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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영원한 지리산장지기 함태식 선생님

ㅅㅏ진인생 2008. 7. 22. 23:47

지리산 사람들     영원한 지리산장지기 함태식 선생님

지리산을 검색하다 함태식옹 관련기사를 보게되었다.

그는 사진인생의 고교시절 스승의 형님되신다.

스승은 함태진 교련선생님 이셨지....

                                                           사진인생 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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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태식 옹

 

 

함태식 선생님은 1928년 구례땅에서 태어나 순천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인천기계제작소에서 10년간 근무하다가 연탄공장, 메추리 사육 등을 하면서 지리산악회의 전신인 연하반에서 지리산을 가꾸고 지키는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1970년 노고단에 산장이 세워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산장지기를 자청하여 산생활을 시작했다. 털보 함태식 선생은 어떤 때는 지나친 간섭이라고 욕 먹을 정도로 산행질서를 바로잡는 데 헌신하고 노력한 결과 한동안 '조용하고 깨끗한 노고단'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때와는 달리, 그리고 지금은 새 산장이 들어서면서 피아골 산장으로 좌천되었고, 1991년에는 왕시루봉 외국인 별장지기를 자원, 지금은 이 두 곳을 오가면서 지리산 지킴이로 살고 있다.

 함태식씨와 지리산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지리산을 다녀온 사람들 중에 자신이 올랐던 봉우리 이름은 몰라도 함태식씨(73세) 이름은 알 정도로 유명하다. 구례가 고향인 그는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다. 그런 그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으로 온 이유는 단지 '지리산이 좋아서'다. 30년 전, 당시에는 산행객도 많지 않고 웬만한 준비 없이는 지리산을 찾기도 어려웠던 시절 홀몸으로 노고단에 올라갔다. 전란 중에 불 타 벽만 남은 외국인 별장을 개조해 산장으로 삼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자재를 구하지 못해 수포로 돌아갔다. 그후 71년, 노고단에 무인산장이 지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내려갔다. 아무도 관리하는 이가 없어 쓰레기더미로 뒤덮인 무인산장을 청소하고 새롭게 보수해 다음해 8월 노고단 산장지기로 정착했다. 당시 무인산장에서 새우잠을 자며 겨울을 난 결과 훗날 그는 폐 한 쪽을 잘라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부분의 산장지기가 그렇지만 그 역시도 엄하기로 유명했다. 노고단에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렸다 하면 그길로 당장 하산이었다. 88년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노고단을 직영으로 관리하기 전까지 노고단산장은 어느 산장보다 깨끗하고 운치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피아골산장으로 내려오면서 함께 있던 사람들도 뿔뿔히 흩어졌다. 함씨는 타력(他力)에 의해 노고단에서 피아골로 내려왔지만 그의 지리산 사랑은 여전하다. '지리산 중에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 이라며, '지리산에 산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행복할 뿐' 이라고 이야기 한다. 요즈음 그는 왕시루봉에 올라가 보내는 시간이 많다. 30여년을 산장지기로 있으면서 사귄 산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귀찮게 굴기 때문. 칠순을 코 앞에 둔 그에게는 두 가지 소망이 있다.

하나는 지리산에서나 지리산에서 살고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다. 이미 두 가지는 이루었으니 '살다가 고꾸라진 곳'이 바로 무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벽소령에 산장이 들어서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보고 싶은 것이다. "옛날에 화엄사에서 종주를 시작하면 많이 가야 연하천 산장이었는데 성삼재 도로가 뚫리고 난 후부터는 성삼재에서 종주를 시작하니까 연하천까지만 가자니 아쉽고 세석까지 가자니 멀고, 그래서 벽소령에 산장을 필요로 한고 그것에 맞춰 얼싸 좋다고 산장을 짓는 거여. 앞으로 벽소령 도로 포장하자고 할 지 누가 알어. " 누구나 지리산은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말은 많이 한다. 그러나 그 말의 진심을 따져보기 전에 얼마나 많이 지리산에 애정을 갖고 자연을 지키려 애써 왔는가를 되짚어볼 일이다. 30년을 지리산에서 살고 지리산 골짜기 구석구석 손금 보듯 훤히 아는 그가 옳다면 옳은 것이고 그르다면 그른 것이다.

지리산 피아골 산장지기 함태식옹(77). 사람들은 그를 ‘노고단 호랑이’ 또는 ‘지리산 털보’라고 불렀다. 지리산에 혼을 빼앗겨 입산한 지 33년째. 눈을 들면 늘 지리산 자락이 보이는 구례가 그의 고향이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순천중과 연희전문을 마친 ‘인텔리’였다. 인천기계제작소에서 10년간 근무했고 연탄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생의 절반을 내맡긴 곳은 아홉살 때부터 오르내렸던 마을 뒷산, 지리산이었다.

그는 1957년 ‘연하반’이라는 산악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찾았다. 연하반은 이후 지리산악회로 이름을 바꿔 지리산을 ‘국립공원 1호’로 만드는 등 지리산 보존에 앞장섰다. 그는 72년 노고단 산장이 건립되자 산장지기를 자청했다. 쓰레기로 변해가는 산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한쪽 폐를 자르면서도 16년간 노고단 산장을 지켰다.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거나 고성방가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혼쭐을 냈다. 조난당한 사람도 숱하게 구해냈다. ‘호랑이’란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였다.

88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산장 직영화 조치로 노고단 산장에서 쫓겨나 하산할 결심까지 했다. 하지만 다행히 피아골 산장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왕시루봉과 피아골을 오가며 지금껏 지리산을 지켜왔다. 그 사이 44세 중년 사내는 머리가 하얗게 센 77세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노인은 이제 지리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 지리산은 어떤 의미일까. “그거 다 부질없는 거시여. 그냥 좋은 거여.” 노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렇다. 그에게서 뭔가 특별한 대답을 바랐던 것은 ‘산 아래 사람’의 어리석은 욕심이었다. ‘도시의 언어’를 쓰는 우리가 ‘산의 언어’를 쓰는 그를 이해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는 다만 산에 대해 보고 느끼고 깨달을 뿐이다. 산은 그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했다. 그는 이같은 무애(無碍)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피아골 산장 옆 간이휴게소도 ‘무애막’(無碍幕)이라 이름 붙였다.

“사는 게 뭐 별 거 있어. 사람이 태어나서 죄 안짓고 나보다 약한 사람 좀 도와주며 사는 거제.”

하지만 세월의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지리산을 타던 많은 벗들이 세상을 등졌다. 그 역시 지난해만 해도 9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구조대에 업혀 산을 내려간 적도 있었다. 60여년을 함께 했던 술을 이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무애의 삶은 세월마저 자연스럽게 품으려는 것일까. 그의 바람은 이제 지리산의 품에 영원히 안기는 것이다.

“조용히 있다가 갈 거여. 그래서 내가 죽으면 저 계곡 옆에서 태우라고 할 거여.”

영원한 ‘지리산 지킴이’ 함태식옹. 그는 이제 지리산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잔설(殘雪)처럼 아련한 전설로 남으려 하고 있었다.

〈구례/글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