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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ㅏ진인생/DS5ZWK
대마도는 조선땅 이다 !! 본문
"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에도 막부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 서기 1617년 통신사 이경직이
자신들(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서기 1590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 안의 주 군(州 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 도장)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서기 1419년 대마도 정벌 뒤에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에서.
"대마도에 대한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전략) … 이곳은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서 망령되게 자존하면서
포악하오나, 이들 모두 도서(圖書)를 받고 우리 조정에 귀순하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이 섬의 두목들에게 예전처럼 오고 가게 하고, 이따금 양식이나 주고 도서를
주어뜻밖의 우환에 대비하게 하소서."
:서기 1444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이 세종에게 보고한 글.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
勾當官)'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일본 큐슈 이키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
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
므로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
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에서
"대마(: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 : 서적, 기록)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대마도를 정벌한 뒤 대마도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대마도 정벌 이후 일기도로 파견된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
(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
ㅇ.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ㅇ.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ㅇ.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ㅇ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도장을 사용하여…”
ㅇ이승만의 “대마도는 우리 땅” 선언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
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ㅇ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녁 때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왔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
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올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한국의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섬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출처: http://unjangsan.tistory.com/487 [산너머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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