비록 오묘칠묘(五廟七廟 : 제후, 천자의 廟에서 일세(一世) 삼세(三世)를 제거한 예는 있지만 배위(配位)가 없는 사당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평소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성조(聖祖)께서 천명(天命)을 받아 오례(五禮 : 吉禮, 凶禮, 軍禮, 嘉禮, 賓禮)를 모두 갖추어 거행하시었고 열성(列聖)이 이어 내려오면서 이를 계승 발전시켜 중국의 그것과 비견되는 전장(典章), 법도(法度)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종묘 안에서 배위가 없는 묘실(廟室)이 있어서 인정이 무너지고 묘례(廟禮)의 결함이 되고 있사온데, 이를 미적미적 미루어 삼세(三世)에 이르도록 아직 추복(追復)하지 못하였습니다.
殿下不恠其失羣臣不信其非臣實耻之父母一天地也天地一父母也人未有有天而無地者矣子未有有父而無母者矣帝王臣民之父母也享其父而不享其母尊其父而不尊其母者自古及今未之嘗聞使母有罪而見黜於父則父命不可違莫可奈而何而公然廢其無罪之母使不得入廟似未合於情禮之正矣昔者儒臣南孝溫之論此事僅及於諸條之未而奸臣任士洪李瓊仝軰從而沮毁之以爲復 昭陵事非臣子所敢言刱爲朋黨之說羅織其罪至請鞫之以起士林之禍頼我 成宗明並日月置而不問然自是以來無敢復進言者環東土數千里凡爲我國臣子者孰不爲 昭陵歎之孰不爲 太廟惜之
전하, 이 과오에 대하여 의아해하지 마십시오. 뭇 신하들이 이 옳지 못함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는데 신은 참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천지와 같고 천지는 부모와 한가지입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없는데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없는데 자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왕(帝王)은 백성의 부모입니다. 그 아버지에 대해서는 향사(享祀)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향사하지 않으며 또한 그 아버지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그 어머니에 대해서는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고로 그 유례가 없습니다.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하면 가령 어머니에게 죄가 있어서 아버지에게서 내침을 당했다면 부명(父命)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죄 없는 어머니를 추폐(追廢)하고 묘실(廟室)에서 내치어 받들지 않는다면 이는 정례(情禮)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옵니다. 예전에 유신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이 일을 여러 조목의 말미에 간신히 끼워 소론(疏論)하였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1445~1506), 이경(李瓊)과 그에 따르는 같은 무리들이 가로막고 헐뜯으며 말하기를, ‘소릉(昭陵) 복위(復位) 문제는 신자(臣子)들이 감히 언급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고, 붕당(崩黨)을 조성하려 한다는 억설로 없는 죄를 얽어 꾸미고 그 죄 지극하다며 국문할 것을 청하여 사림(士林)의 화(禍)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성종께서는 일월과 같이 밝으시어 이를 불문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감히 다시 복위문제를 진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방에 둘러진 국토 수 천리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모든 신자(臣子) 가운데 어느 누가 소릉 일을 탄식하지 아니하며 어느 누가 태묘(太廟)일을 애석해하지 않겠습니까?
世宗立崇義殿封王氏後賜之土田臧獲以奉其祀此大聖人之至仁盛德出於尋常萬萬而百世之所欽仰者也勝國之廟猶尙待之如此其仁厚况我 先王之廟禮之當行而無疑者乎權自愼 昭陵之兄也宋玹壽 魯山之舅也 睿宗嘗原玹壽之子姪琚瑛使參朝籍 成宗亦以自愼家所籍家産臧獲還給 魯山夫人宋氏資其餘生由此而 兩聖之微意大可見矣若曰三世所未行今不可追擧則臣亦遵孝溫之說請以 光廟之訓明之其訓 睿宗曰予當屯而汝當泰若局於吾迹不知變通則非所以順吾志而繼吾事也豈非以事有不可行之時亦有可行之時歟
세종은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 고려 왕족) 후손을 봉하여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 제사를 받들도록 했습니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일에서 나온 대성인의 지극한 인(仁)이며 성덕(盛德)으로 오랜 세대를 두고 흠숭하고 우러러볼 일입니다. 전조(前朝)의 사당이 오히려 이와 같이 후하게 대접받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선왕(先王)의 묘(廟)에 대한 예우(禮遇)야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로 의심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권자신(權自愼)은 소릉(昭陵)의 형이고 송현수(宋玹壽)는 노산(魯山)의 장인이온데, 예종(睿宗)은 일찍이 현수(玹壽)의 아들 거(琚)와 조카 영(瑛)을 조적(朝籍 : 관리 명부)에 올리게 하였으며 성종 역시 권자신(權自愼) 가적(家籍)의 가산(家産)과 노비들을 환급해 주어 노산부인 송씨의 여생의 생계 자원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에 관련한 두 성상(聖上)의 숨은 뜻이 매우 컸음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3세에 걸쳐 행하지 못한 바를 지금 뒤쫓아 거행할 수 없다면 신 역시 남효온(南孝溫)의 설(說)을 좇아 광묘(光廟 : 세조)의 가르침(訓)을 살피실 것을 간청하옵니다. 세조(世祖)께서 예종에게 내리신 말씀은, ‘나는 마땅히 어려움에 시달리고 싸워야 하지만 너는 당연히 태평(泰平)하여야 한다. 만약 나의 행적(行迹)에 연유하여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당하였을 때 이를 변통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나의 뜻을 따르고 내 사업을 계승하지 아니한 까닭일 것이다. 일이란 어찌 행할 수 없는 때가 있고 또한 행할 수 있는 때가 있지 아니하겠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恭惟 殿下欽明仁孝臨御之初凡所以修擧損益以爲繼述之宏規弘謨者莫或不歸於正而惟此一事難愼未決臣不知 殿下何所憚而不能何所待而不爲也以其可行之事又當可行之時而沮於邪議不敢斷然行之是所謂不爲也非不能也昔我 憲宗皇帝追復景泰之仁炳炳如日星在天地間雖與此事稍不相類亦可倣而行之矣神理人情本不相悖人情安然後神理亦安神理不安而人情安人情不安而神理安者未之有也伏聞去夜 文宗室有光恠至遣禮官行祭慰安臣愚以爲 文廟神靈必有所未安於冥冥之中而所以示警於 殿下者顯顯無間矣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흠명(欽命)하시고 인효(仁孝)하시어 등극하신 초기에는 모든 면에서 훌륭하게 닦아 덜고 더함으로써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시었으며, 모든 시책이 정도(正道)에 귀결되지 않는 바 없었는데 유독 이 일만은 어렵사리 신중하여 결말을 보지 못하는 까닭을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 무엇을 꺼려 할 수 없으시며 무엇을 기대하여 하지 않으십니까? 행할 수 있는 일을 마땅히 행할 수 있는 시기에 간사한 논의(論議)에 저지당하여 단연히 결행을 감행하지 아니함은 이른바 할 수 없음이 아니라 하지 아니함이옵니다.
전자에 명나라 헌종(憲宗) 황제가 경태제(景泰帝)를 추복(追復)한 선행은 천지간에 있는 일성과 같이 밝고 빛나옵니다. 비록 이 일과 견주어 서로 같은 점이 적기는 하오나 가히 본받아 행할 만합니다.
신리(神理)와 인정은 본래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니 인정이 편안한 연후면 신리 또한 편안할 것입니다. 신리가 불안한데 인정이 편하다든지 인정이 불안한데 신리가 편안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엎드려 듣자옵건대 지난밤 문종 묘실(廟室)에 심히 괴이한 불빛이 나타나 예관을 보내어 위안의 제를 올린 바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문묘의 신령이 어두운 저승에서 필시 편치 못한 바 있을 것이고 전하에게 신호를 보인 것은 전혀 무간(無間)한 사이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臣以請復旣疏又箚至于再三而不知止者誠欲我 聖朝行此盛德事也伏願 殿下遵 光廟之微訓體 文宗之孤心察 先后之幽寃法中朝之盛制亟使 廟室陵園之禮追復於今日則 殿下此擧卓冠百王卽可以建天地質鬼神允合乎孔聖所稱善繼善述而爲武王周公之達孝也臣以疎賤不揆僣越冒瀆聖聰罪當萬死伏不勝激切祈懇之至疏入主不悅留中不報
신은 이미 청복(請復)의 소와 차자(箚子) 올리기를 재삼 하였사오며 앞으로도 그치지를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바라옵건대 우리 성조(聖朝)에서 성덕(盛德)의 일을 행하여 주십시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 광묘(光廟)의 뜻 깊은 가르침을 따르시어 문종의 외로움과 돌아가신 왕비의 원통한 저승의 원한을 마음으로 살피소서. 그리고 중국 조정의 성대한 제도를 본받아 묘실과 능원(陵園)의 예를 속히 추복(追復)하게 하소서. 전하, 이 거사는 백왕의 으뜸이 되시어 가히 천지의 바탕을 세우실 수 있을 것이며 귀신도 이에 좇을 것입니다. 또한 공자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 선계선술(善繼善述)하여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달효(達孝)하게 된 일과 부합되는 일이옵니다. 신이 천박하고 외람됨을 헤아리지 아니한 소로서 성총(聖聰)을 모독한 죄 만사(萬死)에 해당한 줄 아오나 간절히 기원하는 격절한 마음 삼가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이 소장(疏章)은 연산군(燕山君)에게 올려졌으나 그는 좋아하지 아니하고 보류한 채 아무런 회보도 없었다.
至 中宗癸酉筵臣蘇世讓言 昭陵未復 文宗室無配位大違 宗廟之禮 上命考實錄以進趙元紀申用漑等力贊之會雷震 太廟庭樹特 命禮官擇日 告廟行復 陵祔廟之禮於是乎先生之言始大行上自學士大夫下至婦孺輿儓莫不咨嗟太息慕先生之名如日星江漢而惜先生之未及見也
그 후 중종(中宗)8년에 이르러 연신(筵臣) 소세양(蘇世讓,1486~1562)이 진언하기를 소릉(昭陵)이 미복(未復)되고 문종묘실(文宗廟室)에 배위(配位)가 없는 것은 종묘의 예에 크게 위배된다고 했다. 주상은 실록을 상고하여 진언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조원기(趙元紀,1457∼1533), 신용개(申用漑,1463∼1519) 등이 극력 찬동하였다. 때마침 태묘(太廟) 마당의 큰 나무에 벼락이 떨어진 일이 생겨 주상은 특명을 내려 예관으로 하여금 택일하여 묘(廟)에 고하고 복릉(復陵)과 부묘(祔廟 : 신주를 사당에 합사하는 것)의 예를 행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선생의 말씀이 크게 행하여졌는데, 위로는 학사(學士) 대부(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아녀자와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슬퍼하고 탄식하며 해와 별과 은하수같이 빛나는 선생의 이름을 사모하고 선생이 오늘의 이 결과를 보지 못함을 애석해하여 마지않았다.
鳴呼先生三疏呌閽於擧世噤黙之餘義理塞乎宇宙忠誠貫乎日月激仰感發生氣凛然雖使其言不用亦足以永有辭於天下後世况先生沒纔一紀而象設重新禴祀如故先生之志事彌光一國之彛倫復叙是先生之言雖屈於一時而先生之義實伸於萬世矣向之沮排搆誣從以刑戮先生者適足以暴先生之忠而成先生之仁也
아, 선생은 온 세상 사람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을 때에 세 번씩이나 궐문(闕門)에서 절규하였으니 그 의리가 우주에 가득차고 그 충성이 일월을 꿰뚫어 사람들을 격앙시키고 감동, 분발케 하여 생기가 일고 늠름하게 하였다! 비록 선생의 진언이 수용되지 못했을지라도 천하 후세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만으로 족한 일인데 황차 선생이 돌아가신 지 1기(紀;12년) 만에 옛날과 같이 다시 고쳐 시설하고 왕후의 약사(禴祀 : 종묘 제사의 한 가지)를 지내게 되었음은 선생의 뜻과 사업이 영광스럽게 종결됨이요 일국의 떳떳한 윤리를 다시 폄이었다. 이것은 선생의 진언이 비록 일시적으로 꺾였지만 실상 선생의 의리는 만세에 펼쳐진 것이었다. 선생에 대항하여 저지하고 배척하며 거짓 죄를 꾸며 끝내 선생을 형륙(刑戮)에까지 이르게 한 짓은 선생의 충절을 드러내고 선생의 인(仁)을 완성시키는 데 적당히 이바지한 꼴이 되었다.
二月辛亥以親疾辭拜章卽行丁巳至雲溪庚申承批蒙 允
<1496년> 2월 신해(3일) : 모부인 병환으로 사직서를 내고 직행, 정사일(9일)에 운계에 도착하였는데 경신일(12일)에 윤허를 받다.
丁卯同權嚮之遊觀水樓
<1496년 2월> 정묘일(19일) : 권향지(權嚮之,권오복,1467∼1498)와 같이 관수루(觀水樓)에서 유람하다.
嚮之名五福號睡軒以校理乞養咸昌屢書邀先生至是嚮之來達城又有簡時母夫人病已復遂偕嚮之往咸昌道經洛東院設酌于觀水樓先生有詩嚮之和之因抵縣留三日臨別又有唱和時{詩並見文集一卷}
향지(嚮之)의 이름은 오복(五福)이요 호는 수헌(睡軒)인데, 교리(校理)로 있다가 함창현감(咸昌縣監)으로 걸양하여 갔었다. 그간 누차 서신으로 선생을 초청한 바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향지가 달성(達城)에 와서 또 편지를 보내왔다. 때마침 모부인 병환은 이미 회복되었고 하여 마침내 향지와 함께 함창에 가게 되었다. 도중에 낙동원(洛東院)을 지나다가 관수루(觀水樓)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시창(詩唱)을 주고받았다.
곧 현에 다다라 3일간 머물다가 이별에 임하여 또 시의 창화(唱和)가 있었다.(시문은 모두 문집 1권에 실려 있다.)
辛未徃拜涵虛堂洪先生貴達于臨湖鄕廬
<1496년 2월> 신미일(23일) : 임호(臨湖)의 고향집에 와 있는 함허당(涵虛堂)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선생을 방문하다.
洪公字兼善世家咸昌博學能文性和樂有大節眞宰相也時謝病歸鄕已月餘矣先生過而謁之公執手欣喜謂先生曰君之立朝忠直著名辭受進退少無苟且老夫不及也君其益勉忠義以副朝野之望先生避席遜謝而退
홍공(洪公)의 자는 겸선(兼善)인데 대대로 살고 있는 집이 함창(咸昌)에 있었다. 그는 박학하고 문학이 능했으며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절개가 대단하여 참으로 재상(宰相)의 재목이었다. 이때 병으로 사퇴하고 귀향한 지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 선생이 지나는 길에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공은 손을 잡고 기뻐하며 선생에게 말하기를, “군(君)이 입조(立朝)한 이래 충직함이 널리 알려졌고 사양함과 받아들임(辭受), 나아감과 물러남(進退)이 적지 아니하니 이 구차한 노부(老夫)가 미치지 못한다. 군은 충의에 더욱 힘써 조야(朝野)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란다.”라고 했다.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사례하고 물러 나왔다.
甲戌還雲溪
<1496년 2월> 갑술일(26일) : 운계(雲溪)에 돌아오다.
三月丙戌除吏曹正郞兼知製 敎又承 召以親疾辭不就
<1496년> 3월 병술(8일) : 이조정랑(吏曺正郞) 겸 지제교(知製敎)에 다시 제수하는 부름이 있었으나 친질(親疾)을 이유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다.
甲辰著非鄠人對
<1496년 3월> 갑진일(26일) : 「비호인대(非鄠人對)」란 제목의 글을 짓다.
先生純孝出天幼以孝童稱母夫人常善病甘旨調養之節靡不用極至是又以親疾呈告晝夜侍側衣不解帶躬進湯劑不使他人迎醫問藥誠在必效有非鄠人對{見文集一卷}
선생은 선천적으로 순수한 효성을 타고나 어릴 때부터 효동(孝童)으로 칭송 받았다. 모부인은 평상시 병환이 잦았는데 맛있는 음식으로 조양(調養)할 때 극진하게 안 써본 것이 없었다. 이제 또 친질(親疾)로 조정에 고한 다음 모부인 곁에서 주야로 의대(衣帶)를 풀지 않은 채 시중들었다.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몸소 탕제를 올리며 의원을 맞아 문약(問藥)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면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이 무렵 비호인대(非鄠人對)」란 글을 지었다.(문집 1권 및 속동문선 18권 참조)
閏三月丁丑{二十九日}丁母貞夫人龍仁李氏憂
<1496년> 윤3월 정축(29일) : 모부인 용인 이씨(李氏) 상을 당하여 거상하다.
夫人刑曹參議讓之女以 太宗皇帝永樂二十二年{我 世宗大王六年}甲辰二月二十四日生 英宗皇帝正統九年甲子歸于南溪公至是卒享年七十三
부인은 형조참의 양(讓)의 따님으로 1424년 갑진(세종 6년) 2월 24일 탄생하였고 세종 26년에 남계공(南溪公)에게 시집와서 이제 향년 73세로 졸하였다.
夏五月戊子祔葬李夫人于南溪公墓左 有墓誌先生撰
<1496년> 하 5월 무자[1] : 이부인(李夫人)을 남계공 왼편에 부장(祔葬)하다. 묘지(墓誌)는 선생이 짓다.
[1] 3월에 윤달이 들어 4월11일에 해당.
○十年丁巳{先生三十四歲}
1497년 정사(연산군 3년, 선생 34세)
○十一年戊午{先生三十五歲}
1498년 무오(연산군 4년, 선생 35세)
春正月壬子著遊月宮賦
<1498년> 춘1월 임자(16일) : 「유월궁부(遊月宮賦)」를 짓다.
先生聞主上淫虐日甚憂 宗社之將危感而作此賦{見文集一卷}
선생은 임금의 음탕하고 포학함이 날로 심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종사의 장래가 위태롭다고 느껴 근심한 나머지 이 부(賦)를 지었다. (문집 1권 및 속동문선 2권 참조)
夏六月丁丑服闋
<1498년> 하 6월 정축(12일) : 복(服)을 벗다.
先生居憂喪葬祭莫一依朱子家禮備盡誠敬務在恔心哀毁踰制幾乎滅性每一月半在家廬半在墓幕與東窓公迭相往來朔望則歸奠靈筵鄕黨朋友莫不以先生爲得禮之中
선생은 거상(居喪)에서 상(喪), 장(葬), 제(祭), 전(奠)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준거하고 최선을 다하여 기거동작을 삼가며 쾌한 마음을 가지도록 힘썼으나 지나치게 슬퍼함으로써 심신을 상함이 도를 넘어 거의 멸성(滅性 : 哀毁로 성명을 잃는 것)에 이르렀다. 동창공(東窓公)과 서로 교대로 왕래하면서 한 달의 반은 집에, 반은 묘막에 있었는데 삭망(朔望) 때는 돌아와 영연(靈筵 : 빈소)에 전(奠)을 올렸다.
향리의 친구들은 선생의 행의를 예의 모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庚辰送金淑人歸覲病親于磻谷
<1498년 6월> 경진일(15일) : 병중에 있는 부모님을 뵙게 김숙인(金淑人)을 목천(木川) 번곡(磻谷)에 보내다.
壬午如金海省祖墓
<1498년 6월> 임오일(17일) : 김해에 가서 조묘(祖墓)를 성묘하다.
癸未留盆山別墅有涵虛亭記
<1498년 6월> 계미일(18일) :분산(김해) 별서(別墅)에 머물면서 「함허정기(涵虛亭記)」를 짓다.
墅在祖塋之傍府使崔澹就訪先生請記其新亭先生辭不入城爲文遙記之{記見文集三卷}
별서는 조상의 산소(祖塋) 곁에 있었는데, 부사 최담(崔澹)이 찾아와 선생에게 새로 지은 정자의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선생은 사양하여 성내(城內)에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글을 지어주었다. (문집 3권 및 「속동문선」14권 참조)
丙戌如咸陽訪一蠹
<1498년 6월> 병술일(21일) : 함양(咸陽)에 가서 일두(一蠹) 를 방문하다.
一蠹乙卯夏自安陰棄歸藍溪故廬屢徵不就丙辰秋來弔至是先生又往訪
일두(一蠹)는 을묘년(1495년,연산1) 여름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남계(藍溪)의 옛집에 돌아와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병진년(1496년,연산2)가을 운계(雲溪)에 조문 온 바 있고 지금은 선생이 또 방문 간 것이다.
庚寅有風疾調養於靑溪精舍
<1498년 6월> 경인일(25일) : 풍질(風疾)이 있어 청계정사(靑溪精舍)에서 조양하다.
先生嘗愛其山水而樂與一蠹從遊乙卯秋遣人卜築倩一蠹題其額曰靑溪精舍在藍溪上
선생은 일찍이 그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또 일두(一蠹)와 교유하면서 즐기기 위해 을묘년 가을, 사람을 보내어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일두(一蠹)에게 제호를 청하였는데 편액(扁額)을 ‘청계정사(靑溪精舍)라고 했다. 남계 가에 있었다.
秋七月甲午著聚星亭賦示一蠹
<1498년> 추 7월 갑오(?, 계산상 6월 29일) : 「취성정부(聚星亭賦)」를 지어 일두(一蠹)에게 보이다.
先生與一蠹日夕講磨或語及時事相對流涕是日作此賦示之曰昔朱夫子作聚星亭贊其意盖有在也此亦余之寓意也
선생은 일두(一蠹)와 더불어 밤낮으로 학문을 강마하거나 대화하곤 하였는데, 말씀이 시사(時事)에 이르러서는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날도 이 부(賦)를 지어 보이며 말하기를, “옛날 주선생(朱子)이 취성정찬(聚星亭贊)」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아마 말하려는 뜻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이 또한 나의 우의(愚意 : 다른 사물에 붙여서 그 뜻을 암시한 것)이다.”라고 했다.
一蠹曰何過慮也先生曰子不聞大猷之言乎大猷非無識人也嘗謂德優曰觀今士氣正類東漢之末百源伯恭正中文炳皆有晋風不出十年禍在此軰此言誠然而予謂非獨士氣然也 先生好賢如色從諫如流吾輩年少有志之士自以爲身逢明主展布所蘊可使唐虞之治復致於今日盡言不諱積忤權奸不幸皇天不祚 仙馭遽賓時移事變羣壬得志今禍已迫矣烏得免乎一蠹曰然相與嗟歎者久之
일두가 말하기를 “너무 지나친 염려가 아닌가?” 라고 하니 선생은 “그대는 대유(大猷 : 김굉필,1454~1504)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대유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다. 전에 그가 덕우(德優:辛永僖)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선비들의 기상(氣象)을 보면 동한말(東漢末) 때와 아주 유사하다. 백원(百源;李摠,?~1504), 백공(伯恭;南孝溫,1454~1492), 정중(正中;李貞恩), 문병(文炳;許磐,?~1498) 등 모두가 진(晋)나라의 풍모가 있으며 10년에 아니나올 선비들인데 화(禍)는 이들에게 있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참으로 그러하다. 내가 말하기를 ‘비단 사기(士氣)만이 그러한 게 아니다.’ 라고 했다. 선왕(先王)은 어진 선비 좋아하기를 여색 같이 하고 간언(諫言)에 따르기를 물 흐름과 같이 하여 우리 젊고 뜻있는 선비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밝은 주상을 만나 포부를 펴고 업적을 쌓아 당우(唐虞)의 치세(治世;堯舜時代)를 금일에 다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극언을 거리낌 없이 하였는데 한편으로는 권간(權奸;權臣과 奸臣)들의 미움을 쌓아왔었다. 불행히도 하늘은 복을 주시지 않고 졸지에 황천(黃泉)의 빈객(賓客)으로 모셔 갔구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사태가 변하여 뭇 간신배가 뜻을 얻었으니 지금 화(禍)가 이미 박두하였다. 어찌 이를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일두(一蠹)도 과연 그렇다 하고는 서로 더불어 오래도록 슬퍼하고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先生旣歸作疾風知勁草賦而曰木秀於林風必折之折之亦何傷兮恨吾力之不支聚星亭賦曰主昏於上士激於下黨錮禍作崇信刑餘三百年儲養之人才視草芥之不如觀此兩賦實符戊午之禍抑先生之先見而寓諸文歟抑偶有感而遂成讖言歟鳴呼悲哉
선생이 저번에 귀향했을 때 지은 「질풍지경초부」에 이르기를, “한 나라무가 수풀 가운데서 빼어나면 바람이 반드시 꺾을 것이나 꺾는다고 또한 어찌 (지조마저) 상하리오. 내 힘이 이를 지탱하지 못함을 한하노라.” 라고 하였다. 또한 「취성정부」에서는 “위에서는 임금이 혼미하고 아래에서는 선비들이 격(激)함에 당고(黨錮)의 화(禍)[36]를 일으키어 불구자(환관)를 떠받들고 삼백년 길러온 인재들을 초개만큼도 보지 않네.”라고 하였다. 이 두 부(賦)를 보면 선생의 견해가 무오사화(戊午士禍)와 실제로 꼭 들어맞았으니, 아! 선생께서 선견이 있어서 이를 빗대어 문장화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연한 영감(靈感)이 있어서 마침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인가?
아, 참으로 슬프도다!
[36] 당고(黨錮)의 화(禍)란 중국 후한의 환제(桓帝) 때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전단(專斷)하므로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이들을 몹시 공격하였는데, 환관들이 도리어 그들을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黨人)들이라고 하여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 사건을 말한다.
丙申{初五日}以史事被逮
<1498년> 7월 병신(初5일)[1] : 사기(史記) 일로 체포되다.
[1] 계산상으로는 7월 2일에 해당.
使命至淸道先生時在咸陽大有馳至藍溪告以故先生色不動言笑自若一蠹適在座謂先生曰士類之禍自此始矣先生曰此必克墩發史事也吾其不還矣願伯勗爲道自愛一蠹曰勿多言吾亦從此逝矣先生微笑不答已而都事至示以拿命先生卽就庭下北面四拜訖夷然就道
명을 받든 사자(使者)가 청도에 도착했는데, 당시 선생은 함양에 있었다. 대유가 말을 달려 남계(藍溪)에 도착 이 변고를 고했는데, 선생은 안색도 변치 않고 말씀도 웃으면서 태연자약했다. 마침 일두(一蠹)가 같이 앉아 있었는데 선생에게 이르기를, “사림(士林)의 화(禍)는 이로부터 시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극돈(李克墩)이 일으키는 사기(史記)에 관한 사건일 것이다. 나는 거기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바라건데 백욱(伯勗;일두의 字)은 도(道)를 위하여 부디 자애(自愛)하시오.”라고 하였다. 일두는 “여러 말 하지마오. 나 역시 이 행차에 뒤따르게 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선생은 미소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의금부 도사가 도착하여 체포영장(拿命)을 제시하였다. 선생은 곧 뜰 아래에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를 올리고 평온한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先是天順丁丑金先生以進士當 魯山遇害之時作吊義帝文 成廟命曹梅溪偉撰l集金先生所著文梅溪首錄其文以進先生在史館亦載之於史草至是修 成廟實錄克墩爲堂上見先生史草書已惡甚悉欲因此以報己怨
이에 앞서 1457년 정축(세조 3년) 김종직 선생이 아직 진사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당함을 보고 「조의제문」을 지은 바 있다. 그 후 성종이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에게 명하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저술한 글을 찬집(撰集)하도록 했는데, 매계는 이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수록하여 올린 바 있다. 그리고 선생이 사관에 있으면서 이를 또한 사초에 실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닦는데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당상(堂上)이 되어 선생이 사초에 자기의 비행을 빠짐없이 수록한 것을 보고 이 「조의제문」을 가지고 자기의 사사로운 원한을 갚고자 마음먹었다.
遂亟持其文曰此文意指 光廟是不敢作是不敢書俱大逆言於柳子光子光陰險樂禍者也索啣金先生咸陽焚詩之事卽大喜遂與盧思愼尹弼商韓致亨等俱詰差備門上變告先生以誣毁 光廟唯都承旨愼守勤掌出納檢閱李思恭請見不許主使禁府經歷洪士灝都事愼克成拿來又令掖隷騎能走馬往察在路遟速飛報卽使子光克墩爲推官專治獄事
마침내 그는 「조의제문」을 가지고 유자광(柳子光,1439~1512)에게 급히 달려가 말하기를, “이 문장의 뜻은 광묘(光廟;세조)를 가르킨 것이다. 어찌 감히 이렇게 지을 수 있으며 어찌 감히 수록할 수 있는가? 이 모두가 대역(大逆)이다.”라고 했다. 유자광은 음험하고 화 일으키기를 즐기는 자로서 함양(咸陽) 분시(焚詩)의 일[37] 이래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터라 크게 기뻐했다. 드디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차비문(差備門;궁궐 편전의 앞문)에 이르러 급변(急變)을 고하면서 선생이 허위로 세조를 헐뜯었다고 하였다. 그 편전에 드나드는 것은 오직 도승지 신수근(愼守勤)만이 관장하고 있었는데, 검열 이사공(李思恭)이 들어가 임금 뵙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연산주(燕山主)는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을 시켜 체포하여 오라하고 또 대궐 내의 일을 보는 관원(掖隷) 중에서 말 잘 타는 자를 뽑아 보내어 도중에 지체되지 않는가를 살피고 오게 했다.
그리고 급히 알리어 유자광과 이극돈으로 하여금 추관(推官;죄인을 국문하는 관원)으로 하여 옥사(獄事)를 전적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辛丑就囚義禁府夜被鞠闕庭進供狀
<1498년 7월> 신축일(7일) : 의금부에 갇히고 밤에 대궐 뜰에서 국문을 받은 다음 진술서(供狀)를 올리다.
主御修文堂設鞠問曰史草何以誣書 先朝事又何以錄吊義帝文而贊之曰以寓忠憤 德宗貴人權氏事聞於何人請復 昭陵卽是何意書後殿曲事亦何見耶
수문당(修文堂) 앞에 설치된 국문장에 연산주(燕山主)가 나와 국문하여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선묘(先廟) 때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사초(史草)에 썼는가? 또 「조의제문」은 왜 수록하였으며 거기에 찬동하면서 충분(忠憤)을 빗대어 나타냈다 함은 무슨 저의인가? 덕종귀인 권씨(權氏)에 관한 일은 누구에게 들었는가?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소청하였는데 무슨 뜻으로 썼는가? 후전곡(後殿曲)에 관한 일은 무슨 견해로 적었는가?”하였다.
供曰史法有先是初之例故推記 世祖朝事史所以記君上之善惡人臣之忠奸垂勤戒於後世者也臣師金宗直之作此文實有感於 魯山事而臣之編此欲以示公論於千載也 德宗貴人權氏事聞於貴人姪許磐請復 昭陵者 先王立崇義殿封王氏後此盛德事也臣之此請欲 聖朝之行仁政修廢禮也後殿曲臣昔在西湖書堂也茂豊副正摠携琴相訪彈後殿曲其音哀切非治世之音故幷及之
이에 선생이 진술하기를, “사법(史法)에, 이전에 기록이 시작된 사례에 대해 추가로 기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조조(世祖朝)의 사실을 역사에 기록한 까닭은 임금의 선악과 신하들의 충간을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고 경계하고자 함이며 스승 김종직이 지은 이 글은 노산사건(魯山事件)에 느낀 바 있어 지었던 것이며 신(臣)이 이를 사초에 편집한 것은 천년 후세에까지 이를 보여 공론(公論)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덕종귀인 권씨에 관한 일은 귀인의 조카인 허반(許磐)에게서 들었으며 소릉복위(昭陵復位) 소청은 선왕께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후손을 봉하여 준 바 있는데 이는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신이 이 소청에서 바란 것은 성조(聖朝)에서 어진 정치를 펴고 폐례(廢禮)를 닦고자 함이었습니다. 후전곡(後殿曲)에 관한 일은 신이 전에 서호(西湖)의 독서당에 있을 때 무풍부정(茂豊副正) 이총(李摠)이 가야금을 휴대하고 방문하여 후전곡을 탄 일이 있는데, 그 음이 심히 애절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데 쓸 만한 음이 아닌지라 아울러 언급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又門同議史草之人曰旣輪情矣本無同議之人請獨死先生家搜出文書中有李仲雍言史事書問士灝曰某在道云何曰無他言但云此必李克墩發史事也克墩爲全羅監司時遭 成廟喪奸長興妓及貪贓事吾書諸史草克墩祈其刪去吾不從故懷怨云
또 묻기를 “사초를 같이 의논한 사람이 누구인고?”라고 함에, “모든 실정을 다 털어 놓았습니다. 같이 의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홀로 죽게 하여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선생 가택을 뒤져 색출한 문서 중에 이중옹(李仲雍)이 사초에 관해 말한 기록이 있었다. 홍사호(洪士灝)가 국문하기를, “아무개가 도(道)에 재직할 때․․․ 운운했는데 누구를 말함인가?”라고 했다. 이에 선생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는 필시 이극돈이 사기(史記) 일로 해서 일으킨 일일 것이다. 극돈이 전라감사를 하고 있을 때 성묘상(成廟喪)을 당했는데도 장흥 기생과 놀아나고 또 뇌물을 탐하여 그 사실을 내가 사초에 실은 바 있는데, 극돈이 그것을 삭제하여 줄 것을 빌어왔으나 내가 들어주지 않아 그것으로 원한을 품게 된 것이다.”
乙巳又與李仲雍許文炳就鞠南賓廳
<1498년 7월> 을사일(11일) : 또다시 이중옹(李仲雍) 및 허문병(許文炳)과 함께 남빈청(南賓廳)의 국문에 나가다.
文炳供 德宗昭訓尹氏事語諸某必誤以爲權也仲雍供 魯山淑儀權氏卽擥之族也其田宅藏獲盡占不級致淑儀飢困心常薄之故云云○先生爰辭明白正直無一語前後錯謬每被推訊觀者莫不悚然失色而先生言辭慷慨擧止雍容有剛大不枉之氣焉
문병(文炳)이 진술하기를, “덕종소훈(德宗昭訓;세자궁에 딸린 정5품 궁인) 윤씨(尹氏) 일을 말했는데 아무개는 필시 권씨(權氏)로 잘못 들은 것 같다.”고 했고, 중옹(仲雍)은 “노산(魯山) 숙의(淑儀) 권씨는 곧 권람(權擥1416~1465)의 일족인데, 그의 전택(田宅)과 노비들을 모두 몰수당하고 지급되지 않아 굶주리는 곤궁한 처지에 이르러 마음은 항상 각박하였다. 그런 연고로 해서․․․.” 운운하였다.
선생의 진술은 명백하고 정직하였으며 한 마디도 앞뒤가 어그러지거나 그릇됨이 없었다. 추달과 신문을 받을 때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두려워 실색(失色)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의 언사는 강개하고 행동거지는 화평하고 조용하였으며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기절(氣節)이 있었다.
○子光與克墩慮治獄之未盡如意日夜謨所以鍜鍊乃取吊義帝文自爲註釋令主易如而啓之曰金宗直詆毁我世 祖金馹孫之惡皆宗直所誨宜論以大逆云云
자광(子光)과 극돈(克墩)은 이 옥사가 저희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죄인들을 학대하고 괴롭힐 구실을 밤낮으로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조의제문」을 제멋대로 주(註)를 달아 풀이하고 임금으로 하여금 알기 쉽도록 하여 보이고 아뢰기를, “김종직은 우리 세조를 흉보고 헐뜯었으며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종직에게서 배운 바이므로 마땅히 대역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운운했다.
戊申{十七日}有旨議刑
<1498년 7월> 무신일(17일)[1] : 형명(刑名)을 논의하라는 교지가 내리다.
[1]戊申은 계산상으로 14일, 17일은 신해일이며 연산군일기 제30권 19쪽의 신해일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신해일(17일)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主見子光所啓傳旨曰金宗直草荞賤士 世祖朝登第 成宗擢置經幄久在侍從之地以至刑曹判書寵恩傾朝及其病退 成宗猶使所在官特賜米穀以終其年今其弟子金馹孫所修史草內以不道之言誣錄 先王朝事又載其師吊義帝文其辭曰
연산주(燕山主)는 자광(子光)의 계장(啓狀)을 보고 내린 교지에 이르기를, “ 김종직은 초야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조에 등제한 후 성종이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앉히고 형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정을 기울일 만큼 은총을 받아왔고, 병으로 퇴임하기에 이르러서는 성종께서 향리 지방관으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미곡을 특별히 하사하도록 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 김일손이 닦은 사초 안에는 부도한 말로써 선왕조의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적고 그의 스승의 「조의제문」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吊義帝文>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孫心爲西楚覇王項籍所弑沉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距不啻萬有餘里世之相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寢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屍于水歟是未可知也
정축년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星州)으로 가는 도중 답계역(踏溪驛)에서 자게 되었는데,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제왕복)을 입고 근심스런 모습으로 다가와 혼잣말로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이 서초(西楚)의 패왕(覇王) 항우(項羽)에게 시해되어 침강(郴江)에 던져졌도다.’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 깨어나서 말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의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조선)의 사람이며 지리적으로도 서로 일만여 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세대 역시 천여 년 뒤가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꿈에 보이니 그 무슨 조짐인고?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어찌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 은밀히 격살하고 그 시체를 물속에 던졌단 말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로다.’ 라고 하였다.
遂爲文以吊之唯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尊四大與五常匪華豐而夷嗇兮 曷古有而今亡故吾夷人又後千禩兮恭弔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嬴雖鱣鮪鰍鯢曷自保兮思網漏而營營時六國之遺祚兮沉淪播越僅媲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以從民望兮存熊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芉氏遣長者而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 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齊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而益懼爲醢醋於返噬兮果天運之蹠戾郴之山磝以觸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泆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乎夢想 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而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云
드디어 글을 지어 조상(弔喪)하노라. 오직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제정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사대(四大;道, 天, 地, 王) 오상(五常;仁, 義, 禮, 智, 信) 의 존귀함을 모를 것인가. 중국에는 넉넉하고 동이에는 인색할 이 없으며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어찌 없을 수 있는고? 그러므로 내 동이인(東夷人)이요 또 천년 후세의 사람이지만 공손히 초나라 회왕(懷王)을 조상(弔喪)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진시황의 별칭)이 그의 이빨과 뿔(武力)을 희롱하니 사해에 풍파 거칠고 가득하게 하였도다. 비록 칠갑상어, 다랑어, 미꾸라지, 도롱뇽 같은 작은 물고기라도 어찌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해 그물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그때 육국(六國)의 유손(遺祚)들은 몰락하여 유랑하고 약간은 평민이 되기도 하였다. 항양(項梁;항우의 숙부)은 남국(南國)의 장수 무리의 한 사람으로서 어호(魚虎)의 뒤를 이어 거사하였다. 백성들의 소망을 좇아 임금을 구해 모시니 웅역(熊繹;초나라 시조)의 끊어진 제사를 이었도다. 임금의 옥새를 쥐고 남쪽으로 향해 앉으니 천하에 진실로 우씨(芋氏 : 초나라 임금의 성)보다 존귀한 이 없었더라.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가게 하였으니 또한 그의 인의를 보기 족하였도다. 시랑이처럼 사납고 이리같이 탐욕스러운 자 함부로 관군(冠軍;총대장 宋義)을 죽여 없앴으니 어찌하여 그들을 먼저 잡아들이어 도끼를 (피에) 적시지 않았던고. 아, 슬프도다! 대세가 그러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왕에게 더욱 송구할 뿐이로다 베풀어준 은혜 갚음이 도리어 식혜와 식초처럼 먹히고 말았으니 과연 천도(天道)는 거꾸로 도는도다. 산은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를 듯, 태양볕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침강(郴江)은 주야로 흘러 물결이야 일건만 다시 오진 못하도다. 하늘 같이 깊고 땅같이 오랜 한이 언제나 다할손가. 혼백이 지금까지도 정처 없이 헤매고 떠돌리라. 나의 마음 금석이라도 뚫었음인가 임금님이 홀연 꿈속에 임하셨도다. 자양(紫陽 : 朱子의 호)의 노필(老筆)을 좇으려니 생각은 두렵고 불안하며 근심만 되네. 그름 무늬 술잔 들어 고신(告神)하니 영령(英靈)이시어 오시어 흠 향하소서.
其曰祖龍之弄牙角者祖龍始皇也宗直以始皇比 世廟其曰求得王以從民望兮者王楚懷王孫心初項梁欲誅秦求孫心以爲義帝宗直以義帝比 魯山其曰羊狠狼貪擅夷冠軍兮者宗直以羊狠狼貪指 世廟擅夷冠軍指 世廟誅金宗瑞{癸酉靖難時以左相被殺}其曰胡不收以膏齊斧者宗直指 魯山胡不收 世廟其曰爲醢醋於返噬兮者宗直謂 魯山不收 世廟反爲 世廟醢醋云云其曰循紫陽之老筆思螴蜳以欽欽者宗直以朱子自處其心作此賦以擬綱目之筆金馹孫贊其文曰以寓忠憤念我 世祖大王當國家危疑之際奸臣謀亂禍機垂發誅除逆徒宗社危而復安子孫相繼以至于今功業巍巍德冠百王不意宗直與其門徒譏議聖德 至使馹孫誣書於史豈一朝一夕之故陰蓄不臣之心而歷事三朝予今思之不覺慘懼其議刑以啓云云
여기에서 ‘조룡(祖龍)이 그의 이빨과 뿔을 희롱한다.“고 하였는데 조룡은 진시황으로 종직(宗直)은 진시황(秦始皇)을 세조(世祖)에 비겼고 또 ‘백성들의 소망을 좇아 임금을 구해모시다.’라고 한 대목의 임금은 초(楚)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을 말한 것이다. 처음에 항양(項梁)은 진(秦)을 치고자 하여 심을 구하여 의제(義帝)로 삼았었는데,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 비하였으며 또 ‘시랑이(豺狼)처럼 사나고 이리처럼 탐욕스러운 자 함부로 관군(冠軍)을 죽였다.’고 한 대목을 시랑이와 이리는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함부러 관군을 죽였다 함은 김종서(金宗瑞,1383∼1453)를 목 베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또 ‘어찌하여 그들을 먼저 잡아들이어 도끼를 (피에) 적시지 않았던고.’라고 한 것은 노산이 어찌하여 세조를 잡아들이지 아니했는가를 지칭한 것이며 ‘도리어 식혜와 식초처럼 먹혔다.’고 함은 노산이 세조를 잡아들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식혜와 식초처럼 먹혔다는 말이다. 또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좇으려니 생각은 두렵고 불안하며 근심만 되네.’라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고 이 부(賦)를 지어 강목(綱目)의 필법(筆法)을 모방하려 한 것이다.
김일손은 이 글에 찬동하여 말하기를, ‘충성된 울분을 빗대어 표현했다.’고 했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대왕은 국가가 위태롭고 장래가 매우 불확실할 즈음 간신들이 난을 모의하고 화의 시기가 거의 미치려 할 때 발기하여 역도들을 베고 제거하여 위태로운 종사를 다시 안정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자손들이 대를 이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그 공업(功業)이 매우 크고 높으며 그 덕은 백왕의 으뜸이로다. 그런데 뜻밖에도 종직이 그의 문도(門徒)를 움직여 성덕(聖德)을 헐뜯는 논의를 하였고, 김일손으로 하여금 사기에 거짓된 글을 싣게 함에 이르렀으니 어찌 일석일조의 일이겠는가. 그동안 불신의 마음을 은밀히 품고 삼조(三朝)를 내리 섬겨왔도다. 내 지금 생각하니 그동안 이를 깨닫지 못했음이 슬프고 두렵도다. 형명(刑名;형벌의 종류와 명칭)을 논의하여 아뢰어라. ․․․” 운운했다.
丁巳{二十六日}議刑回啓
<1498년 7월> 정사(26일)[1] : 형명(刑名)을 논의, 보고서를 올리다.
[1]정사일은 23일임. 26일은 경신일. 형량에 대한 내용이 연산군일기 제30권44쪽의 경신일에 나오니 경신일(26일)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子光等求正律不得論以反逆思愼獨曰以文字事置諸反逆誠過重也子光作色詰之各以其意啓之其子光啓本云
유자광(柳子光) 등은 정당한 법률조항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여 논의를 반역(反逆)으로 이끌어갔다. 노사신(盧思愼,1427~1498)만이 홀로 말하기를 문자(文字)의 사건을 반역에까지 처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 과중하다고 하였다. 이에 자광은 안색을 붉히며 힐난하였다. 결국 하나하나 그의 뜻대로 보고되었는데, 자광이 올린 그 보고서(啓本)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金宗直包藏禍心陰結黨類欲售凶謀爲日久矣假托項籍弑義帝之事形諸文字詆毁 先王滔天之惡罪在不赦論以大逆剖棺斬屍其徒金馹遜權五福權景裕朋奸黨惡同聲相濟稱美其文以爲忠憤所激書諸史草欲垂不朽其罪與宗直同科幷令陵遲處死金馹遜又與李穆許磐姜謙等誣飽 先王所無之事傳相告語筆之於史李穆許磐並皆處斬姜謙決杖一百籍沒家産極邊爲奴表沿沫洪瀚鄭汝昌茂豊副正李摠等罪犯亂言姜景叙李守恭鄭希良鄭承祖等知亂言而不告幷決杖一百流三千里李宗準崔溥李黿李冑金宏弼朴漢柱任熙載康伯珍李繼孟姜渾俱以宗直門徒結爲朋黨互相稱譽或譏議國政謗訕時事熙載決杖一百李冑決杖一百極邊付處李宗準崔溥李黿宏弼漢柱伯珍繼孟姜渾等 幷決杖八十遠方付處而流人等幷定烽燧庭爐干之役修史官等見馹遜等史草而不卽啓魚世謙柳洵尹孝遜等罷賤洪貴達趙益貞許琛安琛等左遷
김종직은 은밀히 화심(禍心)을 품고 몰래 결당하여 흉모(凶謀)를 퍼뜨리고자 한 지 오래되었다.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시해한 사건을 빌려 거기에 의탁하여 갖은 문자로써 선왕을 흉보고 헐뜯었으니 그 죄는 하늘에 사무칠 죄악이라 용서할 수 없어 대역(大逆)으로 부관참지(剖棺斬屍)해야 한다고 논의되었다. 그 문도 김일손(金馹遜,1464~1498), 권오복(權五福,1467~1498), 권경유(權景裕,?~1498)도 그 붕당이 간악하고 한 뜻이 되어 서로 돕고 그 글을 충성된 울분이 넘친다고 칭송, 이를 사초(史草)에 실어 영구히 남기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종직과 같아 모두 능지처사(陵遲處死)해야 한다. 김일손은 또 이목(李穆,1471∼1498), 허반(許磐,(?~1498), 강겸(姜謙,∼1504) 등과 더불어 선왕의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서로 전하고 알려 사초에 기록했다. 이목과 허반은 다 같이 참수에 처하고 강겸은 장형(杖刑) 100대를 집행하고 가산을 몰수하며 최변방(極邊)에 노예로 보낸다.
표연말(表沿沫,1449∼1498), 홍한(洪瀚,1451∼1498), 정여창(鄭汝昌,1450∼1504), 무풍부정(茂豊副正) 이총(李摠,(?~1504) 등은 난언(亂言)을 범한 죄가 있고, 강경서(姜景叙,1443∼1510) , 이수공(李守恭, 1464∼1504), 정희양(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으니 장형 100대를 집행하고 삼천 리 밖으로 유배(流配)시킨다. 이종준(李宗準) , 최보(崔溥), 이원(李黿), 이주(李冑),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은 모두 종직(宗直)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며 국정을 비방하는 논의를 하고 시사(時事)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임희재는 장형 100대를 집행한다. 이주는 장형 100대를 집행하고 최변방에 부처(付處)하며, 이종준 , 최보, 이원, 이주(李冑),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모두 장형 80대를 집행하고 먼 곳에 부처한다. 귀양 가는 사람은 모두 봉수대(烽燧台)의 노지기(爐干) 역으로 정한다. 수사관(修史官) 등 김일손 등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아니한 어세겸(魚世謙), 유순(柳洵), 윤효손(尹孝遜)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침(許琛), 안침(安琛) 등은 좌천한다.
戊午{二十七日}被禍
<1498년 7월> 무오(27일)[1] : 화(禍)를 입다.
[1] 무오일은 24일이며 27일은 신유일이다. 연산군일기 제30권 47쪽에 ‘辛酉告誅馹孫等’ 으로 되어 있으니 신유일(27일)이 맞을 것이다.
先生與嚮之子汎仲雍文炳談笑如平日從容就刑午正一刻也是日天地晝晦陰雲四塞暴雨如注大風從東南起折木飛瓦都人士女莫不顚仆股栗雲溪之水血流三日東窓公及大有幷坐竄湖南自是儒林喪氣學舍蕭然父兄相戒曰學而應科則止勿朮仕進云
선생은 향지(嚮之;권오복), 자범(子汎;권경유), 중옹(仲雍;이목), 문병(文炳;허반)과 더불어 담소하며 평일과 같이 평온하고 의젓한 자세로 형장에 나아가니 때는 오정(午正) 일각(一刻)(낮 12시 15분)이었다. 이 날 온 천지가 그믐같이 캄캄하고 음침한 구름이 사방을 뒤덮더니 폭우가 쏟아지고 대풍이 동남쪽에서 일어나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왓장을 날렸다. 도성 안의 남녀치고 엎드려 벌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편 운계(雲溪)의 냇물은 3일 동안 핏빛으로 흘렀다. 동창공(東窓公)과 대유(大有)도 다 같이 연좌되어 호남에 귀양 갔다. 이로부터 유림(儒林)은 기운을 잃고 학사(學舍)는 쓸쓸해졌다. 부형(父兄)들은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배워서 과거에 응할 생각은 이제 그만두어야 하고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 또한 말아야 한다. ․․․”고 운운했다.
○卽日告 宗廟頒赦敎文略曰恭惟我 世祖惠莊大王國家危疑羣奸盤據之際沉幾睿斷戡定禍亂天命人心自有攸屬聖德神功卓冠百王增光 祖宗艱大之業貽厥子孫燕翼之謨繼繼承承式至今休不意奸臣金宗直云云․{以下用子光啓文}隨其罪之輕重俱已處決謹將事由告于 宗廟社稷顧余寡昧剪除奸黨戰懼之念旣深喜幸之心亦切肆於今七月二十七日昧爽以前强竊盜及關係綱常外已決正未決正咸宥除之敢以宥旨前事相告語者以其罪罪之於戲人臣無將旣伏不道之罪雷雨作解宜濡惟新之恩․ 左議政韓致亨等進賀箋略曰豈意逆儔敢肆反側假托妖妄將售不軌之心傳播史文自連莫大之罪大小共憤臣民咸讎覆載難容豈天誅之可逭雷霆所擊致陰慝之旌消云云
이날 종묘에 고하고 한편 죄사(罪赦)하는 교지를 반포했는데, 그 교문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국가가 위태롭고 앞일이 혼미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기반을 굳히려 하는 때를 당하여 깊은 생각과 밝은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쳐서 평정하시니 천명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된 바 있었고, 그의 성덕과 신공은 백왕의 으뜸으로 조종(祖宗)에서 하기 어려운 일을 더욱 빛나게 하였고 자손에게는 연익의 법(燕翼之謨 : 제비처럼 자손을 품어주는 지혜)을 끼쳐주어 계계승승(繼繼承承;잇고 이어)지금에 이르렀는데 불의에 간신 김종직․․․운운. (이하는 유자광이 올린 계문을 적었음).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여 그 사유를 종묘사직에 삼가 고하였다. 생각건대 나는 과매(寡昧)한 사람으로 간당들을 자르고 제거하니 떨리고 두려운 생각이 심히 깊으나 다행한 마음 또한 절실하다. 이에 금 7월 27일 새벽 이전의 강도와 절도 그리고 강상(綱常)죄인 이외에는 기결(旣決)이나 미결(未決)을 막론하고 모두 그 죄를 사해주는 것이니 감히 사면 교지가 내리기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를 다스릴 것이다.
아, 백성들은 거역함이 없고 부도(不道)한 죄는 이미 처결하였으니 뇌우(雷雨)가 인 다음에 풀리듯 마땅히 유신(維新)의 은혜를 흠뻑 받을지어다!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이 올린 축하의 글(賀箋)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거역의 뜻을 같이한 무리들이 어찌 감히 방자하게 배반으로 기울어 요망한 사건을 가탁(假託)하여 모반의 마음을 싸려고 사기(史記)에까지 전파하여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죄에까지 끌고 갈 수 있으리까? 노소 다 같이 분개하고 모든 백성이 원수로 여기니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하늘이 내리는 벌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벼락이 쳐서 숨은 죄악의 기운이 준동하는 것을 없애니․․․ 운운.
<南袞의 子光傳>
○子光者府尹規之孼産也趫捷多力善緣高少從無頼子博奕爭財晨夜浮遊街上遇女則捽而淫之規累加搒撻不之子屬甲子直建春門施愛之亂上書自薦 世祖奇之召試殿前捷如猿猱及從征還寵任以兵曹佐郞魁武科 睿宗初誣殺南怡勳封武靈常自稱豪傑性陰賊害物人有才能名位出己上者百計中傷人皆側目 成宗虗懷納諫子光欲釣奇圖利疏論韓明澮有跋扈狀復與任士洪欲擠玄錫圭謀敗竄東萊尋放還窺冀恩澤計無所不至而竟不得售心常怏怏見李克墩當朝秉權傾身附之嘗遊咸陽作詩囑郡守鏤板揭壁及佔畢先生守是邑見之曰何物子光乃敢爲懸板耶卽令撤而焚之子光恚恨切齒以佔畢寵渥方隆反爲阿附其卒也爲文以吊比諸王通韓愈也
유자광(柳子光)이란 자는 경주 부윤(府尹)을 지낸 유규(柳規)의 서출 소생으로 몸이 민첩하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무뢰한(無賴漢)이 되어 도박으로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에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다가 여인을 만나면 낚아채어 폭행하곤 하였는데, 유규는 여러 차례 매를 때리고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처음에 갑사(甲士, 義興衛의 군사 : 주로 都城을 지킴)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경복궁의 동문)을 지키던 중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이 난의 평정군에 참가하겠다는 자천서(自薦書)를 올렸다. 세조는 기이하게 생각, 그를 불러 궁전 앞뜰에서 시험해 보았는데 마치 원숭이같이 재빨랐다. 결국 정벌에 종사하게 되었고 돌아와서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병조좌랑으로 보임되고 무과에도 으뜸으로 급제하였다.
예종(睿宗) 초에는 남이(南怡)장군을 무고하여 죽이고 그 공훈으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그는 항상 자칭 호걸이었으며 성품이 음흉한 도적 같은 해물(害物)로서 다른 사람이 재능이 있어 명망과 직위가 자기보다 뛰어나면 모든 흉계를 다 써서 중상하곤 하여 모든 사람들이 흘겨보았다. 성종이 간언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자광(子光)은 기회를 잡아 자기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 한명회(韓明澮)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상소문을 올려 논박하고 다시 임사홍(任士洪)과 더불어 현석규(玄錫圭)를 물리치기 위해 모의하다가 도로 패하여 동래(東萊)에 귀양을 갔다. 그 뒤 곧 방면되어 돌아와 은택(恩澤)을 엿보고 바라면서 있는 계교를 다 썼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항상 앙앙(怏怏)한 마음을 품고 있던 중 이극돈(李克墩)이 조정에서 권세를 잡는 것을 보고는 몸을 굽혀 거기에 붙었다.
그는 일찍이 함양을 유람할 때 시 한 수를 지어 그곳 군수에게 부탁, 목판에 새겨 벽에 걸게 한 바 있었는데, 나중에 점필재(佔畢齋) 선생이 군수로 가서 이를 보고 “자광이 어떤 물건인데 너 감히 현판을 달다니!”라고 하며 즉시 명하여 철거해 불살랐다. 이에 자광은 분함과 원한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점필재가 왕의 극진한 총애를 입어 바야흐로 우뚝 뛰어난 위치에 오르자 도리어 자광은 이에 아부하였다. 점필재가 돌아갔을 때만 해도 그는 조상(弔喪)하는 글을 지어 이르기를, 왕통(王通;隨나라의 대학자)과 한유(韓愈)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克墩嘗以弄權分黨被先生之論劾爲全羅監司也當 成廟喪不進香載妓而行先生書諸策克墩請削去不從及修 成廟實錄克墩監春秋見先生史草書己惡甚悉又書 世祖朝事編吊義帝文欲因此報己怨一日屛人語摠裁官魚世謙曰金某誣毁 先王不聞於上可乎封章以啓下於吾屬無患矣世謙愕然不答乃謀於子光子光攘臂曰此豈持疑之事乎卽夕携酒往見盧思愼尹弼商韓致亨等酒酣從容叙受恩 世祖不可忘之意相與涕泣以感動其心然後乃言其事曰金某敢誣 先王欲以彰主惡而揚其直人臣見此不道之事固不可掩置也三人者果皆聽從盖尹盧 世祖寵臣致亨戚連宮掖料其必從也遂俱詰差備門召都承旨愼守勤耳語良久乃啓之守勤之爲承旨也臺諫侍從以外戚得權之漸力爭不可守勤啣之曰朝廷是文臣拳中物我軰何爲至
이극돈은 일찍이 권력을 농간하고 분당(分黨)을 하여 선생의 탄핵을 받은 바 있으며 또한 전라감사를 하고 있을 때 국상(貞憙王后喪)을 당하였는데도 향을 올리지 않고 기생을 태우고 행락한 비행을 선생이 책에 기록하였는데, 극돈이 삭제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은 일이 있었다. 『성종실록』을 편수함에 이르러 극돈이 춘추관 감사(監事)가 되어 선생의 사초에 자기의 죄상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모두 알게 되었고 또 세조조의 정사편(政事編)에 「조의제문」이 수록된 것을 보고 이것으로써 자기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다. 어느 날 주위 사람을 모두 물리치고 사국(史局) 총재관(摠裁官)인 어세겸(魚世謙)에게 말하기를, “김모(金某)가 선왕을 거짓으로 헐뜯었는데 주상에게 알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글(史草)을 봉인하여 올려 임금의 재가를 받는 것이 우리들에게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어세겸은 크게 놀라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극돈은 곧 유자광과 모의했는데 자광은 팔을 걷어 올리며 “이 어찌 의심의 여지가 있는 일인가!”라고 하였다. 바로 그날 저녁 술을 가지고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등을 찾아가 술이 얼큰히 취했을 때 조용히 말을 꺼내어 세조로부터 입은 은혜는 죽어도 잊을 수 없다는 둥 하며 서로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감동하게 한 다음 그 일을 털어 놓으며 말하기를, “김모(金某)가 감히 선왕을 거짓으로 적어 악인으로 표현하고 저희는 곧 사람인 양 떨치려 했는데 신하 된 사람으로 이런 무도한 일을 보고도 어찌 덮어둘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세 사람은 과연 모두 그 말을 따랐다. 대체로 윤과 노는 세조의 총신(寵臣)이었고 한치형은 궁중과 인척으로 연결된 터라 반드시 따르리라 짐작되었다.
드디어 모두 함께 차비문(差備門)에 이르러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 꽤 오랫동안 귓속말을 한 다음 왕에게 아뢰었다. 처음에 신수근이 승지가 되려 할 때 대간(臺諫)과 시종신(侍從臣)들이 신수근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점차 권세를 얻어 세력 다툼할 염려가 있어 불가하다고 간하였는데, 수근이 원한을 품고 말하기를, “조정이 문신들 손안에 있는 물건인가! 우리들은 무엇을 하란 말이냐!” 라고 한 적이 있다.
是羣憾交集主又猜暴不喜學問忿爲文士所拘不能縱惡常曰要名凌上使我不得自由者皆此輩也鬱鬱不樂欲一快施未敢下手及見子光等啓大喜卽令於南賓廳鞫囚令內侍金子猿掌出納餘不得與聞子光以獄事自任每於子猿傳敎必進當其前曲爲阿附之態其傳敎若得嚴劾自以爲得上意更加俯伏若將申謝之爲者聽訖而退忻忻有自得之色乃於衆中大言曰今日乃朝廷改排之時須有如此大處置不宜尋常治之又啓此人徒黨甚盛防護宜嚴乃抄禁衛軍把截宮門囚人就鞫亦令軍士押行猶慮治獄之漸弛未盡如意日夜謀所以鍜鍊一日自袖中出一卷書乃佔畢文集也摘其中吊義帝文及述酒詩遍示諸推官曰此皆指 世祖而作某之惡皆宗直所誨自爲註釋逐句而解令主易知而啓之曰宗直毁詆我 世祖宜論以大逆其所爲文不宜流傳請焚毁其集主從之凡藏宗直詩文者令於三日內各自來納焚於南賓廳前庭諸道館驛懸板留題令所在撤毁
이때를 당하여 원한을 품은 무리들이 모두 모였고 주상 또한 시기하고 난폭하며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문사(文士)들이 자기 마음대로 방종할 수 없게 구속한다고 미워했다. 늘 말하기를, “이름나기를 구하고 임금을 능멸하며 나로 하여금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자는 모두 이들 무리이다.”라고 하며 울적하고 즐겁지 않으며 한 번 시원하게 해치울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감히 하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영을 내려 남빈청(南賓廳)에서 국문하고 가두게 했다. 또 내시 김자원(金子猿)으로 하여금 출납을 관장하게 하고 여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자광은 옥사(獄事)를 자임하고 나서서 매양 자원이 전교를 받들고 올 때마다 반드시 나아가 맞으며 그 앞에 구부리고 아부하는 태도를 취했다. 만약 전교(傳敎)가 엄하게 처리하라고 하면 스스로 왕의 뜻을 얻은 듯이 기뻐하고 다시 부복하며 사례하였다.
퇴청한 후 싱글벙글 자부(自負)의 안색으로 좌중에 큰 소리로 “오늘은 조정을 고쳐 바로잡는 때이다. 모름지기 이와 같은 큰 처리가 있어야 할 것이니 보통 죄로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또 왕에게 아뢰기를, “이들 도당(徒黨)은 매우 번성하므로 방비를 엄중히 함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금위군(禁衛軍)을 뽑아 궁문을 파수 보게 하고 죄인이 국문에 나올 때에도 군사로 하여금 압송하도록 하였다. 또 치옥(治獄)이 조금이라도 해이하여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인을 학대하고 괴롭힐 방법을 모의하였다. 하루는 자기 소매 안에서 한권의 책, 즉 점필재(佔畢齋)의 문집을 꺼내어 그 안에 수록된 「조의제문(弔義帝文)」과「술주시(述酒詩)」를 국문하는 관원들에게 지적하여 보이면서, “이는 모두 세조를 지칭하여 지은 것이며 아무개의 죄악을 모두 종직(宗直)이 가르쳐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자광은 스스로 구절 하나하나 주석을 달고 풀이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여 아뢰기를, “김종직은 우리 세조를 헐뜯고 흉보았으니 의당 대역(大逆)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글들이 널리 전파되는 것이 옳지 못하므로 그 문집들을 불살라 없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연산주는 이 주청을 좇아 조익의 시문(詩文)을 가진 자는 3일 안에 각자가 스스로 가지고 와서 바치고 남빈청(南賓廳) 앞뜰에서 불사르며 각 도의 관(館)과 역(驛)의 현판에 실린 글들은 해당 관장으로 하여금 철훼하도록 하라 하고 명령하였다.
成宗賞命佔畢撰環醉亭記掛在楣間亦令撤去所以報咸陽之怨也子光欲乘機爲一網打盡之計目弼商等曰此人之惡爲臣子者不共戴天其黨與一切鉏去朝廷方得淸明不爾則餘黨復起禍亂之作不久矣左右黙然思愼搖手止之曰武靈何至爲此言也獨不聞漢末黨錮之事乎士類無所容迹而漢隨以亡子光少沮然獄事所連逮者必欲窮治思愼又止之曰枝葉蔓引不干於史筆者因繫日衆非吾輩本意子光不悅及
성종이 점필재에게 명하여 「환취정기(環翠亭記)」를 지어 문설주 위에 걸어놓은 현판까지 철거했는데, 이는 자광이 함양의 원한을 갚고자 한 소치였다. 유자광은 이 기회를 타서 일망타진하려는 흉계를 도모하고자 윤필상(尹弼商) 등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악은 신하 된 사람으로 같이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이 무리들을 몽땅 뿌리째 파내어야 조정이 비로소 맑고 밝아 질 것이다. 만약 그러하지 못할진대 나머지 무리들이 다시 일어나 머지않아 화난(禍亂)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했다. 좌우의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는데, 노사신이 손을 저어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무령(武靈;子光의 封號)은 무엇 때문에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는가? 유독 그대만이 한말(漢末)의 당고(黨錮) 사건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선비들의 발붙일 곳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한나라가 멸망의 길을 가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이에 자광은 다소 움찔했으나 그래도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체포된 사람들은 꼭 추궁하여 다스리고자 했다. 노사신이 또 제지하며 말하기를, “사초(史草)에 간여하지 않은 지엽 말단의 사람들을 가두고 얽어맴이 날로 많아지는데 이는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지 않은가?”라고 했다. 자광은 불쾌해했다.
定罪之日思愼議獨不同子光作色詰之各以其意啓之主從子光議以七月二十七日告 宗廟剖宗直棺斬其屍金馹孫權五福權景裕幷凌遲處斬李穆許磐姜謙等誣餙 先王所無之事筆之於史皆處斬謙杖一百籍家産極邊爲奴表沿沫洪瀚鄭汝昌茂豊副正摠等罪犯亂言姜景叙李守恭鄭希良鄭承祖等知亂言而不告並杖一百流三千里李宗準崔溥李黿李冑金宏弼康伯珍朴漢柱任熙載李繼孟姜渾俱以佔畢門徒互相稱譽或譏議時政熙載杖一百流三千里冑杖一百極邊付處宗準黿宏弼溥漢柱伯珍繼孟渾等幷 杖八十遠方付處而幷定烽燧定虜衛之役以見史不卽告魚世謙李克墩柳洵尹孝遜等罷職洪貴達趙益貞許琛等左遷
죄를 정하는 날에 이르러 노사신만이 동의하지 않는 논의를 폈다. 자광은 얼굴을 붉히며 힐난하였고 결국 하나하나 그의 뜻대로 보고되었다. 연산주는 자광의 논의를 좇아 7월 27일 종묘에 고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는 다 같이 능지처참, 이목, 허반, 강겸 등은 선왕의 없는 사실을 허위로 사초에 기록했다 하여 이목과 허반은 처참, 강겸은 공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최변방에 노예로 부처하고 표연말, 홍한, 정여창, 무풍부정 이총 등은 난언을 범한 죄로, 강경서 , 이수공, 정희양, 정승조 등은 난언을 알고서도 고발하지 않은 죄로 다 같이 곤장 100대에 삼천 리 밖으로 유배, 이종준 ,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강백진, 박한주, 임희재, 이계맹, 강혼 등은 다 같이 점필재의 문도로서 서로 칭찬하고 혹은 시정을 질타하는 논의를 한 죄로 임희재는 곤장 100대에 삼천리 밖 유배, 이주는 곤장 100대에 최변방 부처, 이종준, 이원, 김굉필, 최보,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다 같이 곤장 80대에 원방부처하되 모두 봉수대의 노지기역에 처하고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 조익정, 허침 등은 좌천시킨다.
後追殺殆盡是日晝晦雨注大風從東南起拔木折屋土庶無不顚仆股栗獨子光意滿氣得揚揚歸家朝野視之如毒蛇學舍蕭然數月無誦讀聲識者切歎曰戊戌之獄正類攻邪黨{削竄任元濬任士洪及子光等是也}戊午之獄邪黨陷正類二十年間一勝一敗而治亂隨之大抵君子之用刑也常失於寬緩小人之報怨也必殘滅乃已使戊戌君子盡用其律豈有今日之禍乎
그 뒤 살상이 뒤따라 시행되어 거의 끝나는데, 이날 낮에 그믐밤같이 어두워지더니 큰비가 쏟아지고 대풍이 동남에서 일어나 나무가 뽑히고 가옥이 무너졌으며 백성들은 엎드려 벌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유독 유자광만이 의기양양하여 귀가하였는데 조야의 사람들이 그를 독사(毒蛇) 보듯 하였다.
이후 학사(學舍)는 적막하였고 수개월 동안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식자들은 심히 한탄하여 말하기를, “무술의 옥사는 정류(正類)가 사당(邪黨;간사한 무리)을 쳤고(1478년 무술 5월 任元濬, 任士洪 및 柳子光을 귀양 보낸 사건), 무오의 옥사(1498년 7월)는 사당(邪黨)이 정류(正類)를 함락하여 20년 동안에 일승일패 하였는데, 다스림과 변란(變亂)이 이에 수반되었다. 대저 군자의 형벌운용은 항상 너그럽고 느슨한 데에 잘못이 있고 소인의 원한 갚음은 반드시 잔혹하게 멸함으로써 끝을 낸다. 만약 무술년의 옥사에서 군자들이 적용할 수 있는 법률을 다 운용했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 화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此卽南袞著子光傳也袞之此傳書子光罪惡極盡無餘及至己卯北門告變使一時淸流打盡一網跡其所爲浮於子光是袞自作本傳自書已惡令人一讀不覺掖婉髮指史禍顚末莫詳於此傳故今錄之
이상은 남곤(南袞)이 지은 「자광전(子光傳)」이다. 남곤은 「자광전」에서 자광의 죄악이 극진하였음을 남김없이 기록하였다. 남곤은 기묘사화 때 북문에서 고변(告變)하여 당시의 청류들을 일망타진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발자취는 유자광과 흡사하다. 이런 그가 스스로 「자광전」을 지어 자기의 죄악을 자기 스스로 기록하여 뭇 사람들로 하여금 일독(一讀)하게 한 한 꼴이 되었으니 팔을 걷어붙이고 발끈할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음인가. 이 전기(傳記)에 사화의 전말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지금 여기에 수록하는 바이다.
庚申權葬于楊州之石橋原{在州南五十里}
<1498년 7월> 경신(29일)[1] : 양주(楊州)의 석교원(양주 남쪽 50리)에 임시 장례를 지내다.
[1] 경신일은 26일이다. 앞의 글에서 날짜가 3일씩 밀리는 것으로 보아 29일 계해일이 될 것 같다.
朴期叟{兆年}先生之神交也先生繫獄日候金吾門外至是不避危機與先生家人營窆于此
선생과 정신적 교우 관계에 있던 박기수(朴期叟;兆年)가 선생이 옥에 갇히던 날 의금부 문 밖까지 와서 문안한 바 있었는데 처형당한 지금에 와서도 위기를 피하지 아니하고 선생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양주에 무덤을 만들었다.
○武宗皇帝正德元年{我 中宗大王元年}丙寅
1506년 병인 (중종 1년, 선생 사후 8년)
秋九月戊寅有 旨洗寃復官爵
<1506년> 가을 9월 무인(2일) : 세원(洗寃 : 억울한 죄를 벗겨줌)과 관작(官爵)을 회복하는 교지 내리다.
是時東窓公在湖南南原之謫所見燕山政亂社稷將危與柳濱李顆等謀推戴 中宗傳檄京師其略曰
이 무렵 동창공은 호남 남원의 적소(謫所;유배지)에 있었는데, 연산군의 정치가 어지러워 장차 사직이 위태할까 염려되어 유빈(柳濱;형조참판으로 갑자사화 때 역시 호남에 유배), 이과(李顆) 등과 모의하여 중종(中宗)을 추대하기로 하고 격문(檄文)을 서울에 전하였던 바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東窓公倡義檄文>
恭惟我 太祖握符受命刱業艱難 世宗聖智天縱德敎休明 成宗一遵成憲節用愛士民安物阜躋世昇平不意嗣君荒淫滅德暴虐無道父王後宮杖而殺之翁主王子流以殛之是可忍也 執不可忍也 大諫之正言者竄之誅之史官之直筆者磔之滅之戮辱大臣賊害忠良父子兄弟收司緣坐甚於秦法師友門徒羅織網打劇於漢禁發人之塚禍及枯骸籍人之産殃流黃口寸斬之律碎骨之辟此何等刑也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옥새를 잡으시고 천명(天命)을 받아 창업하심에 온갖 어려움과 고초를 겪으시었고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린 성지(聖智)로 덕치(德治)와 교화(敎化)를 훌륭하게 베푸시었으며, 성종(成宗)은 모범된 법을 세워 이를 일관되게 준수하시었고 스스로 절용(節用)하며 선비를 아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었으며, 또한 물자를 넉넉하게 하고 세상을 더욱더 평화롭게 하셨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뒤를 이은 군주가 황음멸덕(荒淫滅德)하고 포학무도하여 부왕(父王)의 후궁을 매질하여 죽이고 옹주와 왕자를 귀양 보내고 형벌로 죽이니 이에 누가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로다. 대간(臺諫)의 바른 말 하는 자를 귀양 보내고 목을 베며 직필(直筆)하는 사관(史官)을 능지처참하고 대신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해치고 부자 형제를 잡아 문초하는데, 심하게는 옛 중국 진나라의 연좌법(緣坐法)을 원용하는가 하면 스승과 벗과 문도들을 꾸며 엮은 죄로 일망타진하였으며 심지어 한(漢)나라 때부터 발굴이 금지되어 온 사람의 무덤에까지 화를 입히어 해골을 말라비틀어지게 하였다. 백성들의 가산을 몰수하고 어린아이까지 귀양 보내는 벌을 내렸으며 사람을 토막토막 베고 해골을 부수는 형벌이 이 무슨 형벌이란 말인가!
奪人妻女恣行淫慾破人廬舍以廣苑囿 先王陵寢盡爲孤兎之場前聖祠廟變作熊虎之圈採靑之士遍於閭里聚紅之院尊於臺閣百役繁興八域疲弊委差旁午郵傳一空徵歛無藝民不聊生不特此也 宗室婦女誘行私汚兄弟妻妾逼令相奸三年通喪忍短其制父母忌祭亦皆罷之彝倫已斁人道滅矣
남의 처와 여식을 탈취하여 음욕을 자행하고 남의 살림집을 허물어 후원(後苑) 동산을 넓혔으며, 선왕의 능침(陵寢)은 여우와 산토끼들의 놀이마당이 다 되었고, 옛 성인의 사당은 개조하여 곰과 호랑이의 우리로 만들었으며 채청사(採靑使)의 발길이 마을마다 미쳤고, 취홍원(聚紅院;잡아온 미녀들을 수용한 곳)이 대각(臺閣;사헌부와 사간원)보다 존귀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부역을 빈번하게 일으켜 팔도의 지역이 피폐해졌도다. 또한 우편의 소통이 어긋난 채로 방치되고 있으며 어느 한 군데도 징험(徵驗)이 보이는 곳이 없어 재주 없는 백성들은 삶에 대한 애착을 잃었도다. 이 뿐만 아니라 종실의 부녀를 꾀어 은밀히 추잡한 짓을 행하는가 하면 형제들의 처첩을 핍박하여 서로 간통하게 하였다. 차마 할 수 없는 3년상 제도를 단축하게 하는가 하면 부모의 기제사 역시 모두 파(罷)하였으니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가 이미 무너지고 인도(人道)가 파멸되었도다.
其他土木之役聲色之好臺池游畋之娛 禽獸花石之玩凡係亂政難以覶縷熏天之惡過於政廣盈貫之罪浮於桀紂生民一時之苦姑不足言萬一大奸窺覦神器一朝遽起則易姓之禍亦足可虞惟我 成廟臨御二十六年禮接卿士培養忠義者正爲今日也 晋城大君 成宗大王之嫡子賢而有德中外屬望謳歌所歸天命攸在玆以某等以某月某日擧義兵移書諸道約日聚京師在朝公卿百執事宜速推戴以扶 宗社之危云云
그 외에도 토목역사(土木役事)는 가무와 여색을 즐기기 위한 대(臺)와 연못, 뱃놀이와 사냥놀이, 금수와 화석등을 완상(玩償)하는 데 필요한 공사에 집중되고 있도다. 이와 같이 모든 계통의 난정(亂政)은 갈피를 잡을 수 없으며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과 허물이 정사에 광범하게 충만하여졌으니 그 죄는 걸주(桀紂 : 폭군인 하의 걸왕과 은의 주왕)와 그 궤를 같이하도다. 살아 있는 백성들의 일시적 고통은 아직도 말로는 부족하다. 만에 하나 큰 간신이 보위를 엿보아 하루아침에 급거 봉기한다면 역성의 화(禍 ; 타성에 의한 왕위 찬탈)도 가히 염려되는 바이다. 생각건대 우리 성종께서 26년 재위하시는 동안 공경과 대부를 예로써 대접하시고 충의를 함양하신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진성대군(晋城大君)은 성종대왕의 적자로서 어질고 덕이 있어 내외의 촉망과 칭송을 받으시니 이는 천명이 따르심이라. 이에 모모(某某) 등은 모월 모일 의병을 일으켜 격서(檄書)를 각도에 이첩 날짜를 기약하여 서울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조정에 있는 공경과 여러 집사들은 속히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종사의 위기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운운.
未至而朴元宗柳順汀成希顔等以 慈順王大妃命放燕山于喬桐奉晋城大君卽位是爲 中宗大王盡革弊政首洗戊午之寃復其官爵錄其子孫宥還被竄人姜景叙申用漑等
이 격서(檄書)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박원종(朴元宗,1467~1510), 유순정(柳順汀,1459~1512), 성희안(成希顔,1461~1513) 등이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의 명을 받들어 연산(燕山)을 교동(喬桐;江華內)으로 추방하고 진성대군을 받들어 즉위하게 하니 이가 곧 중종대왕(中宗大王)이다. 중종은 폐정 혁신에 진력하였는데, 먼저 무오(戊午)의 억울한 사람들에게 죄를 씻어주고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그 자손들에게 녹을 주었다, 또한 귀양 간 사람들에게는 죄를 사해주고 귀환하게 하였으니 강경서(姜景叙,1443∼1510), 신용개(申用漑,1463~1519) 등이 이들이다.
冬十月庚午{二十四日}改葬于木川之鵲城山
<1506년> 동 10월 경오(24일)[1] : 목천(木川)의 작성산(鵲城山)에 개장(改葬)하다.
[1] 庚午는 25일임
初先生之被逮也夫人金氏在木川聞之涕泣不息十日而不死復進食及先生遇害號擗泣血屢絶復甦三年之內不脫衰麻朝夕哭祭極盡誠禮柴毁骨立扶而後起服闋之日大有自湖南至夫人謂大有曰吾無育願以汝弟大壯奉汝季父之祀又曰我死之後必以我祔葬汝季父之遺骸言訖慟哭更衣正席翛然而歿鳴呼烈哉鳴呼慟哉夫人生於成化六年庚寅十二月二十五日庚子卒於弘治十三年庚申七月二十七日己卯享年三十一葬于縣東十五里一遠東面鵲城山柿木洞子坐向午之原
처음 선생의 피체(被逮) 사실을 부인 김씨가 목천(木川)에 있으면서 듣고 울면서 10일 동안 식음을 끊었으나 죽지 않음에 할 수 없이 다시 음식을 들게 되었는데, 선생이 해를 당하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피눈물을 흘리다가 여러 차례 기절하곤 하였다. 3년 내내 베옷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곡제(哭祭)에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였다. 지나친 슬픔으로 몸이 쇠잔하고 피골이 상접하여 부축해야만 겨우 기동하게 되었다. 탈상하는 날 대유(大有)가 호남에서 당도하였는데, 부인이 대유에게 말하기를, “나는 자식이 없으니 원컨대 너의 아우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너의 계부(季父)의 제사를 받들게 해주기 바란다.”고 하고, 또 “내가 죽거든 꼭 나를 너의 계부 유해 옆에 묻어다오.”라고 하였다. 말을 다 마친 다음 통곡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자리에 바르게 눕더니 조용히 운명하였다. 아, 참으로 절개가 굳으시도다! 아, 애통하도다! 부인은 1470년 경인(성종 1년) 12월 25일 출생하여 1500년 경신(연산 6년) 7월 27일 졸하니 향년 31세였다. 장지는 현동(縣東) 15리의 동면 작성산(鵲城山) 시목동(柿木洞) 남향의 언덕이었다.
<遷墓時 南袞의 輓詩>
至是移葬先生于夫人墓石有南袞輓遷墓詩曰鬼神茫昧然天道諒難知好惡與人異禍福恒舛施悠悠此宇宙修短同蔑咨焉知髑髏樂不易南面治達觀付一莞浮雲於渺瀰獨憐名世人其出每遅遲契濶數百年乃得一見之見之又不遂至治寧有期吾生亦何幸得與君幷時文章漢西京人物宋豊熙{指程張諸賢}
지금에 이르러 부인 묘 오른편에 선생의 유해를 이장(移葬)하였다. 천묘(遷墓) 때 남곤(南袞)이 만시(輓詩)를 지어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신이 견문이 없어 세상일에 캄캄함(茫昧)인가. 천도(天道)는 참으로 알기 어려워라. 좋아함과 미워함이 사람과 달라서 화복을 항상 어긋나게 베푸는고! 유구한 이 우주에 길거나 짧거나 그 수명 한가지로 멸망으로 탄식뿐일세. 어찌 알랴, 저승의 낙이 이승의 제왕자리와도 바꾸지 않을 만한지. 달관자(達觀者)는 아득히 먼 뜬구름이라 일소(一笑)에 붙이리라. 오직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이름 드날릴 사람은 그 나타남이 매양 더디고 더디어서 수백년 만에야 겨우 한번 얻어보게 되었는데 나타났어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지극히 잘 다스려질 날을 어찌 기약할 수 있으리오. 내 그대와 같은 시대를 더불어 하였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대의) 문장은 한서경(漢西京;前漢時代)의 문재(文才)요, (그대의) 인물됨은 송(宋)나라 풍희년간(豊熙年間)의 제현(諸賢;張橫渠, 程明道, 程伊川 등) 같도다.
太息又痛哭堂仁輙敢爲寧知絳灌屬切齒從旁窺纍然囊頭木遽及東市夷萬事何所無東海浩無涯世平法又弛善惡自分岐如何著雍寃尙未大敷披春秋起諱例定哀多微辭聖人與天同後世非敢追執筆書所聞史家之常規所聞有正膠乃是一家私編摩自有局削僞乃其宜只是腹中劒强覓毛底疵豈比元魏人列惡張道逵當官有不職厥罪固當笞賢能又末减公議在所師無人持此語一決九重疑
크게 탄식하고 통곡하면서도 인(仁)에 당면하면 감연(敢然)히 행하였는데, 강권(絳權)의 무리들이 이를 갈며 곁에서 엿보더니 줄줄이 묶인 죄인(囊頭)이 되어 급거 동시(東市)에서 죽임을 당할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만사(萬事)가 왜 이리도 사리(事理)가 없는고. 동해가 넓고 가없듯 세상은 평정되고 법도 완화되어 선과 악이 스스로 가려졌는데 어찌하여 꽉 막힌 억울함을 아직도 크게 펴서 풀지 못하였는고. 춘추에 기휘(忌諱)하는 예(例)를 일으켜서 정공(定公)과 애공(哀公)에게 은밀한 뜻의 말이 많았도다. 성인(聖人)은 하늘과 한가지이니 후세에서 감히 좇을 수는 없으리라. 붓을 잡고들은 바를 적은 것은 사가(史家)의 떳떳한 규범이며 그 들은바가 옳고 그름이 있음은 일가(一家)의 사사로운 일이로다. 사초(史草)를 엮고 다듬기 위해 의당 사국(史局)을 열게 되며 거짓된 것이 있으면 사국(史局)에서 삭제함이 옳은 법인데 오직 뱃속에 칼이 있어서 억지로 머리털 밑의 흠집을 찾았도다. 어찌 원위(元魏)의 사람(옛 堯舜 治下의 都市人)이 장도규(張道逵)의 죄악을 나열한 것에 비하랴. 담당관원이 그 직무를 다하지 않음이 있으면 그 죄는 정녕 태형(笞刑)에 마땅하고 어질고 유능한 이에게 또 죄를 감하는 것은 팔의(八議 : 옛날 죄를 감면하는 여덟 가지 재판상의 恩典)에 법받을 바가 있는데 이 말을 가지고 구중(九重;임금을 일컬음)의 의심을 풀어준 이가 없었도다.
歲星行欲周永結識者悲陂陀城東土草草難掩屍情鍾有子姪卜兆謀遷移君今九天上俯視息相吹烏鳶旣不擇况問彼與玆人間自區區爲便歲時祠凄凉凉木川縣中有山逶迤他年纂圖識錄墓當不遺
세성(歲星)이 일주(一周)하려(12년이 되려) 하는데 식자의 슬픔은 길이길이 맺히는구나. 비탈진 성(城) 동쪽 땅에 간신히 시신 덮여 있어 사랑하는 자질(子姪)이 터를 잡아 옮기기(移葬)를 도모했도다. 그대 지금 구천에서 내려다보시는가? 서로 탄식을 내쉬고 있는 이 광경을. 이미 까마귀와 솔개들의 노리는 바도 아니니 황차 여기와 저기를 물어 무엇하랴. 인간은 스스로 구구(區區)하게 세시(歲時)의 제사를 편하게 하기 위함이로다. 처량하도다. 목천현(木川縣) 가운데 굼틀거리는 산이 있으니 뒷날 지지(地誌)를 다시 편찬할 제 이묘의 기록 의당 빠짐없이 하리라.
南袞己卯凶人也今於年譜錄其詩二編子光傳取其戊午事之昭載也遷墓輓取其辭意之切實也君子不以人廢言後之賢者其或不以取惡人之文爲不可耶然此皆袞少時作也袞素以文學有時望及爲己卯諸人之所擯斥憤憾切齒遂起罔測之禍甘爲萬古之凶人故余嘗以爲袞之始終判若二人焉然昔王安石之亂天下明道先生以爲吾輩當分其過予於己卯事亦云
남곤(南袞)은 기묘사화 때 원흉의 한사람인데도 지금 이 연보에 그의 시문 두 편을 수록하였다. 그 이유는 「자광전」은 무오사화의 사실을 소상하게 싣고 있어서 그것을 취함이요 천묘시(遷墓時)의 「만시(輓詩)」는 그 뜻이 너무도 절실(切實)한지라 그 글을 취함에 있다. 군자는 그 사람됨이야 어떠하든 그 주장하는 바가 이치에 맞으면 그 말을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논어』). 뒷날 이를 읽어보는 사람 가운데 혹 악인(惡人)의 글을 취한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이는 남곤이 젊었을 때 지은 것이다. 남곤은 문학적 소질이 있어 당시의 촉망을 받았었는데, 기묘 때 여러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이를 갈며 분개하다 마침내 망측한 화를 일으키고 즐기다가 만고의 흉인(凶人)이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전부터 나는 남곤의 처음과 나중은 서로 다른 두 사람 같다고 생각했었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의 왕안석(王安石)의 난을 두고 천하의 명도 선생(明道先生;程顥:程子) 은 우리도 그 과실의 일부를 마땅히 나누어 져야 된다고 했다. 기묘사화에 있어서도 나 또한 같은 말을 하고 싶다.
廟主始成從子大壯奉祀
묘(廟)에 비로소 신주(神主)를 세우고 조카 대장(大壯)이 제사를 받들다.
先生歿于禍未得立主至是復爵而主成於改葬時大有禀于東窓公使第二弟大壯奉其祀遵先生夫人遺命也
선생이 사화로 돌아가신 이후 여태 신주(神主)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관작이 회복되고 개장(改葬)할 때 비로소 신주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대유(大有)가 동창공(東窓公)에게 아뢰어 둘째 아우 대장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니 이는 선생 부인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었다.
○二年丁卯
1507년 정묘 (중종 2년, 선생 사후 9년)
夏五月甲辰有 旨還給家産
<1507년> 여름 5월 갑진(2일) : 가산환급(家産還給)의 교지 내리다.
濯纓先生年譜 下
탁영선생<휘일손>연보 하(2/2)
<原文: 濯纓先生年譜 金大有 著 高宗11[1874]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2511-10-25, 參考譯文: 增補濯纓先生年譜 2006.9.30. 感慕齋宗中, 解釋 : 2008. 8.15. 金順大, 編輯 :金乙泰>
○二年丁卯
1507년 정묘 (중종 2년, 선생 사후 9년)
夏五月甲辰有 旨還給家産
<1507년> 여름 5월 갑진(2일) : 가산환급(家産還給)의 교지 내리다.
是年春 上御朝講領事成希顔奏曰戊午史禍士林至今危懼父子兄弟相戒勿言其時推官皆死惟臣與子光在耳臣若不言 殿下何由知之盖金宗直爲儒生時作吊義帝文其意不知何所指而金馹孫輩敷衍之可誅然此事之發實有所由 成宗朝李克墩爲兵曹判書以成俊爲北道節度使俊怒辟克墩子世經爲評事其後金馹孫爲獻納李冑爲正言上箚論之克墩及俊怨二人欲中傷之後克墩監春秋修 成宗實錄見宗直之文欲發其事魚世謙曰此文不可盡信宜於洗史草時幷去之不可漏洩也韓致亨尹弼商柳子光等聞其語上達成獄推官等欲幷罪宗直門徒獨盧思愼以爲若爾則恐成漢時黨錮之禍此戊午事之大槩也
이 해 봄 어느 날 주상이 아침 강(講)에 임했을 때 영사(領事) 성희안(成希顔,1461~1513)이 아뢰기를, “무오사화 이후 사림(士林)은 아직까지 위구심(危懼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자형제 간에 서로 조심하라고 말을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추관(推官)은 모두 죽고 오직 신(臣)과 유자광(柳子光,1439∼1512)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일 신이 말씀 올리지 않으면 전하께서 어찌 아시겠습니까. 그 대강을 말씀드리면,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아직 유생일 때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이 이를 펴냄으로써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발달의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즉, 성종조(成宗朝)에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병조판서를 하고 있을 때 성준(成俊,1436~ 1504)을 북도 절도사(節度使)에 임명하였는데, 성준이 노하여 극돈의 아들 세경(世經)을 평사(評事)로 징소해갔습니다. 그 뒤 김일손이 헌납(獻納)을 하고 이주(李冑)가 정언(正言)을 하고 있을 때 상소하여 논박한 일이 있었는데 극돈과 준은 이 두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중상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 극돈이 춘추관 감사(監事) 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할 때 김종직의 글을 보고 그 사건을 발단시키려 했는데 어세겸(魚世謙,1430~1500)이 말하기를, ‘이 글을 다 믿을 수는 없다. 사초(史草)를 닦을 때 아울러 삭제함이 마땅하다. 사초 내용을 누설함은 불가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치형, 윤필상, 유자광 등은 그 말을 듣고 곧 주상에게 상달하여 옥사(獄事)를 일으켰습니다. 추관(推官)들은 종직의 문도들도 아울러 벌주려 했는데 유독 노사신(盧思愼,1427~1498)만이 반대하면서 한(漢)나라 때의 당고(黨錮)의 화와 같이 될까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오사건(戊午事件)의 대강이옵니다.”라고 하였다.
至是藝文館奉敎金欽祖鄭忠樑待敎李希曾金瑛檢閱李抹尹仁鏡鄭熊尹止衡{一云權橃}等上疏曰書契作而有史學有史學而後是非明是非明而後天下萬世之公論不泯故虞夏之史不諱瞽䏂伯鯀商周之史不諱桀紂幽厲衛完鶉奔之醜聖人著之於經唐宗塵聚之亂史氏特書於策未聞有一人以史事見誅禍及後嗣者也
한편 이때에 예문관 봉교 김흠조(金欽祖), 정충량(鄭忠樑), 대교 이희증(李希曾), 김영(金瑛), 검열 이말(李抹), 윤인경(尹仁鏡), 정웅(鄭熊), 윤지형(尹止衡;일설에는 權橃) 등이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주청하였다.
“글자를(書契)를 만듦으로써 사학(史學)이 있게 되고 사학이 있음으로써 후세에 시비(是非)가 밝혀지고 시비가 밝혀짐으로써 천하 만세에 공론(公論)이 없어지지 않사옵니다. 옛날 우하(虞夏;堯舜帝의 국호)의 사기(史記)에 고수(瞽䏂 : 舜임금의 父)와 백곤(伯鯀 : 禹임금의 父)의 부끄러운 사실들을 기록하는 데 꺼리지 않았으며 상(商), 주(周)나라의 사기에는 걸주(桀紂)와 유여(幽厲)(모두 폭군과 망국 군주의 전형)의 사실을 꺼리지 않고 기록했고 위(衛)나라의 공자완(公子頑)의 음탕한 추태를 다스린 사실을 성인들은 경서에 밝히고 있습니다. 당나라에서는 여취(麗聚)의 난을 사씨(史氏)가 특별히 책에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기에 관한 일로 형벌을 받고 그 화가 후계자들에게까지 미쳤다는 전례는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恭惟我 朝列聖繼作尤重史學至於廢朝二三奸臣導君爲惡史事變亂古所未聞 殿下承大亂之後祛廢朝新法復 祖宗舊章死者封爵亡者表閭萬姓欣欣相慶而至於金宗直等事臣竊痛之昔者 成宗大王親覽吊義帝文尙不以嫌者意必有在也厥後大臣乃反挾私嫌不顧公議挑怒柳子光與二三大臣同議密啓終置大逆是則陰欲掩過而卒不得掩更使暴揚於後世累及於 先王其禍蔓延於甲子盡殱士流 宗社傾危國運中絶如此基禍之奸罪當不原而賞反及焉深恐史家筆法從此盡廢而萬世之公論泯滅無傳
삼가 생가하옵건대 아조의 역대 성상(聖上)께서는 사기(史記)를 계속하여 기록하시었고 사학(史學)을 매우 중히 여기시었는데, 폐조(연산조) 때 두세 사람의 간신이 임금으로 하여금 사학을 혐오하게 유도하여 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 대란의 뒤를 이으시어 폐조의 신법(新法)을 폐기하시고 조종(祖宗)의 구장(舊章;옛 법조문)을 회복하시어 죽은 사람들에게 관작을 봉하고 표창하시니 만백성이 매우 기뻐 서로 경하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종직 등의 일에서는 신 등은 남몰래 절통해하고 있습니다. 옛날 성종대왕께서 「조의제문」을 친히 읽어보시고 가상히 여기시며 혐오하지 않은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대신들이 도리어 사사로운 혐오심을 품고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분노를 부추겼습니다. 유자광이 두세 대신과 같이 모의하여 밀계(密啓)함으로써 결국 대역으로 처치하였는데, 이는 곧 그들의 허물을 엄폐하려는 음흉한 욕심에서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엄폐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널리 후세에 폭로하게 하였습니다. 그 누(累)는 선왕(成宗)에게까지 미쳤고 그 화는 갑자사화에까지 만연되어 선비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종사가 위태하게 기울고 국운이 중도에 끊어질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화의 근본인 간신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며 내려진 상은 도로 회수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심히 우려되는 것은 사가(史家)의 필법(筆法)이 이 일로 해서 모두 폐하여지고 만세의 공론이 민멸(泯滅)하여 전해지는 바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願殿下更立科條亟收賞賜家産各還其主變亂史法者隨輕重以正刑章以史事被誅者幷皆封贈以快公論則 殿下此擧卓冠千古矣於是政院臺諫相繼言史事至嚴不得漏洩而邪慝之人泄於中外遂成戊甲之禍宜明正其罪大臣朴元宗等亦言宗直等其時求正律不得論以反逆誠過重也
전하, 원하옵건대 과조(科條 : 법규, 명령 등의 조항)를 세우시어 상으로 하사하였던 가산을 속히 환수하여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시고 사법(史法)을 범하여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경중에 따라 형법을 바르게 집행하시며 사기(史記)일로 형벌을 받은 사람은 모두 봉작을 높여주어 공론의 법칙이 쾌유하게 하여주소서. 전하, 이러한 조치는 천고(千古)에 뛰어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에 정원(政院)과 대간(臺諫)에서도 서로 연이어 아뢰기를, “사기에 관한 일은 지극히 엄중하고 누설할 수 없습니다. 간사한 사람들이 안팎으로 누설하여 마침내 무오(戊午)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는 마땅히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대신 박원종 등도 또한 아뢰기를, “김종직 등에 대하여 당시 정당한 법률 조항을 찾을 수 없었는데도 반역으로 논의한 것은 참으로 과중한 처사였습니다.”라고 하였다.
上乃命辭連被罪者復其爵李克墩追奪官秩金宗直金馹孫權五福權景裕李穆許盤姜謙等幷還給家産推官尹弼商盧思愼韓致亨柳子光等賞賜田宅伴倘亦幷還收明年戊辰三司交章復劾子光罪惡削勳爵流湖南而死
이에 주상은 곧 명하기를, “글로 해서 죄를 입은 사람들의 관작을 회복하고 이극돈의 관작을 추탈(당시 이미 죽었음)하라.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강겸 등에게는 가산을 다시 돌려주고 추관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유자광 등에게 상으로 내렸던 전답과 종복을 모두 환수하라.”하였다.
그 이듬해(戊辰年)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교대로 글을 올려 유자광의 죄악을 탄핵함으로써 그는 훈작이 삭탈되고 호남에 귀양가서 죽었다.
子光屢起大獄賊殺忠良反正時以子光歷事多謀遣人召之父子並錄勳人以爲元宗等墮子光術中至是三司劾其罪惡子光見元宗而恐動之曰吾與公俱是武人唇亡則齒寒元宗笑曰朝廷切齒久矣恨公不早退也子光破膽而去是日子光將入直摠府軒從已具整服束帶而坐索新扇把之見扇面細書奇禍立至四字大驚異黙然良久將出忽吏報臺啓請罪遂竄湖南兩目全盲數歲死子軫房皆竄北道朝廷許其歸葬而軫忘哀暱色不赴喪房亦對客飮酒托病不奔三司論之並不得其死
유자광은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을 많이 해쳐 죽였다. 중종반정 때에도 많은 일에 관여하고 모의에 참여하여 논공행상할 때 사람을 보내 밝혀 부자(父子)가 나란히 유공자로 책봉되었다. 생각건대 이는 박원종 등이 유자광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삼사(三司)에서 그의 죄악을 탄핵하였는데 자광은 원종을 찾아가 떨면서 말하기를, “나와 공은 다 같이 바른 무인(武人)인데 입술이 망하면 이빨이 시리게 마련(唇亡則齒) 아니오.”라고 하였다. 이에 원종이 웃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를 간 지 오래요. 공이 좀 더 빨리 물러가지 않음이 한 될 뿐이오.”라고 했다. 자광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이날 자광은 총부(摠府) 청사에 입직(入直)하려고 나가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부채를 찾아 쥐고 보니 부채 면에 가는 글씨로 ‘기화입지(奇禍立至 : 기이한 화가 곧 다다른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잠시 후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관리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대간에서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했다.
마침내 그는 호남에 귀양 가 두 눈이 완전히 멀어 몇 년 살다가 죽었다. 이때 그의 아들 유진(柳軫)과 유방(柳房) 모두 북도에 귀양 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돌아와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유진은 슬픔을 잊은 채 여색을 가까이 하고 거상(居喪)에 임하지 않았으며, 유방 역시 손님을 상대로 술을 마시는가 하면 병을 칭탁하고 달려와 상을 치르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는 그들을 논죄하여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다.
○三年戊辰
1508년 무진 (중종 3년, 선생 사후 10년)
秋八月丙子返葬于水也山戌坐之原
<1508년> 가을 8월 병자(11일) : 수야산 술좌의 언덕에 반장(返葬)하다.
在先兆東岡○先生舊墓碣書曰濯纓先生金公之墓至是夫人墓所未得同遷因以其碣竪于夫人墓前
장지는 선영(先兆)의 동편 언덕이다. 선생의 구묘(舊墓) 비석에는 ‘濯纓先生金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는데, 지금 부인의 묘소를 같이 옮길 수 없으므로 인하여 그 비석을 부인 묘 앞에다 세워두었다.
○七年壬申
1512 임신 (중종 7년, 선생 사후 14년)
秋九月癸丑有 旨贈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兼藝文館應敎 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1512년> 가을 9월 계축[1] : 통훈대부 홍문관 직제학 겸 예문관 응교, 경연 시독관, 춘추관 편수관으로 증직하는 교지 내리다.
[1]1512년은 5월에 윤달이 들어 있으며 이를 감안하더라도 癸丑은 10월 13일에 해당
先是 上御經筵知事申用漑奏曰近來史官之直筆無如金馹孫而戊午以後史筆不公請加褒贈以勸秉筆之臣 上敎曰史官直筆以垂千載君臣作爲勸戒自經史禍人皆以直爲戒其論操史筆者凡君之善惡臣之忠奸無不直書以矯隱諱之弊遂有是 命
이에 앞서 주상이 경연(經筵)에 임했을 때 지사(知事) 신용개가 주청하기를, “근래에 사관의 직필이 김일손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무오 이후 사필이 공변되지 못합니다. 청하옵건대 증직으로 포상하시어 사필을 잡은 신하들을 격려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하교하기를, “사관은 직필하여 천년 후세에까지 전함으로써 임금과 신하가 그 사실(史實)을 통하여 권장 또는 경계할 바를 스스로 헤아리도록 하라. 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은 모두 직필하여 그것을 경계하였다. 사필을 잡고 쓰는 사람에게 이르노니 무릇 임금의 선악과 신하의 충간을 직필하지 아니하고 허위, 은폐 또는 기피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고 마침내 이 증직 교지를 내렸다.
冬十月壬午有 旨求遺文
<1512년> 겨울 10월 임오(11월 12일에 해당) : 유문(遺文)을 구하는 교지를 내리다.
上與筵臣語及東人詩文曰予嘗聞華人以金馹孫之文比諸韓愈而未之見焉其文果何如參贊官趙元紀對曰不獨其文章可愛讀其辭想其人其學問節行不愧爲一代名流也 上卽命校書館求遺稿於其家而禍後散失殆盡所存者僅千百之一二也
주상이 경연의 신하들과 동인(東人;조선)의 시문(詩文)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중국 사람으로부터 김일손의 글이 당나라 한유(韓愈)의 글과 비견된다고 들었는데 내 아직 보지를 못했다. 과연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참찬관 조원기(趙元紀;趙光祖의 叔父)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비단 그 문장뿐만 아니고 글의 사상 또한 애독할 만하며 그 사람됨과 학문, 그리고 절행은 일대의 명류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즉시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그의 가정에서 유고(遺稿)를 구하라 하였다. 그러나 사화 이후 거의 전부 산실(散失)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겨우 천백(千百)에 하나 둘 정도였다.
○十三年戊寅
1518년 무인 (중종 13년, 선생 사후 20년)
春二月庚辰有 旨錄用子孫
<1518년> 봄 2월 경진(11일) : 자손을 등용하는 교지 내리다.
上御朝講語及黨錮副提學趙光祖對曰桓靈之時朝廷無公論故宦官乘時煽動然非特亂世而已宋仁宗賢主也司馬光輩猶不得免於黨目盖自古小人欲斥君子必以黨字羅織然後人主信聽得售其術也我朝 成宗好賢納諫一時善士謂以堯舜之治可復致也盡言不諱不避權勢凶險大臣陰懷憤懣及遇廢主卒逞積憾仁人善士無遺者至于戊午甲子而極矣又曰小人芟夷君子終亦不保其身亦云愚哉古人言欲加之罪何患無辭欲䧟君子亦豈無可執之辭乎
주상이 아침 강(講)에 임했을 때 당고(黨錮)에 관하여 말이 미치자 부제학 조광조(祖光祖)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한나라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 조정에 공론이 없는 까닭으로 환관(宦官)들이 그 기회를 타서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난세(亂世)때뿐만 아니었습니다. 송나라 인종(仁宗)은 어진 임금이었는데도 사마광(司馬光) 등이 오히려 당인(黨人)이란 명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대개 예로부터 소인들이 군자를 배척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당(黨)’자로서 죄를 엮은 다음 다른 사람과 임금이 믿어 행하도록 하는 것이 술책이었습니다. 아조의 성종(成宗)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시어 한때 착한 선비들이 요순의 치세가 가히 다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극진한 간언에도 꺼리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세도를 휘두르는 흉험(凶險)한 대신들은 분하고 답답한 심정을 은밀히 품고 있다가 연산주(燕山主)를 만나게 됨에 그동안 쌓였던 한을 모두 풀었습니다. 어진 사람과 착한 선비는 한 사람 남김없이 무오(戊午)와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 다 없앴습니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소인들이 군자들을 풀 베듯 베어 없앴습니다만 종내 그들 역시 일신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대접이 돌고 도는가 봅니다. 옛사람의 말에 ‘죄를 씌우려 들면 무슨 화근인들 꾸며댈 말이 없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昔李承健爲翰林嫉金宗直金馹孫之徒書于國史曰南方之人師弟子互相推譽自作一黨李克墩常曰將吾直筆來其後某之徒比肩就戮又曰記事直筆史臣之職也戊午之變亘古所無金馹孫首被慘禍而尙無顯贈以慰九泉之寃以副士林之望請加封贈 上曰已贈直提學仍問有子否光祖以繼子大壯對 命 宣陵參奉作窠調用
예전에 이승건(李承健,1452∼1502)이 한림을 하고 있을 때 김종직, 김일손 등을 시기하여 국사에 ‘남쪽 사람들이 스승과 제자들 서로가 칭찬하고 밀어주어 스스로 일당을 꾸몄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극돈이 항상 말하기를 ‘언젠가는 내손에 직필이 들어올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후 아무개의 문도들은 나란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직필로서 기사(記事)함은 사신(史臣)의 직분이옵니다. 무오의 변은 옛날까지 더듬어 올라가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써 김일손은 이 변에서 으뜸으로 참화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현저한 증작으로서 항천(黃泉)의 원혼을 위로한 바 없습니다. 사림의 소망에 부응하여 봉작을 더해주시기 청하나이다.”라고 했다.
이에 주상은 “이미 직제학(直提學)으로 증직하였다.” 하고 이어서 “자식이 있는가?” 물음에 광조(光祖)가 자식이 없어 조카 대장(大壯)으로 계자(繼子)하였다고 아뢰니 주상은 선능(宣陵) 참봉 자리를 비우고 거기에 그를 등용하라 명하였다.
夏四月庚戌淸道章甫建紫溪祠
<1518년> 여름 4월 경술(5월12일에 해당) : 청도의 유생들이 자계사(紫溪祠)를 세우다.
本郡士林慕先生之遺風以先生故宅雲溪精舍爲祠宇名之曰紫溪盖取先生被禍時溪水血流之異也
본군(本郡)의 사림이 선생의 유풍을 흠모하여 선생의 옛집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사우(祠宇)로 쓰기로 하고 이름을 ‘자계사(紫溪祠)’라 하였다.
이 이름은 선생이 화를 입을 때 앞 시냇물이 혈류(血流)로 바뀐 이변이 있었는데 거기서 취한 것이다.
○十四年己卯
1519년 기묘 (중종 14년, 선생 사후 21년)
春二月乙巳刊行文集成
<1519년> 봄 2월 을사(3월12일에 해당) : 문집(文集)을 간행하게 되다.
大有搜輯先生遺稿得若干卷付諸本祠經始鋟刊觀察使金慕齋安國捐廪以相其役爲文以序之
대유(大有)가 선생의 유고를 찾아 모았는데 몇 권을 얻어 본사(本祠)에 주어 침간(鋟刊 : 목판에 새겨 발간하는 일)을 시작했다.
관찰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넉넉하게 출연(出捐)하여 이 일을 도왔고 또 서문을 지었다.
○世宗皇帝嘉靖二十七年{我 明宗大王三年) 戊申
1548년 무신 (명종 3년, 선생 사후 50년)
春正月辛丑年譜草本成
<1548년>봄 1월 신축(24일) : 연보 초본을 완성하다.
大有就先生手筆日記參以見聞編爲年譜○右卽我先季父濯纓先生年譜也先生以間世之才遊佔翁之門力探性理之淵源優入文章之閫域與寒喧一蠹朱溪爲道義交再思忘軒爲文章交東峰秋江安亭篠叢爲山林交茂豊秀泉爲音律交觀於先生之所從遊可以知先生之大略矣先生天分豪邁倜儻性度剛正簡亢禀公輔之器抱經濟之策
대유는 선생의 수필일기에 따르고 견문한 바를 참고하여 선생연보를 편찬하였다. 지금까지 위에 적은 것이 바로 나의 돌아가신 계부 탁영 선생의 연보이다.
선생은 세상에 드문 재주를 타고나시어 점옹문(佔翁門)에서 교유하면서 성리학의 연원을 힘써 탐구하시었으며 문장 영역에서는 뛰어나셨다. 한훤(寒暄,김굉필1454∼1504), 일두(一蠹,정여창1450∼1504, 주계(朱溪,이심원1454∼1504)와는 도의(道義)의 교유를 하였으며 재사(再思,이원?∼1504, 망헌(忘軒,이주1468∼1504)과는 문장(文章)의 교유, 동봉(東峰,김시습1435∼1493, 추강(秋江,남효온(1454~1492), 안정(安亭,?), 조총(蓧叢,?)과는 산림(山林)의 교유, 무풍(茂豊,이총?~1504), 수천(秀泉,이정은?)과는 음률(音律)의 교유를 하시었는데, 이러한 교유하신 바를 보면 가희 선생의 대략을 알 수 있다.
선생은 호탕하고 영매(英邁)하며 뜻이 크고 기개가 있는 성격과 도량을 타고나셨고 강직하고 정직하며 대범하고 고고한 천품을 타고나시어 재상의 그릇(公輔之器)이었고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經世濟民)할 지혜를 품고 계신 분이었다.
早歲立揚際遇 成廟期回世道致君堯舜正色立朝盡言不諱奸黨已多有側目而㫄伺者不幸邦運中否弓劒忽攀二三奸凶變亂史筆其禍至於滔天仁人志士之痛愈久而益深鳴呼惜哉鳴呼慟哉迨我 中廟改玉之初首洗誣寃亟復官爵旣貤贈之又廟亭之於是而先生之道學文章氣節行義炳人耳目如日星江漢矣
이른 연세에 입신양명할 즈음 성종(成宗)을 만나 세상의 도의를 회복하고 요순의 반열에 오르게 하려고 기약하셨다. 입조하여 정색을 하고 극언을 다하심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는데 한편으로 간사한 무리들은 눈을 흘기고 기회를 엿보며 벼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불행히도 나라의 운수가 중도에 막혀 기강이 풀어지니 홀연히 기회를 타고 두세 간흉이 사초 일로 변란을 일으켰고 그 화는 하늘에 사무치어 어진 이와 뜻있는 선비들의 통분을 더욱 오래, 더욱 깊게 하였다. 아, 애석하도다! 아, 애통하도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초기에 맨 먼저 모함으로 입은 원통함이 씻어지고 곧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중직이 더하여졌다. 또 이때 묘(廟)에 향사(享祀)하게 되었다. 선생의 도학과 문장, 기절과 행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에 해와 별과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다.
不肖亦以先生之故坐謫湖南才賜環又屢經士禍杜門屛居者四十年餘今已老且死惟先生之實蹟泯沒不傳是懼謹取先生手筆日記之掇拾於禍燼之餘者若干片修述之參以見聞所及編年成譜付諸卯君藏之巾衍以俟後之立言君子云爾旹
불초 또한 선생의 일로 연좌되어 호남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겨우 풀려났고 또 누차의 사화(士禍)로 두문불출, 숨어 산 지 40여 년, 이제 이미 늙었고 곧 죽을 것인즉 선생의 실적(實蹟)이 없어져 후세에 전하지 못할까 오직 이것이 걱정일 뿐이다. 그래서 사화 때 불타고 남은 선생의 수필일기를 수습하여 이를 취하고 힘 미치는 데까지 견문한 바를 참고로 약간의 부분은 다듬어 기술하여 편년체로 연보를 완성하였다.
이제 이를 동생에게 주어 상자에 간직하였다가 훗날 의견을 세상에 발표할 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릴 뿐이다.
嘉靖二十七年戊申之 竹醉日從子大有謹識于雲門之愚淵精舍
1548년 무신(명종 3년) 죽취일(竹醉日;음력 5월 13일) 종자(從子) 대유가가 운문의 우연정사(愚淵精舍)에서 삼가 기록하노라.
神宗皇帝萬曆六년{我 宣祖大王十一年} 戊寅
○ 1578년 무인 (선조 11년)
秋以紫溪祠爲書院
<1578년> 가을 : 자계사(紫溪祠)를 서원(書院)으로 하다.
本郡儒林因祠宇之重修廣其規模爲書院
본군 유림에서 사우(祠宇) 중수를 계기로 그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으로 세웠다.
○三十六年戊申
1608년 무신 (선조 41년)
春重建紫溪書院
<1608년> 춘 : 자계서원(紫溪書院) 중건(重建)하다.
壬辰倭奴之變祠宇燬于兵燹至是士林合謀重建並享節孝公三足堂兩先生
임진왜란 때 병화로 훼손된 후 지금에 이르러 사림(士林)에서 의논을 모아 중건하게 되었다. 1615년 을묘(광해군 7년)에 절효공과 삼족당 두 선생도 함께 향사하게 되었다. <상향축문(常享祝文)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찬하였다.>⇒추록
○毅宗皇帝崇禎甲申後十七年{我 顯宗大王元年} 庚子
1660년 경자 (현종 1년)
春二月慶尙道儒生李光鼎等上疏請書院 賜額
<1660년> 봄 2월 : 경상도 유생 이광정(李光鼎) 등이 서원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를 올리다.
同春堂宋文正公浚吉時爲吏曹判書因儒疏 筵奏先生道學文章精忠直節冠冕一世而遭遇燕山慘被史禍合施院額以豊士林 上曰已令該曹禀處當待回啓施行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당시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유생들의 상소에 인하여 경연에서 주청하기를, “선생의 도학과 문장, 정충과 직절이 일세의 으뜸이었는데 연산(燕山)을 만나 참혹한 사화를 입었습니다. 원액(院額)을 내리시어 사림을 교화함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라고 했다. 주상이 대답하기를, “이미 해당 조(曹)에 명하여 조처를 품신하라 하였으니 회계(回啓)를 기다려 시행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夏六月禮曺回 啓請 賜額蒙 允
<1660년> 여름 6월 : 예조에서 사액(賜額)을 청하는 회계(回啓)를 올려 주상의 윤허를 바다.
判書宋浚吉參判尹絳參議趙復陽正郞金壽興等回 啓 上批曰三賢之實行名節予所尊仰特爲賜額大提學李一相次知
판서 송준길(宋浚吉), 참판 윤강(尹絳,1597-1667), 참의 조복양(趙復陽,1609~1671), 정랑 김수흥(金壽興,1626∼1690) 등이 회계(回啓)를 올렸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삼현(三賢)의 실행(實行)과 명절(名節)에 대하여 나는 존경하고 추앙하는바 특별히 사액(賜額)을 베푸노라.”라고 하였다.
○十八年辛丑
1661년 신축 (현종 2년)
夏四月特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仍 宣額紫溪書院 遣承旨賜祭
<1661년> 여름 4월 : 특별히 명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에 증직하고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사액(賜額)하고 승지(承旨)를 보내 사제(賜祭)하다.
大提學以紫溪擬額號以進 上命知製 敎工曹參議李殷相製進侑文 遣左承旨洪處亮往祭之
대제학이 액호(額號)를 자계(紫溪)로 상신하니 왕은 지제교 공조참의 이은상(李殷相)으로 하여금 유문(侑文)을 짓게 하고 승지 홍처량(洪處亮)을 보내어 향사하게 하다.
○二十一年甲辰
1664년 갑진(현종 5년)
春三月配享木川竹林祠
<1664년> 봄 3월 : 목천 죽림사(竹林祠)에 배향(配享)하다.
祠在縣東一遠東之磻谷初寒岡鄭文穆公逑得石刻竹林二字於磻谷感朱夫子精舍之名因其地建祠享朱夫子至是學者以先生刊行小學集說校正綱目大有功於斯文亦杖屢遊息之地也遂奉以綴享
사당은 현동(縣東) 일원(一遠) 동쪽의 번곡(磻谷)에 있다. 처음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번곡에서 ‘죽림(竹林)’ 두 자가 새겨진 석각(石刻)을 발견하였는데, 주자의 정사 이름과 같음을 알고 거기에 사당을 세워 주(朱)선생을 향사(享祀)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학자들이 선생께서 『소학집설(小學集說)』 간행과 강목교정(綱目校正) 등 사문(斯文;儒敎文化)에 끼친 공이 크고 또한 그곳이 관직을 사직하였을 때 휴식하던 곳임을 알고 마침내 같이 받들어 향사(享祀)하게 된 것이다.
○謹按土人士相傳以爲祠卽先生所居竹林精舍之遺址而石刻二字亦先生之筆云竊意寒岡之建祠但知其偶合於滄洲精舍之舊名而不知爲先生依仰朱子之遺蹟及其配享也亦但以有功斯文而不能闡揚先生宗師朱子之本意豈非文獻無徵先生事實泯沒不傳而致然歟然其建祠也必於是配享也必於是若有使之然者尤可見先生之道未嘗不顯於冥冥之中矣
삼가 살피건대 토착 인사들이 전하는 바로는 사당을 세운 곳은 선생이 거처하던 죽림정사(竹林精舍)의 옛터이고 석각의 두 글자 역시 선생이 쓴 것이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강(寒岡)이 사당을 세운 것은 다만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옛 이름과 우연히 합치한 것만 알고 선생이 주자(朱子)를 의탁하고 추앙하여 생긴 유적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또한 배향하게 되었을 때도 다만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것만 알았지 선생이 주자(朱子)를 으뜸 스승으로 추앙한 본의는 널리 밝혀져 전해지지 못했다. 문헌을 없애고 징표가 없는 마당에 선생의 사실(事實)이 어찌 민몰(泯沒)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겠는가?
그러나 사당의 건립이 이제 이루어졌고 배향 또한 이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필연을 있게 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선생의 도가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타남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二十五年戊申
1668년 무신 (현종 9년)
夏五月重刊本集成
<1668년> 여름 5월 : 문집(文集)을 중간(重刊)하다.
先生文集刊本久多刓缺搢紳章甫合謀重刊尤菴宋文正公時烈撰序文
선생의 문집 간행본이 오래되고 많이 닳아서 관원과 유생들이 함께 의론을 모아 중간하였는데 그 서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이 썼다.
○三十三年{我 肅宗大王二年}丙辰
1676년 병진 (숙종 2년)
春忠淸道儒生疏請竹林祠 賜額蒙 允
<1676년> 봄 : 충청도 유생들이 죽림사(竹林祠)에 사액(賜額)토록 상소하여 윤허 받다.
本縣章甫以鄕賢鄭寒岡逑黃朽淺宗海追配仍陳疏請額
본 현 유생들이 향현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공과 후천(朽淺) 황종해(黃宗海,1579~1642)공을 추가로 배향하고 곧 청액의 소를 올렸다.
秋 宣額道東書院 遣承旨賜祭
<1676년> 가을 : ‘도동서원(道東書院)’ 이란 현판이 하사되고 승지가 파견되어 향사(享祀)하다.
○八十二年{我 英宗大王元年}乙巳
1725년 을사 (영조 1년)
秋九月神道碑銘成
<1725년> 가을 9월 : 신도비명 완성하다.
屛溪尹先生鳳九宰本郡與士林謀刻石樹之墓道禮曹參判尹圃菴鳳朝撰弘文館副提學金退漁堂鎭商書本道觀察使兪知守齋拓基篆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8)선생이 본 군 군수로 있으면서 사림과 의논하여 비석을 새겨 묘도(墓道)에 세우기로 했다. 비명은 예조참판 포암(圃菴) 윤봉조(尹鳳朝,1680∼1761)가 찬하고 홍문관 부제학 퇴어당(退漁堂) 김진상(金鎭商,1684∼1755)이 쓰고 본도 관찰사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1691∼1767)가 전(篆)하였다.
一百八十七年{我 純祖大王三十年}庚寅
○ 1830년 경인 (순조 30년)
春二月慶尙道儒生金相閏等疏請先生及節孝公三足堂兩先生 贈諡未徹
<1830년> 봄 2월 : 경상도 유생 김상윤(金相閏) 등이 선생과 절효공, 삼족당 양 선생의 시호(諡號)를 소청하였으나 관철하지 못하다.
秋八月三道儒生李浚等疏請三先生 贈諡 命下吏曹禀處
<1830년> 가을 8월 : 삼도(三道)의 유생 이준(李浚) 등이 세분 선생의 증시(贈諡)를 소청하였는데 주상은 이조(吏曹)에 조처를 품신하라 명하였다.
九月吏曹回 啓請議大臣 判書徐能輔回 啓依 允
<1830년> 9월 : 이조에서 회계(回啓) 올리기를 대신회의에서 의결하도록 주청하였다. 판서 서능보(徐能輔,1769∼1835)가 윤허를 받다.
冬十一月大臣獻議請先 贈先生爵諡蒙 允
<1830년> 겨울 11월 : 대신들이 의논한 결과 선생의 증작과 증시를 먼저 하도록 건의, 윤허를 받다.
領議政南公轍左議政李相璜右議政鄭晩錫請加 贈賜諡又 啓以濯纓先宜許施之意上允之
영의정 남공철(南公轍,1760~1840), 좌의정 이상황(李相璜,1763∼1841), 우의정 정만석(鄭晩錫,1758∼1834)이 증작을 더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또 탁영선생을 먼저 시행함이 마땅하다는 의견도 같이 계진하여 윤허를 받았다.
十二月加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世孫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
<1830년>12월 :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춘추관 및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세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으로 증직되다.
○一百八十八年甲午
1834년 갑오 (순조 34년)
夏六月 賜諡文愍
<1834년> 여름 6월 : ‘문민(文愍)’으로 시호(諡號)를 내리다.
博聞多見曰文使民悲傷曰愍原任奎章閣直提學趙雲石寅永撰諡狀太常議諡以文愍文簡文貞擬報吏曹入 啓蒙 點
‘견문이 깊고 넓으심에 일컬어 文이요 백성들로 하여금 슬프고 상심하게 하였으니 일컬어 愍이다).’ 이 시호는 규장각 전 직제학을 한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1782~1850)이 지었다. 태상(太常;제사와 諡號 일을 맡은 관청)에서는 문민(文愍), 문간(文簡), 문정(文貞) 3개안을 의논하여 이조에 보고하였고, 이조에서 결국 임금으로부터 문민(文愍)으로 낙점을 받았다.
○一百八十九年{我 憲宗大王元年} 乙未
1835년 을미(헌종 1년)
夏五月延諡 上遣禮官賜祭
正郞張龍八行
<1835년> 여름 5월 : 선생 시호(諡號)를 배수하다. 주상은 예관으로 정랑(正郞) 장용팔(張龍八)을 파견 하여 시호를 내리고 제를 지내게 하였다.
○一百九十五年 戊戌
1838 무술(헌종 4년)
春正月重刊文集成
<1838년> 봄 1월 : 문집 중간을 완성하다.
戊辰後孫垽以先生文集舊本有遺漏文字使族孫再玉往性潭宋先生煥箕添入遺文校正編次丁亥趙雲石按嶺南聞而跋之始刊行
무진년(1808년)에 후손인 은(垽)이 선생 문집 구본에 누락된 글이 있어 족손(族孫) 재옥(再玉)으로 하여금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 선생에게 보내 빠진 글을 보태어 넣고 편집(編輯) 차례도 교정하게 하였다. 또 정해년(1827년)에 영남관찰사인 운석 조인영(趙寅永, 1782~1850)에게 발문을 청하여 받아 간행을 시작하였다.
○二百二十九年{我 當宁九年} 壬申
1872년 임신(고종 9년)
冬十月改修墓貞夫人金氏返祔
<1872년> 겨울 10월 : 정부인 김씨(金氏) 묘를 반장(返葬)하여 개수하다.
貞夫人墓在於木川鵲城山至是返祔于先生墓右從地形也
정부인 묘는 목천 작성산(鵲城山)에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수야산 선생 묘 오른편에 이장하였는데 지형에 따른 것이었다.
<翌年竪碣 : 그 이듬해에 비석을 세웠다.>⇒追錄
二百三十一年甲戌
○1874년 갑술 (고종 11년)
夏六月新刊年譜成
先生年譜之藏于家已三百餘年始用活字印行于世
<1874년> 여름 6월에 새로 간행하는 연보가 완성되었다. 선생의 연보는 집안에서 보관해 온지 300여년이 지났건만 비로소 활자를 사용하여 간행하니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참고 : ⇒변경 추록된 내용
夏四月先生年譜始現于三百年後自京中先刊
여름 4월, 선생의 연보가 처음 나타난 지 300년 후에 서울에서 먼저 간행하였다.
秋七月十七日請先生前 配安人禹氏追 贈貞夫人
가을 7월 17일 선생의 전부인인 안인우씨를 정부인(貞夫人)에 증직하기를 청하였다.
冬十一月本郡士林會于紫溪排任重刊
겨울 11월 본 군의 사림들이 자계사에 모여 교정하고 다시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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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譜跋>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 연보발문)(1)
鳴呼濯纓先生精忠大節有足以撑宇宙光日月而士林之哽涕齋恨至屢百年靡已余先祖恭肅公於先生同師而罹史案故尤悲之切而慕之篤焉
아! 탁영선생의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충성과(精忠) 위대한 절개는 우주와 하늘의 빛을 지탱하기에 충분함이 있다. 사림이 목이 메이고 눈물을 흘리는 한을 경험한 지가 수백년이 지났다. 일찍이 나의 선조이신 공숙공(趙益貞, 1436∼1498)이 선생과 같은 스승을 모셔서 곤란함을 겪으신 일을 생각하니 더욱이 비참하고 애절하며 그리움이 더해진다.
嗟呼先生事行非不尡輝史秉而遺文實蹟百不存一於禍燼之餘幸有三足公所著年譜始出于今先生之出處本末可按而如雲仍合謀將入梓屬余文
아! 선생의 행적이 역사에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남겨진 글이나 사적이 사화의 여파로 백가지 중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다행히 삼족당공이 저술한 연보가 비로소 지금 나타나 선생의 일에 대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후손들이 의논하여 장차 인쇄하기로 하고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噫先生以天挺英豪經世才猷學有淵源蓄積甚富蜚英 明時庶幾展布萬一而 邦運中否禍至滔天命耶時耶丹書旣雪 貤贈賜諡又廟享之 朝家崇報可以無憾
아! 선생은 하늘로부터 받은 빼어난 귀인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재주로서 학문을 꾀하고 근본이 있고 축적된 풍부한 재주로 세상이 밝을 때는 나라안에 펼치고 떨쳤다. 화가 하늘에 까지 흘러넘쳤을 때의 붉은 글은 이미 치욕을 벗었으며 이에 더하여 시호를 내리고 또 사당에 배향하고 조정에서는 은덕을 갚았으니 서운함은 없어졌다 할 것이다.
而 頒額之文袞褒煌煌前後儒賢所發揮炳若日星余何敢贅言而特因尊仰之誠竊以托名爲幸云爾
그리고 반포된 현판의 글에는 임금의 칭찬이 빛나고 있고 전후의 선비들의 훌륭한 글들이 해와 별과 같이 많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군더더기 같은 말을 덧붙이겠는가마는 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살며시 나타내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上之十一年甲戌重陽後學豊壤趙成夏謹跋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중양(2월) 후학 풍양 조성하[1]근발
[1]趙成夏; 1845(헌종 11)∼1881(고종 18). 조선 말기의 문신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 연보발문)(2)
濯纓先生與余先祖再思堂公爲道義交同遊畢齋之門同被戊午之禍世之論史禍之慘者莫不痛寃而悲憤况以兩家之裔講百世之好者耶
탁영선생은 나의 선조 재사당공(李黿, ?∼1504)과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었고 점필재(김종직) 문하에서 같이 수학하셨으며 무오의 화 또한 같이 입으셨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화의 참상은 원통하고 슬프고 분하기가 더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하물며 영원히 우호관계를 강구해야 할 양가의 후예로서야 그 슬픔이 어떠하겠는가?
噫先生道學之純粹文章之宏博言議之正大見識之高明槩見於名碩撰述之文南秋江曰希世之才廟堂之器曹南溟曰生有凌霜之節死有通天之寃華人稱之以東國昌黎斯已盡之更何贅焉
아! 선생의 도학은 순수하고 문장은 웅장하고 넓으며(宏博) 언론은 정대하고 식견이 고명하셨음은 유명한 분들의 저술에서 대강 볼 수 있다. 추강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쓰기를 “세상에 드문 재사(才士)요 재상의 그릇(廟堂之器)”이라 했으며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살았을 때에는 서릿발보다 매서운 절개가 있었고 사후에는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있었다.” 라고 했다. 또한 중국 사람들은 동국의 창려(韓藰, 768~824, 당나라의 문인)라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지난 일인데 다시 군말을 붙여 무엇 하겠는가.
先生遺集之行于世者止若干編間經兵燹存者無幾殆同鄧林之一枝崑山之片玉若其請復昭陵三疏可以建天地不悖與日月爭光而見漏遺集年譜又從而佚焉
선생은 유집을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 몇 편에 그치었는데, 그 간 병화를 겪고 남은 것이라고는 등림(중국 襄陽縣의 큰 숲)의 나무한가지(一枝)요 곤산(곤륜산, 중국 북쪽의 산)의 한 조각 옥이라고나 할까? 거의 없었다. 소릉(昭陵, 문종의 정비, 단종의 생모)의 복위를 청하는 세 번의 상소는 가히 천지의 도리를 바로 세우고 일월과 다투어 빛날 일인데 만약 유집과 같이 연보에도 누락되었다면 아주 묻히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近因其後孫晋炯家藏之年譜出而三疏具焉乃先生猶子三足堂所手輯而編錄者此寔先生行治本末之一部悖簡也
최근에 그의 후손인 진형(晋炯)의 집에서 보관해 오던 연보가 나옴으로써 세 번의 상소를 찾게 되었는데, 이는 곧 선생 조카 삼족당공이 손수 편집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는 실로 선생의 정치행적 본말의 일부로서 (그 내용이) 도타우면서도 간명하다.
第其世級寢遠雲仍零替而斯譜之保有今日若有先蔭之攸庇先生之直聲義烈其將不泯於千百代之下吁其盛矣
다만 세대가 점차 멀어지고 후손들이 가난해져서 이 연보를 오늘날까지 보유만 하고 있었다. 만약 선조들의 음덕이 있다면 선생의 곧은 소리(直聲)와 의롭고 장렬함(義烈)은 후세에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참으로 훌륭하시도다.
謹按年譜 中廟改玉洗寃復爵問金某有嗣否趙靜庵對以金某無嗣以從子大壯奉祀特 命調用由寢郎典邑宰 先朝褒寵固已赫然
연보를 삼가 살펴보니 중종반정 후 억울한 죄를 씻어 주시고 작위를 복권하여 주시며 주상이 묻기를 “김모(김일손)는 사자(嗣子)가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니 조정암(趙靜菴;조광조)이 대답하기를 “김모는 후사가 없어서 조카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봉사케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해다. 임금은 곧 특명을 내려 침낭(寢郎:능원관리 관원)으로 등용케 하였고 인하여 고을 수장(守長)까지 하시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옛 임금(先朝)의 포상과 은총은 매우 혁혁하였다.
純祖朝庚寅請諡疏復以定嗣告職由於年譜之未現而攷實之未著也
순조 경인년(1830년)에 시호를 내려달라는 상소를 다시 올릴 때 후사를 정하고 관직을 내려 줄 것을 아울러 주청했는데, 이는 당시 연보가 출현하지 않았고 또 사실을 깊이 상고하여 밝히지 않은 이유이었다.
今玆家乘有足徵信參互原集亦有所補漏而訂謬者卽未可以一家之私藏少之也余竊爲先生幸重以爲斯文幸矣本孫昌潤甫亟謀登榟要余識其後余不敢以不文辭而托斯譜亦與有幸焉云爾
이제 여기 가승(가문의 역사)이 있어서 사실의 징표로써 족하고 여러 자료를 비교하여 살핌으로써 원집(文集)도 또한 누락된 것을 보완하고 틀린 곳을 정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한 집안의 사사로운 소장(所藏)의 공이 적지 않다 하겠다. 내 곰곰이 생각하니 이는 선생을 위해 다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문(斯文:유교계)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본손 창윤(昌潤)씨가 급히 인쇄를 의논하고 나에게 발문을 요청하여 왔는데, 서투른 글임에도 감히 사양하지 아니한 것은 이 연보에 의탁하고 참여하는 것이 다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月城後學李龍雨謹跋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월성 후학 이용우 근발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연보발) (3)
戊午之禍尙忍言哉濯纓金先生以畢翁高弟道學文章冠冕一世職掌史事惟直筆是信賊子懼而吾道賴而扶焉
무오의 화는 차마 말 못할 일이다. 탁영 김선생은 점필재의 제자(高弟)로서 도학과 문장이 일세의 으뜸이셨고 국사를 관장하는 직무에 있어서는 오직 직필로써 올바르게 밝히시어 불충한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였으니 우리 도(道:유교)가 힘을 입고 어려움을 견디며 유지(扶持)되었다.
邦運不幸大禍撗流先生首被東市之慘當時名賢碩德誅竄相繼學舍肅然士氣沮敗至今談者膽掉而髮竪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큰 화가 가득히 흘러넘쳐 선생이 첫 번째로 동시(東市)의 참화를 입으시고, 당시의 이름나고 덕있는 선비(名賢碩德)들이 연이어 처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으며, 학사(學舍)는 쓸쓸하여졌고 선비들의 사기는 허물어 졌었다. 지금에 와서도 이 말을 하는 사람은 화가 치밀어 간담이 떨기고 머리끝이 선다.
鳴呼先生挺天鍾之氣早聞爲學之大方與寒喧一蠹諸老先生義同道合得千載不傳之緖動合規矩發言成章立朝讜直不避權貴反爲克墩輩之所擠陷參天橡樟一斫斯倒天不欲平治天下而然歟先生之早被登庸非幸也抑不幸耳
아! 선생은 하늘이 내린 정기를 타고나시어 일찍이 대가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으시고 한훤(寒喧;김굉필, 1454~1504), 일두(一蠹;정여창, 1450∼1504) 등 선배[1] 선생과 더불어 의기를 같이하고 도를 함께 하시어 천년동안 한번도 없던 좋은 인연(계통)을 얻으시었다. 그의 거동은 법도에 합치하고 발언은 문장을 이루며 조정에 들어가서는(立朝) 이치에 맞게 직언하시어 권세있고 지위높은 사람들의 반대를 피하지 않으시었다. 그리하여 이극돈(李克墩;1435∼1503) 무리들의 모함에 빠져 하늘에 닿을 거목이 한번 찍어 넘어지는바 되고 말았으니, 이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지는 것을 하늘이 원하지 않으심인가! 선생의 조기 등용(登庸)이 다행이 아니라 정말 불행일 뿐이었다.
[1]김일손의 생몰은 1464~1498
先生猶子三足堂公手錄先生年譜一糾(弓+冫)藏之也衍先生之師友淵源立朝奏疏居家孝友等嘉言善行無不畢載與本集尤詳備矣
선생의 조카 삼족당공(김대유)이 선생의 연보 한권을 지어 보관하여 선생의 사우(師友)관계의 근원과 조정에 들어가서(立朝) 주청하고 상소를 올린일, 가정 안에서의 효도와 우애 등 아름다음 말과 선한 행동이 두루 실리지 않은 것이 없으니 문집과 더불어 더욱 소상하게 갖추어졌다.
其中 中廟朝靜菴先生之建白 除其嗣子爲 宣陵郎以酬其危忠直節者大爲後世衛道者勸而新經大禍惟文字是懼子孫流落江湖矣恢公起廢史無如趙先生者訖今三百年餘無一人顯其世者世道之上下亦可慨也
그 가운데 중종 때에 정암(靜菴;조광조, 1482∼1519)선생이 건의하여 사자(嗣子;김대장)에게 선능랑(宣陵郎;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을 지키는 관직)으로 임명한 것은 높은 충성심과 곧은 절의에 대한 보답으로써 이는 도를 지키려는 후세의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되고, 큰 화를 겪으면서 문자를 두렵게 생각하고 자손들이 여러 곳에(江湖) 흩어져 몰락한 상황을 일신하려는 조치였다. 공의(公議)를 회복하고 더렵혀진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있어서 조선생과 같은 분은 다시는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300여년이 되었으나 그 당시와 같은 사람 한 사람 나오지 않았으며 세상의 도덕 또한 상하할 것 없이 개탄스러운 지경이다.
不佞遊宦泮邸日先生後孫昌潤甫千里踵門泣而告曰此乃三足堂公手錄年譜而今始出於春川族姪晋炯家藏天也夫將得名公大人之言惟不朽是圖祖寒喧者於是役也不可無言可言者又莫如子也盍識其尾
재주 없어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 하루는 반저(泮邸;성균관)로 선생 후손 창윤(昌潤)씨가 천리 길을 달려와 문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족당공이 손수 기록하신 연보인데 지금에야 비로소 춘천에 사는 조카뻘인 진형(晋炯)의 집에서 보관하던 것이 출현되었으니 참으로 천행이다. 이에 명공대인의 좋은 말씀을 얻으려 하니 생각하건대 이 계획은 길이 빛날 일이요 한훤당(寒喧堂)을 조상으로 모신 사람이 이 일에 한 말씀 없을 수 없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또 그대만한 사람이 없다. 어찌 끄트머리에 한 말씀 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雙手擎讀不獲辭迺言曰先生之蹟於是備矣三足之功於是大矣子之家發矣而是書基之矣乎集例有年譜爲開卷第一義亟謀剖劂公諸世也
이에 두 손 받들어 읽고는 사양할 수가 없어 내가 말하기를 “선생의 행적이 여기에 빠짐없이 수록되었으니 삼족당공의 공이 매우 크다. 그대의 가문이 발전하는데 이 서책이 한 계기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문집의 예가 연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책을 펴내야 할 첫째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하루속히 간행을 도모하여 온 세상에 공포하여야 할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瑞興後學金錫輔謹跋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서흥 후학 김석보 근발
濯纓先生年譜後叙(탁영선생연보 후서) (1)
余嘗讀濯纓先生遺集有可恨者二可疑者亦二焉復 昭陵一疏先生之大節也見於朝野僉載及 莊陵誌中者其蹟可据
나는 일찍이 탁영선생의 유집(遺集)을 읽고 한 되는 점 두 가지와 의문되는 점이 또 두 가지 있었다. 소릉복위(昭陵復位)에 대한 첫 번째 상소는 선생의 대절을 온 조야에 보여 준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장릉지(莊陵誌) 중에 실려 있어 그 행적을 알 수 있다.
而疏本無傳焉是可恨也四十八詠 成廟所以寵予也必當賡進而但錄其跋詩什不槪見此又可恨也
그런데 소장의 본문이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한이 되고 48영(詠;시)은 성종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갱진(賡進 : 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지어 올리는 것)한 것인데, 지금은 다만 그 발문만 수록되어 있고 시는 다 볼 수 없으니 이 또한 한 되는 일이다.
先生之遭慘禍蓋以錄吊義帝文故也是作也在佔畢齋先生韋布之時先生雖柄史管何以載此文於國乘也大賢作爲必有意義而有未敢知也
선생이 당한 참화는 대체로 조의제문을 기록했기 때문인데 이는 점필재(佔畢齋;김종직,1431~1492)선생이 가난한 선비시절(韋布)에 지은 것이다. 한데 선생이 비록 국사를 관장하고 계셨지만 무슨 까닭으로 이 글을 국사에 실었는지? 현명한 선비가 그렇게 한 것에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었을 것이나 감히 알 수가 없다.
先生雖無血胤伯氏直提學公有子四人長子三足堂賢而幹家豈忍使先生不祀忽諸然而神道碑及文集序文皆有無嗣之歎是又可疑也余以是四者懷恨齎疑者宿矣
또 선생은 비록 혈윤(血胤:낳은 아들)은 없으나 형님인 직제학공(김준손)이 네 사람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삼족당공(김대유)이 어질고 집안일을 주관하였으니 어찌 차마 선생의 제사를 받들게 하지 아니 했겠는가? 그런데 신도비와 문집서문에 다 같이 후사가 없음을 한탄하는 글이 있으니 이 또한 의문스러운 점이었다. 나는 이 네 가지 문제를 가지고 의아해한지 오래되었다.
今年夏因事在京日金斯文天翼與其宗君淸道昌潤春川晋炯訪余於頖舍䄂示一冊子曰此吾濯纓先祖年譜也將付剖劂氏而願得子一言余愕貽曰先生年譜何自有之而今乃云爾也昌潤指晋炯而言曰吾與此族俱祖濯纓而距今十餘世不相聞知似此遺墨藏弆於彼久矣而今始得見甚矣吾宗之熸也不肖等竊不勝愴幸之私不量工費亟圖所以刊布也
그런데 금년 여름 일이 있어서 서울에 체재하고 있을 때, 유교의 선비(斯文)인 김천익(金天翼)이 그의 종친인 청도의 창윤(昌潤)씨와 춘천의 진형씨(晋炯)와 같이 반사(泮舍;성균관)로 나를 찾아와 소매속의 한 책자를 보이면서 “이것은 우리 탁영선조의 연보이다. 장차 인쇄하러 보낼까 하는데 그대의 한 말씀을 얻고자 한다.” 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묻기를 “선생의 연보가 어디에 있었기에 지금에야 말하는가!” 라고 했더니 창윤씨가 진형씨를 가리키며 “나와 이 종친은 탁영을 조상으로 모시는데 지금까지 10여 세대가 지나도록 서로를 알지 못했다. 이 유묵(遺墨)은 저 사람(진형)이 소장하고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얻어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우리 일가가 쇠잔한 탓이다. 불초등이 남몰래 슬픔과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비용이 얼마나 들든지 간행하여 배포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晋炯備述其古其古笥世傳之由因出示其舊本果塵蠹古冊也余未及辭謝而急於一見得以擎翫焉乃先生從子三足堂公手劄本之以先生日記參之以耳目所逮先生之始終本末無不該備於乎異哉
진형씨가 오래된 그 낡은 상자가 전해진 유래를 자세히 말하면서 구본(舊本)을 꺼내 보이는데 과연 먼지가 앉고 좀이 친 고책(古冊)이다. 나는 미처 사양하지 않고 급하게 한번 얻어서 받들어 보니, 선생의 조카 삼족당공이 선생의 일기를 기본으로 하고 보고들은 바를 참고하여 손수 간단하게 기록한 것이다. 선생의 처음부터 끝가지의 여러 가지 일들이 두루 갖추어 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정말 기이하다.
生就其所嘗疑恨者攷之則 成廟庚戌先生在館草史錄弔義帝文至戊午禍作先生進爰辭有曰史所以記君上之善惡人臣之忠幹垂勸戎於後世者也臣師之作此文實有感於 魯山事而臣之編此欲以示公論於千載也先生之言已盡矣有非後學所敢贅也
먼저 일찍이 의문되고 한 되던 곳을 살펴보니 성종 경술년(1490년)에 선생이 사관(史館)에 있을 때 초록에 조의제문을 실어 마침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선생이 여기에 덧붙여 한 말이 역사라는 것은 임금의 선악과 신하들의 충성심등을 기록하여 그 줄기가 드리워져 후세사람들에게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의 스승이 지은 이 글은 실제로 노산군(단종)의 일에 대한 느낌으로서 신이 이를 편찬하여 기록하는 것은 영원토록 일반적이고 공통된 의견으로서 나타내고자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였다. 선생의 말씀은 다 지나가고 없어졌으나 후학으로서 감히 군더더기 말을 할 바 못된다.
其請復 昭陵則聯劄一獨疏二而年月官啣錯錯可攷疏辭皆明白剴切激昻感慨令人三復而涕下永有辭於天下萬世者也四十八詠不但賡詩有之並與 成廟庸作之雲章而燦然俱載何其盛也惟以卷糾{弓+冫}太重別爲一冊在焉
소릉복위를 청한 일은 연차(聯箚: 여러 사람이 연대하여 올리는 약식 상소) 한번, 독소(혼자 올리는 상소) 두 번이었는데, 올린 연월과 올린 사람의 직함 들을 하나하나 알 수 있고, 소장에 실린 말씀은 모두 명백하고 아주 적절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이 복받치고 사무치게 하여 세 번씩이나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천하 만세에 영원히 남을 말씀이다. 48영(詠)은 비단 시 뿐만이 아니라 성종이 지은 고귀한 글(雲章)도 찬연히 함께 실려 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 책은 매우 귀중하므로 별도로 한 책을 만들었으면 한다.
至若嗣續則庚申七月二十七日先生詳闋之日也淑人金氏召從子三足堂告之曰吾今死矣願以汝弟大壯奉汝季父祀又托以祔葬遺骸言訖痛哭更衣脩然而逝至 中廟戊寅靜菴趙文正公爲先生筵奏請封贈 上曰已贈矣仍問有子否靜菴以嗣子大壯對仍 命 宣陵參奉作窠調用於是乎
대(代)를 이음(嗣續)에 있어서는 경신년(1600년, 연산군 6년) 7월 27일 즉 선생 탈상일에 숙인 김씨가 조카 삼족당을 불러 이르기를 “나도 이제 죽을 것인즉 원컨대 너의 동생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너의 계부 제사를 받들게 하여다오. 또 한 가지 부탁은 <내가 죽거든> 유해를 계부 옆에 부장하여 주기 바란다.” 라고 하시고 통곡한 다음 옷을 갈아입으시고는 서거하셨다. 중종 무인년(1518년)에 정암(靜菴) 조문정공(趙文正公;조광조)이 선생을 위하여 증작을 주청하였을 때 임금이 이미 증직하였다 하시고 이에 묻기를 자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니 정암이 대장으로 후사를 이었다고 대답하였더니 임금은 곧 명하여 선능참봉(宣陵參奉) 자리에 등용하게 하시었다.
昔之所疑恨者段段昭晰怳然若發蒙蔀而覩白日矣其餘本集中所無而此譜中所有者多至數十條莫非可驚司欽可尙可異之蹟則覽者當自得之而至今談先生者無貴賤無賢愚仰之若日星山斗者有以也
예전에 의심되고 한 되던 점이 하나하나 분명해지니 마치 덮개를 열고 밝은 햇살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외에도 본집(本集) 가운데는 없으나 이 연보 가운데 있는 것이 대단히 많아 수십 조항에 이른다. 행적은 놀랍고 공경스러우며 고상하고 기이하지 않음이 없어 보는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선생을 말하는 사람은 귀하거나 천하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를 막론하고 해와 별, 태산과 북두성 같이 우러러보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夫鳴呼此譜之作在於 明廟戊申而埋沒於塵箱敞簏之中者歷年三百二十七世十有三而始出於今日其顯晦之奇直與航頭之見古文尙書無異
아! 이 연보를 지은 것이 명종 무신(1548년)년 이었는데 먼지 앉고 헤어진 상자 속에서 327년, 13세대를 묻혀 있다가 오늘 비로소 출현하였는데, 세상에 나타나고 감추어짐(顯晦)의 신기함이란 바로 대항두(大航頭)가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발견한 것과 다를 바 없다.[1]
[1]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대항두(大航頭, 큰 뱃머리라는 뜻의 지명)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었다는 말이나, 이 고문상서는 위조라는 설이 있다.
噫古文尙書出而王范所補之舜典馬融所疑之泰誓不廢而自廢則自今以後中世所撰附錄之掇拾斷爛於龍蛇之後者自當勿論而一從此譜爲正可也
아! 고문상서가 나타나자 왕범(王范)[1]이 보충한 순전(舜傳)과 마융(馬融)[2]이 의심한 진서(秦誓)는 없애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졌다. 지금 이후로는 중간의 선조세대가 편찬한 부록 즉 선생이 돌아가신 후(龍蛇之後)에 조각조각 모여진 것에 대해서는 의당 가타부타 하지 말아야 하고 이 연보를 올바른 것으로 삼아 한결같이 이에 따름이 옳으리라.
[1]왕범(王范); 북송(北宋) 시대에 어진 재상이었던 왕단(王旦)과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2]마융(馬融); 79~166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학자
抑又有一說焉先生嗣子旣蒙錄用之典而至宰郡縣其後再傳若三傳或以遺逸稱或以道義文章著濯纓之世蓋未艾也
또 일설이 있으니 선생의 사자(嗣子;김대장)가 은혜를 입고 벼슬을 하여 군과 현의 수령을 지냈고 그 후 2대 또는 3대를 전하여 오면서 혹은 유일(遺逸)로써 일컬어지고 혹은 도의와 문장으로 유명해지기도 하였으니 탁영의 세계(世系)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夫何一經兵燹分散流離居者有廣陵之歎行者有雍門之悲所以建院竪碑及文集重刊之役皆士林尸之而不待本孫之宣方此可見先生之德八人之深而諸賢文字誤認爲無嗣者職此之故也嗟乎中衰之極一至此乎
그러다가 병란(兵亂;전쟁 등)을 거치면서 흩어지고 헤어져 집에 있는 사람들은 광릉(廣陵)[1]의 탄식이 있었고 밖에 다니는 사람들은 옹문(雍門)[2]의 슬픔이 있었다. 그래서 서원을 건립하고 비를 세우고 또 문집을 중간하는 일을 모두 사림(士林)이 주관하고 본손(本孫)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이로서 선생의 덕이 사람들을 깊이 감화시켰음을 가히 엿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여러 선비들이 쓴 글이 후사(後嗣)가 없는 것으로 오인하게 된 근원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아! 중간 세대의 쇠퇴함이 여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1]광릉(廣陵); '광릉'은 양주(揚州)의 옛날 지명. 지금의 강소성 강도현에 해당한다.
[2]옹문(雍門);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거문고의 명인, 옹문주(雍門周. 옹문자(雍門子)라고도 한다. 거문고를 잘 타 맹상군이 그 소릴 듣고 울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凡物之理極則必飛今見金氏諸君子各自其鄕邂逅於京師得此譜於三百餘年之後者已不偶然而得之不日又能合謀鋟榟以廣其傳先生之後其將興矣
무릇 사물의 이치는 극에 달하면 반드시 떨어져 나가게 마련이다. 지금 김씨의 여러 군자들을 만나보니 각자 그들의 고향에서 와서 서울에서 만나 3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이 연보를 얻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의논을 모아 책으로 간행함으로써 그 전승(傳承)을 넓히게 되면 선생의 후손이 장차 흥할 것이다.
斯理也愚於先生所著中興策大統之後必有中衰中衰之後必有中興之說證之矣
이것이 이치로서 선생이 지은 중흥책에 ‘국가 통일의 대업(大統) 후에는 반드시 중간의 쇠퇴함이 있고 중간의 쇠퇴함 뒤에는 반드시 중흥이 있다.’는 설이 바로 이를 증명할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後學驪江李在喜謹撰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후학 여강 이재희 근찬
(후서2, 보형)
人有一善一能爲子孫者莫不欲闡揚以傳於後若夫先祖之道德文章行義事業可以耀後世而無愧則必思所以闡而顯之不俟終日者固性分內一事
사람에게는 한 번의 선으로 하나가 가능해지는 것이 있으니 능히 자손된 자로서는 이를 후세에 전하여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선조의 도덕과 학식과 행의와 업적이 후세에 빛날 수만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나 반드시 생각하고 있는 바가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 일의 성질이 내부의 일이기 때문이다.
竊惟我 濯纓先生佔門高弟也博學鉅文卓節高行載在 國乘赫人耳目而不幸燕山戊午首被慘禍鳴呼尙忍言哉由此而先生之遺藁實蹟散逸殆無餘存矣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탁영선생은 점필재의 수제자로서 학문이 높고 절개와 행동이 탁월하여 나라의 역사책에도 실려 있고 사람들의 이목에도 밝게 빛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에서 그 우두머리로서 참화를 당하였다. 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선생에 관한 것은 없어져 버리고 실제의 자취는 흩어져서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及 中廟改玉特 旨求遺文于家先生從子三足公收拾若干篇以獻晩以先生年譜付諸季氏昌寧公諱大壯而深藏之其微意盖可想焉
또 중종반정 이후에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탁영선생이 남기신 글을 구하라고 하여 선생의 조카인 삼족당공이 몇 편의 자료를 모아서 늦게나마 바치니 선생의 연보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동생인 창녕공 휘대장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것인데 이렇게 깊숙이 간직한 뜻을 대략 상상할 수 있다.
往在戊午三足公父子兄弟俱謫南原旣賜環昌寧公因留月谷而林隱公諱致九卽先生曾孫也自月谷遊學湖西受業于趙文烈公憲時値倭寇大侵避寓嘉林未幾淸道南原盡被賊燹遂隱居于烏樓山中
옛날 무오사화가 있던 해에 삼족당공의 부자형제는 모두 남원으로 유배를 갔었고 먼저 사면을 받고 돌아온 창녕공(대장)이 월곡(月谷)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임은공 휘치구, 즉 선생의 증손께서 월곡으로부터 호서(湖西)로 공부하러 떠나 문열공 조헌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이때 마침 왜구가 침입하여 홍주(洪州) 가림(嘉林)으로 피신하여 거처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도와 남원이 모두 왜적들로 부터 피해를 입어 마침내 오루산(烏樓山) 속에 숨어살게 되었다.
嘗有詩戒子孫曰孤蹤畏約隱山林不說先人只說金爲恐遺文重召禍故敎藏護更深深此乃申先訓也盖自帶方分散之後流離南北不遑寧處旣湖而圻荐遭丙丁之難又渡漢而東守義自靖韜光晦迹子姓子子若不保而仍與二南諸族聲聞永阻世遂不知先生之有是孫吾家之有是祖矣
일찍이 시를 지어 자손들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고종(孤蹤;고독 단신)은 두려워하며 산속에 숨어살되 선조에 대해서 말하지 말 것이며 단지 김(金)자만 말하여도 두려움이 따르니 남기신 글은 소중하나 화를 부를 수 있으니 이것을 깊이깊이 간직하라고 가르쳐라.’ 고 하였으니 이는 선조의 가르침이다. 대개 대방(帶方?)이 분산된 후로부터는 서로 떨어져 남북이 편안하게 살 곳이 없었다. 이미 호서와 경기지방에서 거듭하여 병자년과 정묘년의 난[1]을 만나 또 한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서 의로움을 지켰다(?). 나라가 조용해지고 부터는 이를 감추어 알리지 않고 종적을 감추었으니 후손들이 이를 보존하지 못했고 더욱이 영남과 호남의 친족들이 서로의 소식은 들었으나 세대가 멀어지다 보니 마침내 선생에게 이런 손자가 있었고 우리들에게는 이런 선조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1]병자년(1456년)의 死六臣의 上王복위 모의사건과 정축년(1457년)의 魯山君(단종) 사망사건
<※ 위 문단의 뜻풀이가 어려우므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
今年春家兄晋炯客于漢師聞道州族叔昌潤來赴會闈卽進族次語到三足公所撰 濯纓先生年譜則曰無有矣及閱書中所載乃曰此有前所未聞而今始知者凡四條一則先生元配安人丹陽禹氏之失傳也二則先生諱辰在於七月二十七日而誤認以十七日也三則三足公遵先生繼配淑人禮安金氏遺命使其第二弟昌寧公奉祀而靜菴趙先生 筵奏調用也四則先生復 昭陵三疏不說顚末也
금년 봄에 형님인 진형(晋炯)이 서울에 갔을 때 청도에 사는 아저씨뻘인 창윤(昌潤)씨가 부회(赴會;覆試)에 왔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만나 종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삼족당공이 쓴 탁영선생의 연보에 대해서 말했더니 <창윤씨가 하는 말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하면서 책에 기록된 글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전에 듣지 못했다. 지금 비로소 알게 된 것이 4가지인데 첫째는 선생(탁영)의 첫 부인이 단양우씨라는 것은 전해지지 않았고[1], 두 번째는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 7월27일 인데 17일로 잘못알고 있었고, 세 번째는 삼족당공이 선생의 다음번 부인인 예안김씨[2]의 유언을 지켜 그의 둘째 동생인 창녕공(대장)에게 선생의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고 또 정암 조선생(조광조)이 임금께 주청하여 대장에게 관직을 준 일이며, 네 번째는 선생이 소릉의 복위를 간청한 세 번의 상소에 대한 전말이다.” 라고 하였다.
[1]병조참판을 지낸 우극관(禹克寬)의 女
[2]참봉을 지낸 김미손(金尾孫)의 女
十有三而尙未能布諸人者不料其不傳於二南宗中而惟期祖訓之是守也早知其如此寧不圖所以傳世永後而至于今泯黙已也
13세대가 지났으나 아직 여러 사람들에게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은 영남과 호남의 종중에 <이 연보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며[3] 이는 생각해 보면 선조의 교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일찍부터 <연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와 같이 된 것은(즉 알리지 않은 것은) 정녕 세상에 전하여 영원히 후세까지 알려지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3] 영남과 호남의 종중에서는 이 연보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으나, 이 연보를 가지고 있던 춘천의 진형씨는 ‘영호남의 종인들이 이런 연보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보가 있다고 알릴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는 뜻.
竊意刊事不容少緩卽與謀及剞劂氏因續修建院 宣額貤贈賜諡之前後事實于後以成完譜
곰곰이 생각하면 책으로 간행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은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판각하는 사람과 계획하고 계속해서 사당을 세운 일, 액호를 받은 일, 거듭해서 증작을 받은 일과 시호를 받은 전후의 사실들을 수정한 후 완전한 연보를 완성하였다.
不肖雖不敢以布揚 先蹟自居四百年泯沒之道學淵源貞忠大節庶幾復顯于世則其所慶幸奚但爲一行一能之闡揚而止哉不肖於是深有所愴感焉
불초는 비록 감히 이 연보를 배포하지 못하겠으나 선조의 자취를 드높이고, 돌아가신 후로 400여년 동안 잊혀져 사라진 도학의 연원과 곧고 큰 충절을 모두 회복하고 세상에 나타내려 함이니 이러한 소임이 어찌 경사스럽고 다행이 아니겠는가. 다만 한번 이를 행함으로서 조상을 드높이고 자랑하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불초는 이것에 아주 슬프게 느끼는 바가 있는 바이다.
崇禎紀元後五甲戌季夏十三代孫普炯謹識
숭정기원후 5갑술(1874년) 계하(6월)13대손 보형근지
(후서3, 창윤)
不肖奉閱先祖文集未嘗不慨歎飮泣盖當戊午之禍子孫奔竄於嶺湖之間文蹟盡入於搜沒之中逮夫
불초가 선조의 유집(遺集)을 받들어 열람하면 항상 개탄하고 눈물을 삼킨다. 무오의 화를 당하여 자손들이 호남과 영남 각지에 달아나 숨고 선생의 문적은 모조리 수색되어 압수당하였다.
中廟改玉洗寃復爵特下求遺文之命慕齋金先生按嶺撰序印行而所存者十不能一二且經壬辰之燹又多遺失矣
그러다가 중종반정이 이루어져 억울한 죄가 씻어지고 작위가 회복된 다음 특별히 유문(遺文)을 구하는 왕명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모재(慕 齋) 김안국(金安國) 영남 안찰사가 서문을 지어 인쇄하여 발행하였으나 남은 것이라고는 열에 하나 둘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임진왜란의 병화를 거치면서 또 많은 것들이 없어졌다.
今於赴會之日偶逢春川族姪晋炯卽吾同祖之親也晋炯問曰年譜之漏於原集何也家有 濯纓年譜藏在篋笥鳴呼異哉三百餘年而後始現於今日豈非顯晦有時耶參攷始終乃是三足公所著也先生再朞之日夫人金氏面命三足堂曰願以汝第二弟大壯續汝季父之後言訖而沒
그런데 다행하게도 이번 회시(會試;覆試)에 나온 날 우연히 춘천의 조카뻘인 진형(晋炯)을 만났는데 진형은 나와 선조가 같은 친척이다. 진형이 묻기를 “원집에서 연보가 누락되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집에 탁영연보가 대나무 상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아! 기이하다. 300여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출현되다니 어찌 나타남과 감추어짐(顯晦)이 다 때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하여 살펴보니 삼족당공이 작성한 것이다. <탁영선생이 돌아가시고 1년 후인> 첫 제사 때 부인 김씨가 삼족당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원하건대 너의 둘째 동생 대장(大壯)을 너의 숙부의 후사로 삼아라.’ 고 말을 마친 후 돌아가셨다고 되어있다.
中廟朝經筵次對問金某有子否靜菴趙先生以其嗣子大壯對特除 宣陵參奉 朝家崇報之典如是昭著
중종때에 아침 경연 때 김모는 자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고 물으니 정암 조선생이 대장이 뒤를 이었다고 대답하니 특별히 선능참봉에 임명하셨다. 조정에서 <명신을> 숭상하고 포상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나타났다.
而年譜深晦文獻無徵玆故撰先生事實而或稱無嗣 純廟時請諡之疏復告以從子繼嗣者皆未見年譜而然也就此譜而記實正本不可少緩遂與族姪昆季及遊京族人天翼永薰共謀剞劂以壽傳世若夫道學忠節之卓越有非不肖之所敢贅說謹略記顚末云爾
연보가 어둠 속에 묻혀 있었고 문헌상으로 뚜렷한 증거가 없어 선생의 사실을 찬술할 때 간혹 무사(無嗣)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순조임금 때 <1830년> 시호를 청하는 상소에서 다시 조카 대장을 후로 잇도록 고한 것은 모두 연보를 보지 못한데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 연보(발견된 연보)를 가지고 정본(인쇄본)으로 만드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춰서는 안 될 것이라 드디어 조카(진형)의 형제들과 서울에 사는 친족인 천익(天翼)씨, 영훈(永薰)씨와 논의하여 판각하고 도학과 탁월한 충절을 세상에 전하도록 하였다. 불초가 간략히 일의 전말을 기록하였으나 감히 군더더기 말이 있지 않을지 모르겠다.
聖上卽阼之十一年甲戌季夏後孫昌潤謹識
임금(고종)이 보위에 오르신지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후손 창윤근지
(후서3, 천익)
鳴呼此三足堂公所著濯纓先生年譜也先生之文章節行固已炳烺史策而其學問之實出處之蹟經禍散逸爲後生之所齎恨者久矣何幸今年春始與族從晋炯合得此書于三百年之後泣血盥讀得其所不聞焉
아! 이것은 삼족당공이 저술한 탁영선생의 연보이다. 선생의 학문과 절개있는 행실은 진실로 역사책에 빛나고 있으나 그 학문의 실제 자료들은 화(무오사화와 임진왜란 등)를 겪으면서 흩어지고 없어져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한이 오래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금년 봄에 비로소 조카뻘인 진형으로부터 이 책을 얻고 나니 300여년 후의 일이라 피눈물을 씻고서 들어도 보지 못한 것을 읽어 보았다.
蓋先生之學術本之小學而宗師紫陽實行本之純孝而尙友藍田儀度方嚴有周規折矩之美胸襟灑落有超世出塵之致立志大於經濟後樂先憂制行高於出處難進易退憂世道則必欲興學校而闢異端當言路則必欲進賢能而遠侫人掌史筆而錄弔義帝之文所以扶大倫也
대개 선생의 학문의 근본은 소학(小學)으로서 주자(紫陽, 朱子)[1]를 숭상하여 행실의 근본은 순수함과 효도로서 친구를 위하고 의례의 법도가 엄격한 주례의 규범이 있었다. 형식을 거부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흩어져 떨어지고(?) 경영하고 다스림에 큰 뜻을 세워 나중에는 즐기되 먼저 근심하고 제도와 행실은 나타난 곳이 고상하고(?) 나아가기는 어렵고 물러서기는 쉬운 세상의 도리를 근심하여, 즉 분명히 학교를 부흥시켜 이단을 피하게 하고 언로를 담당하여 현자들을 진출시켜 아첨배들을 멀리하고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조의제문을 실은 것은 이러한 도리 때문이었다.
[1]자양(紫陽);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 즉 주자(朱子, 1130~1200)를 말함. 평릉 주희(平陵朱熹), 단양 주희(丹陽朱熹), 오군 주희(吳郡朱熹), 신안 주희(新安朱熹), 자양 주희(紫陽朱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議廟禮而上復 昭陵之疏所以明大義也且夫請立 魯陵後改撰六臣傳皆足以有辭於天下萬世其精忠大節動天地而撼山岳格言至論質鬼神而光日月此皆他書之所闕而昭載無遺然則求先生之全而得先生之眞者莫此書若也
조정의 회의에서 소릉의 복위를 상소한 것은 대의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고 또 노릉(노산군 단종의 능)을 세우기를 청하고 사육신전을 다시 쓴 것은 모두 천하 만세에 그의 말이 있어 충성과 절개가 하늘과 땅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산을 뒤흔드는 말과 귀신을 질책하는 지론은 해와 달같이 빛나고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책에 기록되어 소상히 실려 있다고 하나 전해지는 것은 없어 선생의 모든 것을 구하고 선생의 진실을 얻는 것이 이 책이 아니겠는가.
淸道宗君昌潤適來漢師遂與共圖壽傳付諸鋟刊雖以不肖之無似亦猥有聞於參訂之役畧掇譜中所錄正學高行淸風峻節後賢之未及發揮者十餘事以備立言君子之栽擇云爾峕
청도에 사는 일가인 창윤씨가 서울로 오게 되어 마침내 같이 의논하여 인쇄하여 전하게 되었다. 비록 불초가 미천하고 함부로 이 연보를 수정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간략하게 연보 속에 이를 기록하여 바른 학문과 높은 행실과 맑은 풍속과 높은 절개 등에 대해서 후세의 선비들이 알지 못하는 10여건의 선생이 하신 일을 준비하여 두니 군자들이 판단하여 선택할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不肖後孫天翼再拜謹識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불초 후손천익 재배근지
(후서5, 영훈)
先生早襲庭訓少負聲望博學宿德爲百代之所宗特立獨行亘萬世而不顧鳴呼痛矣戊午之事尙忍言哉尙忍言哉
선생께서 일찍 계승한 가정에서의 훈계와 젊어서 얻은 명성과 학문과 덕망은 영원히 종친들에게 모범이 되는 바이고 특히 혼자서 행하신 일은 만세를 지나도 다시 볼 수 없다. 아! 원통하다. 무오사화는 차마 말로서 표현할 수 없다.
先生富於文學平日著述不爲不多而慘毁之餘且經兵燹 經筵應製之作師友講磨之文散佚無徵後所蒐輯不無掛漏之嘆寔爲後昆之齎恨千古者而世之相去也已爲三百有餘年于玆矣
선생의 문학에서 풍부하여 저술하신 것이 많을 것이나 무참히 훼손되고 남은 것이 또 전쟁을 거치면서 경연(임금과의 회의)에서 지은 것과 스승과 친구들 간에 배우며 닦은 글들이 흩어지고 없어져 자료가 없으니, 이후에 이것을 모으는데 눈물과 탄식이 없지 아니하다. 후손들이 가진 한은 아주 오래되어 세대가 바뀐 것이 300여년이 지났다.
歲甲戌春幸我族人普炯甫藏弆于鸞飄鳳泊之中者今始出焉乃先生之年譜及四十八詠詩什也寔三足堂公親自校輯而兼有篇終之跋於是乎先生之終始遺蹟略已備矣此豈但一門之慶幸而已哉
갑술년(1874년) 봄에 다행히 우리의 일가인 보형(普炯)씨가 보관해 오던 것이 란표봉박(鸞飄鳳泊)[1]중에 지금 비로소 나타나니 선생의 연보와 48영시이다. 이는 삼족당공이 친히 교정하고 편집하여 몇편으로 만들고 마지막에 발문까지 실은 것으로서 선생의 일생과 유적을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단지 한 가문만의 경사이겠는가.
[1]鸞飄鳳泊(란표봉박) : 헤어지고 흩어진 것을 의미하는 말임. 한유의 구루산시(岣嶁山詩)에 "蚪蝌拳身虀倒披 鸞飄鳳泊拏虎螭"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구루산 신우(神禹)의 비가 산중에 자취를 감춘 것이 마치 난봉이 표박하는 것과 같다는 뜻임.
至若先生之道學文章讜直論議固非後生小子之所敢私自讚揚何敢贅說乎亟謀鋟榟功未數月而告竣後之覽此者庶可以觀感而尊慕焉
선생의 도학과 문장과 곧은 의견은 진실로 후생인 소자가 감히 자찬하여 드높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감히 군더더기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재빨리 인쇄를 결정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완성됨을 보고하니 이후에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다 존경과 숭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後孫永薰謹識
지금임금(고종) 11년갑술(1874년) 계하(6월) 후손영훈 근지
<濯纓先生年譜下卷終>
출처:http://cafe.daum.net/kimcero(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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