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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ㅏ진인생 2010. 2. 21. 22:56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하룻밤!
  5.16 이후 탄생한 신군부의 태동!
  육사 11기를 중심으로한 하나회의 집권!!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길었던 하룻밤!

  ◎ 12.12의 정황을 보다 이해하시기 쉽도록 하기 위해 MBC 특별 기획 드라마 "제5 공화국"의 장면들을 대거 첨부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10.26 사태의 발발과 신군부의 태동 》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사진은 5.16 당시 소장과 대위 시절 모습이다.
  우리 군의 이력에 있어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12.12 군사반란!
  하지만 과연 1980년대 이후 세대들 중 이 최대 규모의 군사반란을 알고 있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또 앞으로 군에 입대할 젊은이들에게도 좋은 교훈으로 작용할 이 사건이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알려졌는가?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12.12 관련 다큐멘터리들을 여럿 시청하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는데 놀랐고 김영상 정권의 대대적인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접하면서 이 12.12가 단순한 군사반란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그는 새로운 혁명을 꿈꿨겠지만 역사는 반역자의 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느 한 쪽이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 그 자체였고 휴전선 155마일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수도 서울에서 벌어진 심야의 대규모 병력 이동과 교전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군부의 수뇌가 교체되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퍼싱의 전쟁영화 이야기에서는 5.18 29주년을 기념해 군 수사부의 대대적인 조사를 통해 드러난 12.12의 경과를 토대로 보다 알기 쉬운 12.12 전개 상황을 소개하기로 한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식당에서는 역사의 한 획을 그을 희대의 암살극이 벌어졌다.
  바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한 10.26 사태가 발발한 것!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그는 연행되어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 와중에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 육군사관학교 5기 )이 사건 당시 현장에 김재규와 동행했던 것이 문제점으로 잡혔다.
  때마침 정승화 대장과 대통령 시해사건 합동 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소장( 육군사관학교 11기 )은 10.26 사태 수사와 청와대 경호실 차장 이재전 중장 석방건, 군 인사 관련 문제로 인해 적잖은 마찰이 있었다.
  더욱이 정승화 대장은 수도 경비사령관에 육군종합학교 출신인 장태완 소장을 임명하는 등 비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성들을 대거 중용하면서 자연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성들이 주축이 된 하나회와도 대립관계를 구축했다.
  이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보안사 대공 2과장 겸 합동 수사본부 제1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 육군사관학교 18기 )은 전두환 소장에게 10.26 사태 당시 정승화 대장의 행적에 대해 의혹을 품고 연행해 수사해야할 필요성을 여러차례 건의했다.
  하지만 전두환 소장은 상관인 계엄사령관을 연행해야하는 매우 민감한 안건이었기 때문에 이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침내 12월 06일에 연행을 결정, D-Day를 장군 진급심사 결과가 발표되는 12월 12일로 확정했다.
  《 작전 개시, 암호명 "생일집 잔치" 》
  자칫 잘못하다가는 반역자로서 역사에 오명을 남길 수도 있으며 보안사령부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 정승화 대장과 전두환 소장의 알력은 생각 외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특히 10.26 사태 이후 양측의 충돌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그 자체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고 정승화 대장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동행한 상황 하에서의 의혹도 제기되는 판국이었다.
  결국 운명의 12월 06일, 전두환 소장은 정승화 대장의 연행을 결정한다.
  마침내 운명의 12월 12일 18시 30분, 전두환 소장은 보안사령부 대공 2과장 이학봉 중령을 대동, 18시 43분에 보안사령부를 출발해 삼청동에 위치한 신현확 국무총리 공관에서 집무 중인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대장의 연행을 위한 재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장관이 없으면 절대 재가할 수 없다고 못박았고 전두환 소장은 하는 수 없이 총리 집무실을 나와야 했다.
  그러나 같은 시각, 이미 전두환 소장을 주축으로 한 군부 사조직 "하나회"는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하나회 소속 장성들은 장세동 대령( 육군사관학교 16기 )의 수도 경비사령부 30 경비단으로 속속 집결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는 이건영 중장의 제3군 소속 일선 지휘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른바 암호명 "생일집 잔치"의 발동으로 이 날 30 경비단에 도착한 하나회 소속 장성들은 그 이력이 대단히 화려했으며 상당수가 전투부대 지휘관들이었다.
  유학성 중장( 정훈장교 1기, 국방부 군수차관보 )
  차규헌 중장( 육군사관학교 8기, 수도군단장 )
  황영시 중장( 육군사관학교 10기, 제1 군단장 )
  노태우 소장( 육군사관학교 11기, 제9 보병사단장 )
  백운택 준장( 육군사관학교 11기, 제71 방위사단장 )
  박준병 소장( 육군사관학교 12기, 제20 보병사단장 )
  박희도 준장( 육군사관학교 12기, 특전사 제1 공수여단장 )
  최세창 준장( 육군사관학교 13기, 특전사 제3 공수여단장 )
  장기오 준장( 육군사관학교 12기, 특전사 제5 공수여단장 )
  장세동 대령( 육군사관학교 16기, 수도 경비사령부 제30 경비단장 )
  김진영 대령( 육군사관학교 17기, 수도 경비사령부 제33 경비단장 )
  동시에 특전사령관인 정병주 소장( 육군사관학교 9기 )과 수도 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육군종합학교 ), 육군 헌병감 김진기 준장( 육군종합학교 )을 연희동의 요정으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물론 안내를 맡은 보안사령부 참모장 우국일 준장에게는 작전 사항에 대한 일체를 통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12월 12일 19시 05분, 사전에 전두환 소장의 지시를 수령한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 육군사관학교 17기 )과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겸 합동 수사본부 제2 수사국장 우경윤 대령( 육군사관학교 13기, 최세창 준장과는 동기생 )은 육군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과 함께 보안사령부에 파견되어 있던 수도 경비사령부 예하 제33 헌병대대( 대대장 최석립 중령 ) 1개 중대 60명을 대동하고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동했다.
  목표는 당연히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이었다.
  《 총장공관에서의 총격전, 해병대와 33 헌병대의 교전 》
  마침내 1979년 12월 12일 19시 10분,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이 탑승한 보안사령부의 차량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도착했다.
  간단한 검문을 마친 후 이들이 총장공관으로 진입하기가 무섭게 성환옥 대령이 이끄는 수도 경비사령부 제33 헌병대대 병력이 위병소를 급습해 경비 중이던 해병대 병력을 무장해제시킨 후 정문과 총장공관 경비대 본부를 장악했다.
  총장공관 응접실에서 정승화 대장을 접견한 허삼수 대령은 현 위치에서 조사가 곤란하므로 녹음기가 준비된 취조실로 이동할 것을 권했고 정승화 대장은 이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동행한 보안사 수사관인 김대균, 한길성 소령과 정승화 대장측의 총격전이 발생해 육군참모총장 부관 이재천 소령( 육군사관학교 26기 ), 육군참모총장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 육군사관학교 29기 )가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와 동시에 사전에 총장공관을 포위하고 있던 수도 경비사령부 제33 헌병대 병력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해 M16A1 소총의 5.56mm×45탄이 응접실로 날아들었다.

 


  ◀ 암호명 생일집 잔치가 발동되면서 12월 12일 18시를 기해 경복궁 제30 경비단에는 하나회 소속 장성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 중 유학성 중장을 제외한 황영시 중장, 차규헌 중장, 노태우 소장, 박준병 소장, 백운택 준장, 박희도 준장, 최세창 준장, 장기오 준장 등 일선 전투부대 지휘관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이들의 병력 동원으로 12.12 군사반란은 성공하고 말았다.
  정승화 대장은 순식간에 벌어진 이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 끝까지 연행을 거부했지만 그 순간 M16A1 소총을 든 보안사 수사관 박원철 상사가 응접실 창문을 깨고 난입해 위협하면서 결국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에 의해 연행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경윤 대령이 제33 헌병대가 발사한 5.56mm탄에 허리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당했고 결국 그는 이 12.12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어 준장으로 전역하고 말았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현관을 나설 때까지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자신들도 우경윤 대령 꼴이 날 것이 안봐도 DVD였기에 허삼수 대령과 동행한 김대균, 한길성 소령 및 박원철 상사는 문을 열기가 무섭게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려야 했고 정승화 대장은 그렇게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압송되었으니 1979년 12월 12일, 19시 27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운좋게 총격전에서 살아남은 총장공관 관리 담당관인 반일부 준위가 즉시 인근의 총장공관 해병대 본부로 달려가 지원요청을 한 것이었다.
  참으로 간발의 차이였다.
  반 준위의 경보를 받은 총장공관 해병대 본부는 즉각 증원 병력을 총장공관으로 출동시켰고 애시당초 수적으로 해병대에게 열세였던 제33 헌병대 병력은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정문과 경비대 본부를 탈환한 해병대는 즉각 총장공관으로 진격했고 소형 버스에서 대기 중이던 성환옥 대령과 최석립 중령 이하 제33 헌병대 잔여 병력은 순식간에 해병대의 사격을 받아 이 와중에 박윤관 일병이 관통상을 당해 사망하는 등 사상자까지 발생하며 그 자리에 고립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밤샘 총격을 얻어맞은 제33 헌병대는 결국 해병대에게 무장해제를 당했고 성환옥 대령 이하 지휘관들은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는 그 순간까지 해병대원들에게 구타를 당하며 있는 치욕, 없는 치욕을 다 당해야 했다( 더 웃긴 것은 이 때 생긴 악감정으로 인해 12.12가 성공한 이후 성환옥 대령이 총장공관 해병대 본부로 쳐들어가 똑같이 되갚아줬다는데 있지만 )
  《 진돗개 하나 발령, 예상 외로 커지는 사태 》
  한편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되는 동안 사태를 수습해야할 책임이 있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추태는 그야말로 후세인들에게 지탄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는 12.12 군사반란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성이 울리기가 무섭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해 가족들을 데리고 도피하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군의 총책임자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의 도피로 인해 병력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하나회와 달리 이를 진압해야할 진압군 측은 사실상 제9 공수여단을 제외한다면 병력을 동원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국방장관이 도주하고 정승화 대장이 연행된 상황에서 보고를 받은 육군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 육군사관학교 9기 )은 즉각 전군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정승화 대장의 소재 파악에 나섰으며 연희동 요정에서 한창 연회 중이던 정병주 소장과 장태완 소장, 김진기 준장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육군본부가 우왕좌왕하던 그 시각 연행된 정승화 대장은 곧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압송되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악명을 떨친 서빙고 분실 고문을 받아야 했다.
  "총장님이 이 곳에 오신 것은 김재규 사건으로 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공손하게 말을 건넨 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이었지만 분위기는 처절했다.
  2명의 수사관은 10.26 사태 당시의 정황부터 소상하게 질문하기 시작했고 정승화 대장은 차분하게 설명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답변이 안나오자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졌다.
  "이거 조사받는 태도가 왜 이래? 누가 이 따위 복장으로 조사받으라고 했어? 앙! 이거 여기가 어디인 줄 모르는 모양이구만"
  그리고 수사관들은 정승화 대장의 옷깃을 잡아당겨 일으켜세웠다.
  "이게 무슨 짓인가?"하고 정승화 대장이 꾸짖자 수사관들의 반응은 예상 가능한 수준에서 이뤄졌다.
  "아직도 자신이 참모총장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이지? 죄인이 조사를 받는데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것이지 왜 이리 잔말이 많아?! 빨리 이 작업복으로 갈아입지 못해?!"
  이윽고 정승화 대장은 착용하고 있던 외출복이 벗겨지고 심문용 작업복으로 갈아입혀진 뒤 다시 조사를 받아야 했다.
  《 하나회 측에 장악당한 총리 공관 》
  정승화 대장이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한창 조사를 받고있을 그 시각, 삼청동에서는 또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정승화 대장을 연행함과 동시에 총리 공관에 외부인사가 출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하나회는 즉각 청화대 경호실장 직무대리를 수행하고 있는 정동호 준장과 작전담당관 고명승 대령으로 하여금

청화대 경호실 예하 제55 경비대대와 101 경비단 병력을 출동시켜 총리 공관의 특별경호대를 무장해제시킨 후 공관을 완전 장악해버렸다.


  이로써 최규하 대통령은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소식도 통보받지 못한 채 총리 공관에 고립되어 버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의 군부 내 인맥이 얼마나 탄탄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줬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외부인사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에 하나회는 즉시 20시 20분, 청와대 경호실장 대리 정동호 준장과 작전담당관 고명승 대령으로 하여금 청와대 경호실 예하 55 경비대대와 101 경비단 병력을 출동시켜 총리 공관을 경비하던 구정길 중령의 특별경호대를 무장해제시킨 후 총리 공관을 장악하도록 지시했고 정동호 준장과 고명승 대령은 20시 40분, 이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했다.
  이처럼 대통령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은 청와대 경호실이 하나회의 지시에 즉각 병력을 동원한 원인으로는 아무래도 정승화 대장의 장군 진급심사 과정에서 고명승 대령을 진급 누락시킨 것에 대한 원한이 작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당시 심사담당관은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이었는데 정승화 대장이 고명승 대령을 고의적으로 지적해 진급 누락을 지시하자 차규헌 중장이 "고명승 대령은 유능한 장교입니다"라고 변호했지만 정승화 대장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우경윤 대령( 앞서 언급했지만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최세창은 이미 준장으로 진급해 특전사 제3 공수여단장을 맡고 있었다 )과 마찬가지로 장군 진급심사에서 하나회 소속 및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대거 물을 먹은데 대한 원한도 12.12 군사반란이 그토록 성공리에 진행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총리 공관이 청와대 경호실 병력에게 장악되자 전두환 소장은 20시 30분, 경복궁 제30 경비단으로 이동해 생일집 잔치에 따라 집결한 장성들과 합류했고 어떻게든 국방장관을 찾아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됨과 동시에 김진기 준장의 통보를 받은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과 수도 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즉각 사령부로 복귀하고 있었고 특히 장태완 소장은 수도 경비사령부 부헌병단장인 신윤희 중령( 육군사관학교 18기 )에게 장갑차와 병력을 이끌고 즉시 총장공관으로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 육군본부와 수도 경비사령부의 대응 조짐, 하나회의 병력 출동 》
  한편 잇따라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정승화 대장 납치 주범이 바로 보안사령부의 소행임이 밝혀지자 육군본부와 수도 경비사령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뭐야?! 보안사 권정달 처장( 전두환 소장은 허삼수 대령이 인사처장인 점을 감안해 정보처장으로 위장하도록 지시했다 )과 우경윤 대령의 소행이라고!"
  육군본부는 당연히 이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했고 수도 경비사령부 상황실에 도착한 장태완 소장은 즉각 예하 부대장들을 소집했지만 유일하게 장세동 대령과 김진영 대령만이 부재 중이라는 점에 의혹을 가진 끝에 생일집 잔치의 전모를 알아내고 열화와 같이 분노했다.
  "이 놈들이 우리들을 요정으로 유인해 놓고 반란을 일으켜?! 정치군인으로 안하무인격으로 놀아나더니 이제는 총장님까지 납치를 하다니... 이런 죽일 놈들!! 당장 30 경비단에 전화 대!!"
  졸지에 자신들의 직속 상관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날아들자 제30 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은 찍 소리도 못하고 수화기를 제1 군단장 황영시 중장에게 넘겼다.
  "아! 장 장군이야? 나 황영시야. 우리 전화로 이럴 것이 아니라 여기로 와서 얘기 좀 하자고"
  "아니?! 선배님은 왜 남의 부대에 와 계시는 겁니까? 장세동이랑 김진영은 내 직속부하들인데 듣자하니 거기서 그 자식들하고 작당해서 총장님을 납치했다는데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어떻게 총장님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장태완이 이거 왜 이래? 우리 같은 처지에 통하는 사람들끼리"
  "뭐가 통한다는 겁니까? 지금 당장 총장님을 원상복귀시키십시오!"
  황영시 중장은 순간적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직감했고 이에 군수차관보인 유학성 중장이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아! 장 장군. 나 유학성이야, 왜 흥분부터 하고 그래? 우리 예기를 들어보면 장 장군이 충분히 이해할 거야"
  "아니?! 형님은 또 왜 거기서 그러고 계십니까? 거기는 내 부대입니다. 형님이 거기에서 나오십시오! 그리고 총장님이 1군 사령관으로 계실 적에 총장으로 모시자고 운동하라고 했던 것이 누구십니까? 그러한 형님이 어떻게 총장님을 납치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긴 말 할 것 없습니다. 이 일은 없던 것으로 할테니 당장 총장님을 원상복귀시키십시오"
  "장 장군,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박 대통령 시해사건 조사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야"
  "형님, 정말 이럴 겁니까?"
  "이봐! 정승화 총장을 조사해본 후 혐의가 없으면 풀어주면 될 것 아닌가?"
  "뭐?! 이 반란군 놈의 XX야! 너희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 전차를 몰고 가서 포로 네 놈들 머리통을 날려버릴 테니까!!"
  극도로 흥분한 장태완 소장은 그래도 수화기를 내리 꽂았고 순식간에 제30 경비단장실에는 냉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일은 이미 여기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던 것
  유학성 중장의 얘기를 들은 전두환 소장은 어쩔 수 없이 병력 동원을 지시했다.
  "희도야( 특전사 제1 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 네가 먼저 출동해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해라"
  "예! 알겠습니다"
  특전사 제1 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즉석에서 제1 공수여단 사령부를 호출해 출동을 명령했다.
  "아! 참모장, 나 여단장이야. 부대 이상없죠? 지금 즉시 여단을 출동시키세요. 목표는 육군본부와 국방부! 지금 즉시 여단을 출동시키세요"
  마침내 전두환 소장측에서 먼저 행동을 개시해 참모장 이기룡 대령이 이끄는 특전사 제1 공수여단 병력 1,500명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목표로 출동했다.
  이후에도 전개되지만 이처럼 전두환 소장측은 꾸준히 병력을 동원한 반면 육군본부측은 북한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쉽사리 전방 병력을 빼내지 못했고 결국 12.12 군사반란의 성공을 도와주는 격이 되고 말았다.
  《 별들의 방문, 특전사령부의 비상 》
  특전사 제1 공수여단이 출동하자 전두환 소장과 장성들은 제9 보병사단장 노태우 소장과 제20 보병사단장 박준병 소장, 제3 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제5 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을 남겨둔 채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향했다.
  물론 21시 30분, 이들이 방문했음에도 최규하 대통령은 끝내 국방장관이 없이는 재가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고 이 때문에 전두환 소장은 또다시 퇴짜를 맞아야 했다.
  한편 특전사 제1 공수여단이 무단으로 1,500명의 병력을 출동시키자 육군본부는 비상이 걸렸다.
  가까스로 도착한 노재현 국방장관이었지만 그는 또다시 병력 동원을 지시하지 않은채 미 제8군 벙커로 향하고 말았다.
  또한 육군본부 또한 CP를 수도 경비사령부로 옮기면서 12.12 군사반란을 저지할 수 있는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다.
  당시 육군본부의 CP 이동에 대해 정승화 대장은 훗날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육군본부 벙커에서는 적의 직접 공격을 당해도 상당 기간 버틸 수 있어요. 그런데 경솔하게 옮긴 것은 큰 실책이었읍니다"

 


  ◀ 마침내 하나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전사 제3 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은 예하의 제15 대대장 박종규 중령( 육군사관학교 24기 )으로 하여금 특전사 사령부를 장악하도록 지시했고 그 결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이 부상을 당한 채 연행되고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 육군사관학교 25기 )이 복부에 총상을 당하는 등 6발의 5.56mm×45탄에 피격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김진기 준장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정 총장은 그 결정을 비판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수경사가 안전하다고 보았어요. 왜냐하면 10·26 사태 이후 육군본부를 방어하기 위하여 불러다 놓은 공수여단 병력은 공교롭게도 그 며칠 전에 돌아가 버렸어요"
  육군본부가 CP를 옮기는 동안 정병주 소장이 복귀하기 전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 육군사관학교 25기 )은 특전사 사령부 작전과장과 함께 부대 인근 주점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20시가 조금 넘어선 무렵 교육과 선임하사가 부대에 비상이 걸렸으니 즉각 복귀하라는 통보를 했다.
  김오랑 소령은 복귀 전 부인 백영옥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미안해, 오늘 집에 못 들어가게 됐어. 아니, 아마 오랫동안 못 들어갈 지도 몰라. 아무튼 정말 미안해"
  김오랑 소령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용건만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아내 백영옥씨는 남편의 목소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 전화가 김오랑 소령 부부에게 있어 마지막이 되었을 줄 또 누가 알았겠는가?
  《 예하 부대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육군본부 》
  필자는 앞서 육군본부가 신속하게 병력을 동원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만약 육군본부가 예하부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면 과연 그들이 출동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또 아니었다.
  하나회는 예상 외로 큰 규모를 가진 조직이었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끈끈한 전우애로 인해 직접적으로 하나회 회원이 아닐지라도 하나회에 소속된 동기생들의 요청으로 인해 얼마든지 육군본부 및 사단장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장태완 소장이 그토록 출동을 요청했던 배정도 소장의 제26 보병사단 "불무리 부대"( 현 제26 기계화 보병사단 ), 수도 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와 같은 경우 사단 내의 하나회와 육군사관학교 인맥들에게 사단 사령부가 설득당해 출동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본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윤흥기 준장의 특전사 제9 공수여단이 유일했다.
  하지만 육군본부는 전두환 소장측의 꾀임에 넘어가 결국 이 최후의 카드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 제9 보병사단 29 보병연대, 제2 기갑여단 16 전차대대 출동 등 하나회의 추가 병력 동원 》
  그렇지만 아무리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더라도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21시 45분, 육군본부의 정식 명령으로 인해 신월동까지 진출했던 특전사 제1 공수여단이 도중에 주둔지로 복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두환 소장측은 다시금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12월 12일 23시, 전두환 소장은 모든 운명을 특전사 제1 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에게 걸기로 했다.
  "희도야, 아무래도 네가 직접 부대로 돌아가 지휘해야겠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네 어깨에 걸려있구나"
  "알겠습니다."
  "내 차를 타고 가거라. 희도야, 부탁한다!"
  그 길로 특전사 제1 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전두환 소장의 지프를 타고 참모장 이기룡 대령과 연락을 유지하며 특전사 제1 공수여단 주둔지로 향했다.

 


  ◀ 마침내 노태우 소장이 행동에 나섰다.


  노태우 소장의 지시에 따라 참모장 구창회 대령은 이필섭 대령의 제29 보병연대에 30 보병연대 1개 대대를 배속시켜 13일 오전 02시 30분을 기해 중앙청으로 출동시켰다.
  이들은 도중에 황영시 제1 군단장의 지시로 이상규 준장이 출동시킨 제2 기갑여단 16 전차대대의 M48 "패튼" 전차 35대와 합류해 04시 30분, 중앙청 앞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제3 야전군 "선봉부대" 사령관인 이건영 중장은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하나회 소속 장성들의 예하 부대 출동을 제지하려 했지만 이처럼 그의 지휘권도 간단하게 무시되어버리는 실정이었다.
  한편 수도 경비사령부 제30 경비단에 잔류한 노태우 소장은 총리 공관에 나가있던 동기생 백운택 준장으로부터 상황이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서둘러 제9 보병사단을 출동시키라는 요청을 받았다.
  "음.. 마!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이미 제3 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과 제5 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을 주둔지로 돌려보낸 상태였고 옆에는 오로지 박준병 제20 보병사단장만이 남아있었지만 강남에 주둔하고 있던 박준병 소장의 제20 보병사단은 주한 미 제8군 예하 부대인데다 육군본부에서 파견한 감찰감에게 부대를 장악당한 관계로 쉽사리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노태우 소장이라고 해서 당장 병력을 동원하는 것에 망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태우 소장의 제9 보병사단 "백마부대"는 아예 철책을 경비하는 전방부대였다.
  서울로 출동을 한다면 최소한 1개 연대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전방 경비에 큰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태였다.
  "아! 참모장 대라, 참모장? 나 사단장이야. 지금부터는 무조건 내 명령만 듣거라. 지금 즉시 29 연대를 중앙청으로 출동시키거라. 알겠나?"
  그 시각 총리 공관에 있던 황영시 제1 군단장도 예하 부대에 출동을 지시하기로 결정했다.
  "나 군단장이다. 30 사단 대! 아! 박 장군? 나 군단장이야. 지금 즉시 30 사단을 출동시켜줘야겠어. 이건 명령이야"
  "2 기갑여단 대! 아! 이 장군? 나 군단장이야. 지금 즉시 전차대를 중앙청으로 출동시키도록"
  이리하여 12월 13일 02시 30분, 이필섭 대령의 제9 보병사단 "백마부대" 29 보병연대는 30 보병연대의 1개 대대를 배속받아 서울로 출동했고 02시간 만인 04시 30분, 황영시 중장의 명령에 따라 이상규 준장( 육군사관학교 13기 )이 출동시킨 제2 기갑여단 16 전차대대( 대대장 김호경 중령 )의 M48 "패튼" 전차 35대와 합류( 16 전차대대는 03시 30분 도착 )해 중앙청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노태우 소장이 주한 미 제8군의 지휘계통마저 무시한 채 멋대로 1개 연대 병력을 동원함으로써 이 날 한국의 전방 방어선에는 큰 구멍이 뚫려버리고 말았다.
  《 특전사 3개 공수여단 출동! 기울어져 가는 대세 》
  이처럼 하나회가 적극적으로 병력을 증원시키는 동안 특전사 사령부는 마침내 하나회에게 장악당하게 된다.
  정병주 소장은 복귀와 동시에 제9 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을 호출해 출동대기를 명하는 한편 예하의 제1, 3, 5 공수여단장들의 소재를 파악했고 끝내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박희도 준장의 제1 공수여단에는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을 파견해 부대를 장악하도록 명령했지만 이는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병주 소장의 움직임은 물론 육군본부와 장태완 소장의 통신들이 모조리 보안사령부에게 도청당하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장태완 소장은 제30 보병사단 "필승부대" 사단장 박희모 소장에게 제1 공수여단이 통과할 행주대교를 봉쇄하도록 요청했지만 이를 감청한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 육군사관학교 17기 )과 보안처장 정도영 대령( 육군사관학교 14기, 동기로는 특전사 제7 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 )의 신속한 조치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제30 보병사단장 박희모 소장은 직속 상관인 황영시 제1 군단장의 지시에 따라 송응섭 대령의 제90 보병연대를 13일 04시, 고려대학교로 출동시키며 군사반란에 가담하고 말았다.
  이처럼 12.12 군사반란에서 하나회의 인맥과 육군사관학교 선후배 간의 인연은 전두환 소장이 실권을 잡는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한편 제1 공수여단을 장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이순길 준장은 전혀 통제를 따르지 않는 제1 공수여단 참모장 이기룡 대령 및 제2 대대장 서수열 중령, 제5 대대장 박덕화 중령 등의 지휘관들로 인해 곤혹을 치렀고 마침내 박희도 준장이 복귀해 부대를 완전 장악해 출동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 마침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특전사 제1 공수여단이 장악함으로써 승부는 결정이 나버리고 말았다.


  12월 13일 00시 20분을 기해 박희도 준장은 제1 공수여단의 4개 대대 1,500명을 인솔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목표로 진격했고 동시에 제3 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은 상관인 정병주 소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최세창 준장은 결국 눈물을 머금으며 전두환 소장의 지시에 따라 제15 대대장 박종규 중령( 육군사관학교 24기, 훗날 제56 보병사단 "북한산 부대" 사단장 역임 후 소장 전역 )을 호출해 사령관 체포를 지시했다.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명령을 받은 박종규 중령은 13일 00시를 기해 제15 대대 예하 지역대 38명을 인솔해 특전사 사령부로 쳐들어 갔다.
  애시당초 사령부 경비병력으로 예하 공수여단의 지역대를 상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령부를 완전 장악한 박종규 중령은 10명의 체포조를 선발해 사령관 집무실을 포위했다.
  모든 이들이 정병주 소장을 버리고 피신하거나 제압당한 상황에서 오직 김오랑 소령만이 사령관 곁을 지켰다.
  김오랑 소령은 집무실문을 걸어잠근 후 책들을 쌓아 올려 체포조의 진입을 저지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대대장님, 안에서 잠겨 있습니다."
  "부숴!"
  박종규 중령의 지시에 따라 제3 공수여단 15 대대 병력은 일제히 M16A1 소총을 사격해 문고리를 박살내버렸다.
  그러자 김오랑 소령은 자신의 권총을 난사해 박종규 중령을 비롯한 체포조에게 부상을 입혔고 이에 제3 공수여단 15 대대의 사격으로 김오랑 소령은 복부에 총상을 입는 등 총 6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아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전 박종규 중령과 김오랑 소령은 육군사관학교 1기수 선후배 사이에 바로 전날 두 부부가 함께 식사까지 하는 등 형제와도 같은 사이였다고 한다.
  과연 이들에게 조국에 대한 충성은 무엇이며, 군대란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여하튼 김오랑 소령이 쓰러지자 팔에 부상을 당한 정병주 소장은 그대로 15 대대원들에게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압송당했고 이로써 특전사 사령부는 하나회에게 장악당하고 말았다.
  특전사 사령부를 장악한 제3 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은 곧 예하 3개 대대를 인솔해 출동했고 제5 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역시 정낙준 중령의 제23 대대, 장용주 중령의 제26 대대를 인솔해 효창 운동장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육군본부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윤흥기 준장의 제9 공수여단을 원대복귀시킴으로써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지킬 수 있던 최후의 카드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회의 승리로 끝이 나고 있었다.
  박희모 소장의 행주대교 통과 방조로 인해 손쉽게 서울로 진입하는데 성공한 이후 12월 13일, 01시 35분을 기해 특전사 제1 공수여단 1대대와 2대대는 육군본부를 급습해 손쉽게 육군본부 본청사 및 상황실, B-2 벙커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박덕화 중령의 제5 대대는 국방부 진입 과정에서 청사 옥상에 설치된 20mm 발칸포의 공격을 받아 하사 1명이 즉사하는 등 수명이 관통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 예하 부대도 장악못하는 사령관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 바로 12.12 군사반란이다.


  물론 특전사 제1 공수여단의 대응사격으로 20mm 발칸포를 조작하던 병장이 피격되어 그대로 추락해 즉사하기는 했지만( 당시 이 병장은 전역을 불과 1주일 남겨둔 상태였다 )
  문제는 이 때 노재현 국방장관이 국방부에 복귀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졸지에 한국군의 심장부인 국방부가 특전사에게 짓밟히는 꼴이 되었고 얼마 안되어 박희도 준장의 특전사 제1 공수여단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박희도입니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했습니다"
  "그래?! 좋아! 아주 좋아!! 희도야, 수고했다. 국방장관은 찾았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고 하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상황이 완전히 자신들에게 넘어왔음을 확신한 전두환 소장은 이제 마지막 남은 유일한 걸림돌인 장태완 소장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전두환 소장에게 붙은 헌병단장 조홍 준장( 진 )은 즉시 수도 경비사령부 부헌병단장인 신윤희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장태완 소장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신윤희 중령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수도 경비사령부는 사분오열되어 있었고 특히 전차대대와 같은 경우 1개 중대가 사령부에, 나머지 3개 중대는 각각 경복궁 30 경비단, 33 경비단, 전차대대 본부에 위치하고 있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아군끼리 전차전을 벌일 아찔한 상황이었다.
  전차대대장은 당연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 장태완 소장은 마침내 단독으로 1개 전차중대를 비롯한 사령부의 잔여 병력을 총동원해 제30 경비단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윤희 중령은 엄연히 장태완 소장의 직속부하였지만 지휘 계통의 혼란으로 갈피를 못잡다가 마침내 조홍 대령의 지시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신윤희 중령은 13일 02시를 기해 병력을 소집시켰고 약 60명이 집결했다.
  신윤희 중령은 이들을 20명씩 3개조로 나눠 장태완 소장이 머물고 있는 본청의 2층 출입문과 복도, 계단을 장악하도록 계획을 수립했다.
  마침내 13일 오전 04시 이후, 신윤희 중령은 병력을 이끌고 본청으로 향했다.
  육군본부 CP가 설치된 사령관실을 지키던 경비병을 무장해제시키는데 성공한 신윤희 중령은 마침내 사령관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윤성민 중장을 비롯한 육군본부 수뇌부를 포위했다.
  이 과정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권총을 뽑아들었다가 신윤희 중령의 대응 사격을 받아 쓰러졌고 바로 옆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황원탁 대령이 권총을 뽑아들고 대치했지만 막 들어선 장태완 소장의 제지로 인해 육군본부 수뇌부들은 그대로 무력화되고 말았다.

 


  ◀ 1979년 12월 13일, 단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장태완 소장은 결국 체포되어 승용차에 태워져 보안사령부로 압송되었고 마침내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한편 국방부 청사를 이잡듯이 뒤진 특전사 제1 공수여단의 수색작전으로 노재현 국방장관이 발견됨으로써 전두환 소장은 즉시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이리하여 12월 13일 오전 05시 10분, 최규하 대통령이 정승화 대장 연행 재가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12.12 군사반란의 모든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1979년 12월 12일~13일 오전에 걸친 가장 길었던 하룻밤의 상황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반란을 통해 전두환 소장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 장성들은 군부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이들에게 대항한 장성들이 대거 강제 예편을 당해야 했다.
  정승화 대장은 예편과 동시에 교도소로 수감되어야 했고 정병주 소장 역시 한 때 자신의 부하였던 전두환, 노태우 소장, 최세창 준장에게 가장 처참한 배신을 당하며 예편을 당했다.
  이 12.12를 통해 전두환 소장은 군의 1인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80년 05월 18일, 광주를 제압함으로써 대통령으로 집권해 다시금 신군부 정권의 수립을 만천하에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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