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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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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

ㅅㅏ진인생 2018. 3. 5. 17:38

영천에 포은 정몽주를 만나러 임고서원을 둘러보았다

조선선조때의 책들을 직접보니 감회가 새롭다.

조선시대에 들어간듯 ...


고려말 국운이 기울어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한 이성계.정도전등 개국세력을 상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북한개성의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피살된 인물로 후세에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임고서원은 1554년(조선명종8년)준공된 부래산(浮來山)에

있던것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3년(선조36년)에 지금의 자리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로

옮겨지었다.


 경북영천의 선죽교


경북영천 임고서원에 있는 선죽교는 북한개성에 있는 선죽교를 실측으로 지었다고 한다.


북한개성에 있는 선죽교 돌비석


북한개성에 있는 선죽교


동방이학지조


포은 정몽주는 1338년 1월 13일(1337년 음력 12월 22일) 경상북도 영일현 에서 영일 정씨(迎日鄭氏) 정운관(鄭云瓘, 다른 이름은 정거민(鄭居敏))과 영천이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얼마 후 청림동으로 이주하였다.

의종 때의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진현관제학을 지낸 정종흥(鄭宗興)의 5대손이며, 그의 고조부 정림(鄭林)은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증조부 정인수는 검교군기감을 지냈고 증 개성부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는 직장과 동정(同正) 등을 지냈으나 아버지 정운관은 성균관 재생(유생과 같은 의미)에 불과하였다.



고려말 등장한 중소지주 기반의 신진 사대부로써 여말 조선초 성리학의 시조겪인 안향(경북 영주)의 출생지인 경북 중부 내륙 지방은 지방 향리 출신이자 중소 지주의 경제적 기반을 둔 신진사대부들의 요람(포은 정몽주-경북 포항, 야은 길재-경북 구미, 목은 이색-경북 영덕, 도은 이숭인- 경북 성주, 삼봉 정도전-경북 영주)격으로 학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다.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영천 이씨는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름을 몽란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부친 정운관이 꿈에서 중국의 주공(주나라 문왕의 아들, 정치가)을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이름을 고칠 때 몽주라 하게 된다. 아버지는 성균관 재생이었으나 그의 가계는 대대로 관료 생활을 한 양반 가문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1364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나 후일 혁명방법을 놓고 갈등하게 된다. 그 뒤 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후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임명되었다. 전농시승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일시적으로 사직했다가 복직하였는데,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 사대부들도 100일만 지나면 상을 벗었는데 그는 부모상 때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이 극진했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했다.

 


그 뒤 복직하여 예조 정랑 겸 성균관 박사·성균관 사예, 1367년 통직랑(通直郞) 전공정랑(典工正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성균관 박사, 1368년 명나라가 처음 건국하자 그는 명나라가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들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명나라와 국교를 체결하게 된다. 1371년(공민왕 20년) 태상소경(太常少卿)·보문각 응교 겸 성균관직강(寶文閣應敎兼成均館直講) 등을 거쳐 성균관 사성에 올랐다.



실제로 정몽주가 성균관 박사로 재직하며 유교의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논어(論語)’등 사서에 관한 주자의 주석서)》밖에 없었으나[출처 필요] 정몽주의 강의에는 막힘이 없었다.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하여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李穡)이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칭하였다.[12] 훗날 조선시대에 가서 중국에서 들어온 다른 유교의 경전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을 비교할 때 틀린 곳이 없어 사람들이 그를 동방 성리학의 실질적인 창시자 또는 성리학의 중시조로 보게 되었다.

신돈이 신진사류를 발탁하게 되면서 정몽주 역시 요직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신돈 등이 몰락하고 그의 일파들이 처형될 때 정몽주도 신돈의 일파라는 누명이 나돌게 된다.

1371년 7월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신돈이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는 커다란 정세 변화가 있었지만, 정몽주를 비롯한 그들은 중국대륙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14]


그는 신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신돈 암살 이후 신돈이 신진사류를 적극 채용한 일로 엮여져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후일 그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모략을 하는데 가담, 협력하는데 동참하게 된다.

1372년(공민왕 21년) 3월 명나라가 서촉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사(正使)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남경에서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했다. 정사인 홍사범 등은 익사하고 정몽주는 바위 섬에서 구사일생으로 표류 13일 만에 살아났다. 그 뒤 표류하였으나 그는 가슴 속에 명 태조 주원장의 서신을 간직하며 물에 한번 젖지 않게끔 보존하고 있었다.

명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배를 보내어 굶주림 속에서도 의연한 그의 모습을 보고 귀국을 도와주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져 명나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는 1373년 7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중국의 한 객관에서 지은 시가 후대에 전한다.



1374년(공민왕 23년) 경상도안렴사로 부임했으나 그해에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예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다. 이때 공민왕이 피살되고 김의(金義) 등이 명나라의 사신을 죽인 일로 명나라가 공민왕의 죽음과 명나라 사신 암살 사건을 놓고 고려 조정에 책임을 추궁해와 국내가 뒤숭숭해지자, 다들 명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으나 그는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 사정을 고하고 사과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1375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1376년(우왕 2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였다.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그는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였으며 이인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北元)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정책을 추진하자 정몽주는 박상용, 김구용 등 10여 명과 상소하고 대간들도 이인임을 탄핵했다.

“점점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와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 신진사류는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재개하려는 정책을 문제삼아서, 종국에는 그 정책을 추진한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이인임과 지윤(池奫)을 죽이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16] 그 과정에서 정몽주도 1375년(우왕 1년) 5월 원나라에서 온 사신을 사로잡고 관계를 맺지 말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상소를 올렸다.[16] 그러나 이러한 정몽주 등의 정치적 행동은 심각한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정몽주는 물론이고 정도전을 포함하여 신진사류 21명이 죽거나 유배당한 것이다.[16]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비판, 규탄하였다가 울산 언양(彦陽)으로 유배 되었다가 1377년(우왕 3년)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몸을 돌보지 않는 노력과 자신의 외교적, 학문적 능력 덕분에 정몽주는 1375년 쫓겨났던 다른 동료들에 비하여 꾸준히 정치적 성장을 이룰수 있었다.[17]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장에 이보다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그의 달라진 정치관이었다.[17] 그해 3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공민왕 대와 달리 우왕 대에 관직에 복귀한 이후에는 시류에 영합하면서 권력자들의 뜻에 어느 정도 맞추어 가는 쪽으로 처신하였다.[17] 그리고 권력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17] 당시 왜구의 침입과 노략이 심하여 그는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하였으나 성과없이 감금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1377년 9월 그는 사신을 자원하여 왜에 보빙사(報聘使)로 건너갔다.


그가 직접 사신으로 파견돼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오는 외교력을 보여줬다. 왜(倭)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서 규슈 탄다이(지방장관)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왜구의 약탈로 인한 피해가 심하여 일본과 외교가 어려운 점을 지적하여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여 응낙을 얻고,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그 시 명은 우왕의 요동 정벌 계획을 사전에 입수하여 고려에 출병하려고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고려에 최후통첩을 보내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 홍상재(洪尙載) 등을 유배보냈다. 정몽주는 토산물의 부족과 명나라 태조의 처사가 지나침을 호소하였고, 스스로 사신의 직책을 자청한다.

그해 주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가 파견될 때,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했는데, 사신 중 일부는 명 태조가 그자리에서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학문적 소양이 있던 왜의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과의 대화에서 두 나라 사이에 교류하는 의리와 이해관계를 설명하였는데, 이마가와는 그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에 탄복하였다 한다.

규슈 성주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언행에 감복해 특별히 우대했다.


  일본 승려들이 모여들어 시를 청했고 매일같이 가마를 타고 규슈 내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1378년 7월 포로나 노예로 끌려갔던 수천 명을 배에 싣고 일본에서 돌아왔다. 고려인 포로 수천명을 구해 되돌아온 일로 명망을 얻었다. 이후 우산기상시·보문각 제학·지제교를 거쳐 1379년(우왕 5년) 우산기상시를 거쳐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 판서(禮儀判書)·예문관 제학·전법판서(戰法判書)·판도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문관으로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가하였다.

1380년 9월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가던 중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들른다. 이곳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환영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당시 종사관이 되어 황산대첩에 참가했던 정몽주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잔치자리를 빠져나와 말을 달려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한탄하는 시를 짓는다.


1388년 5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이를 적극 도와주었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18] 1388년 최영과 우왕이 계획한 요동 정벌이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고, 우왕이 폐위당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창왕(昌王)이 왕위에 올랐다. 국가 운영은 이성계가 주도했고, 정몽주는 더욱 출세 가도를 달렸다.[19]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결합한 신진사류 대부분이 정치 일선에서 활발한 활약을 보였지만 정몽주는 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 뒤 밀직제학(密直提學)·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보문각 제학·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우왕 7년) 초 첨서밀직사로 승진했다.
1381년(우왕 7년)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봉해지고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선발되어 진공사(進貢使)로 명나라에 가다가 여진족을 만났으나 어렵게 야인들의 화를 피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측의 오만한 태도와 입국 거부로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고, 그해 청시사(請諡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으나 역시 입국을 거부당하여 요동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1383년(우왕 9년) 3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동년 가을 동북면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정몽주는 자원하여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감축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게 하였다. 또한 이전에 억류된 홍상재 등도 풀려나 돌아오게 했다.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여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선발하였고, 1386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다시 동지공거가 되었다.


1386년에는 명나라에 바쳐야 할 5년간의 공물과 일방적으로 명나라에서 늘려 정한 공물을 면제하여 줄 것을 청하러 간 것이었는데[17], 명의 황제로부터 (공물 면제) 승낙을 받고 돌아옴으로써 집정자들의 큰 부담을 덜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의 흉년과 입을 옷감이 부족한 점을 들어 구원을 요청하여 명나라로부터 갓과 의복, 옷감 재료의 지원을 받아오는데 성공하였고, 동시에 명나라로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밀린 5년분과 증가한 정액을 모두 면제받았다. 우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옷·안장 등을 하사하였고, 그는 바로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1387년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7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원나라때부터 다스렸던 땅임을 들어 철령위를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 등 강경파와 외교로 해결하자는 이성계, 정도전 파로 나뉘게 되자 그는 외교론자가 되어 이성계와 정도전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해 6월 그는 하륜(河崙)·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건의하여 백관(百官)의 관복을 정하여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제도를 따랐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명나라 사신 서질(徐質)이 와서 보고 감탄하여,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따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한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정도전과 함께 불교비판의 선봉장에 서고, 유학을 권장하였으며 성균관을 통해 성리학 사상의 확산에 노력했다. 이후 최영을 비판하여 실각시키고 정계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그해 12월에 경사(京師)에 가서 조빙(朝聘)을 통하기를 청하였다.

고려사 정몽주전에는 이성계가 매번 출전할 때 정몽주와 함께 나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할만큼 이성계와 정몽주는 가까운 사이였다.[19]


정몽주는 이성계가 이름을 빛낸 1380년 전라도 남원군 운봉[19](지금의 남원 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여하기도 하였다.[20]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는 데 동의했던 정몽주는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이에 반대했다.[21]

이성계 일파에 대한 공격으로 그는 정도전이 탐욕스러운 존재라고 비난, 규탄했으며 우현보 일가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현보 일가는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우씨 집안의 여종이었고, 정도전의 외할아버지는 우씨 집안의 인척으로 승려가 된 김진인 점을 지목하며 정도전과 그의 아들들을 무시하였고, 정도전은 우현보의 일족들에게 악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이성계 주변인물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한다. 또한 그는 정도전의 외가가 우현보집안의 종의 자손임을 지적하여 바르지 못한 혈통에서 태어났다며 공격하였다.

이 비난을 듣고 감정이 상한 정도전은 그를 원수로 여기게 된다.


1391년(공양왕 3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어 인재 선발을 주관하였고, 바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그 뒤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산정하여 새로운 법령인 신률(新律)을 제정, 공표하여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임고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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