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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한국땅 !!!

ㅅㅏ진인생 2008. 7. 17. 19:15

2008.7월 일본대사관앞에서

 

대마도(對馬島) :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속한 695㎢ 규모의 열도.

 

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위치해 있고 우리나라의 부산에서 50km 정도, 일본 규슈(九州) 본토와는 132km 떨어져 있으며 일본에서는 쓰시마섬이라고 한다.

상도(上島), 하도(下島)의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산에서 대마도를 볼 때 두 마리의 말이 마주 보고 있다고 해서 지명이 대마(對馬)라고 불리어졌으며 일본 신화에는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하여야 하므로 고려 말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의 형식을 취하여 그 대가로 미곡을 받아갔으며, 조정에서도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우대하여 주는 등 대마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 이곳을 근거지로 왜구가 자주 출몰하자 조선 세종 때 이종무가 원정(遠征)을 하기도 했으며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이 열도는 다이묘(大名) 소씨(宗氏)의 봉토였다.

1274년, 1281년에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주민들이 대량학살당했으며 러시아는 1861년에 이 지역의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1488년 당시 명나라 사신이었던 동월(董越)이 영종의 명을 받아 조선 땅을 둘러본 뒤 작성한 견문록 ‘조선부’에 나와 있는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다.

 

 

한국, 샌프란시스코 조약때 대마도 영유권 공식 요구


1951년 美국무부 외교문서에 명시
입력 : 2005.04.10 17:01 / 수정 : 2005.04.10 17:01
한국은 지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이 조약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는다는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미국측에 공식 요구했던 것으로 9일 밝혀졌다.

연합뉴스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입수한 미국 국무부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있던 시기인 지난 1951년 4월27일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의 ’영토’ 부분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은 정의가 영구적 평화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대마도의 영토적 지위에 대한 완전한 검토를 할 것을 요청한다”면서 “역사적으로 이 섬은 한국 영토였으나 일본에 의해 강제적, 불법적으로 점령당했다”고 말했다.


이 문서는 또 “(초안의) 5번째 문단(paragraph)에서 일본은 사할린의 남쪽 절반과 모든 부속 도서 그리고 쿠릴 열도를 소련에 넘겨주도록 명령받는다”고 돼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사실을 고려해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말했다.


당시 양유찬 주미대사는 그로 부터 약 3개월 뒤인 7월9일 국무부에서 존 포스터 덜레스 대사를 만나 대마도는 당연히 한국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마도가 한국에 귀속될 것인가를 거듭 확인했다.


그러나 덜레스 대사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으며, 평화 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답변,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었던 사실은 익히 알려졌으나 한국 정부가 국제적인 조약에 명시하도록 공식 요구한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이다.


(워싱턴=연합뉴스)

 

 

대마도정벌 (對馬島征伐)

 

고려말·조선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세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한 일.


고려말·조선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세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한 일. 왜구는 13∼16세기 한반도와 중국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주로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대마도주는 소씨[宗氏(종씨)]로서, 이들이 대대로 대마도를 관리하며 살았는데,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농토가 척박하여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국내의 내환으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고, 빈민이 증가하여 비상수단에 의한 물자의 공급이 요청되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왜구의 창궐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추진된 대마도정벌은 수군의 확충과 화기의 발달이 뒷받침해 주었다. 즉, 고려는 초기부터 수군을 양성하였고, 현종 때에는 도부서(都府署)를 설치하여 전함을 건조하는 등 조직과 군비를 강화하였으며, 말기에는 수군을 재정비하였다. 화기는 1377년(우왕 3) 최무선(崔茂宣)이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20여 종을 제조하였고, 후에 화포를 전함에 배치하여 왜구를 섬멸하였다. 한편 최초의 대마도정벌은 1389년(창왕 1) 박위에 의해서였다. 박위의 정벌은 특히 우왕 재위 14년간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이기 때문인데, 그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선 300여 척과 관사·민가를 불태웠다. 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에 있었다. 태조는 조선 초에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이 때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였다. 왜구를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은 1419년의 기해동정(己亥東征)이었다. 기해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비인현(庇仁縣)의 도두음곶(都豆音串)의 침탈이었다. 이에 태종은 이종무(李從武)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하고 중군을 거느려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나아가 왜구가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다.
 

對馬島는 大韓民國 領土이다! 

  

對馬島は大韓民國の領土です

 

               Daemado belong to the territory of the Republic of Korea

  

                        '경상도 경주땅 對馬島를 생각한다'

                                         700년 전부터 우리 땅
                                     萬戶벼슬 하사받은 대마도주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내막
                                         이승만의 영유권 주장

 


대마도(對馬島)는 우리 땅이다! 

 
역사적 고증 충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이 일면서 한국은 마땅히 일본에 대항할 것이 없다. 오히려 일본은 그들의 교과서에서 독도를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독도에 대해서만 염려할 뿐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데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구한말 우리가 쇄국정책을 펼치는 사이 일본은 재빨리 대마도를 삼켜버렸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을 주장했는데…. 지금은 대마도 반환의 불씨를 지펴야 할 때다.       
신영길 < 한국장서가협회 회장 >


대마도는 남북으로 72km, 동서로 16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이다. 총면적은 714㎢에 이른다. 이 섬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깝다. 한국 남단에서는 53km, 일본 규슈(九州)에서는 147km 떨어져 있다. 대마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다에 떠 있는 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특히 남섬은 375.5m의 원견산(遠見山)을 필두로, 328.6m의 홍엽산(紅葉山), 158.2m의 백악산(白嶽山) 등이 있어, 온 섬이 숲으로 덮인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산림이 많다 보니 농사는 해안지대 일부 계곡에서만 가능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사 이래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잡은 어물을 배에 싣고 한반도로 가, 물물교환하는 형태로 호구지책을 삼아 왔다.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마국은 구야(狗耶·가야)에서 강 건너 1000여 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토지는 척박하고 산세는 험준하며, 깊은 숲이 우거져 있다. 길은 매우 좁아 짐승이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다. 사람은 1000여 호가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 그러나 좋은 농토가 없어, 해산물을 거둬 자활(自活)하고 있다. 식량은 선박을 이용해 한반도의 해안에서 구하고 있다.”

 
▲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한 1592년 일본의‘조선국지리도’중‘팔도총도’. 현존하는 지도는 1872년 재모사한 것이다. 지리적 개념이 부족해 독도(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졌지만 명백한 조선 영토로 돼 있다.


‘慶尙道에 속한 對馬島’

대마도는 고려 때부터 우리의 속령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083)부터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해행총재(海行摠載)’는 조선 초 신숙주(申叔舟) 등 17명의 관리가 통신사로 일본에 다니면서 남긴 기록물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에 이미 일본에 사는 왜인(倭人)들은 대마도를 외국으로 보았고, 대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반(半)조선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세종 원년(1419년) 조선 정부는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그리고 세종 9년(1427) 7월17일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1370~1447) 명의로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다. 여러 문헌에도 그렇다고 되어 있다(對馬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載 在文籍昭然可考)”고 적었다. ‘양계강역도(兩界疆域圖)’ 기서(記書)에도 “영남지대마도(嶺南之對馬島·대마도는 영남에 속한다)”라는 표현이 있으니 대마도는 우리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세종 24년(1442) 신숙주(1417~1475)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대마도에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성종 2년(1471)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는데, 이는 15세기의 대마도를 연구하는 기본 문헌 중의 하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대마도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군(郡)은 8개이고 사람은 모두 바닷가 포구에서 살고 있다. 대마도의 포구는 82개나 된다. 남북은 3일이면 다 돌아볼 수 있고 동서 횡단은 하루나 반나절이면 족하다. 바다와 접한 사면은 모두 돌산이고 땅은 척박하다. 백성은 가난해서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잡아, 팔아서 살고 있다. 종(宗)씨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되는데, 풍속은 신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소찬(素饌)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대마도는 해동 여러 섬의 요충지이므로 조선을 왕래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본도(대마도)의 거주자에 한하고 도주의 문인[渡航證]을 받아야 조선에 올 수 있게 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대마도는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재위 1419~1450년)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 영토라는 내용이 있다.

 

대마도 왜구들의 해적행위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해유록’은 여러 통신사의 일본 기행문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대마도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마주(對馬州)의 별명은 방진(芳津)이라고도 한다. 토지는 척박해서 채 백물(百物·100백 가지 産物)도 생산되지 않는다. 산에는 밭이 없고 들에는 도랑이 없고, 터 안에는 채전(菜田·채소밭)이 없다. 오로지 고기를 잡고 해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대마도인들은 서쪽으로는 (조선의) 초량(草梁·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모이고, 북으로는 일본의 오사카(大阪)와 당시 왜국의 수도인 나라(奈良)에 통한다. 동으로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장사하니, 바다 가운데의 한 도회(都會)와 같다.”

이때 대마주인들은 지금의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소주(蘇州) 사람이나 절강성(浙江省)의 항주(杭州)인, 복건성(福建省) 사람, 그리고 당시에는 ‘류큐(琉球)’로 불렀던 지금의 오키나와(沖繩)인, 또 아란타(阿蘭陀) 사람들과 해상교역을 벌였다. 그로 인해 대마도에는 주기(珠璣·보석)와 서각(犀角·무소 뿔), 짐승의 이빨가루, 후추, 사탕, 소목(蘇木·한약재), 비단 등이 폭주하였다. 대마주인들은 이러한 물품을 전매하여 번 돈으로 의복과 식량을 마련하고 생활필수품도 구입했다. 그러나 도주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대마도인들은 필사적인 해적행위를 하는 왜구(倭寇)로 표변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대마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본거지였다. 대마도 왜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에 처음 나온다. 신라본기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7년(408) 춘 2월조(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왜인이 대마도에 영(營)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를 습격하려고 꾀하고 있다.” 신라본기에서 처음 나온 왜구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서도 빈번히 나온다. 그만큼 한반도와 대마도는 밀접했던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교량

대마도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선사시대 부터 한반도 동남쪽 해안에서 실종된 물건은 해류를 따라 자연스럽게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남해를 흐르는 해류가 한반도 동남쪽과 대마도를 이어준 ‘다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해류 때문에 한반도의 문화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논농사(稻作)는 야요이(彌生)시대 한반도에서 전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도작은 단순한 기술만으로는 전파되지 않는다. 도작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야만 전해질 수가 있다. 도작 문화가 전파됐다는 것은 고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대마도를 거쳐 규슈 지역으로 집단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마도는 고대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이어주는 중계지였다.

삼국 통일을 달성해 가던 시절 신라는 왜에 대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대마도에 있는 천연 요새 가네다성(金田城)이다. 서기 663년 백제 부흥군을 후원하려고 온 일본군이 백강전(白江戰·백마강 전투)에서 전멸했다. 그러자 일본은 665년 대마(對馬)와 이키(壹岐)·규슈·봉화(烽火)에 변방 수비대인 ‘방인(防人)’을 두었다. 그리고 이듬해 백제에서 망명해온 달솔(達率·백제의 벼슬 이름) 억례복류(憶禮福留)와 사비복부(四比福夫)를 규슈 대재부(大宰府)로 파견해, 대야(大野)와 연(椽)에 두 개의 성을 쌓게 했다.

그리고 2년 후 대마도 천해만(淺海灣)에 가네다성을 쌓았다. 가네다성은 백제산성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 한반도를 향하고 있는 표고(標高) 274m의 바위산을 이용해 지어진 이 산성은 그야말로 천연 요새다. 가네다성이 완성됨으로써 대마도는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한 최전방 방어선이 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문종 3년(1059) 대마도로 표류해온 고려인을 고려로 압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 후에도 거듭된다. 문종 36년(1082)에는 대마도에서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공민왕 때 萬戶벼슬 내려

고려와 대마도가 정식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공민왕 17년(1368)이다. 이때 대마도주는 고려로부터 만호(萬戶) 벼슬을 받은 처지에서 사신을 파견했고, 고려는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대마도로 파견하였다. 같은해 11월 대마도 만호 숭종경(崇宗慶)이 보낸 사신이 고려에 왔기에 고려 정부는 쌀 1000석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주는 고려의 지방 무관직인 만호 벼슬을 받았고 쌀까지 얻어가는 처지였던 것이다.

일본 헤이안(平安)시대부터 가마쿠라(鎌倉)시대 초까지 대마도의 실권자는 아비류(阿比留) 집안이었는데, 1246년부터는 종(宗·처음에는 惟宗) 집안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니까 고려 문종으로부터 만호 벼슬을 받은 이는 아비류 집안이고, 공민왕으로부터 만호 직함을 받은 것은 종(宗) 집안인 것이다.

고려 말부터 대마도와 일본 근처에 있는 이키시마(壹岐島)·송포(松浦) 등지에서 발호한 왜구가 한반도 남해안을 약탈하고 때로는 육지 깊숙이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대마도주 종(宗)씨와 규슈의 탐제(探題) 이마가와(今川)·오우치(大內) 등 호족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를 금압(禁壓)하고 고려와는 평화적으로 교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게 된 근본 원인은 1218년과 1274년 두 차례에 걸친 여원군(麗元軍)의 일본 원정이 있은 후, 일본과 고려·중국의 통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南北朝)의 쟁란(爭亂)에 빠져 있어, 규슈와 대마도 등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이곳에 사는 변방민들은 부족한 주·부식을 획득하기 위해 왜구로 나선 것이다. 더욱이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정성(貞盛)이 집권했는데 종정성은 너무 어려 왜구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러한 왜구의 발호에 대해 고려 조정과 조선 조정은 회유와 무력 응징으로 대응했다. 조선 왕조는 왜구 근절에 훨씬 능동적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은 ‘이선치선이무제도(以善治善以武制盜·착하게 행동하면 좋게 다스리고, 도적질을 하면 무력으로 다스린다)’의 대책을 내놓았다. 조선 태조 5년(1396) 대마도인 구륙(六)이 선박 60척과 왜인 수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조선 조정은 구륙에게 ‘선략장군용양순위사행사직 겸 해도관민만호(宣略將軍龍巡衛司行司直兼海道管民萬戶)의 관직을 제수했다. 이듬해 구륙이 등륙(藤六)으로 이름을 바꾸자, 다시 종4품인 ‘선략장군행중랑장(宣略將軍行中郞將)’이란 관직을 제수했다.

태조 6년(1397)에 왜구의 한 우두머리인 임온(林溫)이 병선 24척을 이끌고 투항하자,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제수했다. 이 일을 계기로 망사문(望沙門)·곤시문(昆時門)·사문오라(沙門吾羅)·삼보라평(三寶羅平)·현준(玄准) 등 대마도에 거주하는 많은 왜구 두목이 투항해 관직을 받았다. 이러한 투항자 중에는 평원해(平原海)·등차랑(藤次郞)·간지사야문(看智沙也文)처럼 의술이나 조선술·제련술이 뛰어난 자도 있었다.


이종무의 기해東征으로 屬領化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재위 1401~1418년)은 왜구에 대해 강경책을 펼쳤다. 그는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했으나, 군사권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1419) 6월17일,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己亥東征]. 이에 따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 1360~1425)가 병선 227척과 장병 1만7385명을 인솔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의 천해만과 오자키(尾崎)·후나고시(船越)·진나(仁位)를 공격했다.

이종무 군을 태운 선단이 대마도에 접근했을 때, 대마도인들은 자신들의 왜구선단이 약탈품을 싣고 돌아오는 줄 알고, 영접하러 나왔다고 한다. 대마도에 상륙한 이종무 군은 적선 129척을 나포하고 왜구가 사는 집 1939호를 불질러 태워버렸다. 생포한 왜구는 12명이었고 참수(斬首)한 왜구는 114명이었다. 내친 김에 이종무 군은 왜구들이 심어 놓은 곡식도 베어 버려, 요행히 산 속으로 도망친 자들도 굶게 만들었다.

이종무 군이 감행한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인해 대마도주와 대마도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은 대마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는 왜인들에 게 교역을 허가했으나, 대마도인들의 도래는 허용치 않았다. 그러자 그해 9월20일에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이 항복[降]한다는 외교문서를 든 사자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응답하지도 않았다. 세종 2년(1420) 윤정월 10일 대마도주는 다시 사자를 보내, “대마도는 조선을 주군으로 하며, 그 주명(州名)을 지정받고자 한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서 주군인(州郡印)을 사여(賜與)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동년 동월 23일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외무장관 일을 맡는 예조판서 허조(許稠, 1369~1439)를 통해 대마도를 다시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그 군관에 대한 관례대로 관인(官印)을 사여하였다. 그 후에도 속령(屬領)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세종 25년(1443)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이 체결되어 대마도주는 1년에 50척의 세견선(歲遣船)과 200석의 세사미(歲賜米)를 특전으로 받게 되었다. 세견선 외에도 특송선(特送船)이란 명목으로 제한 없이 무역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중종 5년(1510)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이 왜란은 부산첨사 이우회(李友會)가 부산에 거주하는 왜인의 수를 제한하고, 웅천(熊川)현감은 왜인이 식리(殖利)하는 것을 금하자, 이에 자극받은 왜인들이 대마도 도주 종성순(宗盛順)의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부산첨사를 죽이고 웅천을 점령한 사건이다. 이에 조선은 왜인을 평정하고 삼포를 폐쇄하자 왜인들은 대마도로 도주하였다.

삼포는 중종 7년(1512)에 임신조약(壬申條約)으로 다시 열렸는데, 이때 세견선과 하사미를 반으로 줄였다. 중종 39년(1544)에는 사량왜변(蛇梁倭變)이 일어나 교역이 일시 단절되었다. 그러다 명종 2년(1547) 정미조약(丁未條約)을 맺어, 이미 반으로 줄어든 세견선 25척을 대선(大船) 9척, 중선(中船) 8척, 소선(小船) 8척으로 한다고 못박아 한층 엄격히 통제했다.

  

‘대국휼소국’의 관계

이현종(李鉉淙)이 편찬한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1964년 한국연구원 간행)에 따르면 대마도의 유력자 중에는 조선의 관직을 받은 ‘수직왜인(受職倭人)’과 특별히 세견선이나 세사미를 배당받는 자들이 있었다. 이키시마(壹岐島)에 있는 수직왜인은 3명인데, 대마도의 수직왜인은 17명이나 된다. 대마도인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받은 교지(敎旨)를 대개 ‘고신(告身)’이라고 한다. 대마도에서는 오자키의 소다(早田) 집안, 지다류(志多留)의 다게다(武田) 집안, 이나(伊奈)의 쇼야(小野) 집안에서 이러한 고신이 전해 오고 있다.

고신을 받은 대마도인들은 1년에 한 번 조선에 도래하여, 관직에 상당한 예우를 받고 특별한 이득을 얻어갔다. 조선 초기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세약선(歲約船)·수직인선(受職人船)·수국서인선(受國書人船)의 수가 204척이었는데, 그 중에서 대마도 배는 절반에 육박하는 124척이었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단절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침략군은 대마도의 대포(大浦)에 집결한 후 조선을 침공하였다.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자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대마도의 생사가 걸린 조선과의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에 대해 조선은 부정적이었으나, 종의지는 광해군 원년(1609) 기유조약(己酉條約)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 사이에서 줄타기 교린 우호 관계에 들어갔다. 대마도인들은 초량(草梁·부산)에 새로 왜관을 설치해, 문화·경제적 이윤을 얻게 되었다.

대마도 고문서 목록 서문에 따르면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표면상으로는 조선의 교린 정책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수직왜인은 조선 정부로부터 물품을 받는 처지였으므로 대마도는 ‘진상(進上)’, 조선은 ‘회사(回賜)’하는 것이 교류의 기본 형태였다. 조선과 대마도는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조선으로 보면 조선이 대마도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규휼하는 것)’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하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조선민족은 대륙문화의 계승자로서 대체로 도서(島嶼)를 경시하였다. 조선인들은 대마도를 척박한 섬으로만 보았다. 이러한 땅은 반역음모지(叛逆陰謀地)가 될 염려가 있어 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와 반대로 일본 본토에서는 범법자와 범죄자가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이들로 인해 대마도는 해적 소굴이 되었다. 이들이 조선의 해안지대를 수시로 침범해 약탈하자 조선은 강부(降附·항복하여 굴복하다)를 권고하기도 하고, 토벌(討伐)을 수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요구

 

1859년 3월31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으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유도에 의해 국내 정세가 크게 변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도 일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마도가 대행하고 있던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1868년 1월3일 도쿠가와 막부의 조번체제(朝藩體制)가 붕괴하고 왕정복고·왕위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웅번(雄藩)들은 판권봉환(版權奉還·왕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각번의 영주들의 영역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에 들어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시게노부(德川慶喜, 1837~1913년)도 정권을 개혁 조정에 반환하게 되었다. 1871년 8월29일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막부 시절의 번을 없애고 근대적 지방 행정기관인 현을 두는 것)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외번부용(外藩附庸)의 대마도주 종의달(宗義達, 1847~1902)도 대마도를 판적봉환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종의달은 조신(朝臣)과 근위소장(近衛小將)이라 칭하고 이스하라(嚴原) 번지사(藩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1877년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면서, 현에 속한 지방 행정지로 격하되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대마도주가 고려의 만호 벼슬을 가진 사신(使臣)으로 파견된 이래 대마도는 600여 년간 조선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의 관계를 맺어온 속방(屬邦)이었다. 그러다 일본 신제국주의의 마수에 걸려 일본에 귀속되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1863년 12월13일 즉위한 고종을 대신해 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1865년부터 조선은 임진왜란 때 타버린 경복궁을 중수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 전해인 1864년 4월22일에는 전국 서원의 향현사(鄕賢祠·향교와 사당)를 철폐하고, 척사 조치를 내리는 등 쇄국봉건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와중인 1868년 12월19일, 일본 정부는 일본이 왕정체제로 복귀해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조선에 통고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조정은 서계(書契·조선과 일본을 왕래하던 문서) 문구가 불손하다며 접수를 거절하였다. 그러다 1875년 8월20일 강화도에서 운양호사건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876년 2월2일 조선은 일본과 치욕적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였다.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임오군란→갑신정변→청일전쟁→명성황후 시해→노일전쟁→을사늑결(을사보호조약)→경술병탄(한일합방)→3·1 독립선언→1945년 8월15일 광복으로 숨가쁜 현대사가 이어진다. 이런 현대사 속에 우리는 대마도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광복 후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라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초대 부산수산대학장을 역임한 정문기(鄭文基, 1898~1996) 박사다. 정박사는 ‘대마도의 조선 환속과 동양평화의 영속성’이라는 논문에서 대마도를 조선으로 환속하는 것이 동양평화의 영속성을 기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미 군정 시기인 1948년 2월17일에 열린 제204차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입법의원 허간용(許侃龍·서북도 관선의원) 외 62명은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대일강화조약에 넣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폭주로 연기되다 회기가 종결됨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했다.


대마도 반환 불씨 지펴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이하 온 내각이 발칵 뒤집히며 반발하였다. 그런데도 이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9일 재차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9년 1월6일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한 이대통령은 이틀 후인 1월8일, 대일강화회의 참가계획을 발표하면서 또 한 번 대마도 반환을 주장했다. 국회에서도 앞으로 열릴 대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것을 촉구하는 건의안이 제출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요시다 총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방해되는 언사로 받아들이고 이대통령의 발언을 제지했다. 그 후 이대통령은 공식적으로나 문서상으로는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역설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역사적인 근거를 깔고 있는 올바른 발언이었다.

대마도는 치욕의 역사 속에서도 대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혼이 깃들인 섬이다. 올해 4월 부산 부경대학교(구 부산수산대) 강남주 총장은 대마도에서 입시설명회를 갖고 “대마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150km쯤 떨어져 있는 일본보다는 53km 만 떨어져 있는 한국을 더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깔려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강총장이 대마도에서 입시 설명회를 갖고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은 깊이 음미해볼 만한 일이다.

구한말 국제정세에 우둔했던 우리는 쇄국정책을 선택해, 대마도가 일본의 억압 속에 일본 영토로 귀속된 사실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당당히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따져볼 때다.

 


한나라 “대마도는 우리땅, 교과서 수정하겠다”…대마도 역사연구회 발족
 2008년 07월 17일(목)

 

(고뉴스=이세찬 기자) 일본의 독도 교과서 명기와 관련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주장과 함께 역사적 연구를 위한 움직임이 정치권에서 일고 있다.

부산시당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 김정훈 의원은 10여명의 소속 의원들과 함께 일본의 독도관련 망언을 규탄하는 한편, 가칭 ‘대마도 역사연구회’를 발족해 “대마도의 역사적 진실을 밝혀 대한민국 영토인지 확인하겠다”며 연구결과를 토대로 “영토 관련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우리 교과서 우리 교과서도 수정할 부분은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17일 국회 정론관에서 한나라당 김무성, 허태열, 김정훈, 김세연, 이종혁, 장제원, 박대해, 박민식, 허원제, 이진복 의원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히며 “지리적, 역사적, 지도 문헌상으로도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48년과 1949년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가 한국영토임을 천명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먼저 대마도의 지리적 요건에 주목, “대마도가 부산에서 최단거리로 49.5킬로미터인 반면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134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지리적으로도 부산이 훨씬 가깝다”며 “맑은 날에는 부산에서 대마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고, 대마도 주민들도 ‘새벽에 귀 기울이면 부산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할 만큼 부산과 대마도는 가깝다”고 역설했다.

또 역사적 사실로는 “문헌상으로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와 182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 등에 의하면 대마도는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 되어있다”며 “또한 12세기말 일본 승려가 지은 ‘산가요약기’에서 조차 ‘대마도는 고려가 말을 방목하여 기른 곳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또 “옛 지도상으로는 17세기말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독도와 대마도가 우리 땅으로 표기되어 있고, 심지어 풍신수길이(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침략을 위해 만든 지도인 ‘팔도전도’에서도 독도는 물론 대마도조차 조선땅으로 표기하여 침략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 김 의원의 설명.

아울러 “15세기에 중국에서 제작된 ‘조선팔도총도’에 의하더라도 울릉도, 독도, 대마도 모두가 우리 땅으로 표기되어 있다”며 “우리나라에서 16세기에 제작된 ‘팔도총도’,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좌전도’ 등에 의하더라도 대마도는 우리 땅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김 의원은 “대마도 역사연구회는 한나라당 부산의원들이 중심이 되고 민주당 부산의원, 부산광역시, 역사학자, 지리학자, 국제법 학자 등이 함께 참여하여 대마도 역사의 진실을 연구할 것”이라며 “대마도 관련 자료가 있으면 한나라당 부산시당 위원장 사무실로 연락해 달라”고 국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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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정벌 (對馬島征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일. 대마도 원정은 좁은 뜻에서는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한 일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고려 창왕(昌王) 때와 조선 태조(太祖) 때의 정벌까지도 포함한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의 해협에 위치하여 중개역할을 하는 특수한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하여야 하므로 고려 말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朝貢)의 형식을 취하여 그 대가로 미곡(米穀)을 받아갔으며, 조정에서도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우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대마도에 기근이 심할 때면 그들은 해적으로 돌변하여 해안을 약탈하므로 조정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다. ① 1389년(공양광 1) 2월에 박위(朴)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찾아왔다. ② 96년(태조 5)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③ 1419년(세종 1) 6월에 다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도주(島主) 소 사다시게[宗貞芽]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이었는데, 대마도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왜구는 대거 명나라 해안으로 향하던 중, 비인현(庇仁縣:舒川) 도두음곶(都豆音串)과 해주(海州) 해안을 약탈하였다. 조선에서는 왜구의 창궐과 행패가 새 도주 소 사다모리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하여 이종무를 삼군도제찰사로, 우박(禹博)·이숙묘(李淑畝)·황의(黃義)를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유습(柳濕)을 좌군도(左軍都)절제사,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 김을지(金乙知)·이순몽(李順夢)을 우군절제사, 도합 9절제사에게 삼남(三南)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을 주고 마산포(馬山浦)를 출발하게 하여 대마도로 진격시켰다. 당시 일본에서는 규슈[九州]의 제후(諸侯)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하게 하였으므로 원정군은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 수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해 6월에 회군하였다. 이 해가 기해년이었으므로 이 정벌을 일명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15>대마도의 역사적 진실

  
《“통한다!”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안의 한국전망대에 오르면 부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해질녘이면 부산의 야경이 빛나고, 카메라 줌을 당기면 광안대교의 불빛까지 선명하게 찍힌다. 여기 저기 휴대폰을 꺼내들고 문자메시지를 받거나 통화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취재팀도 휴대폰을 켜보니 액정화면에 안테나 5개가 기운차게 뻗어 올랐다. “휴대폰이 터지는 곳은 우리의 영토입니다”라는 모 통신사의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열차와 배로 6시간 거리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녁 때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왔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 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올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취재팀도 서울에서 오전 6시에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시반에 여객선으로 갈아탄 뒤 정오쯤 대마도 최북단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었다.

●한국의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섬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쓰라린 민족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

●본디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 땅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또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팔도총도’ ‘동국조선총도’ 등 조선시대에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조선의 고을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이즈하라의 슈센지에 있는 항일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최익현 순국비

●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이와 관련, 전북대 하우봉(河宇鳳) 교수(사학)는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의 류큐(琉球)왕국처럼 조선후기의 대마도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屬)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대마도는 우리 땅” 선언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재일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李新演) 단장은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에 살던 일본 주민들은 ‘한국이 독립을 해서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해했다”고 회고했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있는 고려문(高麗門). 대마도 번주가 살던 ‘사지키바라’ 성의 제3문으로서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됐다. 왼쪽은 조선시대 후기 한일간 조선통신사의 친선교류에 공로가 컸던 일본의 유학자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가 주창한 외교원칙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을 기리는 비.-대마도=특별취재팀

●독도문제보다도 입증할 자료 많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도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다.


하 교수는 “섬을 비워놓는 ‘공도(空島)정책’ 탓에 조선이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킬 기회를 놓쳤다”며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근거보다 한국의 대마도영유권 주장근거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는 차원에서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마도=특별취재팀


입력 | 2004.07.22 18:32                 
 

[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16>대마도 재발견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려는 대마도 번의 노력으로 조선의 문화사절단인 통신사가 약 200년간(1607∼1811)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현재 대마도 이즈하라에서는 한일교류의 상징인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고 8월 첫째주 주말에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열린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총각’이 한국말이라고요?” “아니 ‘지게’도 한국말이에요?” ‘쓰총’(쓰시마 총각) ‘삿총’(삿포로 총각)이란 줄임말을 쓰는 쓰시마의 택시 운전사에게 ‘총각’이 한국말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란다. 한국의 지게 역시 쓰시마에서도 ‘지게’로 불린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선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쓰시마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 일제시대 한국인 2만여명 살아


섬 전체의 92%가 척박한 산악지형이고 농토는 3%도 안 되는 대마도의 생존과 성쇠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교류에 크게 좌우돼 왔다. 대마도향토연구회 회장인 나가토메 히사에는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는 밝았던 시대와 어두웠던 시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좋았던 시기로 기원전 3세기∼2세기의 500년과 조선 초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인구가 9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 지금은 4만여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도 일제강점기에는 2만여명이나 살았지만 지금은 60명에 지나지 않는다.


1999년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엔 1만5300명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았다. 파고가 높아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으면 대마도의 주요 호텔과 음식점들이 텅 비기도 한다.


● 한복입고 참가하는 ‘아리랑 마쯔리’


조선시대 때도 대마도엔 주기적으로 ‘조선 붐’이 일었다. 관료 학자 통역관 악대 등 50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갈 때면 대마도는 후끈 달아올랐다.


대마도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웬만한 절이나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이라는 대리석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열리기도 한다.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한다. 주로 부산 동래구청장이나 구의회의장이 초청돼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타던 가마에 탄다. 그 호위는 대마도에 진주해 있는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장이 맡는다.


 
조선 왕실이 대마도의 수직왜인(受職倭人)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준 임명장 ‘고신’(告身). 대마도가 조선의 정치체제에 편입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 조선왕실의 관직임명장인 ‘고신’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유물 중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고쿠신)이 특히 흥미를 끌었다. 대마도가 조선에 정치적으로 예속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이를 받은 사람들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불렸다.


그래서 그런지 취재팀에 특별히 전시장 내부 촬영을 허락한 자료관 직원은 왠지 고신에 대해서만 “박물관 소유의 물건이 아니다”며 촬영에 난색을 표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취재팀이 고신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자 그 직원은 거북한 표정으로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 들었다. “왜구에 꼭 일본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과 중국 출신도 많았다. 고신은 한국 출신 왜구로서 조선왕조의 스파이 역할을 하다가 공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라고.

 

● 대마도의 원주인은 백제계 유민?


리아스식 해안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아사우(淺海)만은 요즘 한일 양국의 프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낚시터이지만 오랜 기간 왜구의 소굴이었던 천혜의 요새다. 조선 태종 때 이종무 장군도 아사우만 일대에 한 달간 머물며 왜구를 소탕했다.


이 일대에는 667년에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백제식 산성인 ‘가나다노기’(金田城)가 있다. 백제와의 인연은 13세기 중엽까지 대마도를 지배했던 ‘아비류’(阿比留)씨 가문의 혈통에서도 더듬어볼 수 있다. ‘아비류’는 ‘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인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 다시 거세게 이는 대마도의 한국 붐

 
15세기 대마도를 통치한 관청이었던 ‘엔쓰지’(圓通寺) 내의 조선범종. 태극의 팔괘와 비천상 무늬가 확연해 우리나라 종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대마도=특별취재팀
 

대마도에 다시 한국 바람이 거세다. 3월 시로 승격한 대마도엔 산을 깎고 온천과 골프장 등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의지가 섬 곳곳에서 느껴진다.


대마도가 속해 있는 나가사키(長崎)현은 정부에 ‘대마도 특구’ 법안을 제출했다. 이 안에는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에 한해서는 비자 면제, 섬내 토지이용 및 취득 규제 완화, 한국어 교육 확대 등의 정책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한국인 단체관광객과 학생은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다. 또한 대마도고교 국제교류과 학생들은 졸업학점(25학점) 중 한국어 5학점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돼 있다.

 

● 주민증만 내보이면 땅도 살 수 있어


취재 도중 미쓰(美津)지역에서 ‘대마도에 별장을’이라는 흥미로운 벽보를 발견했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한국의 모든 분들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토지와 건물의 판매 가격은 2000만원부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벽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한국 사람인데 대마도의 농가주택을 구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인 부동산업자는 “한국의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살 수 있고 등기도 가능하며 가격은 평당 20만∼30만원대”라고 대답했다.


대마도 시청의 우치다 히로시(內田洋) 총무기획부장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50km 떨어진 부산엔 400만∼500만명이 살고 있는데 150km 떨어진 후쿠오카의 인구는 200만명에 불과하다. 눈앞에 좋은 시장이 있는데 왜 한국과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였다.


 
‘대마도에 별장을!’.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대마도 곳곳에는 ‘한국사람도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구입할 수 있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 교류 활성화로 대마도와 연을 잇자


일본이 실효적으로 대마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그보다는 교류 활성화로 대마도를 한국의 경제권과 문화권에 편입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6년째 여행 가이드를 해 온 홍관영씨의 생각도 같다. 그는 “대마도가 일본 땅이 된 이유는 척박한 땅이라고 해서 한국이 방치해왔기 때문”이라며 “영토 분쟁보다는 경제와 문화 교류를 통해 한국과 대마도의 연을 이어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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