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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上古史&환단고기

환단고기 출간유래와 저자소개

ㅅㅏ진인생 2020. 1. 11. 17:18

 

  환단고기 출간과정 

  1911년 삼성기,단국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를 한권으로 묶어 "환단고기" 계연수 필사

  1979년 계연수제자 이유립 공개

  1982년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노보루"가 일본어로 번역된것이 한국으로 들어와 환단고기가 공개됨

    (1999년10월2일 41회  KBS역사스페셜 TV방영)

 

 

 

  삼성기(上)

  저자 / 안함로 安含老(579년~640년)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다
  23세(601, 진평왕23) 때 수나라로 가서, 열반에 이르는 십승十乘의 비법과 심오한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을 공부하고 5년 후 서역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삼성기(下)

  저자 / 원동중 元董仲(1330년~)

  필명은 동중(원천석)
  세조가 팔도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 로 기록되어 있다

  단군세기

  저자 / 이암李嵒(1297년~1364년)

  17세(1313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분 을 모시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시작하여

  두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 의 자리에 올랐다.

  북부여기

  저자 /  범장 范樟(1342년~)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령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郎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

  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그리고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 등이 있다.

  태백일사

  저사 / 이맥 李陌(1455~1528)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며 행촌 이암의 고손자다. 1474년(서종 5) 진사시에 합

  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 환단고기 " 출간과정과 초간본 목격 증언

  동영상

 

 2018. 12. 30. 17:37  

※광주환단고기북콘서트 <환단고기 출간과정> 녹취본

인류 원형문화 역사관, 문화원전, 역사경전이라고도 우리가 실제 의미를 부여하는데 환단고기 출간과정을 보면, 우선 환단고기 저자 다섯 분인데 이 분들의 약력을 보면

1. 안함로 <삼성기> 上

 

 

첫 번째 책, 삼성기 상 안함로 수나라를 유학한 도승인데, 이 분은 유불선을 회통한 분이야, 삼성기 상을 읽을 때 왜 즐겁냐?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

유일신(有一神)이 재사백력지천(在斯白力之天)하사

삼성기 上

오환건국, 인간에 대한 진리정의를 해놓고 우리들의 삶의 목적은 행복한 나라, 광명의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다. 건국을 우리들 삶의 근본주제로 선언하는거야.

재미있는건 뭐냐? 그 광명의 나라 환국은 어디에서 왔냐? 그 환국의 국가 건설과 경영과 국가 존립의 영원한 목적은 뭐냐? 유일신이라는거야. 서양의 오직 유唯자가 아냐, 있을 유有자야.

‘유일신(有一神)이 재사백력지천(在斯白力之天)하사’ 신이 광명의 우주하늘에 계셨다는거야. 그 단락을 읽어보면 그 한 단락에 유불선이 그냥 회통이 아니고 도통한 심법 경계에서 얘기하고 있다. 이 분의 일화를 써놓은 불교 책을 보면 이런 돗자리 깔아놓고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하늘을 날아다녀요.

2. 원동중 <삼성기> 下

 

원동중이란 분은 세종의 아버지,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야. (태종이) “국가를 위해서 봉사를 해주시오” “너하고 얘기 안한다”고 보따리 싸가지고 자리를 옮겼어. 이렇게 올곧은 선비정신의 대명사. 이 분이 삼성기 하를 썼어요. 배달국 환웅천왕 열여덟분의 족보가 나와. 이건 놀라운 사건이야. 그건 누가 조작을 할 수가 없는 거야.

3. 행촌 이암 <단군세기>

 

 

그리고 행촌 이암, 고려 말 여섯 임금을 섬기신 수상을 했던 분. 이 분의 집안이 아주 쟁쟁한 거예요. 이 분의 아우는 누구여? 바로 <삼성기> 하 쓴 태종의 스승인 원천석, 원동중 바로 그 분의 스승이야. 손자는 태종 이방원 아들 세종대왕의 스승이야  

그 이상의 지성이 어디 있냐 이거여. 태양과 같은 지성으로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여섯 임금을 섬긴 행촌 이암. 천하의 대문장가, 천하의 명필, 원나라 황제가 감탄했던 역사적 인물.

이런 역사적 인물들을 생각해보지 않고 “환단고기는 위서 조작된 책이다.” 이런 역사적 인물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 분은 단군은 마흔일곱분이다. 단군조선은 2096년, 4년 부족한 2100년의 역사 통치시간대가 있다.

4. 범장 <북부여기>

 

 

그다음에 북부여사 완성한 범장. 범장은 고려가 망할 때 함께 들어가서 불타 죽었던, 물론 범장은 자리를 옮겨서 살았지만, 이 분은 원천석하고 둘도 없는 친구예요. <화해사전>이란 책을 썼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런 유학자들하고 언어 세계가 다릅니다.

관련글: “원동중은 원천석” 

5. 이맥 <태백일사>

 

그 다음에 태백일사 여덟책을 써서 우주의 창세기 <삼신오제본기>, <환국본기> 환국에 대해서 따로 쓴거야. 또 배달국에 대해서 <신시본기>로 따로 쓴거야. 단군은 삼한으로 나눠 다스렸다. <삼한관경본기>라고 별책이 따로 있는거예요.

그 다음에 <소도경전본훈>이라고해서 우리의 신전, 한국인의 본래 신전에서 어떤 교육을 했냐? 어떻게 천제를 올렸냐? 이게 <소도경전본훈>이거든. 우리들의 본래 인류역사문화의 원형을 창조한 한국인 조상들의 국민교육경전 3대 경전에 대해서 정리를 한 게 있단말야.

그 다음에 고구려, 후 고구려, 발해라고 하지만 그건 식민사관이나 중화사관의 언어인데 대진국, 고려. 우리 역사의 대의를 바로잡아 주는데,

위서론주장 “환단고기는 원전이 없고 이유립이 창작한거다”

 

 

지금 위서론에서보면 ‘환단고기는 원래 원전이란거 초간본도 없고, 1979년도에 교정본이 마무리 되가지고 그 뒤에 나온 것이다. 이유립이라는 한 인물의 창작품이다. 대부분은 조작된거다.’ 이게 마녀사냥으로 ‘이것은 금서고 죽음의 책이다’ 지금 이렇게 되어있는데.

환단고기는 어느날 갑자기 이 책 한권이 세상에 뚝 떨어진게 아니고 환단고기 초간본이 이조왕조가 패망한 다음해 1911년 신해년에 30권 초간본이 나왔는데 이미 13년전에 서력으로 1898년에 <단군세기>*계연수가 간행이 됐어요. 그 다음에 1899년, 광무 3년에 환단고기의 80%를 차지하는 <태백일사>*계연수가 간행이 됐습니다. 이때 <천부경 요해>라는 계연수 선생의 책도 간행이 됐는데

 

그리고 1909년에 책으로 공부했던 해학 이기의 제자 계연수 선생이 이런 분들이 모여가지고 단학회를 조직했어요. 이 단학회를 알아야 위서론 시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1909년에 단학회가 조직되 가지고 마리산 참성단에 가서 삼신하나님께 직접 심고를 드린거야. 그리고 2년 뒤에 초간본 30권이 나왔고, 10년뒤에 (1920년)에 계연수 선생이 감영극이라는 조선인 밀정에게 잡혀가지고 일본 헌병대에서 아주 무참하게 온 뼈마디가 부러지고, 눈알이 빠지고, 마침내 저항이 끊어지지 않으니까 일본군 헌병대가 대칼로 사지를 잘라가지고 압록강에 수장을 시켰습니다.

이런 비극을 14세 소년때 직접 현장에서 본 (이유립). 단해 이관집 아버지와 더불어서 환단고기를 만주 배달의숙에서 공부했던 소년이 환단고기 한 권을 가지고 남쪽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이유립 선생 연보

이유립 선생이 1907년에 세상에 태어났는데, 이 분이 세 살때 어머니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환단고기가 나올때는 5세였습니다.

6세때(1912년) 아버지가 계연수 선생하고 광개토 대왕, 여기서는 광개토 성릉이라고 했는데 2차 참배를 했어요.

8세때(1914년) 1914년에 아버지께서 <천부경 집해>라는 책을 쓰셨어요. 그리고 몇 년 뒤에 책이 나오는데,

13세때(1919년) 만주로 옮겨가지고 여기 배달의숙 학당에서 아버지 따라서 역사강론을 들어요. 환단고기를 배워. 13세때부터 환단고기를 암송하는거야 이 의식이 참 중요해요.

14세때(1920년) 1920년에 조선독립소년단에 들어가서 단장이 되고, 평안북도에 있는 천마산대 소년통신원이 되가지고, 암기술이 기술적으로 발달한 것은 통신원 역할을 했기 때문에 책 20, 30권 50권 쭉 얘기하면 그걸 다 외운다는거야 그 증언을 한번 들어보죠.

“옛날에 계연수 선생이라든가 이기 선생이라든가 옛날에 이런 분들이 자기에게 얘기해준걸 기억해가지고 40권 쪽지를 주더라고, 그래서 갔더니만 사서라는 분이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걸 보고 달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그래가지고 그걸 복사를 다 해왔어요. 라면박스로 두 박스가 넘었어요.

도대체 선생님은 이걸 어떻게 다 기억을 하셨습니까 독립군들하고 독립군들 메시지 편지같은걸 전달하면 다 뺏기잖아요. 외워가지고 전달하는거야 그 역할을 했던게 대한독립 소년단 거기에 단장까지 하셨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외우는게 숙달이 됐다. 그때부터 훈련된거야 외우는게” - 박정학(한배달 회장) 증언

24세때(1930년) 나라가 망하면서 금식으로 세상을 떠난 해학 이기 선생이 “신교육을 배워야된다.” 그래서 삼육전제라는 삼육사를 조직해서 위원장이 되기도 하고

29세때(1935년) 삭주회 유교청년회 책임자도하고 32세때(1938년)는 동아일보 삭주지국의 책임자가 되기도 하고

35세(1941년) 늦은 나이에 신매녀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되기 1년전에 신시 개천경을 발표하는데. 이 신시개천경은 왜 중요하냐하면, 이건 나중에 남한에 내려와서 찍었어요.

관련글: “이유립은 친일파?” 

이 책은 우리 역사의 원형은 어디 있는거야.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 역사서에서 <삼국유사> 고조선조인데 이분은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냐 이것을 이해해야 이 분이 환단고기라는 책을 어떤 마음으로 가슴에 끌어안고 있느냐.위서론에 대해서 매우 중대한 사실인식을 하는데 하나의 표준이 되기 때문에 이 신시개천의 내용은 조금 이따 보여드리겠어요.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천마산에서 8.15해방 봉고제를 지내고 단학회 기관지 <태극>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주간으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1948년에 도저히 북쪽에서는 사상통제 때문에 살 수가 없어서 남쪽으로 가야겠다 결단을 내리고

그리고나서 자기 아내는 어린 딸, 세 살짜리를 데리고 같은 고향 사람 조카 이석영이 아내와 조카를 데리고 친족이 살고 있는 태전쪽 청주에 왔는데 그 이석영은 누구냐면 당대에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명리학의 1인자야 <사주첩경>을 쓴. 너무도 유명한 거야 이 사람은.

이유립 선생은 만주에 가서 여러 문헌이니 사람들 만나서 정리하고 조금 늦게 내려오는데, 이 양반이 내려오다가 안내원이 배반해가지고 해주 소재의 내무국 보안대에 걸려들어가가지고 거기서 죽도록 고문 받고 사경에도 헤맸다 그러는데 거기서 보초 서는 제자가 있어서 “선생님 나가시라” 해가지고 거기서 탈출을 했어요 4개월만에.

대동보 고성 이씨 족보를 찍느라고 해방 전에도 대전에도 여러번 왔었다는거야. 대전근교에 친족이 있는데 그 분이 대전에서 인쇄업을 하는 분이예요. 유명한 이문사 사장님인데 그래서 계룡산 신도안에서 머물다가 청주에서 가족을 찾아 겨울을 보내고 대전으로 옵니다.

그래서 1949년(43세)도부터는 1976년(70세) 서울로 가기전에 근 30년을 대전에서 사셨다고, 우리 집이 그분이 대전에서 살던 은행동하고 멀지않은 곳인데, 제가 10대때 보면 그 분이 가리방으로 긁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책자가 여러군데 돌아다녔어요

1949년 오형기 필사본이 나온 경위

(43세) 1949년부터 대전에 살면서 거기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뭐냐면 3월 16일날 강화도 참성단 가가지고 천제를 올린거야 자기 아는 사람들하고 이때 오형기라는 사람이 이 사람이 붓글씨를 아주 잘 써요. 환단고기는 다 이분이 쓴거거든. 이 분이 이유립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위원장을 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생애를 함께 한 거여.

 

이 양반이 환단고기 정서를 이유립선생하고 대화해서 허락을 받아가지고

이 분이 3월 16일날 시작해서 5월 종료를 했다는거야 이게 오형기 정서본인데

 

 

이유립 선생 따님과 제자 양종현씨의 환단고기 초간본 증언

그러고나서, 정착지가 대전 은행동 1층에서 살림하고 2층에 작은 다락방이 있어. 지금도 보존이 되어있는데, 다락방 한쪽에 제자들 십대 소년들 오면 서너명 간신히 앉거든 그때 공부했던 젊은이 가운데 지금 그 양반들이 60, 70이 되는데, 그 분들을 내가 불러가지고 이분이 수석제자인데, 양종현은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친구들하고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 분 어머니가 이유립선생 아내하고 시장에서 같이 장사를 했어. “내 아들이 이렇게 똑똑하다” 하니까 이유립 선생이 아내 얘기를 듣고 집에도 찾아갔다는거야 “야 종현아 너 식민사학 배우지말고 나한테 직접 우리 역사 진수를 배워라” 그래서 학교를 그만뒀어요.

양종현과 몇 사람들을 내가 직접 만나서 얘기도 듣고 그랬는데, 그 아내되는 분이 살아계시고 따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한번 물어봤어요

 

 

“환단고기라는 책을 실제 이름을 들어봤냐” 그러니까 따님(이순직)은 자기는 십대때 들었다.

그게 언제냐면 그게 여고 한 2학년때 들어본거 같다. 아버지한테 환단고기라는걸 들어본

기억이 있다고 보니까 1963년, 1964년 그때야.

 

그리고 2년 뒤에 양종현 선생이 문하에 들어가서 직접 책을 보면서 배웠다는거야. 환단고기 원전을.

“환단고기는 원래 원전이 없는거다. 환단고기는 1979년에 교정이 끝나서 1980년 초에 나온거다. 그래서 사료가치가 없다.”

이렇게 낙인을 찍어가지고 대한민국 사학과 역사과 학생들 물어보면 “그 책은 절대 봐서는 안되는 책, 봐야 백해무익한 책” 전혀 관심이 없어요

<환단휘기>는 해설서

환단고기는 여러가지 얘기가 있거든, 환단고기가 아니고 원래 그 양반이 1970년대에 자기 저서에 쓸 때는 <환단휘기>라고 했다.

이 환단휘기는 내가 두 권을 가지고 있는데 양종현 선생이 기증한 것도 있고, 이게 환단휘기야 이것은 네 권의 다른 책을 여기다 주석을 붙이고 해석한 건데, 내가 양종현 선생한테 10년을 물어봐. 어떤 주제든지 열 번 이상 물어서 거기서 진실이 느껴질 때 제가 사실로 인용하거든요. 이 양반이 뭐라고 하냐. 한번 보지요

- 아래는 양종현 증언

“1966년도에 고등학교 1학년때죠. 그때 선생님을 처음 만나뵈었습니다. 한암당 선생님 사모님 신매녀 선생님과 제 어머니는 목척 시장에서 같이 장사를 하시는 분이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선생님께서 저를 만나보고 싶다고 청해가지고 제가 선생님을 만나뵈었습니다.

선생님 댁은 1,2층 적산가옥이었는데 지금도 그 집이 남아있습니다. 그 집 1층은 세 평쯤 되는데 2층은 선생님이 서재로 쓰고, 그 서재 이름이 한암당이었습니다.

이층에서 선생님이 앞에 앉으시고 처음에는 저 혼자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제가 선생님 말씀 배우는게 아주 유익하고 좋아서 주위 친구들을 모아가지고 여러 명이 같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모임 이름이 ‘회일강좌’였습니다.

제가 처음에 환단고기를 본건 1960년대 고등학교 1학년때(1966년) 선생님 댁에서 계연수 선생이

목판인쇄를 한 걸 봤습니다.

 

 

너무 소중하게 다뤄서 오랫동안 갖고 계시면서 책이 깨끗했습니다. 그 책이 특징이 있습니다.

그 모양은 색깔도 비슷하고 엮은 것도 같은데 다만 ≪환단고기≫라고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환단고기≫

 

 

당시 선생님께서는 책을 엮은 끈이 떨어져가지고 그걸 하려고 애쓰시는걸 보고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해서 책을 엮어드렸더니 선생님이 책을 보시면서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1976년 8월) 선생님께서 백내장을 앓고 계셔서 군산 일가인 공안과에 눈 치료를 하러 가계시는 동안에 집주인이 집세가 5개월 이상 집세가 밀렸다고 야반도주한줄 알고 집기 팔면서 책도 다 팔아버렸습니다.

그 판 속에 환단고기가 들어있어가지고 선생님이 낙담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환단고기를 잃어버리고 낙심하시고 계실 때, 저도 같이 걱정하니까 “상관없다. 내 머릿속에 다 들어있으니까.””

대전에서의 고난의 시절, 약 30년. 일주일씩 밥을 굶어가면서 10대 젊은이들에게 뭔가 민족, 역사광복의 불을 지피려고 했었던 노옹의 고독한 삶.

여기서 뭔가 좀 서광이 비쳐가지고 이분이 70세때, 1976년도 서울 상계동에 이사를 갔어요 이 분이 서울에서 역사운동의 많은 기회를 갖게 되고 참여하게 되고 조직속에서 함께 일도 하고 그랬는데. (끝)

 

승정원일기 영조8년1월11일

(승정원은 지금의,대통령 비서실이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