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투후 김일제
- 화원유원지
- 한국사연표
- 대구수목원
- 한국역사
- 문태갑
- 우포늪
- 포네틱코드
- 남평문씨인흥세거지
- 포토샵 단축키
- SWR
- 행촌이암
- 상고사
- 인수문고
- 남평문씨 세거지
- 전리층
- 이승만
- 보이저호
- 10대뉴스
- 지구
- 남평문씨
- 중국연대표
- 단군
- 환단고기
- 포토샵
- 10대 뉴스
- ISS
- 1.끝나지 않은 전쟁 2.자연생태계 3.민통선 개척민 4.두 얼굴의 DMZ
- 판문점선언 소요예산
- 환단고기 출간
- Today
- Total
ㅅㅏ진인생/DS5ZWK
광개토태왕비문(414년 장수왕3년) 본문
<1913년 촬영>
고구려시대/광개토대왕비/고구려414년(장수왕2년)/높이630cm/
국립중앙박물관
<廣開土好太王碑 釋文 및 飜譯>
고구려연구회 윤독회 옮김
* 廣開土好太王碑 原文을 판독하는데 대비한 탁본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酒 影信本, 1881∼1883.
(2) 水谷悌二郞本, 1887∼1889.
(3) 林基中本,
* 廣開土好太王碑 原文을 판독하는데 대비한 釋文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水谷悌二郞, {書品}, 1959.
(2) 王健群, {好太王碑硏究}, 1984.
(3) 武田幸男, {廣開土王陵碑原石拓本集成}, 1988.
(4) 林基中, {廣開土王碑原石初期拓本集成}, 1995.
① 고구려의 건국역사
[제1면]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命, 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聿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제1면] 아,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도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신이시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나면서부터 거룩한 △을 갖추셨도다. △△△△△△명(命), 수레를 타고 순행(巡幸)하며 남쪽으로 내려가시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게 되었다. 왕께서 (대수)에 이르셔서 곧 "나는 하늘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을 띄워라"고 말씀하시었다. 그 말씀에 따라 바로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들이 떠오르자, 건너셨도다.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도다.
세속의 지위를 즐겨하지 않으시자, 하늘이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하셨도다.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가시며, 세자 유류왕(儒留王)에게 도로써 잘 다스리라고 유언하셨도다.
② 광개토호태왕의 생애
大朱留王紹承基業, 還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爲永樂. 太王 恩澤△于皇天, 威武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대주류왕(大朱留王)께서 (나라의) 기틀을 이어 받으신 뒤, 십칠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도다. 열 여덟 살(391년)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했다. 태왕(太王)의 은택은 하늘에 두루 미쳤으며, 위무(威武)는 온 세상에 떨쳤도다. (태왕이) △△을 쓸어 없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케 하시니 나라가 부강하고 민호(民戶)가 불어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러나)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설흔 아홉 살(41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그 뒤) 갑인년(414)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옮기었도다.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새겨 후세에 알리고자 하니,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③ 업적1- 영락 5년(2728, 395) 비려(碑麗)정벌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稗麗不△△△, 躬率往討. 過富山負△, 至鹽水丘, 破其三部△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力城·北豊. 五備海, 遊觀上境, 田獵而還.
영락 5년(395), 을미년에 왕께서 패려(稗麗)가 △△△하지 않기 때문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負△)을 지나 염수(鹽水) 언덕에 이르러 세 부△ 6,7백 영(營)을 처부수고 소·말·양떼 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뒤 어가(御駕)를 돌렸다. 이에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쪽으로 와 △성·역성(力城)·북풍(北豊)으로 왔다. 왕은 사냥을 준비하도록하고 국경을 시찰한 뒤 사냥(田獵)을 하고 돌아오셨다.
④ 업적2-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기사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未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 王破, 百殘△△△羅, 以爲臣民.
백잔·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아직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그리고 왜(倭)는 신묘년(391)부터 무엄하게 건너왔기 때문에 왕께서 백잔과 왜는 공파하고 신라는 신민으로 삼았다.
⑤ 업적3- 영락 6년의 백제 정벌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 攻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摸耶羅城 莫△城 △△城 △而耶羅城 城 △△城 △△城 豆奴城 沸△△
[제2면]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城 △△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영락) 6(396)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을 거느리고 잔국을 토벌하시었는데 군△△ 먼저 일팔성·구모로성·각모로성·간저리성·△△성·각미성·모로성·미사성 고사조성·아단성·고리성·△리성·잡진성·오리성·구모성·고모야라성·막△성·△△성 등을 쳐서 빼앗으셨다. 그리고 이어서 야라성·전성·△△성·△△성·두노성·비△△
[제2면] 리성·미추성·야리성·대산한성·소가성·돈발성·△△△성·루매성·산나성·나단성·세성·모루성·우루성·소회성·연루성·석지리성·암문△성·임성·△△성·△△성·△리성·취추성·목발성·고모루성·윤노성·관노성·삼양성·△△성·△△노성·구천성·△△△△ 등을 치셨다.
△ 그 나라 성.
⑥ 업적3
殘不服義 敢出△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便△城 而殘主困逼 獻△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疋 王自誓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백잔이 의(義)에 굴복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므로 왕께서 크게 성내시어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특공대를 보내어 성을 다그치니, --------- 백제 임금은 괴롭고 지쳐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가는베 천 필을 바치며 왕께 무릎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는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왕이 지난날의 어리석은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 뒤의 순종하는 정성을 받아 들이셨다. 이에 58성과 마을 700을 (얻어)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열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돌려 도성으로 돌아오셨다.
⑦ 업적4- 영락 8년 숙신 정벌(?)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帛愼土谷 因便抄得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服事
(영락) 8(398)년 무술에 교지를 내려 군대 일부를 파견하여 백신의 토곡(土谷)을 순시케 하였는데 그 편에 바로 막△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00여명을 잡아오니, 이 때 부터 조공을 바치고 섬겼다.
⑧ 업적5- 영락 9,10년 신라를 침입한 왜구(倭寇) 정벌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遣使還 告以△△
(영락) 9(399)년 기해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통하였다. 왕이 순시차 평양에 갔을 때 신라가 사절을 왕에게 고하기를 "△인들이 국경에 가득차 성과 못을 파괴하고 있으니 이 노객(老客)을 백성으로 여기시는 왕께 구원을 요청합니다"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그들의 충성을 칭찬하며 사절들이 돌아가 △△를 알리도록 하였다.
⑨ 영락 10년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來 安羅人戍兵 △△△△△其△△△△△△△△
[제3면]
△△△△△△△△△△△△△△△△△△△△△△△△△△辭△△△△△△△△△△△△△潰△△△△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新羅寐錦△△僕勾△△△△朝貢
(영락) 10(40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니 왜△가 그 안에 있었는데 관군이 곧 이르자 왜적이 물러났다. △△△△△△△△ 뒤에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쳐 빼앗아 탈환하였다. 안라인(신라인) 수병(戍兵)이 신라성과 △성에서 왜를
궤멸시켰다. ....
[제3면] ... 옛날에는 신라 임금이 스스로 와서 △△한 적은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게 △△신라 임금이 .... 조공하였다.
⑩ 업적6- 영락 14년 대방침입 왜구 격멸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 △連船△△△△△率△△△平穰△△△鋒相過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영락)14년, 왜(倭)가 법도를 지키지 않아 대방경계를 침입하였다. △△△△석성을△하였다. 연선(連船)△하고, △△△△△을 이끌고 평양을 △하고 △△△봉(鋒) 서로 만나니 대왕의 군대가 (왜구를) 깨끗이 쓸어 괴멸 시키니 참살된 왜구가 수없이 많았다.
⑪ 업적7- 영락 17년 후연(後燕)정벌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殺蕩盡 所穫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城 △△△△△△那△城
(영락)17년 정미에 교지를 내리시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 △사(師)△△전투가 붙어 참살·소탕하니 적으로부터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에 이르고, 군수품과 장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누성·△△성·△△△△△△△△성을 쳐부셨도다.
⑫ 업적8- 영락 20년 동부여 정벌
卄年庚戌 東夫餘舊是雛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國駭 △△△△△△△△△ 王思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영락)20년 경술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왕께서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셨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온 나라가 놀라 △△△△△△△△△, 태왕의 은혜가 널리 퍼졌다. 돌아올 때 (태왕)의 덕을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사람(집단 . 부락)이 있는데 미구누압노·비사마압노·서사누압노·숙사사압노·△△△압노이다.
(태왕께서) 공격하여 함락시킨 성이 64개, 마을이 1400군데였다.
⑬ 묘지기 연호(烟戶)
守墓人烟戶 賣勾余民 國烟二 看烟三 東海賈 國烟三 看烟五 敦城民 四家盡爲看烟 于城 一家爲看烟 碑利城 二家爲國烟 平穰城民 國烟一 看烟十 誓連 二家爲看烟 △婁人 國烟一 看烟 三 △谷 二家爲看烟 梁城 二家爲看烟 安夫連 卄二家爲看烟 △谷 二家爲看烟 新城 三家爲看烟 南蘇城 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 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 五家爲看烟 勾牟客頭 二家爲看烟 求底韓 一家爲看烟
舍 城韓穢 國烟三 看烟卄一 古△耶羅城 一家爲看烟 △古城 國烟一 看烟三 客賢韓 一家爲看烟 阿旦城雜珍城 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 九家爲看烟 臼模盧城 四家爲看烟 各模盧城 二家爲看烟 牟水城 三家爲看烟 幹 利城 國烟一看烟三 舊城 國烟一 看烟
[제4면] 0000七 也利城 三家爲看烟 豆盧城 國烟一 看烟二 奧利城 國烟二 看烟八 模鄒城 國烟二 看烟五
百殘南居韓 國烟一 看烟五 大山韓城 六家爲看烟 農賣城 國烟一 看烟七 閏奴城 國烟二 看烟卄二 古牟婁城 國烟二 看烟八 城 國烟一 看烟八 味城 六家爲看烟 就咨城 五家爲看烟 穰城 卄四家爲看烟 散那城 一家爲國烟 那旦城 一家爲看烟 勾牟城 一家爲看烟 於利城 八家爲看烟 比利城 三家爲看烟 細城 三家爲看烟
묘지기 연호(烟戶) 수는 매구여(賣勾余)의 백성 가운데서 국연(國烟)이 2집 간연(看烟)이 3집, 동해고(東海賈)에서는 국연 3집 간연 5집, 돈성(敦城) 백성 가운데서는 4집 모두가 간연, 우성(于城)에서는 간연 1집, 비리성(碑利城)에서는 국연 2집, 평양성(平穰城) 백성 가운데서는 국연 1집 간연 10집, △연(△連)에서는 간연 2집, △성(△城)에서는 간연 2집, 안부련(安夫連)에서는 간연이 22집, 개곡(改谷)에서는 간연 3집, 신성(新城)에서는 간연 3집, 남소성(南蘇城)에서는 국연 1집이다.
새로 들어온 한(韓)과 예(穢) 가운데는 사수성(沙水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1집, 모루성(牟婁城)에서는 간연 2집,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에서는 간연 5집, 구모객두(勾牟客頭)에서는 간연 2집, 구저한(求底韓)에서는 간연 1집, 사조성(舍조城)의 한(韓)과 예(穢) 가운데서는 국연 3집, 간연 21집,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에서는 간연 1집, 막고성(莫古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3집, 객현한(客賢韓)에서는 간연 1집,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에서는 합해서 간연 10집, 파노성(巴奴城)의 한(韓) 가운데서는 간연 9집, 구모로성(臼模盧城)에서는 간연 4집, 각모로성(各模盧城)에서는 간연 2집, 모수성(牟水城)에서는 간연 3집, 간저리성(幹저利城)에서는 국연 2집 간연 3집, 미추성(彌鄒城)에서는 구연 1집 간연 11집,
[제4면] .... 야리성(也利城)에서는 간연 3집, 두노성(豆奴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2집, 오리성(奧利城)에서는 국연 2집 간연 8집, 모추성(模鄒城)에서는 국연 2집 간연 5집.
백제 남쪽에 사는 한(韓) 가운데서는 국연 1집 간연 5집, 대산한성(大山韓城)에서는 간연 6집, 농매성(農賣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7집, 윤노성(閏奴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22집, 고모루성(古牟婁城)에서는 국연 2집 간연 8집, 전성(전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8집, 미성(味城)에서는 간연 6집, 취자성(就咨城)에서는 간연 5집, 삼양성(삼穰城)에서는 간연 24집, 산나성(散那城)에서는 국연 1집, 나단성(那旦城)에서는 간연 1집, 구모성(勾牟城)에서는 간연 1집, 어리성(於利城)에서는 간연 8집, 비리성(比利城)에서는 간연 3집, 세성(細城)에서는 간연 3집이다.
⑭ 묘지기 제도의 정립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 守墓 西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 西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 看烟三百 都合三百 家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守墓人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계셨을 때 말씀하시기를 "선조 왕들께서는 원근 지방에 사는 구민(舊民)들만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고 청소를 하게 하였다. 나는 구민(舊民)들이 점차 고달퍼져 열악하게 될까 걱정이 된다. 때문에 내가 죽은 뒤 내 무덤을 지킬 자들은 내 스스로 돌아다니며 직접 데리고 온 한(韓)족이나 예(穢)족 들에게 수호·소제하는 일을 맡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대로 한족과 예족 220집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법칙을 모를까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집을 데려와 새로 온 사람들과 합치니 묘지기 호수가 국연(國烟)30집, 간연(看烟) 300집이 되어 모두 330집이 되었다.
윗대 선조와 선왕(先王)이래 묘에 비석을 갖추지 못하여 묘지기 연호들이 착오를 일으켰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은 선조와 선왕의 무덤에 모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셨다. 또 묘지기 제도를 제정하여 앞으로는 묘지기를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셨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하고, 법령을 어기는 자 가운데서 파는 자는 벌주고 사는 자는 법을 만들어 그 자신이 묘지기가 되도록 하였다.
[출처] 광개토태왕비 원문과 번역문(고구려연구회 윤독회)|작성자 정감
'역사_대한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후 김일제는 누구인가? (KBS 방송) (0) | 2020.01.23 |
---|---|
신라김씨의시조"흉노족 김일제"(김수로왕은 김일제의 동생 윤의5대손...) (0) | 2020.01.23 |
▶ ▶ ▶ 식민사학이 숨긴 한국사의 진실(이완영 대한사랑) (0) | 2020.01.19 |
고려왕릉 현황 (0) | 2020.01.04 |
종묘사직(설민석강의) (0) | 2019.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