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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1910.3.26일) 본문

역사_대한민국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1910.3.26일)

ㅅㅏ진인생 2010. 3. 27. 08:17

 

 

 

 

 

 

조선 말기 교육가·의사(義士). 황해남도 해주 (海州)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승마·궁술·사격술을 익혀 문무(文武)를 겸했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다묵)] 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산둥[山東(산동)]을 거쳐 상하이[上海(상해)]로 갔다.

 

1906년 석탄 상점을 정리한 뒤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웠고, 이어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웠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펴다가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군사령관 직책을 맡아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慶興)까지 쳐들어갔으나 일본군에 패배하여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로 가서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노브키에프스크에서 김기룡(金起龍)·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를 조직,

안중근·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을 암살 제거하기로 단지의 피로써 맹세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滿洲) 하얼빈[哈爾濱(합이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해를 결의하였다.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세우고 하얼빈역에 잠입,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 예비심문에서 거사 동기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혔다.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에서 여섯 차례 재판을 받은 뒤 1910년 3월 뤼순[旅順(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으며 재감중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야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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