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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백의민족.한계레 는 어디서왔는가? 본문

역사_대한민국

단군.백의민족.한계레 는 어디서왔는가?

ㅅㅏ진인생 2017. 11. 20. 12:50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naver.com)

 

 

김정민박사의 동영상 강의

1강ㅡhttps://youtu.be/q7qp3aiB8Wc

2강ㅡhttps://youtu.be/pcPMR8G1Pwc

 

역대왕조의 단군 제사 일본강점기 때 끊겼다.

堯와 함께 開國… 箕子보다 먼저 立國 三國史記 이전 古記 등 記錄 믿어야!

이병도가 죽기 전 병상에 있을 때 쓴 참회의 글이다. 1986년 10월 9일 자 조선일보에 실려 있다. 이 글을 보고 이병도 제자들은 스승을 노망으로 치부하였다. 통탄할 일이다. 한국고대사 정립에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글이지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전문을 실어 소개한다. -편집실 

 

대체 천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을 군장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은 즉 「군장을 개설한다」라는 것이 되므로 개국, 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은 즉 최고 시조인 단군의 즉위와 개국을 의미하는 개천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1권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라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하에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풍백(풍신) 우사(우신) 운사(운신)의 삼신을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형 주선악 등 무릇 인간 삼백육십여 사를 주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 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관념한 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 국가를 새로 세운 군장이라기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를 주관하는 수호신적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수호신의 주처는 곧 신단수로 이것은 지금 민속 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선왕당(仙王堂 서낭당)은 즉 천왕당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신단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신단을 중심으로 한 마을이 신시였다.

신단수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수목숭배)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 자체가 신 그것이었는데, 그 후 변천하여 신단수는 천신 천왕의 강하계단, 혹은 천왕의 주처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옛날의 국호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 하는 아사달(아사달)이 정작 국호였고 조선은 후에 이르러 「아사달」을 아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논문집(사회과학) 제2집에 「아사달과 조선」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기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고기에는 웅이 여신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이는 웅(곰) 토템족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 주장해 오고 있다.

즉 웅을 신성시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 천신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10월 3일(음력)을 개천절이라 하여 단군의 개국 일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시월 절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가 있는 달이다.

즉 시월 절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맺었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마을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신인공락)의 놀이를 하였다. 이를 계절제(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 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락종(하종)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신에게 년사의 풍등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의 제전을 오월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이 동락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시월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신에게 고사하고, 선조 무덤에 시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월제 시월제의 유풍이라 할 것이다.

 


▲곰상 (공주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 고, 산, 신 등을 의미하는 고어로 그 어원은 「솟」 「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의 영고제, 고구려의 동맹제, 동예의 무천제가 다 이러한 추수 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 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 팔관대회도 춘동이기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중동팔관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 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 절의 고속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입국의 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 10월 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정족수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 3일로 정하게 되었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두계잡필(斗溪雜筆)」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현정회 이사 이희수(李喜秀) 씨가 1977년 10월 「현정지」에 「사서상에서 본 국조 단군」이라는 제목하에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지금은 없어진 「고기」와 「구삼국사기」와 현존 위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의 단군기사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사대로서 기술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 이전의 사기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를 제외하였지만, 동서 권십칠 고구려본기오 동천왕 이십일년 춘이월조에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이라고 하였다(惑云이하의 王之는 왕노릇을 하였다는 동사로 읽어야 하고 「都王儉城의 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王之都王儉」이라고 연서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 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黃城(皇城, 즉 丸都城)의 對岸인 東黃城(今 강계)인 것이다. 지금의 평양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양(지금의 평양) 지칭이므로 전, 후자를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당시 평양은 다른 곳

김부식과 같은 사가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 않고 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 것은 김부식의 머릿속에 지금의 평양이 선인 왕검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외 사서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양을 왕검성이라고 하는 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고기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史記 地理 誌高句麗條에서 古記云朱蒙自夫餘逃難至來本則紇升骨城 ②史記 志一祭祀條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③史記 列傳 金庾信上에서 金春秋가 講和하려고 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言眞平王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傳故兩存之」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고기에는 단군기사가 기재되어 있을 그뿐만 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에 김춘추가 갔던 서기 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이 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이십일년서 이월조에서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이거나 단군기를 인용한 그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육촌도 조선의 유민이 산간에 와서 자리 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권 제일 신라본기 제일에 보면 「始祖姓 朴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時 朝鮮遺民分居 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이 인용한 고기의 단군기재를 근거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이 평양이 선인(단군) 왕검의 택이라고 명기한 데서 고기가 단군기사를 실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를 들먹여서 단군기사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 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 묘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 때에는 노래(世年歌)에 의하여 단군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 권40 세종 10년 무신 6월 조에 유관(柳寬)의 상서를 보면 문화현(文化縣) 구월산 동령 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 천왕, 서벽에 단군 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삼성이라고 일컬으며 산 아래 마을을 성당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은 그 상서중에서 「구월산은 현의 주산이던 단군조선때에는 아사달 산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에 와서 궐산이라고 고쳤다. 그때 문화현을 궐구현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고려 때에 유주감무로 하고 후에 또 문화현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리게 소리 내 구월산이라고 부른다.

 

두 수의 시에 나타나

문화의 동쪽에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고 한다‥」하였으며 「구월산하에는 환웅을 남면으로 모시고 동서향으로 환인과 단군을 모신 삼성당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이 입도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세종 18년 병진 12월 정해조 유사눌(柳思訥 유관의 조카)의 상서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土良)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基歌曰亨國一千四十八至今廟在阿斯達則등無所처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與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고기 단군기 외에 가사 형식으로 된 단군기사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세년가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유사눌은 한성 부사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신이 단군 세 년간을 보니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 사람과 다르고 몰함에 신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어쨌든 조선 세종대까지 단군 세년가가 남아 있었고 식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이다.

앞에서 제시한 류관의 상서에 따르면 삼성당은 황해도 구월산 동령에 있다. 류관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들로부터 단군사적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삼성당에 환웅천왕을 상좌에 모셔서 남면하게 하고 동벽에는 환인 천왕을 모셔서 서향하게 하고 서벽에는 단군 천왕을 모셔서 동향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성당의 경내·외에는 날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 권64 찰고 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으며 춘추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 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의 말에 쫓아서 구월산에 삼성묘를 세우고 평양의 단군 묘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42 문화현사 묘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사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1 평낭조」에 보면 두 수의 시를 통하여 「개국한 지가 멀고 먼 단군은 조선 시 조이다. 단군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와 함께 개국하였다고 들었으니 거금 사천년이며 단군 묘를 남겼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사상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 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를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자료 : 이병도사관은 극복되었는가는 김정희(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2004년,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 사관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일부 발췌 정리>

[이병도 조선일보 특별기고 1]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 참한역사칼럼 (ich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