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문고(仁壽文庫)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인흥), 이곳 남평문씨 세거지(南平文氏世居地)에는 <인수문고(仁壽文庫)>라는 특별한 문고가 있다. 이것은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의 문중문고(門中文庫)인데, 수장하고 있는 장서가 무려 8천 5백여 책(冊)에 이른다. 이는 <인수문고(仁壽文庫)>의 전신인 <만권당(萬卷堂)>과 <수봉정사(壽峯精舍)>에 소장하고 있던 6천 948책과 1975년 이후에 수집한 1천 5백여 책(冊)을 합한 것이라고 한다. 1책이 두세 권 분량이니, 요즘 사용하는 권(卷)으로 환산하면 2만 권에 이르니, 문중문고로서는 정말 대단히 많은 장서를 수장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서원 가운데에 가장 많은 장서를 수장하고 있는 안동(安東)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약 4천4백여 책(대략 1만 권)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인수문고(仁壽文庫)>의 기반이 된 만권당(萬卷堂)은 수봉 문영박(壽峯 文永樸, 1880~1930)이 나라가 망하던 1910년 무렵에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가 강점하여 신식 교육기관을 대거 설립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문씨 집안에서는 일제의 교육기관에 자녀를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문중에서 자녀들을 직접 교육하려고 설립한 일종의 사립학교이자 도서관이 바로 < 만권당(萬卷堂)>이라고 한다. 그는 구입할 책의 목록을 작성하여 대구와 서울을 직접 오가며 구입하였다고 한다.
<인수문고(仁壽文庫)>에서 수장하고 있는 서책 중에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고가의 전집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수입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구한말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 1850~1927, 1908년 중국 망명)이었다고 전한다. 그는<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와 <한사계(韓史棨)>같은 저서를 남기는 등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니, 인수문고에 역사책이 많은 것도 아마 김택영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택영이 중국에서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에 싣고서 대구 인흥리까지 옮겨 왔다고 하니, 경비는 둘째로 치고 그 정력과 의지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하겠다.
<광거당(廣居堂)>과 <수백당(守白堂)>은 남북전쟁(6.25) 때에 다소의 전적 손실과 서화의 피해를 입기도 하였단다. 그 후 문중에서 관리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봉정사 구역 내에 집을 짓고 두 곳의 책을 모두 옮겨 놓고 그 이름을 <인수문고(仁壽文庫)>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흥리(仁興里)에 수봉(壽峯)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문고라는 의미가 되겠다. <인수문고(仁壽文庫)>는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문중문고이며, 민간에서 수장한 장서의 양이나 질적인 측면에서도 으뜸가는 문고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문태갑(文胎甲) 옹은
수봉의 둘째 아들인 문진채의 둘째 아들이니,
바로 인수문고의 전신인 만권당(萬卷堂)의 설립자 수봉의 손자이다.
출처http://m.blog.daum.net/heart2008/7346798
---------------------------------------------------------------------------------------------------------------------------
어제 늦은 오후부터 함박눈이 가득 내려
아침에 남평문씨 인흥세거지 에 눈풍경을 보고싶어 카메라 하나 메고 집을나섰다.
얻었다 한들 본래 있던것
잃었다 한들 본래 없던것
문으로 들어서 본다
담벼락과 나무위의 눈이 소북이 쌓여있다
마침 두루마기를 입고 방문하신 원로하신 분을 만났다.
전남 화순에서 오셨는데
오늘이 80세 생신인데 인수문고를 보고 싶은게
소원이라 하시어 가족분들 께서 모시고 오셨단다.
원로하심에도 불구하고,먼길 찾아 오심에 존경스러웠다.
찿아 오신분은 雲波 徐在豊 님 으로 항일독립유공자 후손 이시다.
한학을 공부하신 분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학문이 깊으신것 같다.
雲波 徐在豊
인수문고 문이 열리고
오래된 서책을 안내받아 보고 계신다
안내하시는 분은 남평문씨 후손으로
서울에서 45년간 사시다가 귀향해서 고향을 지키신다 하셨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책궤에 보관이 되어있다
이중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책들도 있다한다
중국에서 목포까지 배를타고 목포에서 거창-함양- 이곳 대구달성 까지
소달구지를 이용해 보름간 걸려서 도착했다 한다.
민간보유 서책 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도산서원 보다 훨씬 많은 약2만권에 달한다
광거당 에서 亞杣 金佑炅 님 께서 방문객과 함께 우전차를 대접해 주신다
향기가 그윽하니 눈오는날 정취가 더해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
눈덮이 인흥세거지
광거당 뒷길
수봉정사 쪽문을 나서면 높다란 담장길이 나온다.
운치좋은 돌담길
옛것이 고스란히 담긴 이런길이 좋다
오늘은 참좋은 인연으로 좋은분을 만난거 같다
----------------------------------------------------------------------------------------------
↓ 아래 글출처 프로보노 (biryong****)
인흥리에 사는 남평문씨들은 시조가 문다성(文多省)이다.
문다성은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장자못가에 솟은 천길 높이의 바위에서 태어났다는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남평면 풍촌리 장자못가에는 시조가 태어났다고 하는 바위인 ‘문암(文巖)’이 우뚝 솟아 있다. 본관인 남평 역시 문씨들이 나주의 남평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평 문씨의 중시조는 고려말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년)이다. 남평 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인 문세근(文世根) 때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00년 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로 옮긴 것이다.
대구에서 다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 현재의 남평문씨 세거지에 들어와 터를 잡은 것은 문익점의 18세손이자, 문세근의 9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 1812∼1874년) 때부터다. 160년 전인 1840년대 전후에 인흥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흥에 새롭게 터를 잡은 개기조(開基祖)는 문경호다. 입향(入鄕)이라 하지 않고 개기(開基)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1840년대 당시에 인흥 세거지에는 사람이 사는 동네가 없었고, 문경호가 들어오면서부터 처음으로 문씨들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흥은 조선후기 당시 폐사지였다. 원래 고려시대 인흥사(仁興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가 폐사가 된 상태였던 것이다. 인흥사는 고려시대 일연(一然)스님이 11년간이나 머물렀던 사찰이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여기서 작성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의 상당 부분과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인흥사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평문씨의 종손인 문정기(文定基)씨가 살고 있는 집터는 인흥사의 대웅전 자리라고 전해진다.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 이름이 고려정(高麗井)인데, 고려시대 인흥사 시절부터 사용되던 우물이다.
세거지 앞의 밭 가운데 있는 석탑도 인흥사 유물로 전해진다.
---------------------------------------------------------------------------------
↓ 아래글출처:남평문씨 인흥세거지 홈페이지
거경서사 |
인수문고를 건립할 때 같이 지은 열람과 담론의 공간으로 전면 3칸 겹집인 조촐한 규모의 목조건물이다. 그리고 1982년 같은 해에 문고 전면에 4칸의 목조건물로 관리사옥을 함께 지었으며 수봉정사와 문고로 통하는 협문이 각각 나 있다. 이로써 문고 전체의 구도가 짜여지고 광거당 수봉정사 그리고 아홉 대소가의 제택과 더불어 오늘의 인흥으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 |
|
고려시대석탑 |
세거지에는 옛날 절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우물과 돌유구등이 남아 있고 1910년 광거당을 새로 지을 때 사용한 초석이나 기단석, 그리고 장대석의 상당수가 근처에서 출토 퇸 옛 인흥사에서 쓴돌로 알려져있다. |
|
광거당 |
광거당은 1910년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부자가 지은 집이다.
건물에 사용된 화강암 기단석(基壇石)과 초석 등은 인흥사지(仁興寺地)에서 나온것이며
주요목재는 춘양목(春陽木)을 사용하였다.1820년 전후로 인산재의 선대인 무일(武一)이 지은
용호재라는 제사를 지내려고 지어진 공간이였지만 이것을 헐고 후에광거당 내에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들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보면서 토론하는 문화 공간이 되었다. |
|
목화시배지 木化始培地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위치하며 1997년 6월 10일에 개관하였다. 대지는 4천 6백평이며 전시관 2개가 있다. 전시관에는 무명옷을 짜는 과정과 당시의 생활풍습을 전시하고 있다. 1전시관에는 무명옷을 짜는 베틀과 기구들이 전시되고 2전시관에는 조선시대 의류가 전시되고 있다. |
|
문암文巖바위 |
민속자료 32호
시조 무성공이 태어난 문암바위는 민속자료 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암각을 지어 문암을 보호하고 있다. 문씨 종중에는 시조의 묘소가 전해지지 않아 문암바위를 성역화하고 매년 3월 20일(양) 제향을 지내고 있다.
|
|
문익점 효자비 |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 ~ 139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碑石, 비석이 세워진 곳은 원래 문익점 선생이 살던 마을이었다. 문익점이 모친상을 다하여 시묘侍墓를 하고 있을 때 왜적이 침범해 와 모두 피난을 갔지만, 문익점만이 홀로 여막을 지키며 평소와 같이 곡哭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이를 보고 감동하여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고 써서 세웠기에 일대가 모두 평안하였다한다. 1393(우왕 9)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
|
문익점文益漸 신도비神道碑 |
경남문화재자료 제53호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적고 있다. 문익점 신도비는 1934년(순조 34) 경기도의 강화도 물 가운데서 돌을 캐내 각 고을 성주들이 협력하여 등짐으로 3년여를 운반하여 마을 도로변에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실화로 보이는 불로 인하여 비각이 타버렸으나, 1943년 조선총독부와 경상남도에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
|
배산임수 |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地勢)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설에서 주택이나 건물을 지을 때 이상적으로 여기는 배치이다. 주택이나 마을의 입지조건으로 가장 우선시 되는 게 배산임수다.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물을 보는 지세다. 여기에 남향까지 보태어지면 최상이다. 배산임수 지형은 뒤가 높다. 이 때문에 그 땅은 자연히 안정감이 있게 되고, 햇볕과 바람의 순환도 용이하게 된다. |
|
보당고택 |
인흥세거지 안에서 두번쨰로 지어진 집이다. 1880년대 초 죽헌 문달규의(1832~1905)아들 후은 문봉성(1854~1923)의 살림 집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당고택은 원래 단출한 초가집이었으나, 1936년 초가를 헐고 새로 와가로 지은 집이 지금의 보당고택이다. 후은 문봉성은 장손 외당에게 맏집을 잇게 하고 나이 어린 보당과 함께 살면서 보당고택이라고 한다. |
|
사부 |
옛날 책의 분류 방법으로 경부ㆍ사부ㆍ자부ㆍ집부로 구성되어 있다. 경부는 당시 교과서에 해당되는 경전을 가리키며, 사부는 역사책을 뜻한다. 자부는 중국 옛 성현들의 여러 주장과 기술,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흥미로운 책을 말하며, 집부 학자들의 개인 문집을 뜻한다. |
|
사죽헌 |
1936년 지금의 보당 고택을 새로 지을 때 둘째 아들인 휘 현채와 셋째 아들 휘 혁채의 살림 집을 함께 지어 각각 분가시켰다. 이 집은 둘째인 현채의 주택으로, 동서로 긴 장방형의 대지에 4칸 규모의 ㅡ자형 안체와 4칸 규모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안마당 서쪽에 뒤주 채가 별도로 배치되어 있다. 사죽헌은 사랑채와 대문에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가리게 담을 별도로 쌓아 세거지 안에서 남녀 생활 공간의 구분이 제일 명확하다. |
|
삼우당실기 |
6권 3책, 목활자본, 1819년(순조 19) 후손 문계항이 간행한 것을 1900년 단성 신안사재에서 중간한 것이다. 권1은 문익점의 저작으로 시 6수, 소 3편이다.
이 중 1390년(공양왕 2)에 상소한 경오봉사는 중앙에 학당, 지방에는 향교를 건립하고, 상제는 불교식 백일상제를 타파하고 주자의 가례에 따라 가묘를 설치할 것이며, 그 외의 부분도 <주자가례>를 행할 것과, 원의 복식인 호복을 폐지하고 중화의 복식을 따를 것 등을 주장한 글이다.
이 내용들은 모두 고려말에 논란이 되던 것으로 조선 건국 후에도 주요 정책과제였다. 고려말 성리학계의 동향과 당시의 정치현안, 유학자로서의 문익점의 위치를 보여주는 글이다. 권 2 이하는 모두 부록으로 남효온이 쓴 목면화기 이하 역대의 사제문, 만사, 행장, 연표, 세계 등을 수록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으며,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여러 이본이 전한다. |
|
수봉고택 |
후은의 둘째 아들 수봉의 제택이다. 세거지안에 지어진 살림 집 중에 처음으로 지어진 큰 규모의 기와집으로, 광거당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 죽헌종택과 더불어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의 대표적인 반가인 수봉고택은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와 함께 아래채, 방앗간채까지 구성되어 있다. 정면 1칸 측면 2칸인 대문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수봉고택은 초당 채와 곡간 채가 헐렸고, 최근에 사랑채의 수리와 번화작업이 있었으나 대체로 원형대로 유지되고 있어, 100년을 헤아리는 연륜으로 죽헌종택과는 또 다른 옛멋을 느낄 수 있다. |
|
수봉정사 |
수봉정사 문봉성의 아들인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1880~1930)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다. 문영박은 만권당을 설치한 인물로,남평문씨 마을의 현재 모습을 완성한 사람이다. 수봉정사는 현재 남평 문씨 마을 맨 앞에 있는 건물로, 문영박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죽은 뒤 1936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여기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제2의 광거당 역할을 하였다. |
|
약산가 |
죽헌종택 왼쪽에 위치해 있다. 약산가는 1924년 수봉의 둘째 아들인 약산 휘 진채의 현 위치로 분가할 때 지었다고 한다. 세거지 안에서 다섯번째로 세워졌던 집으로, 집 이름도 약산 휘 진채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약산가는 대문간채, 안채, 사랑채 고방채, 아래채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룬다.
현재 약산 - 인곡 희윤(仁谷 凞胤)- 석기(碩基)에 이르러 3대째 이어지고 있다. |
|
유당가 |
유당가는 유당 휘 형채의 호를 다서 부르는 이름이다. 1925년 수봉의 셋째 아들인 유당 휘 형채가 분가해 나오면서 지은 살림 집으로 약산가 바로 전면에 자리잡고 있다.전면 4칸의 안채와 애래채 그리고 3칸반의 사랑채를 갖춘 ㄷ자형으로 잘 다듬어진 건물이었다.불행히도 1950년대 후반에 화재로 1960년대 중반
사랑채를 중건,1984년에 안채도 새로 짓게 되었다.동남형 방향으로 대문이 나있으며 약산가 전면에 위치하여 좌우 담장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당가는 공간 사용도 짜임새가 있고 구조 결구가 견실한 유당가의 이런 공간 구성으로 인하여 이 가옥은 쓰임새가 좋고 품격이 높으며, 단출하고 단아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들의 꼿꼿한 기개를 느끼게 하는 집이다. |
|
인수문고 |
광거당과 수백당에 만 여권의 전적과 여러 종류의 고서화가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움으로 중간에 제대로 살피고 돌보지 못한 때도 있었고 특히 6.25동란 때는 다소의 손실이 있었는데 서화의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그래서 의논하여 수봉정사 구내에 잘 보이는 곳을 택하여 집을 지어 두곳의 책을 옮겨 함께 소장하고 인수문고라 이름하였다. 인수문고는 국내에서도 보기 힘든 전적문고이며,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문중문고의 하나이다. 민간의 전적장서로서는 질과 양적인면에서도 으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
|
인흥사 |
인흥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이 분명치 않으나 최근학계에서는 통일신라 때의 절로 아마도 임진왜란 떄나 혹은 다른 원인으로 소실된 후
복원이 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달성군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세거지 일대에서 출토된 와당(瓦當)을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 때의 것으로 나오고 있다고 한다)현재의 많은 답사와 연구를 통해 인흥사가 원래는 인홍사(仁弘寺)라는 절이었으며 삼국유서를 쓴 일연이 '아주오래된 절'로 기록하고 있다.1450년대에는 군자와 미곡 등 많은 물자를 비축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수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수복,시굴에 의해 인흥사의 유구 일부를 볼수 있게 되었다. |
|
인흥서원 |
고려 고종부터 충숙왕에 걸쳐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을 지낸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시조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인 노당(露堂)추적(秋適·1246~1317)의 위패를 봉안한 곳. 낮은 산자락에 동쪽을 향한 인흥서원은 전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한 강당과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사당인 문현사와 동재·서재·외삼문인 숭봉문를 비롯해 서원 앞의 신도비각 등 5동의 소박한 건물로 서원철폐령의 화를 피해 창건 당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대원군위 서원철폐정책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서원으로,특히 이 곳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명심보감판본 31매가 소장돼 있다. |
|
정전법 |
땅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해서 여덟 농가가 나누어 부치게 하고 가운데 땅은 공동으로 지어 조세로 바치게 하던 중국 하.은.주 시대대의 토지제도를 말한다. |
|
조산무더기 |
돌을 쌓아 올린 조산유적으로 산천의 비보적인 역할과 마을 수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처로도 이용되며 성황당이나 누적단과는 또 다르다. 보통 평면이 둥글며 20~30cm의 자연석으로 축단을 쌓고 있고, 거의 예외없이 조산 중앙에 1~2m전후의 장대석(장대석이기 보다는 돌기둥이나 솟대에 근사하다)을 세워놓는데 이는 천계와의 교감을 위한 중개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인흥마을에서는 조산무더기가 동네를 알리는듯 초입에 직경 510cm 높이 270m규모로 원추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정월 보름달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
|
죽헌종택 |
남평문씨南平文氏 대종 택으로, 1872년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의 개기開基 시조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가 가장 먼저 지은 집이다. 처음에는 초가로 지어졌으나 남평문씨본리세거지가 인흥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대외적으로도 인정받게 되면서, 외당은 남평문씨의 종택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1972년 수봉과 함께 초가를 헐고 와가로 새로지었다.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된 죽헌종택은 남평문씨의 종택답게 세거지의 다른 어느 제택에 비견해 규모와 구도가 뛰어나다. 곳간과 헛간까지 합해 10칸 규모인 죽헌종택은 종택 안 대문 바깥 왼쪽에 옛 인흥사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고려정이 지금도 남아있다. 원래는 ㅁ자형의 집구도였으나 바깥마당에 있던 초당채와 안마당 왼쪽에 있던 아래채가 없어져 현재 ㄷ자형의 구도를 띄는 죽헌종택은 사랑채가 1976년 화재로 소실되어 그해에 원형대로 복원한 것 외에는 큰 변화없이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다. |
|
중곡서고 |
인수문고 경내에 주로 20세기에 간행된 한국학 중심의 책 약 5,000권을 장서하고 있는 중곡서고가 병설되어 있다. 19세기까지의 전적문고인 본 문고에 보첨하는 것을 목적으로 모은 책들이며, 외형은 3칸 한옥이나 역시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이며 거경서사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1993년에 지었다. |
|
천수봉 |
비슬산의 북서쪽으로 한소맥을 형성,한봉우리를 거치는데 이봉우리가 천수봉이다.그리 높지는 않으나 보기에도 넉넉하고 후덕스러움을 지닌 산이다.둥근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생긴 금형의 산이며 부처가 좌선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
|
추적신도비 |
신도비는 추적을 비롯하여 추황ㆍ추유ㆍ추수경등 4인의 추계추씨 인물들을 배향하는 인흥서원 경내에 있다. |
|
춘강가 |
1933년 수봉의 막내아들인 춘강 휘 기채의 살림 집으로 지어졌다. 탄당가의 전면에 위치해 있는 춘강가는 광거당으로 가는길을 사이에 두고 수봉정사와 거경서사가 있다. 이 제택은 건물 키가 훌쭉하게 높지 않고 단조롭고 소박하다. 일반적으로 대문간채, 안채, 사랑채, 아래채등등의 구조로 이루어진 반가와 달리 대문간채,ㅡ자형 안채, ㅡ자형 사랑채로 구성되었다. ㄴ자를 엎은 형태의 평면 구조로, 세거지안의 제택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규모다. |
|
충선공 문익점 |
1398년에 70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한 문익점은 생전에 나라가 진흥하지 못하고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며,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한 세 가지 점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삼우당으로 지어 불렀다. 고려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공민왕때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하였다. |
|
충숙공 문극겸 |
1122년(예종 17)∼1189년(명종 19).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자는 덕병(德柄)이다.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간 뒤 의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언관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내시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궁녀들과 추문을 일으키며,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뇌물을 챙기는 등 문란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음을 직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왕이 대노하여 상소를 불사르고 처벌하려 하였으나 언관을 내침은 불가하다는 주위의 건의에 따라 황주판관으로 강직되었고, 이어 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충직한 신하를 거듭 외직으로 내치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이 있어 내직인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고, 이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다른 문신들과 함께 붙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평소 문극겸의 충직함을 알아본 무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오히려 재상으로 중용되고 상장군을 겸하였다. 태부소경(太府小卿)이 되었을 때 왕이 근신들과 밤늦도록 연회를 베풀자 문극겸은 “이것이 바로 먼저 왕이 폐위된 원인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습니까?”라며 직언하였다. 한편 지난 번 무신 난 때 쫓겨난 의종이 남쪽으로 떠나면서 한탄하기를 “내가 진작 문극겸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욕을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 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
|
탄당가 |
수봉의 넷째 아들이 탄당 휘 노채가 분가하면서 1940년에 지은 주택이다. 세거지의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탄당가는 광거당과 천수봉에서 내려오는 도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일제 말기에 지은 집이나 아주 단단하게 지어져 지금도 빈틈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탄당가는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사대부 선비의 기품을 읽게한다. |
|
학자수 |
수봉정사 옆에 수령 300년의 노거수이며 ‘문경호나무’라고 이름 지어진 희화나무이다. |
|
혁채가 |
사랑마당의 조경이 특히 눈길을 끄는 혁채가는 보당의 셋째 아들 혁채의 살림집으로, 1936년에 보당고택, 현채가가 지어질 때 함께 세워졌다고 한다. 대문채, 안채, 사랑채, 고방채등 네 채의 건물이 네모 난 마당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혁채가는 세거지 안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전형적인 ㄷ자형 평면구조의 집이다. |
거경서사 |
인수문고를 건립할 때 같이 지은 열람과 담론의 공간으로 전면 3칸 겹집인 조촐한 규모의 목조건물이다. 그리고 1982년 같은 해에 문고 전면에 4칸의 목조건물로 관리사옥을 함께 지었으며 수봉정사와 문고로 통하는 협문이 각각 나 있다. 이로써 문고 전체의 구도가 짜여지고 광거당 수봉정사 그리고 아홉 대소가의 제택과 더불어 오늘의 인흥으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 |
|
고려시대석탑 |
세거지에는 옛날 절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우물과 돌유구등이 남아 있고 1910년 광거당을 새로 지을 때 사용한 초석이나 기단석, 그리고 장대석의 상당수가 근처에서 출토 퇸 옛 인흥사에서 쓴돌로 알려져있다. |
|
광거당 |
광거당은 1910년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부자가 지은 집이다.
건물에 사용된 화강암 기단석(基壇石)과 초석 등은 인흥사지(仁興寺地)에서 나온것이며
주요목재는 춘양목(春陽木)을 사용하였다.1820년 전후로 인산재의 선대인 무일(武一)이 지은
용호재라는 제사를 지내려고 지어진 공간이였지만 이것을 헐고 후에광거당 내에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들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보면서 토론하는 문화 공간이 되었다. |
|
목화시배지 木化始培地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위치하며 1997년 6월 10일에 개관하였다. 대지는 4천 6백평이며 전시관 2개가 있다. 전시관에는 무명옷을 짜는 과정과 당시의 생활풍습을 전시하고 있다. 1전시관에는 무명옷을 짜는 베틀과 기구들이 전시되고 2전시관에는 조선시대 의류가 전시되고 있다. |
|
문암文巖바위 |
민속자료 32호
시조 무성공이 태어난 문암바위는 민속자료 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암각을 지어 문암을 보호하고 있다. 문씨 종중에는 시조의 묘소가 전해지지 않아 문암바위를 성역화하고 매년 3월 20일(양) 제향을 지내고 있다.
|
|
문익점 효자비 |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 ~ 139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碑石, 비석이 세워진 곳은 원래 문익점 선생이 살던 마을이었다. 문익점이 모친상을 다하여 시묘侍墓를 하고 있을 때 왜적이 침범해 와 모두 피난을 갔지만, 문익점만이 홀로 여막을 지키며 평소와 같이 곡哭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이를 보고 감동하여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고 써서 세웠기에 일대가 모두 평안하였다한다. 1393(우왕 9)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
|
문익점文益漸 신도비神道碑 |
경남문화재자료 제53호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적고 있다. 문익점 신도비는 1934년(순조 34) 경기도의 강화도 물 가운데서 돌을 캐내 각 고을 성주들이 협력하여 등짐으로 3년여를 운반하여 마을 도로변에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실화로 보이는 불로 인하여 비각이 타버렸으나, 1943년 조선총독부와 경상남도에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
|
배산임수 |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地勢)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설에서 주택이나 건물을 지을 때 이상적으로 여기는 배치이다. 주택이나 마을의 입지조건으로 가장 우선시 되는 게 배산임수다.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물을 보는 지세다. 여기에 남향까지 보태어지면 최상이다. 배산임수 지형은 뒤가 높다. 이 때문에 그 땅은 자연히 안정감이 있게 되고, 햇볕과 바람의 순환도 용이하게 된다. |
|
보당고택 |
인흥세거지 안에서 두번쨰로 지어진 집이다. 1880년대 초 죽헌 문달규의(1832~1905)아들 후은 문봉성(1854~1923)의 살림 집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당고택은 원래 단출한 초가집이었으나, 1936년 초가를 헐고 새로 와가로 지은 집이 지금의 보당고택이다. 후은 문봉성은 장손 외당에게 맏집을 잇게 하고 나이 어린 보당과 함께 살면서 보당고택이라고 한다. |
|
사부 |
옛날 책의 분류 방법으로 경부ㆍ사부ㆍ자부ㆍ집부로 구성되어 있다. 경부는 당시 교과서에 해당되는 경전을 가리키며, 사부는 역사책을 뜻한다. 자부는 중국 옛 성현들의 여러 주장과 기술,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흥미로운 책을 말하며, 집부 학자들의 개인 문집을 뜻한다. |
|
사죽헌 |
1936년 지금의 보당 고택을 새로 지을 때 둘째 아들인 휘 현채와 셋째 아들 휘 혁채의 살림 집을 함께 지어 각각 분가시켰다. 이 집은 둘째인 현채의 주택으로, 동서로 긴 장방형의 대지에 4칸 규모의 ㅡ자형 안체와 4칸 규모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안마당 서쪽에 뒤주 채가 별도로 배치되어 있다. 사죽헌은 사랑채와 대문에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가리게 담을 별도로 쌓아 세거지 안에서 남녀 생활 공간의 구분이 제일 명확하다. |
|
삼우당실기 |
6권 3책, 목활자본, 1819년(순조 19) 후손 문계항이 간행한 것을 1900년 단성 신안사재에서 중간한 것이다. 권1은 문익점의 저작으로 시 6수, 소 3편이다.
이 중 1390년(공양왕 2)에 상소한 경오봉사는 중앙에 학당, 지방에는 향교를 건립하고, 상제는 불교식 백일상제를 타파하고 주자의 가례에 따라 가묘를 설치할 것이며, 그 외의 부분도 <주자가례>를 행할 것과, 원의 복식인 호복을 폐지하고 중화의 복식을 따를 것 등을 주장한 글이다.
이 내용들은 모두 고려말에 논란이 되던 것으로 조선 건국 후에도 주요 정책과제였다. 고려말 성리학계의 동향과 당시의 정치현안, 유학자로서의 문익점의 위치를 보여주는 글이다. 권 2 이하는 모두 부록으로 남효온이 쓴 목면화기 이하 역대의 사제문, 만사, 행장, 연표, 세계 등을 수록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으며,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여러 이본이 전한다. |
|
수봉고택 |
후은의 둘째 아들 수봉의 제택이다. 세거지안에 지어진 살림 집 중에 처음으로 지어진 큰 규모의 기와집으로, 광거당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 죽헌종택과 더불어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의 대표적인 반가인 수봉고택은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와 함께 아래채, 방앗간채까지 구성되어 있다. 정면 1칸 측면 2칸인 대문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수봉고택은 초당 채와 곡간 채가 헐렸고, 최근에 사랑채의 수리와 번화작업이 있었으나 대체로 원형대로 유지되고 있어, 100년을 헤아리는 연륜으로 죽헌종택과는 또 다른 옛멋을 느낄 수 있다. |
|
수봉정사 |
수봉정사 문봉성의 아들인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1880~1930)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다. 문영박은 만권당을 설치한 인물로,남평문씨 마을의 현재 모습을 완성한 사람이다. 수봉정사는 현재 남평 문씨 마을 맨 앞에 있는 건물로, 문영박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죽은 뒤 1936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여기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제2의 광거당 역할을 하였다. |
|
약산가 |
죽헌종택 왼쪽에 위치해 있다. 약산가는 1924년 수봉의 둘째 아들인 약산 휘 진채의 현 위치로 분가할 때 지었다고 한다. 세거지 안에서 다섯번째로 세워졌던 집으로, 집 이름도 약산 휘 진채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약산가는 대문간채, 안채, 사랑채 고방채, 아래채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룬다.
현재 약산 - 인곡 희윤(仁谷 凞胤)- 석기(碩基)에 이르러 3대째 이어지고 있다. |
|
유당가 |
유당가는 유당 휘 형채의 호를 다서 부르는 이름이다. 1925년 수봉의 셋째 아들인 유당 휘 형채가 분가해 나오면서 지은 살림 집으로 약산가 바로 전면에 자리잡고 있다.전면 4칸의 안채와 애래채 그리고 3칸반의 사랑채를 갖춘 ㄷ자형으로 잘 다듬어진 건물이었다.불행히도 1950년대 후반에 화재로 1960년대 중반
사랑채를 중건,1984년에 안채도 새로 짓게 되었다.동남형 방향으로 대문이 나있으며 약산가 전면에 위치하여 좌우 담장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당가는 공간 사용도 짜임새가 있고 구조 결구가 견실한 유당가의 이런 공간 구성으로 인하여 이 가옥은 쓰임새가 좋고 품격이 높으며, 단출하고 단아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들의 꼿꼿한 기개를 느끼게 하는 집이다. |
|
인수문고 |
광거당과 수백당에 만 여권의 전적과 여러 종류의 고서화가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움으로 중간에 제대로 살피고 돌보지 못한 때도 있었고 특히 6.25동란 때는 다소의 손실이 있었는데 서화의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그래서 의논하여 수봉정사 구내에 잘 보이는 곳을 택하여 집을 지어 두곳의 책을 옮겨 함께 소장하고 인수문고라 이름하였다. 인수문고는 국내에서도 보기 힘든 전적문고이며,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문중문고의 하나이다. 민간의 전적장서로서는 질과 양적인면에서도 으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
|
인흥사 |
인흥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이 분명치 않으나 최근학계에서는 통일신라 때의 절로 아마도 임진왜란 떄나 혹은 다른 원인으로 소실된 후
복원이 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달성군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새거지 일대에서 출토된 와당(瓦當)을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 때의 것으로 나오고 있다고 한다)현재의 많은 답사와 연구를 통해 인흥사가 원래는 인홍사(仁弘寺)라는 절이었으며 삼국유서를 쓴 일연이 '아주오래된 절'로 기록하고 있다.1450년대에는 군자와 미곡 등 많은 물자를 비축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수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수복,시굴에 의해 인흥사의 유구 일부를 볼수 있게 되었다. |
|
인흥서원 |
고려 고종부터 충숙왕에 걸쳐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을 지낸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시조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인 노당(露堂)추적(秋適·1246~1317)의 위패를 봉안한 곳. 낮은 산자락에 동쪽을 향한 인흥서원은 전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한 강당과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사당인 문현사와 동재·서재·외삼문인 숭봉문를 비롯해 서원 앞의 신도비각 등 5동의 소박한 건물로 서원철폐령의 화를 피해 창건 당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대원군위 서원철폐정책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서원으로,특히 이 곳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명심보감판본 31매가 소장돼 있다. |
|
정전법 |
땅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해서 여덟 농가가 나누어 부치게 하고 가운데 땅은 공동으로 지어 조세로 바치게 하던 중국 하.은.주 시대대의 토지제도를 말한다. |
|
조산무더기 |
돌을 쌓아 올린 조산유적으로 산천의 비보적인 역할과 마을 수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처로도 이용되며 성황당이나 누적단과는 또 다르다. 보통 평면이 둥글며 20~30cm의 자연석으로 축단을 쌓고 있고, 거의 예외없이 조산 중앙에 1~2m전후의 장대석(장대석이기 보다는 돌기둥이나 솟대에 근사하다)을 세워놓는데 이는 천계와의 교감을 위한 중개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인흥마을에서는 조산무더기가 동네를 알리는듯 초입에 직경 510cm 높이 270m규모로 원추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정월 보름달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
|
죽헌종택 |
남평문씨南平文氏 대종 택으로, 1872년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의 개기開基 시조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가 가장 먼저 지은 집이다. 처음에는 초가로 지어졌으나 남평문씨본리세거지가 인흥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대외적으로도 인정받게 되면서, 외당은 남평문씨의 종택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1972년 수봉과 함께 초가를 헐고 와가로 새로지었다.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된 죽헌종택은 남평문씨의 종택답게 세거지의 다른 어느 제택에 비견해 규모와 구도가 뛰어나다. 곳간과 헛간까지 합해 10칸 규모인 죽헌종택은 종택 안 대문 바깥 왼쪽에 옛 인흥사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고려정이 지금도 남아있다. 원래는 ㅁ자형의 집구도였으나 바깥마당에 있던 초당채와 안마당 왼쪽에 있던 아래채가 없어져 현재 ㄷ자형의 구도를 띄는 죽헌종택은 사랑채가 1976년 화재로 소실되어 그해에 원형대로 복원한 것 외에는 큰 변화없이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다. |
|
중곡서고 |
인수문고 경내에 주로 20세기에 간행된 한국학 중심의 책 약 5,000권을 장서하고 있는 중곡서고가 병설되어 있다. 19세기까지의 전적문고인 본 문고에 보첨하는 것을 목적으로 모은 책들이며, 외형은 3칸 한옥이나 역시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이며 거경서사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1993년에 지었다. |
|
천수봉 |
비슬산의 북서쪽으로 한소맥을 형성,한봉우리를 거치는데 이봉우리가 천수봉이다.그리 높지는 않으나 보기에도 넉넉하고 후덕스러움을 지닌 산이다.둥근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생긴 금형의 산이며 부처가 좌선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
|
추적신도비 |
신도비는 추적을 비롯하여 추황ㆍ추유ㆍ추수경등 4인의 추계추씨 인물들을 배향하는 인흥서원 경내에 있다. |
|
춘강가 |
1933년 수봉의 막내아들인 춘강 휘 기채의 살림 집으로 지어졌다. 탄당가의 전면에 위치해 있는 춘강가는 광거당으로 가는길을 사이에 두고 수봉정사와 거경서사가 있다. 이 제택은 건물 키가 훌쭉하게 높지 않고 단조롭고 소박하다. 일반적으로 대문간채, 안채, 사랑채, 아래채등등의 구조로 이루어진 반가와 달리 대문간채,ㅡ자형 안채, ㅡ자형 사랑채로 구성되었다. ㄴ자를 엎은 형태의 평면 구조로, 세거지안의 제택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규모다. |
|
충선공 문익점 |
1398년에 70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한 문익점은 생전에 나라가 진흥하지 못하고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며,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한 세 가지 점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삼우당으로 지어 불렀다. 고려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공민왕때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하였다. |
|
충숙공 문극겸 |
1122년(예종 17)∼1189년(명종 19).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자는 덕병(德柄)이다.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간 뒤 의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언관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내시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궁녀들과 추문을 일으키며,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뇌물을 챙기는 등 문란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음을 직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왕이 대노하여 상소를 불사르고 처벌하려 하였으나 언관을 내침은 불가하다는 주위의 건의에 따라 황주판관으로 강직되었고, 이어 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충직한 신하를 거듭 외직으로 내치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이 있어 내직인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고, 이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다른 문신들과 함께 붙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평소 문극겸의 충직함을 알아본 무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오히려 재상으로 중용되고 상장군을 겸하였다. 태부소경(太府小卿)이 되었을 때 왕이 근신들과 밤늦도록 연회를 베풀자 문극겸은 “이것이 바로 먼저 왕이 폐위된 원인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습니까?”라며 직언하였다. 한편 지난 번 무신 난 때 쫓겨난 의종이 남쪽으로 떠나면서 한탄하기를 “내가 진작 문극겸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욕을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 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
|
탄당가 |
수봉의 넷째 아들이 탄당 휘 노채가 분가하면서 1940년에 지은 주택이다. 세거지의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탄당가는 광거당과 천수봉에서 내려오는 도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일제 말기에 지은 집이나 아주 단단하게 지어져 지금도 빈틈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탄당가는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사대부 선비의 기품을 읽게한다. |
|
학자수 |
수봉정사 옆에 수령 300년의 노거수이며 ‘문경호나무’라고 이름 지어진 희화나무이다. |
|
혁채가 |
사랑마당의 조경이 특히 눈길을 끄는 혁채가는 보당의 셋째 아들 혁채의 살림집으로, 1936년에 보당고택, 현채가가 지어질 때 함께 세워졌다고 한다. 대문채, 안채, 사랑채, 고방채등 네 채의 건물이 네모 난 마당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혁채가는 세거지 안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전형적인 ㄷ자형 평면구조의 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