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결제를 끝내고 수월이 찾아가 머문 곳이 바로 우번대다. 마하연이 금강산의 복장 이라면 우번대는 지리산의 심장일지 모르겠다 문수가 머문다는 문수봉(차일봉)이 우번대의 주봉이기 때문이다 우번대의 터는 비록 작지만 어우러진 산세며 눈앞에 펼쳐진 전망이 절묘하기 짝이 없는 성지다. 눈이나 비가 내리는 날이면 화엄사에서 울리는 큰 종소리가 바로 곁에서 울리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그러나 기도를 이루려면 아침저녘으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화엄사 종소리가 아니라 우번대 앞에 솟아 있는 석종대에서 울려 퍼지는 돌종 소리를 들어야 한다. " 돌종이 우는 소식 " 이야말로 우번대의 화두다. 우번대라는 이름은 '소가 몸을 바꾼 자리' 라는 뜻으로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라 때였다고 한다. 지리산에 머물던 문수보살은 보살이 법문할때 종 치는 일을 맡아보는 길상(吉祥)동자를 데리고 마을 들길을 걸어갔다. 길상이란 인도말 '만주쉬리'의 뜻말이니, 길상동자란 곧 문수동자와 같은 이름이다. 문수는 앞서고 길상은 뒤에서 가고 있었다. 그때 마을 앞길에는 탐스럽게 익은 조밭이 있었다. 길상은 그 조알곡이 어찌나 고운지 손에 놓고 바라보다 그만 세 알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길상은 아까운 그 알곡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알곡을 자신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를 지켜보던 문수보살이 말했다. "길상아, 너는 이제 소가 되어 세 해 동안 빛을 갚아야겠구나" 그 순간 길상동자는 누런 암소로 변하여, 말없이 밭둑에 앉아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소가 된 길상은 밭주인인 김서방을 따라가 열심이 일했다. 그가 땀을 흘린 밭은 풍년이 들었고 주인은 세해만에 부자가 되었다. 또 이 소가 떨어뜨린 소똥은 밤이 되면 환하게 빛이 났다. 그런 연유로 길상이 소가 되어 일하던 마을 이름을 지금도 방광리라고 부르고 있다. 우번대는 가을 단풍이 한창일 때 이 방광리 어귀에서 올려다보아야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꼬박 세 해를 지낸 날 밤, 잠을 청하려고 누워 있는 주인의 방문 앞에서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렸다. "주인장, 주인장. 내가 세 해동안 일을 해 주었으니, 빛을 다 갚은듯합니다. 이제 나도 집으로 가렵니다. 깜짝 놀란 주인이 문을 열어젖히고 내다보니, 지금까지 집에서 부리던 소가 집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주인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소를 따라 나섰다. 가을 산빛같은 누런 털 위로 맑은 달빛이 스며든 소는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소는 걷고 또 걸어 천은사와 상선암을 지나 우번대에 이르자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벌써 날이 새었는지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김서방은 사방으로 소를 찾았지만 보살의 손처럼 희디흰 산 갈대 숲 속에 작은 띳집 한 채만이 있을 뿐 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김서방은 마침 띳집 앞 바위 위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발견하고 쫏아가 물었다. "어르신, 혹시 소 한 마리 못 보셨습니까?" "그 소는 피곤해서 방에 누워서 자고 있을 것일세, 돌아가는 길에 소 허물을 보거든 그것이나 잘 묻어주게나." 김서방이 방문을 열어보니 과연 노인의 말대로 한 동자가 잠을 자고 있었다. 김서방이 땅에 업드려 참회하고 다시 마당을 돌아보니 방금 있던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집이랑 동자랑 다 함께 말이다. 김서방은 내려가던 길에 죽어 버려져 있는 소를 정성껏 묻어주었다. * * * * * 수월은 이 우번대에서 그해 가을을 홀로 보냈다고 한다. 우번대는 해발 천이삼백 미터쯤 되는 높은 곳에 있는 아주 작은 암자다. 수월은 여기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처음 몇 달쯤이야 쌀 한 말만 짊어지고 가면 살 수 있었겠지만, 뒷날 수월이 생식을 하면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면 수월은 이 우번대에서 생식의 기초를 다졌음직하다. 수월은 날마다 이곳에서 나무할 일도, 밭 갈 일도 없이 혼자 지냈다. 일 없는 들길에서 조 알곡의 빛과 모양에 깜박 물들고 만 길상의업, 자비 수행의 보살행을 통해 삼독이 텅 빈 것임을 깨달아 업에 얽힌 세계를 훌쩍 벗어난 저 길상동자의 설화가 별처럼 빛나고 있는 우번대에서 수월은 틀림없이 밤낮 없는 용맹정진으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깊어진 가을이 겨울 하늘 속에 잠겨가던 어느 날 밤이었다. 우번대 둘레의 산세가 환히 올려다 보이는 방광리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우번대 둘레를 온통 휩싸안고 밝게 타오르는 큰 빛덩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천장암 아랫마을 사람들이 그랬듯이 산불을 끄려고 모두 우번대로 달려 올라갔다. 그리곤 천장암 아랫마을 사람들이 그랬듯이 세상에는 행복의 빛이 정말 있음을 자기들 눈으로 직접 보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 행복한 마을로 돌아왔다. 이 일이 벌어진 뒤 수월은 다시 지리산을 떠나고 말았다. 수월이 뿜어올린 그 엄청난 빛덩어리는 나라를 잃어가는 조선 사람들도, 그리고 이 땅을 빼았은 일본 사람들도 모두 소용돌이치는 가슴을 끌어안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불빛은 빼앗길 것도, 빼앗을 것도 없는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모두에게 밝게 가르쳐준 평화의 빛이 되었으리라. 출처 - 물 속을 걸어가는 달 - 김진태 지음 - 학고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