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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산서원에 가 보았다 ...

ㅅㅏ진인생 2012. 4. 30. 16:58

봉하마을 가는길에 들러보았다.저산서원...

 

저산서원 (김해김씨 삼현파 시조 金菅 배향 )
자료1

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유등리 331-4.5 번지
저산서원은 고려 후기 문신인 
삼현파1세 김관(金菅)을 주향으로 하여, 2세 김문숙(金文淑).3세 김항(金伉).4세 김서(金)를 배향하고 있다

저산서원에서 문정(1세 김관)墓 까지 거리는 500미터 이며,
농로옆에 위치하고 있어 주차가 가능하다. 

노무현대통령 생가인 봉하마을 과 직선거리로 3km 에  있다.

(사진.동영상 출처 :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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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유등리 331-4.5 번지 (봉하마을과 3km 거리)

 

 

 

 

 

↑ 저산서원1955년 준공


 

 

↑ 김문숙(좌향).김항(우향)

 

 

↑ 김문숙(좌향).김항(우향)

 

 


↑ 명회제김선생지단 (2세 김문숙)
명회제 문숙


 

 


↑ 김문숙

 

 


↑ 김문숙

 

 


↑ 돈옹김선생지단 (3세 김항)
돈옹 항

 

 


↑ 김항


 

 

↑ 김항


 

동영상 

 

 

자료2

(글 출처 http://changwon.grandculture.net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대산면 유등리에 있는 김해김씨 문중 서원.

[개설]
저산서원은 현대에 건립된 서원으로서, 고려 후기 문신인 김관(金菅)을 주향으로 하여, 김문숙(金文淑)·김항(金伉)·김서(金湑) 등을 배향하고 있다. 김관은 안향과 도의로 사귀어, 함께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의 수도에 머물면서 주자학을 연구하고 고려에 도입하였다. 충혜왕과 충목왕 때도 외교와 정치에 공이 많아 왕에게 우대를 받았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항은 공민왕에게 직언을 하여 많이 받아들여졌으나 신돈의 모함이 계속되자 귀향하였으며, 김서는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으나 고려의 성세가 기울어가자 낙향하였다. 향사일은 2월 중정일(中丁日)이다.

[위치]
창원시와 김해시 진영읍 경계선에서 동쪽 들판을 가로질러, 대산면 유등리의 옛 유등나루 부근 저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유등나루는 창원의 대산과 밀양의 하남을 연결하던 낙동강가의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형태]
건립 이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저산서원은 외삼문·강당·내삼문·사우가 일직선상에 배치되었고, 강당 앞 좌우에 동재인 돈서헌(敦敍軒)과 서재인 호원당(湖源堂)이 배치된 전형적 전학후묘의 짜임새를 보여준다. 강당인 홍인당(弘仁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가운데 세 칸은 방이고 양쪽 끝은 마루이다. 사우인 경덕사(景德祠)는 정면 3칸·측면 2칸이며,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건물 구조와 함께, 주위의 여러 단(壇)과 비(碑)가 갖추어져 있다.

[의의와 평가]
현대에 건립된 저산서원은 강학의 기능보다 봉사에 의의가 있다. 제향된 인물들은 고려 후기에 관직에 올랐던 사람으로서, 유학을 존숭한 당시의 신유학자들이다. 저산서원이 있는 경상남도 창원시 대산면 유등리에는 저산서원을 중심으로 그 앞에 김관 신도비, 숭조돈종비(崇祖敦宗碑) 등이 있어 지역 유교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저산재 창건 사실기 (350쪽) 


저산재는 고려 판도판서 문정공 및 김문숙,김항,김서 3대 배향하고 있다. 

소재지는 경남 창원시 의창군 대산면 유등리 저소산 북쪽이니 문정공 묘소에서 가까운 거리이다. 

1921년 신유년에 문정공 묘를 찾은 뒤에 

 

종손 용식씨가 용한, 석두, 동균, 창직, 상준, 상순과 더불어 

각문 에 알리어서 초가수간을 사서 기와를 얹고 재실을 꾸미어서 저산제라 현판을 올리었으나 대지는 협소하고 

규모는 적어서 넓힐 수 도 없어 어러움이 많았다. 그후  을유년 광복후에 종손 진곤께서는 개축할것을 종론과 일치되어 

무자년 (1948년) 가을에 유등리 마을앞 넓은 곳에 창건하기로 한뒤

 

 불행이 세상을 떠나시니 재우사 용우 씨가 이어받어 

팔년 세월에 걸려 을미년(1955년)에 준공 을 보게 되니 오간이요 문루는 5간을 세우니 정당에는 현액하고 저산재요 

동재는 소원당 이오 서재는 돈서헌 이오 문루는 망해루 인데 경안문이라 하고 그 범위와 규모가 크고 웅장하여 영남에서 

으뜸이었다. 그러나 해마다 시제때는 숙소가 모자라 불편하여 기미년 (1979년) 다시 동재옆에 숙사 3칸을 증축 하니 

념수실 이라 하였다 . 

 

이와 같이 선재가 빛난것은 후손들의 성력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마산시에 용주씨 께서는 

제답으로 백여 마지기를 헌납 하시니 종주에 비를 세워고 그밖에 영역신 분도 많으나 일일이 적지를 못하며 그중의 

귀곤, 유곤, 봉재, 정기, 영진씨 이고 그밖에는 성금부에 기록 함으로써 번거로움으로 모두 적지 못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