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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의 문화재 본문
(대구 달성군의 문화재)
1.도동서원 강당 사당 부 장원
종 목 보물 제35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시 대 조선시대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동서원은 문경공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원년(1568) 처음 세워 쌍계서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선조 40년(1607)에 임금님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년(1871)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가운데 하나이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있다. 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제사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맞담으로 구성하여 매우 아름답다.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서원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2.용연사 석조계단
종 목 보물 제539호
지 정 일 1971.07.07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65 용연사
시 대 조선시대
계단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 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4천왕상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8부신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태고정
종 목 보물 제554호
지 정 일 1971.12.0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
4.현풍 석빙고
종 목 보물 제673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5.도동서원
종 목 사적 제488호
지 정 일 2007.10.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시 대 조선시대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6.달성 삼가헌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
지 정 일 1979.12.28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시 대 조선시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각각 국화와 연꽃을 심은 뒤 하엽정이라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2칸·마루방·청지기방을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꾸몄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곳간채·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별당은 고종 11년(1874)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이 별당은 안채의 서쪽 넓은 터에 따로 자리잡고 있는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 3칸과 마루방 1칸으로 구성되었다. 왼편 끝방의 앞에는 1칸의 누마루를 꾸미고 그 옆 마루와 다른 방들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7.달성 조길방 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00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350
시 대 조선시대
깊은 산골 경사가 급한 산간마을에 자리한 초가로, 현 소유자의 9대조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사랑채는 60여년전에 확장하였고, 아래채는 30여년 전 무너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산 전체가 서향으로 경사져 있고 그 안에 마을이 숨듯이 자리하여 집들은 자연히 모두 서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15호 가량의 집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6호만 남아있고, 이 집이 이 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높은 축대 위에 지은 안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사랑채, 왼쪽에는 아래채가 부속건물처럼 낮게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앞면 벽에는 크기가 매우 작은 여닫이 문 1짝이 있는데, 출입보다는 채광과 통풍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초가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된 건축으로, 특히 안채 창호문의 규모와 성격은 주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8.도곡재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92
시 대 조선시대
도곡재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사용되던 집이다.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 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태백산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9.남지장사 청련암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865
시 대 조선시대
남지장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4년(684)에 양개조사가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에 고승 무학대사가 수도한 곳이기도 하며,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효종 4년(1653) 인혜대사가 청련암과 함께 다시 세웠으나, 순조 6년(1806)에 또 화재를 2년 뒤 다시 세웠다고 한다.
청련암은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특이한 평면을 가진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그러나 실제로 법당의 기능보다 강당의 기능을 가진 건물로 ‘인법당’으로도 부르고 있다.
남지장사 청련암은 부분적으로 옛 건축수법을 간직하고 있는 소박한 구조의 건물이다.
10.용봉동 석불입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5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용봉리 산2-1
시 대 통일신라
대구에 있는 비슬산 일원에는 신라시대 이래의 많은 불교 유적이 산재해 있는데 용봉동 석불입상이 있는 곳도 그 중의 하나이다. 높이 2.8m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한쪽면에 광배(光背)와 불상을 조각한 것으로 왼손에 약항아리를 들고 있어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얼굴에는 풍만한 인상이 나타나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모양으로 원형의 머리광배와 가는 타원형의 몸광배를 도드라진 선으로 나타내고 있다.
불상과 광배에 표현된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후기의 수법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11.하목정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이다. ‘하목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머물렀던 인조(재위 1623∼1649)가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준 것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인조가 명령하여 이 집에는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처마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내부에는 김명석·남용익 등 많은 유명인들이 쓴 시가 액자가 걸려있다.
12.이철견 신도비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8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강림리 731-1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공신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우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무신인 이철견 장군을 기리고 있다.
이철견 장군은 세조에서 연산군사이에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호조판서, 경상도관찰사,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이시애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비는 받침과 비몸 ·머릿돌로 이루어진 형태로, 머리돌은 지붕모양을 하고 있어 조선시대 전기 신도비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몸 윗면에 ‘양평이공신도비명’이란 제목을 쓰고, 본문에는 장군의 업적을 열거하였다.
비문은 홍귀달이 짓고 안침이 글을 썼으며, 연산군 3년(1497)에 비를 세웠다. 원래 서울 봉천동에 있던 것을 1969년 도시계획으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13.용연사 극락전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시 대 조선시대
비슬산 용연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원년(912)에 보양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 1년(1419)에 천일대사가 다시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200여 칸이 넘고 승려도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14.대견사지 삼층석탑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2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용봉리 산1
시 대 통일신라
비슬산 중턱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탑이다.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절내의 여러 석재들과 더불어 쓰러져 있던 것을, 1988년에 겨우 복원한 것이다. 일반적인 탑과 달리 절벽의 높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그 위로 기단과 탑신을 올려놓았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둔 것 외에는 거의 꾸밈을 하지 않아 소박하다.
만들어진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로 추측된다. 오랜 세월 무너져 있었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산세를 다스리고 있는 듯한 위엄이 우러난다.
15.유가사 석조여래좌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지 정 일 2003.04.3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양리 144
시 대 고려시대
유가사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불상과 대좌가 모두 같은 석질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얼굴 전면과 양 무릎을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그 외의 부분은 비교적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얼굴 모양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목에 있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는 뚜렷하지 않다. 어깨는 각이 지고 힘이 들어가 있으며, 가슴은 양감있게 돌출되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우견편단으로, 상반신은 그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크게 열었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는데 왼손은 길상좌를 하고 있는 오른발 위에 올려 놓고 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에는 법의 주름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형태면에서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계열의 불상으로 볼 수 있으나, 불상의 어깨가 좁아지고 가슴의 탄력이 감소되는 등의 변화를 볼 수 있으며 대좌도 방형으로서 10세기 이후의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이 불상의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16.예연서원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538번지일대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1552∼1617)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의 ‘홍의장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광해군 10년(1618)에 ‘충현사’로 처음 세웠고 현종 15년(1674)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숙종 3년(1677)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예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77년과 1984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현재는 곽재우의 재종숙으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곽준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제물을 준비하여 두던 고사, 숙소로 사용되던 동·서재 등이 있다. 사당은 곽재우와 곽준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강당은 유림의 회합장소와 교육 장소로 사용하던 건물로 중앙에는 마루를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이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경내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비석이 있어 흥미롭다.
17.천내리 지석묘군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515-1 일대
시 대 청동시대
대구 달성군 화원읍의 천내리와 성산리 일대에는 과거 많은 지석묘가 분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곳에 있는 8기만이 유일하게 남북으로 열을 지어 있다. 3기는 화장사 경내에 1기는 화장사 담에 걸쳐서, 4기는 화장사 바깥의 화원교도소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다.
이 곳의 지석묘는 부정형의 거대한 암석을 상석으로 하고, 일열로 배치되어 한 집단을 이루고 있다. 상석의 장축방향은 북동-남서간 선상에 있다. 지석의 유무는 외형상 확인되지는 않으나 원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에 현존하는 지석묘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유적이다.
18.냉천리 지석묘군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4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385-1 일대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석묘는 모두 8기로 과거 신천유역에는 많은 지석묘가 분포했으나 급격한 도시 팽창과 경지정리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었다.
북측의 상동 고인돌 및 마을유적과 파동 바위그늘유적 등과 연계하여 신천유역에 영위되던 청동기시대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학술적 자료로 가치가 크다.
19.초곡산성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7호
지 정 일 2008.04.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초곡리 산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초곡산성은 비슬산 유가사 서쪽 해발 700미터 산 정상에 위치하여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길게 타원형으로 자리 잡은 성으로, 성의 둘레는 1,700미터이며 산성 내에 분포한 고분군으로 보아 삼국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여겨진다.
성곽의 형태는 꼭대기가 평탄하며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한 퇴뫼식 산성으로 성내부에는 성문, 망루 등의 흔적뿐만 아니라 기와, 우물, 고분군 등이 확인되어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일대의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20.남평문씨 본리세거지
종 목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 373
시 대 조선시대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으며, 도로에 접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지당·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수봉정사는 세거지의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지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는 옛 마을이다.
21.논공 천왕당
종 목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논공읍 북리 462
시 대 조선시대
천왕당은 마을 수호신을 모시고 주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당이다. 1940년대의 보고에 의하면 대구부근에서는 누석단을 천왕당거리 또는 귀천왕이라 칭하고 당이 건립된 것을 천왕당이라 한다 했다. 또한 1982년의 보고에는 영천 경주 등지에서는 서낭당을 천왕당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서낭신앙은 중국에서 고려시대에 전래한 신앙인데 양자의 신앙적 기능이 서로 비슷하여 복합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즉 대구를 비롯한 경북일대에서는 서낭당을 천왕당이라 부르기도 하고 성황당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이곳 천왕당은 논공읍 남리와 북리 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신당으로 남리의 동쪽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천왕당의 측면과 배면에는 돌담을 둘렀으며 주위에는 노송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마을 입구(현재 남리 680-1번지일원)에 있었으나 1924년 이곳으로 이건한 것으로 최초의 건립은 상량문에 함풍 3년9월(1853년)이라 적혀 있다.
22.현풍향교 대성전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7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326-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현풍향교를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옛 교동에 다시 지었고 영조(재위 1724∼1776) 때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다. 대성전은 영조 26년(1750)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3.용연사 삼층석탑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시 대 고려시대
용연사 극락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바닥돌은 후대에 새로운 돌로 보수한 상태이며, 기단과 탑신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짧고 처마가 얇은데 비해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이 높직하다.
극락전의 장중한 규모에 비해 석탑의 높이가 2.6m로 너무 작아 서로 잘 조화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조각양식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4.현풍곽씨 십이정려각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
시 대 조선시대
현풍 곽씨 집안의 유교 도덕에 기본이 되는 삼강을 지킨 28인의 정려비로, 선조 31년(1598)부터 영조 때(재위 1567∼1608)까지 포상된 12명을 한 곳에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을 잘 지키면 이를 국가에서 포상하며 기리도록 하였다. 한 마을의 한 성씨(곽씨)에서 12명의 포상자가 나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서, 정려를 받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하게 되자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곽재훈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아버지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곽재기의 부인 광주 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었기에 선조가 정려했고, 곽홍원의 부인 밀양 박씨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죽음으로써 남편을 보호하였기에 현종이 정려했다.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는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원했으나, 남편이 죽게 되자 먹지 않고 따라 죽게 되니 현종이 정려했다.
건물은 앞면 1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정려각 안에는 2개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건물과 현판은 최근 것이나, 12정려각은 그 유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25.이노정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내리 443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성종(재위 1469∼1494) 때 대유학자인 김굉필과 정여창이 무오사화로 화를 당하여 시골로 내려와 지내면서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제일강정’이라고도 하며, ‘이노정’이라는 이름은 김굉필, 정여창을 두 늙은이라 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노정은 고종 22년(1885)에 영남 유림에서 두 분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쳐 지었고, 1904년에도 고쳤다. 건물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처마 아래에는 가운데에 ‘이로정’과 ‘제일강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앞면 둥근 기둥에는 두 분이 지은 ‘유악양’이란 시가 현판에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노정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평면 형식을 갖추고 있다. 또한 마루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 강바람의 유통을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어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26.소계정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1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기세리 714
시 대 일제강점기
석재준(1866∼1945)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23년 제자들이 지은 것으로, 호를 따라 ‘소계정’이라 부른다.
석재준은 학당을 열어 문하생들이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선비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27.이양서원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2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대리 907-3일대
시 대 조선시대
곽안방·곽지운·곽규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곽안방은 조선 세조 9년(1463)에 청렴결백한 관리로 뽑혔다.
조선 숙종 33년(1707)에 세운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당과 외삼문, 관리사만 남기고 철거되었다. 1954년에 제사지내는 곳인 사당을 복원하고 각 건물을 고쳐 세웠으며 1982년에는 동재와 서재를 세웠다.
모두 8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사당과 강당을 비롯하여 신문, 읍청루, 고사 등이 있다. 외삼문과 공부하는 곳인 강당을 같은 선상에 두고 왼편과 오른편에 기숙사인 동재·서재를 배치하였다. 강당 오른편에는 청백사로 불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28.관수정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6호
지 정 일 2004.06.1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65
시 대 조선시대
관수정은 1624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사우당 김대진선생이 경상감사 이민구와 지역 사림의 협조로 건립하였으나 1721년 소실된 것을 1866년 그의 후손 김규한이 중건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일자형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1칸의 온돌방을, 왼쪽에는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관수정은 주위 자연환경과 잘 조화되고 건물 각부의 비례구성이 단정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하며 원형을 잘 보존하여 조선후기 정자건축의 흐름을 잘 표현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
29.유가 만세교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2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양리 575-2
시 대 일제강점기
유가면 양동 유가사 아래쪽 500여m 되는 위치에 흐르는 계천에 가설한 석교이다.
일반적으로 홍예형 석교는 육중하고 견고한 구조감을 주는데 이 석교는 소박하고 경쾌한 구조감을 준다. 이 다리는 원래 척진교로서 척진교비에 따르면 홍예형의 목교로 정묘년(1747)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옆에 세워진 만세교비에 따르면 병진년(1916)에 일인 석공 남목(kusunoki)가 지방인 석공과 합세해서 목교를 석교로 교체하였고 “만세교”라 명명했다.
30.소재사 대웅전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3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용리 4
시 대 조선시대
소재사는 비슬산 남서 중턱 해발 450미터에 자리하고 있다. 최초 창건 시기는 신라 시대로 전해지고 있다. 2000년 대웅전 보수시 확인된 상량문의 내용에는 1673년에 명부전과 함께 지었으며, 1857년(철종 8년)에 법로 화상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한때 상주했던 대중이 산내 암자와 더불어 3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사역이 대단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다포계 맞배 지붕건물이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전면벽체는 3칸 모두 문으로 구성하였는데 어칸에는 4짝 여닫이, 향 퇴칸에는 2짝여닫이문을 두었다. 배면에도 양쪽 퇴칸에 한짝의 여닫이문을 두었는데 정면, 배면 모두 문짝이 최근에 교체되었으며, 문틀일부도 교체가 되었는데 된 것이다. 다만 배면 어칸에 두짝문이 있었던 연귀맞춤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배면3칸 모두에 창호를 둔 것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까지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31.소재사 목조지장보살좌상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4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용리 4
시 대 조선시대
소재사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좌상이다. 최근 개금불사에서 출토된 복장품에서 강희12년 계축4월일(1674)에 조상했고 건륭6년 신유3월20일(1741)에 중수개금을 시작하여 4월6일에 마쳤다고 하는 복장기를 확인하였다. 즉 조상연대와 중수기록이 있고 또한 지장보살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이며 조선후기 작품이면서도 조선 전기 양식을 일부 간직하고 있어 조상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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