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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박원순 서울시장

ㅅㅏ진인생 2020. 7. 10. 04:54


【서울=뉴시스】김인철 기자 = 박원순 서울시장이 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서울시 2015년 신년인사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15.01.07. yatoya@newsis.com
박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의 한 농가에서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에는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친형을 따라 상경해 경기고에 입학했다.
법조인의 꿈을 안고 재수 끝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한 지 3개월 만인 1975년 5월 고(故) 김상진 열사의 추모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4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제22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대구지검 검사로 재직했으나, '사람 잡아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사표를 썼다는 게 박 시장의 설명이다.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박 시장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시국사건들의 변론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0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미국 문화원 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등 민감한 사건을 주로 맡았다.
박 시장은 이 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인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으로 주목받았다. 직장내 성희롱이 불법이라는 인식을 최초로 갖도록 한 이 사건은 6년의 법정 공방 끝에 1998년 서울고법에서 승소하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1994년에는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면서 박 시장은 시민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약하면서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 '국회의원 낙선운동', '1인 시위' 등을 벌이며 정치권과 사회에 새로운 개혁 방안을 제시하며 주목을 받았다.
시민운동을 우리사회에 정착시킨 박 시장은 2000년부터 '기부·나눔·참여'에 관심을 두며 또 한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00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적 기업인 아름다운 가게도 열었다. 2006년부터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재직했다. 희망제작소는 공공기관에 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관협치 기관으로 평가받는다.

그랬던 그가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 후보로 급부상했다. 사상 처음으로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으로 대중 정치의 영역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은 많았다. 박 시장이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뒤부터 여권의 검증 공세가 이어졌다. 병역, 가족사, 학력, 과거 이력 관련 의혹이 쉴새 없이 제기됐다.
결국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양보로 단일화되면서 당선에 성공했다.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강북 '옥탑방살이' 한 달을 마친 박원순 서울시장이 19일 오후 서울 강북구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시민과 동고동락 성과보고회에서 정책발표를 하고 있다. 2018.08.19. park7691@newsis.com

서울시장이 된 박 시장은 재선에 당선된 이후에도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도시재생 등 자신이 꿈꿨던 수많은 사회혁신 정책을 하나 둘씩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중도포기 했으나, 서울시 최초로 3선 시장 고지에 오르면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박 시장은 '서울 10년 혁명 완수'라는 큰 목표 아래 자신의 정체성과 같은 '시민과의 협치', '경제', '평화와 안보' 등 굵직한 정책을 내놓았다. 협치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서울시 위원회는 2011년 103개에서 2017년 7월 189개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유망 스타트업 100개사를 선정해 제품화부터 판로개척, 지식재산권 출원까지 기업당 1억원의 '성장촉진 종합패키지'를 지원, 성장기 스타트업 전용 펀드를 1150억원 규모로 조성해 기업당 최대 30억원 이상을 투자, 바이오·의료 산업, 핀테크·드론·로봇 등의 산업을 전략산업 집중 지원 등에도 앞장섰다.
서울-평양간 적극적인 도시교류를 통해 서울 테두리 안에서 한계에 도달한 여러 산업들을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올해 1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하면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방역에 성공한 서울시가 '익명검사', '고위험군 선제검사' 등을 제시하며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방역의 표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박 시장은 시장 마지막 임기, '서울 10년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강남·북 균형발전'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강남과 강북이 격차를 없애 서울이 고르게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시민들이 체감하는 삶의 변화를 이뤄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더 큰 꿈을 꾸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지난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일명 '박원순계'라고 불리던 이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하면서 박 시장의 큰 꿈은 한층 더 탄력을 받기도 했다.
박 시장은 3선 시장으로서 임기 반환점을 돈 지난 6일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안 되고 싶어도 하게 되는 운명적인 직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시 10년 혁명' 완성을 1년 2개월, 대선을 1년 6개월 남짓 남겨두고 박 시장은 2020년 7월 사망했다.

출처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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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의 유서

내 딸과 아들에게..

유언장이라는 걸 받아 들면서 아빠가 벌이는 또 하나의 느닷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남길 재산 하나 없이 무슨 유언인가 하고 내 자신이 자괴감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유산은커녕 생전에도 너희의 양육과 교육에서 남들만큼 못한 점에 오히려 용서를 구한다.

그토록 원하는 걸 못해준 경우도 적지 않았고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모여 따뜻한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구나. 그런 점에서 이 세상 어느 부모보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점을 실토한다.

가난했지만 내 부모님께서 내게 해주신 것으로 보면 특히 그렇단다. 우리 부모님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바치신 분들이다. 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 나를 뒷바라지해 주신 그분들은 내게 정직함과 성실함을 무엇보다 큰 유산으로 남겨 주셨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재대로 시간을 내지도 못했고, 무언가 큰 가르침도 남기지 못했으니 그저 미안하게 생각할 뿐이다. 다만 그래도 아빠가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죄를 짓거나 욕먹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니 그것으로나마 작은 위안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부모님의 선한 심성과 행동들이 아빠의 삶의 기반이 되었듯 내가 인생에서 이룬 작은 성취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바른 생각들이 너희의 삶에서도 작은 유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분명 아빠의 변명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홀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단지 책 보따리 하나 들고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컸다. 학창시절에는 감옥도 가고 학교로부터 제적이 되어 긴 방랑의 세월도 가졌다. 긴 고통과 고난의 세월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그것에 굴하기는커녕 언제나 당당히 맞서 극복해 왔다. 그런 힘든 나날이 오히려 더 큰 용기와 경험,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니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진리임에는 틀림없는 듯 싶구나.

당연히 너희의 결혼을 치러 주는 것이 내 소망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너희에게 집 한 채 마련해주지 못하고 세간조차 제대로 사주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말아라. 그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이 아빠에게도 왜 없겠냐마는, 그래도 그런 능력이 안되는 나를 이해해다오. 우리가 약속했듯 대학까지만 졸업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너희가 다 알아서 해결하고 개척해 가렴.


그러나 너희가 아무런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거창한 부모를 가지지 못했다 해도 전혀 기죽지 말아라. 첫출발은 언제나 초라하더라도 나중은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인생은 긴 마라톤 같은 것이다. 언제나 꾸준히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인생을 잘사는 것이란다.

더구나 인생은 그렇게 돈이나 지위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희는 돈과 지위 이상의 커다란 이상과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아빠가 아무런 유산을 남가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큰 유산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아내에게..

평생 아내라는 말, 당신 또는 여보라는 말 한마디조차 쑥스러워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아내라고 써 놓고 보니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참 잘못했다는 반성부터 앞서는구려.

변호사 부인이면 그래도 누구나 누렸을 일상의 행복이나 평온 대신 인권 변호사와 시민 운동가로서의 거친 삶을 옆에서 지켜주느라 고되었을 당신에게 무슨 유언을 할 자격이 있겠소. 오히려 유언장이라기보다는 내 참회문이라 해야 적당할 것이오.

그래도 적으나마 수입이 있던 시절,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조금의 여윳돈이 있던 시절, 내가 다른 가족들이나 이웃, 단체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주는 것을 옆에서 말리기는커녕 당신 또한 묵묵히 동의해 주었소. 당신도 내 낭비벽의 공범이었으니 나만 탓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조금이나마 따로 저축이나 부동산을 남겨두었다가 이럴 때 비밀스럽게 내놓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법.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전세금이나 고향에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조그만 땅이 있으니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자위하지만 그래도 장래 우리 아이들의 결혼 비용이나 교육비에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사실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는구려.

그러나 우리가 그랬듯 살아가는 동안 겪는 어려움과 고난은 오히려 우리 아이들을 더욱더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니 모든 것은 운명에 맡겨 두는 것이 좋을 듯하오.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 게 또 하나 있소. 아직도 내 통장에는 저금보다 부채가 더 많다오. 적지 않은 빚이 있는데, 다행히 나와 함께 일하는 간사가 내가 마구 쓰는 것을 견제하면서 조금씩 적금을 들고 있는 모양이니 조만간 많이 줄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러나 혹시 그걸 다 갚지 못한다면 역시 당신 몫이 될 테니 참으로 미안하기만 하오. 내 생전 그건 어떻게든 다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소.

내가 당신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몇 가지 또 처리해 줘야 할 일이 있소. 내가 소중히 하던 책들, 이사할 때마다 당신을 고생시키며 모아온 그 책들은, 우리 아이들이 원하면 가지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대학 도서관에 모두 기증해 주기를 바라오. 아무래도 법률책이 많으니 고시 관련서만 가득한 서울대 법대에 기능하는 것도 좋겠소. 그 책들은 내가 평생 이 나라와 여러 나라에서 소중하게 모은 것들 아니오? 당신 밥 한끼 사주는 대신 함께 모은 것들이니 한 곳에 전해져 그 분야에 관심있는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소.


이미 안구와 장기를 생명나눔실천회에 기부했으니 그분들에게 내 몸을 맡기도록 부탁하오. 그 다음 화장을 해서 시골 마을 내 부모님이 계신 산소 옆에 나를 뿌려주기 바라오. 양지바른 곳이니 한겨울에도 따뜻한 햇볕을 지키면서 우리 부모님에게 못다 한 효도를 했으면 좋겠소. 원컨대 당신도 어느 날 이 세상 인연이 다해 내 곁에 온다면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겠소. 그래서 우리 봄 여름 가을 겨울 함께 이 생에서 다하지 못한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으면 하오.


그리고 내 마지막을 지키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소. 내 영혼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반가울 것이요. 내 부음조차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소. 신문에 내는 일일랑 절대로 하지 마오.


무책임한 남편이 끝까지 무책임한 말로써 이별하려 하니 이제 침묵하는 것이 좋겠소. 부디 몸조심하고 남은 인생을 잘 보내고 다음 세상에서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소. 감히 다시 만나자고 할 염치조차 없지만 그래도 당신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니 나로서야 또 만나자고 할 형편이오. 어떡하겠소? 다만 이 모든 것을 용서해 주오.

모든 가족과 지인들에게..

오늘날의 나를 만든 많은 분이 계시지만 그 가운데 내 형제들을 잊을 수는 없겠습니다. 어린 시절 내 학비를 보태고 부모님을 돌보던 큰누님과 매형, 아들만 귀히 여기는 집안 분위기와 부모님의 인식 때문에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외지에서 무진 고생만 한 둘째누님, 셋째누님, 시골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돕느라 시집갈 때까지 온몸을 바쳐 일한 넷째누님, 학문의 길을 걷느라 어려우신 걸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 형님, 그리고 오빠들 때문에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니고 내내 농사일만 하던 막내 여동생.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희생과 헌신에 대해 아무것도 갚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이 아리기만 합니다. 변호사 동생 또는 오빠를 두었으니 뭔가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아픈 가슴만 남았습니다. 다음 세상에서 혹시 그럴 위치가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동생 또는 오빠가 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향가 ‘제망매가’에서는 ‘같은 가지에 태어나 가는 곳 모르겠소’라고 노래했지만, 우리는 다음 세상에서 다시 함께 ‘같은 가지’로 태어났으며 좋겠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동네 친구들, 장난꾸러기에 지나지 않던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신 초등학교 선생님들, 많은 꿈을 심어주신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함께 유년 시절과 소년시절을 뛰놀며 꿈을 꾸던 친구들, 변호사 일을 하는 동안 나를 도운 사무장과 사무원들, 인권 변론을 함께 하면서 그 어두운 시절을 보낸 동료, 선배 변호사님들,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에서 함께 희망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밤낮을 잊으면 살고 있는 간사들, 거기에 기꺼이 회원이 되고 도움을 주신 분들.

그 모든 분에게 나는 큰 신세를 졌습니다. 많은 배움과 도움을 얻었습니다. 때로는 내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고 억지스런 요구로 손실을 입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꿈꾸어 오던 깨끗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그 못다한 몫은 바로 이제 여러분들이 이뤄 줄 것임을 믿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세상에서 반가운 얼굴로 맞겠습니다.

박원순 자서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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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202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