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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ㅏ진인생/DS5ZWK
● 한국역사 (연도별사건)_교육자료 본문
●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자료1
1914년 7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 약 4년간 주로 유럽을 전장(戰場)으로 하여 싸운 전쟁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에 있으며 1개월 후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였다. 그것에 대해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자세를 보이자 3국 동맹에 의해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에 있던 독일은 기선을 제압하여 8월 1일에 대(對)러시아 선전포고하였다.
한편, 영국ㆍ프랑스는 3국 협상에 의해 러시아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영국ㆍ프랑스를 둘러싼 결과가 되었다. 그 위에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본도 선전하고, 11월에는 터키가 독일 측에 참전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아시아에도 파급되었다.
당초 독일은 단기 결전을 생각하였지만 9월초 마르누회전에서 프랑스가 승리하자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져 장기적인 참호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교전국은 징병제에 의한 병력 증강이나 경제력의 총동원을 추진한 ‘총력전’ 체제가 구축되고, 독가스, 전차, 폭격기 등 파괴력이 높은 무기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급증 하였다. 또한 유트랜드 해전에서 영국에 제해권을 빼앗긴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단행한 결과 피해를 받은 미국이 1917년 4월에 대(對)독일 참전하여 협상국 측이 우위에 섰다. 한편, 전쟁으로 피폐한 러시아는 1917년 11월의 혁명에서 볼셰비키 정권이 성립하여 ‘무(無)합병ㆍ무(無)상금ㆍ민족자결’의 강화를 제창하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이러한 반전으로 혁명의 기운은 독일에도 파급되었으며 1918년 11월에는 키르군항에서 일어난 수병의 반란을 계기로 독일의 제정이 붕괴되어 전쟁은 종결을 맞이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양방에서 6,30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854만명이라는 전대미문의 전병사자(戰病死者)를 낳았기 때문에 전후에는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등의 제창으로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지만 대(對)독일 강화를 규정한 베르사유조약에서는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자료2
발단은 발칸반도로, 최근에도 민족분쟁이 끊이지 않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중심지인 사라예보였다.
원래 이곳은 세르비아인 지역이다. 그런데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세르비아인 사이에서는 세르비아인의 나라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불안한 정세 속에서 마침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가 사라예보를 방문했고 가브리엘로 프린치프라는 세르비아 청년이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그의 아내 조피를 권총으로 암살한 것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이 한 명의 세르비아인 청년에 의해 발발한 것은 아니다.
당시 유럽 열강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한쪽은 영국,러시아,프랑스 중심의 구세력이고
다른 한쪽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중심의 신흥세력이다.
이 세력 싸움에 휘말린 것이 바로 발칸반도다. 그곳에 러시아가 슬라브족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게르만주의를 앞세우며 뛰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고 이는 단순한 민족분쟁, 즉 두 나라간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흔히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난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에서 발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된 것으로 여긴다. 이 기간 동안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 등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 8.15 광복 1945년
광복이란 대한제국이 붕괴되면서부터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포괄하는 관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이 8·15광복의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1910년 8월 22 일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35년간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은 계속 전개되었다.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운동·반침략호국운동이,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민 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에는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집결되어 200만 명의 인원이 참가하였으며, 독립이 현대적 국민국가수립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3·1운동 직전 2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3·1운동 직후 4월 13일에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에서는 4월 23일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하는 등 곳곳에 정부가 세워졌으며, 1920년대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편 1910년경 만주지방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기를 띠었다. 간도 삼원보(三源堡)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독립군 3,500명을 수료시키고, 김좌진(金佐鎭)은 간도에서 1,6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연길현(延吉縣)에서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이후에는 독립군부대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설립하였다. 국내의 광복운동은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1917년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혁명노선으로 양분되었다. 1927년 2월 재통합을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으나 1931년 붕괴되었다.
해외에서는 정치단체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으나, 1938년 좌익계 독립운동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민족진영과 좌익사회주의진영으로 양립되었다. 그러나 1939년 김구(金九)와 김원봉(金元鳳)이 민족적 통일기구로 전국연합전선협회를 성립시켰으며, 1940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으로 발전하였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는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무력항전을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신탁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는 카이로선언이 재확인되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데 이어 38선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분할안을 제기하였으며,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하였으며, 한반도는 자유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러시아가 점령하였다.
광복이 되었으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요인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정계는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여운형의 조선인민 당, 김성수(金性洙)의 한국민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으로 분열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는 한국에 대해 미·영·러·중 4개국의 5년간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으며, 이에 대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탁(反託)을 주장 하였으나, 1946년 1월 2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섰다.
한편 1946년 1월 16일 과 1947년 5월 21일 2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10월 18일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그러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으며, UN은 1948년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입국을 거부함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 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947년 2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1948년 2월 임시헌법을 공포하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 였다. 이와 같이 남북한에서 각기 단독 정부가 수립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1947년말부터 중도파 정당들을 중심으로 미·러양군의 철수와 남북정당들의 직 접적인 협상을 통한 자주적 남북통일정부수립운동이 추진되어 1948년 4월말 남 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으나 남북한 단독정부수립을 저지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8·15광복을 맞은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미국과 러시아는 한국의 자주독립국 가수립을 원조하기 보다는 각기 자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데 1차적인 목표를 두었으며, 국토분단으로 38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이 민족분열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전쟁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으며, 평화적 민족통일이 8·15광복 이후 우리민족의 과제로 남아 있다.
● 제주 4.3 사태 1948년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694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한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지리적 특성상 동북아 요충지인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 6만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다.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 주민들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이 겹친데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고, 군정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 중 기마경찰이 탄 말의 말굽에 구경을 나온 어린이가 치이는 일이 있었고 이를 본 주변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일반주민 6명이 사망하는 ‘3·1발포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反警)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결과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에 동참하였다. 전체 166개 기관단체 에서 41,211명이 참여하였고, 이중 제주출신 경찰관 66명도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카스티어(casteel)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으나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다스리기 보다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여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당시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를 ‘붉은섬(Red lsland)’로 규정하고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하였다.
● 여.순 반란 사건 1948년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695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려고함.
여순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부른다. 제주4·3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고 하였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고 하여 1995년부터는 '여수·순천사건'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사용한다.
● 6.25 사변 (한국전쟁) 1950년
동영상http://blog.daum.net/ds5zwk/15658689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1953.7.27 휴전협정 조인)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룩한다는 조건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하였고, 그 통치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 외상은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히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으로 돌아섬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 무대에 노출되었다.1947년 11월에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 해 5월에는 남한만의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소련을 비롯한 공산 여러 나라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하여 분단을 공식화하였다.
정부 수립을 마친 북한은 곧이어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소련은 그 해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하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남한에서 철병을 완료하였다.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미국과 소련이 그어 놓은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분할 독립과정에서 우선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이미 완전 무장한 4개 보병사단과 소련제 T-34 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 기갑대대를 편성하였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 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또 3월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5000명이 북한에 인도되었다. 이로써 10개 북한군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 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이어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국외의 요인으로는 ①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고, ②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③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Acheson,D.G.)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④ 1949년 말경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 계획에 대한 스탈린(Stalin,I.V.)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 국내의 요인으로는 ① 남로당의 실질적 붕괴에 따라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② 김일성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사로서의 경쟁’에서 박헌영(朴憲永)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③ 남한이 아직도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고, ④ 국군의 병력·장비가 열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은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이러한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한 공산당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펼쳤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6년 1월에 미군정 산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각 육군·해군으로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리고 10월에는 공군이 편성되어 병력은 약 1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비가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는 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부터 먼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게릴라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 2.28 운동 1960년
2•28 대구 학생의거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 독재에 항거,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는 이후 마산의 3.15 부정선거 항의시위로 이어졌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선거유세일 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 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
● 3.15 부정선거 1960년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701 (3.15부정선거 와 4.19혁명 이승만 대통령 하야)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정권에 의해 대대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되었던 정·부통령선거. 사상유례없는 부정선거로 4·19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1960년 예정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결과를 미리 분석한 자유당정권은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한편 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대통령은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그러자 선거의 초점은 당시 85세로 노령이었던 이승만의 유고시에 승계권을 가질 부통령선거에 집중되었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와 여당의 야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사건이 연일 계속되었다.
지시된 부정선거계획의 내용을 보면, 40%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에 의한 반공개투표,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발표 등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음모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폭로되었다.
3·15부정선거 결과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각각 88.7%와 79%의 득표로 정·부통령에 당선되었음이 공고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3월15일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이어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데모가 벌어짐으로써 4·19로 이어졌다.
● 4.19 혁명 1960년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697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개표를 조작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 5.16 쿠테타 1961년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686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6 ·25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다.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하였다.
반공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 ·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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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대통령 당선 1960.3.15
● 이승만대통령 하야 1960.4.26
● 윤보선 대통령 선출 1960.8.12
● 5.16 쿠테타 1961.5.16
● 윤보선 대통령 사임 1962.3.22
●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 1962.3.24
● 박정희 대통령 당선 196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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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 사태 1979.10.26
동영상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685박정희 대통령 총격사망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에 의해 피격)
● 최규하 대통령 당선 1979.12.6
최규하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대통령 당선
● 12.12 사태 1979.12.12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684
12월 12일, 합동수사본부장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관련혐의로 연행(군장악).
● 5.18 광주사태 (광주민주화운동) 1979.12.12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696
박정희 대통령이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대통령 대행체제가 이어졌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을 틈타 신군부세력(노태우 등)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12·12 사태) 무력으로 순식간에 군부와 정치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다시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유신체제에 이어 민주헌정이 정지되고, 민주정치 지도자들이 투옥되는 등 군사독재가 재발하자 국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는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지속·확산되어 갔다. 1980년 5월 15일 전국의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으며,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1980년 5월 17일 비상국무회에서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의결하였다.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의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한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비상계엄군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들이 속출하자, 학생들은 '계엄 철폐', '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의 중심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은 학생시위대를 지지하는 일반 시민들도 구타하고 체포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들이 발생하였다.
● 6.10 민주항쟁 (1987년)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702
● 역대 대통령들의 기록 동영상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700
● 노태우 대통령 취임 1988.2.25
● 김영삼 대통령 당선 1992.12.19
● 김대중 대통령 당선 1997.12
● 노무현 대통령 당선 2002.12 노무현인생63년 동영상 http://blog.daum.net/ds5zwk/15658703● 이명박 대통령 당선 2007.12
● 박근혜 대통령 당선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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