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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의 138자를 복원한 계연수의 무술등본(戊戌謄本) 본문

조선上古史&환단고기

광개토대왕비의 138자를 복원한 계연수의 무술등본(戊戌謄本)

ㅅㅏ진인생 2024. 11. 20. 18:17

광개토대왕비의 138자를 복원한 계연수의 무술등본(戊戌謄本)


138자를 복원한 운초 계연수의 무술등본(戊戌謄本)

운초 계연수(桂延壽, 1864-1920)는 1898년 5월에 집안에 있는 광개토태왕비를 답사하여 탁본을 떴는데 이것을 무술등본(戊戌謄本)이라 부른다.   


필자가 직접 찍은 광개토태왕비 : 고구려 붕괴 이후 발해, 거란, 금, 원의 영토가 됨. 조선의 사신들은 광개토대왕비를 금나라 유적으로 오인. <용비어천가>에는 황폐한 성과 오래된 비석을 언급. 성현 선생은 비를 읽어보지 못했다고 기록. 17세기 청나라 봉금제로 인해 방치. <고대사 숨은 이야기, 광개토대왕비의 비밀>


광개토태왕비 탁본의 종류 :  

원석탁본(原石拓本) : 원석탁본(아무런 가공 없이 비석의 상태 그대로 뜬 탁본)인 이른바 ‘청명(靑溟)본’과 ‘미즈다니(水谷)본’ 등 10여본이 있다.

묵본墨本 : 먹으로 채워서 탁본처럼 떠낸 것.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은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일본 육군대위가 1883년경 입수했다는 탁본이다. 

석회본 : 비면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보수하여 뜨는 방식. 지금 남아 있는 탁본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이때 1,802글자 중에서 알 수 없는 글자가 117자였다. 그후 14년이 지난 1912년 5월 다시 가서 탁본을 떴는데 많은 글자가 마멸되어 알 수 없는 글자가 더욱 많았다. 이에 운초는 무술등본을 바탕으로 138자를 복원하고 이를 징실徵實이라 하였다. 여기서 徵자는 證자와 같은 글자로, 징실은 사실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계연수가 쓴 <광개토성릉비문결자징실>의 서문

<광개토성릉비문결자징실(廣開土聖陵碑文缺字徵實>의 서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무술년(1898) 5월에 고구려의 옛 수도를 보고자 하여 출발하려고 할 때에 오동진(吳東振, 1889-1944)이 듣고 50金 의 여비를 주고 이참봉 홍린鴻麟이 또한 베를 내어서 보조해 주었다. 이에 장비를 꾸려 북쪽으로 갈 때 강계의 만포진을 걸쳐 배로 압록강을 건너 곧장 집안현에 이르니 이덕수李德洙와 김효운金孝雲과 백선건白善健이 먼저 비석가에 와 있었다.  

함께 머무르면서 비석의 등본뜰 일을 상의하고 장정 서너 명을 고용하여 성릉에 이르니 숲이 깊고 산이 험하여 가는 길이 많이 불편하였다. 일행이 먼저 술과 과일로 제사 지내고 또 기름과 술을 부어 청소를 한 뒤에 비의 전문을 본떠서 내니 글자가 모두 1802글자였다. 비록 글자 획이 정확하고 정돈되어 그런대로 판단하여 읽을 수 있었지만 끝내 등본을 뜨지 못한 글자는 오직 117자뿐이었다. 15년이 지난 임자년(1912) 5월에 또다시 가서 제사를 지내고 비를 관찰해보니 글자의 획이 더욱 감소되고 마멸되어 많은 곳이 옛날과 같지 않았다. 

 

계연수가 복원한 138자 살펴보기

이때 징실한 글자 138자는 다음과 같다. 징실자는 밑줄로 표시한다. ( )에 있는 것은 징실한 숫자이고, 번역은 논자가 추가하였다. 

 

①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태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 (징실) : 掃除仇耻 (2) : 원수와 부끄러움을 쓸어 제거하다.

 

②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 躬率往討.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징실) : 王以稗麗屢犯邊境 (4) : 비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③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노태돈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징실) : 百殘聯侵新羅(4) :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오니 매번 격파하였고(渡每破) 백잔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범함으로 (신라를) 우리의 신하로 여기시었다. 

 

* 노태돈은 “고대 왜가 신묘년 즉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격파하고 신라를 신하의 백성으로 삼았다.” 라고 일본과 같은 해석을 한다. 논자는 이 조문에서 渡海破의 海를 每로 보고자 한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渡와 달리 海의 ‘삼수변’은 세로줄 밖으로 나가 있어 ‘삼수변’을 버리면 每가 되기 때문이다. 




海자의 삼수변이 돌출돼 있다. 삼수변을 버리면 每자가 된다. 


이 주장은 탐철화耿鐵華가 처음 주장하였고 이도학도 이 설을 따르고 있다. 유승국 교수도 海字의 좌측 ‘삼수변’이 비문 종선 안에 있지 않고 선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하여 每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앞부분에서 “백잔과 신라가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라는 내용과, “신라를 고구려의 속민으로 여겼다.”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④ □□盧城, 仇天城, □□□□, □其國城

(고구려군이)...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징실) : 又分遣 急圍其國城 (5) : (고구려군이)노성, 구천성 등을 공취하고, 또 군사를 나누어 보내 급히 그 도성을 포위하였다. 

 

⑤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징실) : 橫截直突 掠使國城(4) :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 가로질러 끊고 곧장 돌격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도성을 공략하게 했다. 

 

⑥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 國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징실) : 官兵 躡跡而越 夾攻來背 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8) : 관병이 (도망간) 자취를 밟아 바다를 건너가 협공을 하면서 등 뒤로부터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렀다. 

 

* 고구려군이 도망가는 倭軍의 자취를 밟아 바다를 건너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렀다는 내용은 임나가라가 한반도의 남해안이 아니라 대마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혀준다. 


 

⑦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城□]#□□盡□□□安羅人戍兵[新]□□□□[其]□

라인(羅人)을 戍兵으로 두셨다.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징실) : 安羅人戍兵 拔始羅城都城 倭滿倭潰 城 六被我功 盪滅無遺 倭遂擧國 降 死者十之八九 盡臣率來 (20) : (안라인(安羅人)을 수병으로 두셨다. 시라성과 도성을 함락시킬 때) 왜적이 성에 가득했으나 왜적이 무너지니 성이 여섯 번이나 우리의 공격을 받고 탕멸하여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이고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여 왔다. 

 

* 7조의 첫 문장이 “拔始羅城都城” 이다. 시라성은 큐슈 대우국大隅國의 시라성始羅城으로 지금의 녹아도의 압랑군(姶良郡 : 아이라)이 옛 시라군始羅郡이고, 도성은 궁기현의 남쪽에 있는 성이다. 따라서 7조의 내용은 고구려 군이 큐슈의 남쪽을 초토화시키는 내용이 된다.  


 

⑧ □□□□□□□言]□□□□□□□□□□□□□□□□□□□□□□□□□□辭□□□□□□□□□□□□□潰]□□□□□□羅人戍兵.

 

(징실) : 滿假□□ 倭欲敢戰 與喙己呑 卓淳諸敵 謨□□官兵 制先直取卓淳 而左軍 由淡路島到但馬 右軍 經難波 至武藏 王直到竺斯 諸敵悉自潰 遂 分爲郡 安羅人戍兵. (55) : 滿假□□ 왜적이 감히 싸우려고 하여 탁기탄喙己呑 탁순(卓淳 : 지금의 박다)의 여러 적들과 함께 □□을 도모하다가 관병이 기선을 제압하여 곧장 탁순을 취하고 좌군은 담로도를 거쳐 단마(但馬 : 효고현 북쪽)에 이르고 우군은 난바(難波 : 지금의 오사카)를 지나 무장(武藏 : 近畿 동쪽, 지금의 동경)에 이르로 왕께서는 곧장 축사(竺斯 : 축자, 북큐슈)에 이르시니 모든 적들이 다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나누어 군을 만들고 안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 8조의 내용은 고구려군이 담로도를 거쳐 지금의 효고현을 치고 오사카와 동경까지를 공략한 내용을 담고 있다. 




⑨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14년[18] 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19]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징실) :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焚掠邊民 自石城島 連船 蔽海大至 王 聞之怒 發平穰軍 直欲戰 相遇 (19) :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계에 침입하여 불지르고 변방의 백성들을 노략질하며 석성도로부터 배를 잇대어 바다를 덮고 크게 이르니 태왕께서 듣고 진노하시어 평양의 군사를 출동시켜 곧장 만나 싸우려고 했다. 

 

⑩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징실) :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往討契丹城以太牢薦師祭□合戰(11) : 정미(407)에 전교를 내리시어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파견하여 가서 거란성을 치게할 때 태뢰로 군제를 올리고 전쟁을 하였다. 


407년에 거란성을 쳤다. [수서]<거란전>에 의하면 거란의 도읍은 송막松漠이다. 송막은 지금의 극동극십기와 위장현圍場縣 지역이다. 열제의 군사는 거란성을 친 뒤, 돌아오면서 사구성과 누성, 양주성을 격파하고 군현으로 삼았다.407년 3월에 북연의 고운과 화친을 맺었기 때문에 유주지역을 공략한 뒤 그쪽으로 돌아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⑪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징실) : 破沙溝城, 婁城, 爲郡縣 降凢□ 又襲取凉州城 (5) : 사구성, 누성을 격파하여 군현으로 삼고 범□를 항복받고 또 양주성을 습격하여 취하였다. 

 

⑫ 臼模盧城四家

구모로성 4가 (수묘인호구) 

  

 결론

이상의 내용은 운초가 무술등본을 바탕으로 138자를 징실 보결補缺 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징실한 138글자 중에서 3조의 4자, 6조의 8자, 7조의 20자, 8조의 55자, 8조의 19자 등 모두 106글자가 왜倭와 관련이 있으니 일본인들이 태왕비를 크게 훼손시켰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운초의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강단 사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태왕비의 연구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1932년 삼육사(三育社)의 회람 잡징 계연수의 ‘성릉보결자징실’을 게재했다가 압수당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의 편집자 전봉천全鳳天은 도주하였고 삼육사는 해산되었으며 관련자들은 구속되었다. 이를 보더라도 광개토태왕비문의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윤창열, <운초 계연수의 생애, 사상 및 업적>, 세계환단학회지 7권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