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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탁영선생 연보 (김일손) 본문
탁영선생<김일손>연보 상(1/2)
<原文: 濯纓先生年譜 金大有 著 高宗11[1874]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2511-10-25,
參考譯文: 增補濯纓先生年譜 2006.9.30. 感慕齋宗中,
解釋 : 2008. 8. 15. 金順大, 編輯 :金乙泰>
나는 일찍이 탁영선생(김일손1464~1498)의 문집을 읽어보았는데,
하늘까지 간간이 기가 서리고 문장과 절개있는 행실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고
우암 송선생(송시열, 1607년~1689)이 그 서문에서 드러내어 밝혔으니(表章)[1]
가히 영원히 믿어 증거할 만하다.
그러나 선생의 도의가 기록된 자료와 조정에서 활약하신 여러 가지 사실에 관해서는 아직 상세한 것을 얻지 못하다가 선생이 돌아가신 지 400년 후에 연보가 나타났으니 선생의 조카 삼족당(김대유, 1479~1551)이 저술한 것이다. 후손들이 동남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서 이 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비로소 의논을 모아 간행, 배포하기로 하였다.
원집(기존의 문집)에서 빠지고 잘못된 점도 이 연보를 참조하여 함께 수정 , 보완토록 힘썼으니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에 걸친 소릉(문종의 정비, 단종의 생모)복위의 상소가 곧 원집중에 누락된 부분의 하나인데, 해를 꿰뚫는 한결같은 충성(貫日精忠)은 읽는 이로 하여금 오싹하게 한다. 밝고 밝은 대의가 막혔다가 다시 펴진 것은 실로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어찌 천추에 전할 말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아, 운수가 재앙을 만나 일신이 기구한 화를 당하였으니 어찌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는 후하게 하고서 끝내는 다시 재앙을 내렸으니 무슨 운명이 그러하겠는가. 혹시 선생이 오래 사셨더라면 융성한 시대를 만나 당시의 여러 어진 학자들과 함께 조정에 나아가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堯舜 ; 어진정치)을 크게 펼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루지 못하고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유독 운명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미 선생의 사실과 행적이 나라의 자료에 소상하게 실려 있으므로 명현(名賢), 석학(碩學)들의 찬술(讚述)과 학자들의 존경심이 이 책(年譜)이 나온다고 해서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나, 지금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어질지 못해(不仁)질 까봐 이것이 두렵다. 하늘이 선생을 인재로 후하게 내렸다는 것은 세월이 오래 지나면 더욱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1464년탁영 김일손선생 출생
1464년 봄 1월 7일 오시(午時, 낮 12시 전후) :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현재 이서면 서원리) 옛집에서 출생하다.
선생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던 고장은 김해였는데, 고조할아버지 둔옹공(遯翁公, 諱는 伉(항)이요 字는 而正, 圃隱 鄭文忠公 夢周와 교유)이 일찍이 운계리를 지나다가 산과 계곡이 깊고 맑음을 사랑하여 여기에 처음으로 터를 잡아 정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고 선생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선생이 출생할 때 앞내에 마치 무지개와 같은 자줏빛 서기(瑞氣:紫氣)가 일어 하루해가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더니 마침내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난 선생의 모습은 단정하고 기상(氣象)은 매우 중후하며 울음소리는 마치 큰 종(洪鍾)소리처럼 우렁찼다고 한다.
처음에 탁영선생 김일손의 아버지 남계공(南溪公) 김맹 이 용인(龍仁) 이씨(李氏)를 부인으로 맞을 때, 존안례(尊雁禮)를 올린 날 저녁 부인의 꿈에 준마(駿馬) 세 마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 줄기의 청운(靑雲)으로 변하여 가슴속으로 날아든 일이 있었는데, 그 후 선생 3형제를 얻게 되고 이름 또한 꿈의 징조에 따라 맏이는 준손(駿孫 자는 伯雲). 둘째는 기손(驥孫 자는 仲雲). 막내, 즉 선생의 휘(諱)는 일손(馹孫 자는 季雲, 初字는 舜佑)이라 했다.
김일손선생 의 호(號)는 탁영자(濯纓子), 이당(伊堂), 운계은사(雲溪隱史), 소미산인(少微山人 ; 주거지 지명을 따서 지음). 영귀학인(詠歸學人), 와룡초부(臥龍樵夫 ; 1488년 9월 와룡봉 밑에 운계정사를 신축한데서 이 호를 지음), 반계거사(磻溪居士 ; 1492년 목천 반계에 죽림정사를 신축한데서 이호를 지음) 등 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고 깨달음이 민첩하여 나이 겨우 4~5세에 어른들이 문자(文字)를 한번 가르치고 지나가도 얼른 기억하였으며 동네 아이들과 더불어 놀되 난잡한 놀이는 하지 않으며, 혹 속임수를 쓰는 아이에게는 반드시 성내어 질책(叱責)하고 더불어 놀지 아니하였다. 대체로 선생의 천성은 강직하고 엄했으며 정직하였다.
이 해에 선생의 아버지 남계공 김맹(南溪公 ; 諱 孟, 字 自進)이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로 부임할 때 선생의 어머니 이부인(李夫人)은 마침 용인 포곡면 압고리(龍仁 蒲谷面 鴨皐里)의 친정에 와 있었는데, 선생도 여기에 따라와 있었다.
공의 객지 벼슬살이가 불편한지라 전 가족을 이끌고 북상하여 처가 곁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사는 집 동북에 별당을 신축하여 선생 3형제의 독서(讀書) 장소로 이용하였는데, 당호(堂號)를 ‘옥수정사(玉樹精舍)'라고 했다.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 선생이 현판(扁額)을 쓰고 또 기문(記文)도 지었다.{지금은 그 정사(精舍)가 철훼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토착민들이 그곳을 탁영대(濯纓臺), 뒤편의 산봉우리를 탁영봉(濯纓峰)이라 불렀는데. 이는 모두 선생이 명성을 얻은 데 연유한다.}
남계공(南溪公) 김맹 은 가정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탁영선생의 할아버지는 휘(諱)가 극일(克一)이요
절효 김극일은
자는 용협(用協)이며 호는 모암(慕菴)인데,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에게 배우고 그의 영향을 받아 평생 벼슬하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되고 사시(私諡)하여 이르기를 절효(節孝) 선생이라 했다.
남계공은 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 佔畢齋의 父) 선생에게 사사(師事)하여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을 통하여 전수된 정주학(程朱學)을 득문하였으며 『소학(小學)』 『대학(大學)』을 일상 암송하여 성정격치(誠正格致 ; 誠意 正心, 格物, 致知 : 『대학(大學)』의 修身)에 힘썼다. 선생의 학문은 대체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남계공(南溪公)은 선생의 총명함이 너무 조숙하여 조금 천천히 성취(成就)되기를 원하여 입학(入學)을 시키지 않았는데, 선생은 다른 사람이 독서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몰래 듣고 마음속으로 암송했다. 당시 공은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으로서 권세 있는 고관을 상소하여 논박하고 사직한 다음 압고리(鴨皐里)에 와 있었는데, 어느 날 선생이 중형인 매헌공(梅軒公)이 읽는 『논어(論語)』를 가지고 와서 배움을 청하였다.
남계공은 기특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 책은 어린아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라고 하며 『소학(小學)』을 주었다. 그랬더니 하루에 수백언(數百言) 씩을 암송하여 공에게 묻기를, “이른바 성현(聖賢)은 사람된 생김새가 보통사람과 혹 다른 점이 있습니까?”라고 했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보통사람과 같으니라.”라고 하니 “보통사람과 같다면 혹은 성현(聖賢)이 되고 혹은 범인(凡人)이 되는데 그것은 왜 그러합니까?”라고 했다. “능히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람은 성현이 되고 다할 수 없는 사람은 범인(凡人)이 된다.”
“사람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부자친(父子親), 군신의(君臣義), 부부별(夫婦別), 장유서(長幼序). 붕우신(朋友信)을 말함입니까?” “그러하니라.” “그렇다면 저 역시 성현(聖賢)이 될 수 있겠습니다.”라고 했다. 공은 매우 기특하게 생각했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10세부터 12~3세에 이르기까지 사서(四書)를 4~5회 읽은 데 불과하였다. 비록 잊은 곳은 없었으나 300회를 독서과정으로 정하여 익혀가니 차츰 공부와 작문법(作文法)을 알게 되었다.”고 한 적이 있다.
○ 1477년 丁酉 (성종 8년) 선생 14세
일찍이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14~5세 때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었는데, 옛사람들이 입조(立朝)하여 충언(忠言)과 직론(直論)을 펴서 기개(氣槪)와 절조(節操)를 굽히지 않은 대목을 접할 때마다 거듭거듭 감탄했다.”라고 했다.
○ 1478년 戊戌(성종 9년) 선생 15세
<1478년> 봄 2월 : 반궁(泮宮 : 성균관에 들어가 독서하다.
[1]성균관(成均館)은 조선시대 최고 국립 종합대학으로 1398년(태조 7년) 숭교방(崇敎坊:명륜동)에 건물을 준공하여 유학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이하 136명을 모신 문묘(文廟), 유생(儒生) 200명이 거처하는 동서재(東西齋) 등을 두었다. 입학 자격은 15세 이상의 자제로 4부 학당, 항교졸업자, 소과 합격자 등이었다.
선생은 이미 성동(成童)의 나이(15세)가 되어 태학(太學 ; 성균관)에 선입(選入) 되었다. 새로 들어온 소년 학동들은 보기에 선생의 거동이 강직하고 언사는 당당하며 의젓하며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는지라 더불어 상종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식자들은 선생의 사람됨이 큰 그릇이요 학문에서는 문장(文章)의 기초를 두터이 하고 나아가는 방향과 속도가 올바름을 알았다.
목계(木溪) 강혼(姜渾)역시 선생과 같은 나이로 이때 태학(太學)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선생과 깊이 사귀었는데, 일찍이 그가 말하기를 “계운(季雲)은 곧 나(渾)의 사표(師表)이지 친구가 아니다. 훗날 사림의 영수(領袖)요, 조정의 계책을 담당할 두뇌요, 제왕의 정사에 중심인물이요, 치도(治道)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 바로 그가 계운(季雲)이다. 나 혼(渾)과 같은 사람은 다만 그 뒤를 따르는 티끌이 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1478년> 15세 봄 3월 壬午(20일) : 서호(西湖) 단양(丹陽) 사인동(舍人洞)에서 단양(丹陽) 우씨(禹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다. (우씨는26세에 별세)
부인은 병조참판 우극관(禹克寬)의 여식으로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6세손이며 형조참의 용인(龍仁) 이양(李讓)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하여 효녀라는 칭송을 받아왔는데 지금 선생에게 시집오게 된 것이다.
<1478년15세> 가을 8월 갑진(15일) : 청도(淸道)에 가는 도중 선산(善山)을 지나다가 어은(漁隱) 정(鄭)선생과 경은(耕隱) 이(李)선생을 뵙다. 신해일에 운계(雲溪)에 도착 나복산에 있는 조묘(祖墓)를 성묘하다. (조부는 절효 김극일선생)
정공(鄭公) 의 이름은 중건(仲虔), 자는 경부(敬夫)인데 선생의 전 외조(外祖)이다. 문학에 능하고 절의를 숭상하였다. 계우정난(癸酉靖難) 때 집현전 전한(典翰)으로 있다가 외직을 자청하여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나갔는데 얼마 안 있어 사직하고 돌아와 경은(耕隱) 이공과 함께 선산 강장리(綱障里)에 은둔하고 있었다.
경은(耕隱) 이공 의 이름은 맹전(孟專), 자는 백순(伯純), 성주인(星州人)으로 병조판서 이번지(李蕃之)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등제하여 벼슬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까지 하였고 청덕(淸德)과 직성(直聲)이 있었다.
단종 2년(1454년), 세태가 어렵고 위태함을 보고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자청하여 나갔으나 곧 눈멀고 귀먹었다는 핑계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生六臣의 한사람). 그 후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에도 불응하고 어은(漁隱), 강호(江湖)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유(交遊)를 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이 지나다가 찾아뵙게 되었는데, 이공이 선생의 그릇됨을 매우 사랑하여 평소 품은 생각을 가지고 지은 시(詩;述懷詩) 1절을 보여주었다. 선생은 그에 화답(和答)하였는데, 그 시구(詩句)는 다음과 같다.
先生韜晦久盲聲(선생은 은둔하시며 눈멀고 귀먹다 하시니)
小子何知意欲同(소자 무엇을 알아 뜻을 같이하리까)
夜夜子規啼不盡(밤마다 소쩍새는 울고 울어 그지없고)[2]
九疑山色月明中(저 멀리 구의산은 달빛 속에 밝은데...)[3]
[2]단종이 내침을 당하여 영월에 유폐되어 있을 때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그 소회(所懷)를 표한 바 있다. 이를 본 많은 뜻있는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며 화답(和答)하는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애도하고 흠모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를 은유(隱喩)한 듯하다.
[3]구의산(九疑山)은 중국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에 순제(舜帝)의 종묘(宗廟)가 있는 산, ‘제위(帝位)를 선양하고 사양하고 한 성군(聖君) 순(舜)임금의 영혼이 잠든 저 구의산(九疑山)은 달빛에 밝은데 이 땅에서는 왕위 찬탈과 시해가…’하는 속뜻이 숨겨진 듯.
이공은 크게 칭찬하고 고체시(古體詩) 한편을 지어 선생을 송별하였는데, 그 시구(詩句)는 다음과 같다. 이 시구(詩句)를 미루어 보면 선생에 대한 공(公)의 칭찬과 기대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古道巳云遠(옛 성현의 도는 이미 멀어가고)
但見浮雲翔(이제는 나는 뜬구름(소인)만 보일 뿐이네)
願言篤交誼(원컨대 우리 교분 두터이 하고)
善保金玉相(금옥 같은 바탕 소중히 보전함세)
○ 1478년15세
가을 9월 계해(5일) : 서울로 돌아와 반재(泮齋 ; 성균관)에 들어가다
○ 1479년16세
기해 (성종 10년) 선생 16세
1479년16세 가을 8월 계유(?) : 매헌공(梅軒公)과 함께 한성부(漢城府)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하다.
1480년17세 경자 (성종 11년) 선생 17세
1480년17세 봄 2월 을축(15일) : 매헌공(梅軒公)과 함께 예조(禮祖) 복시(覆試)에 실패하다.
이미 낙방한 사람들 중 위로의 말을 하는 자 있어 선생이 대답하기를, “과거 보는 일은 학문(學問)하는 길과 서로 배치(背馳)되는 일이다. 보다 원대한 곳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이 일은 본디 당치 않은 일이나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과거를 버리면 임금을 섬기는 길에 나아갈 수 없으니 이번에 나는 부득이 과거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학업(學業)에 정미(精微)하지 못함을 걱정하지 고시관(考試官)이 밝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라 했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이지 과장(科場)에서의 득실(得失 ; 되고 안 되고)이야 알 바 아니다.”라고 하였다.
<1480년> 3월 신사(1일) :
양친을 모시고 운계리(雲溪里.지금의 청도군이서면서원리)로 돌아오다.
탁영 김일손의 부친 남계공(南溪公)김맹 은
노병으로 도총부(都摠府) 경력직(經歷職)[4]을 사직하고 전 가족이 귀향함에 선생은
큰형 동창공(東窓公), 둘째형 매헌공(梅軒公)과 같이 따르게 되었다.
[4]조선시대 군대조직, 즉 五衛(義興衛, 龍驤衛, 虎賁衛, 忠佐衛, 忠武衛)의 軍務를 총괄하던 관청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종4품 문관직.
<1480년>가을 9월 신묘(14일)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선생(고향은밀양) 문하에서 수학(受學)을 시작하다.
이때 선생은 산방(山房 : 즉 절효(節孝)선생이 시묘 때 쓰던 나복산 밑의 여막을 여름에 중수하여 현판을 ‘나산서옥(蘿山書玉)’이라 하였음)에 있었는데, 어느 날 독서하다 훌연 한숨짓고 탄식하며 “나의 독서가 비록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널리 독파하고 힘써 분발했는데도 아직 고인(古人)들이 이미 이루어놓은 학문(學問)도 모르고 있으니 17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구나!
지금 점필재(佔畢齋) 선생은 당세의 도학군자(道學君子)인데 들으니 친상을 당하여 밀양에 와 계신다고 하니 어찌 가서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매헌공(梅軒公)과 더불어 예물(禮物)을 가지고 가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道義)의 교유(交遊)를 하며, 강(講)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닦았는데, 드디어 학문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성품이 남을 용납함이 적었는데 17세 때
점옹(佔翁) 문하에서 교유(交遊)하기 시작하면서 12인의 정신적 교우를 얻었다. 도학(道學)에서는 김대유(金大猷;宏弼), 정백욱(鄭伯 勖;汝昌), 이백연(李伯淵;深源), 문장(文章)에서는 강사호(姜士浩;渾), 이주지(李冑之;冑), 이낭옹(李浪翁;黿), 이중옹(李仲雍;穆), 유일(遺逸)에는 남백공(南伯恭;孝溫), 신덕우(辛德優;永僖), 안자정(安子挺;應世), 홍여경(洪餘慶;裕孫), 음율(音律)에는 이백원(李百源;摠), 이정중(李正中;貞恩) 등이었다.” 고 했다.
대체로 동방성리학은 정포은(鄭圃隱) 선생이 실창(實倡)하여 길야은(吉冶隱) 선생에게 전수하고 야은은 김강호(金江湖) 선생(佔畢齋의 父)에게 전수, 다시 점필재(佔畢齋) 선생에게 가정세습으로 전수되었는데 경술(經術)과 문장에서는 일세의 으뜸(冠冕)의 위치에 올랐으며 그 문하에서 많은 학자들이 사방에 배출되었다. 선생과 김한훤(金寒喧), 정일두(鄭一蠹), 남추강(南秋江;孝溫), 이재사(李再事;黿) 등이 뛰어난 분들이다. 이상이 선생의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이다.
1480년17세 겨울 12월 병인(21일) : 밀양(密陽)으로부터 돌아오다.
○ 1481년 18세 신축(성종 12년)
1481년18세 봄 2월 병인(22일) : 밀양에 다시 가서 김선생을 뵙고 한문(韓文;韓昌黎의 문집)을 받다.
점옹(佔翁)이 항상 선생에게 말하기를, “군(君)은 시문(詩文)에 있어서 능하지 않은 데가 없다. 나의 의발(衣鉢 ; 학문과 技藝)을 전할 사람은 군 이외에 아무도 없다. 후일 문병(文柄 ; 학문 또는 文治上의 권세)은 반드시 군에게 돌아올 것이다. 조정의 상문(上文)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창려집(昌黎集)을 많이 읽어야 한다,” 고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18세 때 한문(韓文)을 읽고 기뻐했다.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책장을 넘기고 입은 글 읽기를 끊이지 않았는데 1,000여 회에 이르도록 계속했다. 그런 연후에 문장에 진전이 있었다.”고 하였다.
선생이 저술(著述)에서 입초(立草)한 수많은 문장들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하며 박식하여 물 흐르듯, 막히거나 그침이 없어 보는 사람은 마치 대양(大洋)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중국 사람들이 “이 사람은 동국(東國)의 한창려(韓昌黎)[5]이다.” 라고 칭송했다.
[5]창려(昌黎)는 한유(韓愈768~824)의 號이고 字는 退之, 中唐의 文豪로 柳宗元과 함께 古文復興으로 유명하다. 唐宋 8대가의 한 사람. 저서에 『韓昌黎集』50권이 있다.
선생이 글을 쓸 때는 매양 마음속에 초고를 구상하고 벼루에 먹을 가득 갈아 일필로 써 내려가서 검토함이 없이 그대로 상자 속에 던져 넣어두었다가 여러 달이 지난 다음 비로소 꺼내어 교정하곤 하였다. 가끔 그 연유를 묻는 사람이 있어 대답하기를, “처음 기초할 때는 아직 사의(私意)가 들어 있어 당연히 고쳐야 할 곳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래 지난 다음에는 사의가 제거되고 공심(公心)이 생겨 비로소 순전하거나 흠결이 있는 곳을 훤히 알게 된다.” 고 했다. 이것이 선생 문장(文章)의 조예(造詣)이다.
<1481년>18세 가을 7월 정유(24일) : 추강(秋江)과 함께 용문산(龍門山에) 유람하다.
추강(秋江)은 남효온(南孝溫)[6]의 호 인데
그 사람됨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으며 마음씨가 깨끗하고 시원스러워 어느 한 곳 속된 곳이 없었다. 그 기상은 다른 사물에 구속받지 않고 대범하여 의기가 넘치고 감격 잘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기상이 있었다.
25세 때 소능복위(昭陵復位)를 상소한 바 있으며 일찍이 김열경(金悅卿 ; 時習)을 좇아 방랑하며 속세를 벗어난 곳을 찾아 다녔다. 선생과 정신적인 교우관계를 맺고 이번 여행과 같이 명산 등을 동유(同遊)하였으며 기행록을 남겼다.
[6] 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음.
<1481년>18세 8월 병오(4일) : 원주 주천(酒泉 ; 지금의 영월군 주천면) 산중에서 원자허(元子虛) 선생을 방문, 이틀간 유(留)한 다음 돌아오다.
원자허(子虛)의 이름은 호(昊)[7]요 호는 무항(務巷)인데, 세종 5년에 등과(登科)하여 관직은 집현전 직제학까지 지냈으며 남계공(南溪公)과는 문학의 교우였다. 노산(魯山) 계유정난 때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두문불출하여 집안사람들도 면대하기 어려웠다. 청냉포(淸冷浦) 상류에 정자를 짓고 영월을 우러러보다가 1457년(丁丑) 노산군(魯山君.단종)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廬墓)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7]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음.
세조(수양대군)가 호조참의로 불렀으나 죽음을 맹세코 응하지 않았으며 거처 근처의 관부(官府)가 싫어서 주천(酒泉) 산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선생은 평소에 남계공(南溪公)으로부터 그의 고절(高節)을 들은 바 있었다. 추강(秋江)과 함께 공의 토실에서 뵈었는데, 공은 옛 친구의 어린 자식으로 선생을 대하였으며 오랜 지기와 같이 흉금을 터놓고 문답하였다. 병정사(丙丁事 : 즉 병자년(1456년)의 死六臣의 上王복위 모의사건과 정축년(1457년)의 魯山君(단종) 사망사건)에 관한 말씀은 매우 상세하였다.
송별할 때 계곡 입구에 이르러 평소에 지은 바 「탄세사(歎世詞)」를 읊어주어 전별했다.
嗟夷齊邈焉寡儔兮(아! 백이숙제 아득히 머니 벗할 이 드물구나)
空摘翠於首陽(부질없이 수양산에서 푸른 것만 따는 도다)
世皆志義循祿兮(세상이 다 의리를 잊고 녹봉을 좇아도)
我獨潔身而徜佯(나홀로 몸 깨끗이 하고 노닐리다.)
대체로 공의 심경을 선생 등에게 토로한 것이 이와 같았다.
선생과 추강(秋江) 모두 이에 화답(和答)하였다.(문집 6권 참조)
○ 1482년 임인 (성종 13년) 선생 19세
<1482년>겨울 10월 경진(15일) : 큰형동창(東窓), 작은형매헌(梅軒) 두 형을 따라 정시(庭試)에 나갔으나 병을 칭탁하여 곧바로 나오다.
이날 주상이 근정전에 나와 시무책(時務策)에 관한 문제를 내어 선비들을 시험 보았는데, 선생은 장원급제를 두 형에게 양보하고자 병을 칭탁하여 시험을 보지 않고 그 곳을 빠져나왔다. 그래서 결국 매헌공(梅軒公)이 장원을 차지하고 동창공(東窓公)이 둘째로 급제하게 되었다. 주상이 특명을 내려 형제의 서열대로 갑을(甲乙)의 순서를 정하게 했다.
아마 선생은 만약 자기가 답안지를 제출하면 반드시 장원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두 형의 명성을 가리게 된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답안을 작성하지 아니하며 잠시 경쟁심을 없앰으로써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482년>19세 11월 경술(16일) : 운계(지금의 청도 서원리)에 환향하다.
두 형을 쫓아왔는데, 과거 급제 절차를 마친 뒤의 영친(榮親 ; 부모를 영광스럽게 함)스러운 귀성이었다. 점옹(佔翁)은 축하의 서문을 지어 보내왔다.
○ 1483년20세 계묘, (성종 14년, 선생 20세)
<1483년>20세봄 2월 : 밀양에 가서 김(金)종직 선생을 뵙다.
그 당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선생은 홍문관 직제학을 사임하고 밀양에 돌아와 있었는데, 선생이 가서 가르침을 받고 4월에 돌아왔다.
<1483년>20세 가을 9월 신축 {11일} : 남계공(南溪公)(김일손의 부친인 김맹) 상(喪)을 당하다.
남계공(南溪公)은 1410년 경인(태종 10년) 8월 1일에 출생하여 생원, 진사를 거쳐 문과에 등제하였다. 계유정난 때 집현전 교리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는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불기(不起)하다가 성종 초에 비로소 이조좌랑, 참좌리원종훈관(參佐理原從勳官)을 배명하고 사헌부 집의에서 치사(致仕)하였다가 지금에 이르러 향년 74세로 별세하였다.
<1483년>20세 겨울 11월 경술(21일) : 수야산 건좌에 남계공(南溪公) 장례를 지내다
묘는 청도 상북면에 있으며 지문(誌文)은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비명은 함허정(涵虛亭) 홍귀달(洪貴達)이 지었다.
○ 1484년 갑진(성종 15년) 선생 21세
○ 1485년 을사(성종 16년) 선생 22세
겨울 12월 정해(10일) : 복을 벗다.
1486년 병오 (성종 17년) 선생 23세
<1486년> 봄 : 청도군학(淸道郡學)이 되다.
군수 이균(李鈞)이 선생의 문학이 고명하고 언행이 엄정함을 알고 여러 생도를 교수하기 위해 학사(學師)로 초청하였다. 5월에 교궁(校宮:鄕校)이 중수됨에 「중수기」를 썼다.
(記文은 문집 3권 참조)
○ 1486년 선생23세
가을 7월 갑자(21일) : 영남좌도(嶺南左道) 감시(監試) 초시(初試) 양장(兩場)에 합격하다.
초장 부(賦)에서는 제 1인, 종장 의(疑)에서는 제 3인으로 합격하였다.
<1486년>23세 8월 정유(25일) : 복시(覆試)에서 생원, 진사에 합격하다.
생원은 제 1인, 진사는 제 2인으로 합격하였다.
<1486년>9월 임술(20일) : 생원, 진사 합격 증서를 받고 계해(21일)에 사은(謝恩)한 후 갑자(22일)에 선성(先聖 ; 文廟의 聖賢)을 배알하다.
<1486년>23세 9월 무진(26일) : 식년(式年) 정시(庭試) 문과(文科) 초시(初試) 3장(場)에 연달아 수석으로 합격하다.
<1486년>23세 겨울 10월 병술(15일) ; 복시(覆試) 대중흥책(對中興策)에서 제 1명으로 합격하다.{중흥책 문집 5권 참조}
고시관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이번 방(榜)에서 장원한 김모는 틀림없이 비상한 인물이다. 그의 언론을 들으면 추상같이 삼엄하고 그의 문장을 보면 대해(大海)와 같이 왕양(汪洋 ; 문장의 기세가 좋고 큰 모양) 하다. 우리는 이제 조정을 위해 인물을 얻었다.” 고 했다.
<1486년>23세 10월 경자(29일) : 전시(殿試)에 나아가 「친현원간잠(親賢遠奸箴)」 ;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간신배를 멀리해야 한다는 경계의 뜻을 펴는 글)을 지어 올리다.
<1486년>23세 11월 갑자(23일) : 갑과(甲科) 제 2인으로 급제, 증서를 받고 출신(出身)하다.
선생은 복시(覆試) 초장에서 술에 취해 졸다가 답안을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백지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중장에 와서도 역시 그러했다. 종장에 이르러 삼장(三場)의 시권(試券 ; 시험 답안지) 수십 폭을 모두 풀로 붙여 고시관의 문책(問策;試問)에 들어갔다. 중흥책(中興策)을 제목으로 하였는데 송나라 고종이 문제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선생은 그 시제(詩題)를 말면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송 고종은 어버이 일을 잊고 원수를 석방하였으며 오랑캐에게 신하로 굴복(稱臣)하였으니 짐승만도 못합니다. 어찌 감히 하나라의 소강제(小康帝)나 주나라의 선왕(宣王)과 나란히 중흥의 반열에 끼어 넣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고시관은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선생 말씀대로 고쳤다, 선생은 약간 얼근한 술기운을 타고 일사천리로 답안을 써내려가 해가 아직 오시(午時)가 되기 전에 다 끝냈다.
방(榜)이 붙자 사람을 시켜 가보고 오라며 맨 위의 제 1등이 내가 아니면 나머지는 다시 볼 것도 없다 하였다. 가서 보니 과연 제 1등에 있었다.
선생은 비록 문장에 능했지만 매번 자기의 사심(私心)과 욕심을 버리고 두 형들이 펼 수 있도록 하여 두 형 모두 등과한 연후에 스스로 장원을 차지한 것이다. 향시(鄕試)로부터 문과급제(大闡;대천)에 이르기까지 수개월 사이에 연달아 6장(場)에 수석을 차지했으니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전시(殿試)에 이르러 고시관이 시기하여 둘째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선생은 소동파(蘇東坡 ; 송대 제일의 시인,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의 제 2위 한 것과 자기의 상황을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시를 지어 축하했다.
吾師推許孰如君(우리 스승 밀어주고 허락할 이 그대 말고 누구인고)
日月名高吏部文(일월같이 높은 명성 이부(韓愈)의 문장이네)
老御李君踰素分(늙어서 어진 그대를 공경하고 따를 주제도 못되니)
羞將布鼓入雷門(포고 지고 뇌문에 들어가는 부끄러움일세)[8]
淸朝榜眼韓忠獻(맑은 조정 한충헌[9]은 제2명 급제했어도)
市上兒童誦姓名(길거리 아이들도 그의 성명 외웠네)
弘業大功從此始(왕업을 크게 펴는 큰 공 이에서 비롯되느니)
金甌愼勿汚光明(금단지[10]는 더럽히지 말고 광명을 내야 하리)
天生豪傑萬人先(하늘이 내신 호걸 만인에 앞서니)
莫邪神光射斗邊(막사(神劍)의 신령한 빛이 북두변을 비추네)
文藻已看修五鳳(그대 문채 이미 오봉을 보고 닦았으니)
心齋須識呂藍田(모름지기 마음으로 여람전[11]을 새겨둘지어다)
[8]“布鼓毋過雷門”에서 온 말, 즉 會稽城門(회계성문)인 雷門에 설치된 북은 소리가 커서 온 洛陽에 들릴 만한데 소리가 없는 베로 만든 布鼓를 가지고 雷門을 지나면 웃음거리가 되어 부끄럽다는 뜻.
[9]한충헌(韓忠獻) ; ?
[10]금단지는 영토와 주권의 완전하고 견고함을 비유하는 말.
[11]呂藍田은 宋나라 呂大鈞, 呂氏鄕約(自治規範)을 처음으로 실시한 사람.
추강(秋江)은 세속을 벗어난 그의 청아한 풍격과 세상을 압도할 만한 호방한 그의 기상 때문에 평생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경우가 적었다. 그런 그가 항상 칭찬하기를, “선생의 학술은 동광천(董廣川) 같고 문장은 한창려(韓昌黎), 재식(才識)은 채서산(蔡西山), 덕기(德器)는 한위공(韓魏公), 기절(氣節)은 이용문(李龍門), 실행(實行)은 여남전(呂藍田)을 닯았다. 그런고로 그의 앞으로의 진취가 크게 기대된다.” 고 하였다.
위의 하시(賀詩)에서 보는 바도 이와 같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고시관을 맡았을 때 송순(宋純)의 대책(對策 : 問策에 대한 답안)을 읽어보고 “계운 이후 이와 같은 작문이 없었다.”고 말했다.
선생이 세상을 위해 꾀하고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486년>23세 11월 기사(28일) : 승문원[12]에 예속되어 무공랑(務功郞)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제수 받다.
[12] 조선 태조 때 설치한 文書應奉司를 1410년(태종 10년)에 개칭한 것으로 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맡아보던 관청
<1486년>23세 12월 갑술(3일) : 정자(正字) 겸 춘추관[13] 기사관에 승진 임명되다.
[13]국가의 時政을 기록하던 관청. 일명 史館이라고도 한다. 領事, 監事, 知事, 同知事, 修撰官, 編修官, 記注官, 記事官 등의 관원을 두었다.
당시 동창공(東窓公)은 중시(重試)에 등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되고
매헌공(梅軒公)은 이조의 좌랑,
그리고 탁영 김일손 선생은 정자(正字)에 오름으로써 3형제가 나란히 청환(淸宦 : 학식, 문벌이 높은 사람이 하던 홍문과, 예문관, 승문원 등의 벼슬)에 선임되어 일함에 당시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김씨삼주(金氏三珠)”라 했다.
○ 1487년 정미(성종 18년) 선생 24세
<1487년>24세 봄 1월 갑자(23일) : 홍문관[14] 정자(正字) 겸 경연[15]전경(典經), 춘추관 기사관으로 옮겨 보임되다.
[14]조선시대 3司의 하나, 經籍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광청. 일명 玉堂이라고도 하여 젊은 학자들이 추앙하던 곳으로 이 관청의 2품 이상의 官은 經筵官을 겸하였다. 성종은 세종 때의 집현전을 본받아 學士의 대우를 극진히 하였다. 官職은 領事, 大提學, 提學, 副提學, 直提學, 典翰, 應敎, 副應敎, 敎理, 副敎理, 修撰, 副修撰, 博士, 著作, 正字 등이었다.
[15]임금이 학식과 덕망 있는 학자를 불러 학문을 닦기 위해 經書를 강론케 한 일. 경연관에는 領事, 知事, 同 知事, 參贊, 侍讀官, 檢討官, 司經, 說經, 典經 등을 두었는데 대부분 타관과 겸직하였다.
이 임용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임금은 유학을 숭상하고 인재를 일으켜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향당(鄕黨)에 이르기까지 문물이 매우 번성했다. 학문이 깊고 넓으며 품행이 방정한 선비로 이름이 나고 자자한 칭찬이 이어져 무성해지면 중론의 미는 바가 되어 등과 후 얼마 안 되어도 곧바로 남상(南床 ; 弘文館 正字의 별칭)에 오를 수 있었는데, 선생이 바로 그러하였으니 가히 선생의 숙취(夙就 : 이른 승진)를 엿볼 수 있다.
<1487년>24세 3월 병오(6일) : 모친 병환으로 사직하고 귀근(歸覲: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뵙는 것)할 것을 소(疏)를 올려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말미가 주어져 즉일로 출발. 신해일에 운계(지금의 청도군 서원리)에 도착하였다.
<1487년>24세 4월 정해 17일[1] : 안인(安人) 우(禹)씨 별세(26세)하다.
[1]18일 임, 17일은 일본 간지에 의한 것, 일본간지와 중국간지 및 우리나라 간지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만일 연보의 초본 작성시기가 조선초기라면 중국간지로 보아야 한다.
안인(安人 ; 7품관 부인 칭호) 우씨는 1462년 임오(세조 8년) 3월 8일에 출생, 지금에 이르러 별세하니 향년 26세이다. 부인은 매우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인자하고 성실하여 시부모의 사랑을 받았었는데 연세 30 미만에 요절하니 향리 일가친척들과 이웃들이 통탄하고 애석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487년>24세 5월 임인(3일) : 본직에 복귀하라는 교지가 내려 역마를 타고 부임하였다.
<1487년>24세 6월 병자(8일) : 망처(亡妻) 귀장(歸葬)을 위해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말미가 주어졌다.
<1487년>24세 6월 신묘(23일) : 안인 우씨를 나복산 인좌(寅坐)에 장사 지내다.
장지는 청도 상북면과 풍각면의 경계,
즉 절효 김극일선생(탁영 김일손의 조부) 묘 아래이다.
<1487년>24세 7월 기해(2일) : 부름을 받아 서울에 돌아와 다시 사직 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87년>24세 가을 8월 을유(18일) : 행주(杏州)에 있는 추강(秋江)을 방문, 함께 파평(坡平) 남곡(南谷)에 가서 문두(文斗) 성(成)선생을 뵙고 인하여 지경 오른쪽에 있는 명산을 유람하고 열흘이 지나 돌아오다.
문두(文斗)선생의 이름은 담수(聃壽)[16]요 자는 이수(耳叟)인데, 집현전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이다. 병자년(세조 2년) 성희는 친척인 성삼문(成三門) 등의 노산군(魯山君)의 단종 복위 모의 사건에 연좌되어 김해에 귀양 갔다가 마침내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그 후 파주(坡州)에 귀장(歸葬)하였는데, 그 묘 아래 문두 선생이 거처하게 된 것이다.
문두 선생은 스스로 깊숙이 은둔(韜晦)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곧은 마음(貞心)과 맑은 절개(亮節)는 능히 전열(前烈 ; 先代의 忠烈)을 이을 만했다. 선생과 추강이 방문해서 그 문 앞에 이르니, 쓸쓸한 초옥(草屋)은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흙바닥에 자리도 없어 한 몸 용신(容身)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술병을 차고 낚싯대를 들고 선생을 인도하여 장포강상(長浦江上)에서 유람하면서 서로 시창(詩唱)을 주고받았다.
이때 공의 나이는 51세였다. 선생은 이때의 기행록을 써서 남겼다.
[16] 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1487년>24세 9월 경오(10월4일?) : 상소하여 걸양(乞養 :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는 것)하였는데, 임신일(10월 6일?)에 진주목학(晋州牧學) 교리(敎理)로 임명되다.
이 해 봄에 매헌공이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걸양하여 창녕현감(昌寧縣監)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 역시 봉양의 편의를 위해 외직을 주청하였던 것이다.
국법에 정하기를 목(牧) 이상의 문신 중 청렴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학교수(學敎授)로 보내게 되어 있었다.
<1487년>24세 을해일(10월9일?)에 사은하고 기묘일(10월 13일?) 조정에 고별하고, 을유일(10월19일?)에 금산군(金山郡)을 지나다가 봉계(鳳溪)의 고향집에 있는 조태허(曺太虛)를 방문하다.
조태허(曺太虛)의 이름은 위(偉)요 호는 매계(梅溪), 점필재(佔畢齋)의 처남 되는 사람으로 점옹(佔翁)에게 수업을 하였는데, 문학에 능하고 지절(志節)이 있는 사람이다.
선생은 항상 형으로 받들었는데, 이때 공은 직제학으로 상소하여 권세 있고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한 사람(權倖)을 논박함으로써 임금의 뜻을 거슬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지 이미 수개월이 되었다.
선생이 이곳을 지나면서 찾아뵙고 학문을 위하여 임금을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 강론(講論)하고 새벽에 떠났다.
<1487년>24세 정해일(10월 21일?) : 창녕에 이르러 모부인을 뵙다.
<1487년>24세 겨울 10월 무술(?) : 진주학(晋州學)에 도착하다.
선생은 이미 소임에 임하였는데, 몸소 많은 유생을 통솔하면서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는 반드시 엄하게 하고, 예법은 반드시 명확하게 하고, 의리에 힘쓰고, 성경(誠敬;存誠과 居敬)을 깨우치게 하고, 학문(學問)을 강문(講問)하는 방법을 체득케 하여 교도(敎導)의 책무를 다하였다.
독서의 순서는 주자가 정한 규칙(朱子成規)에 따르도록 하여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논어』『맹자』『중용』을 읽은 다음 『시』『서』『춘추』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모두 하나 같이 순응해 따랐다.
한훤당(寒暄堂)이 말하기를, “계운은 교수(敎授)하는 근본을 깊이 체득하여 교학(敎學)에 임했다.”고 하였다.
○ 1488년25세 무신 (성종 19년) 선생 25세
<1488년>25세 봄 3月 정묘(3일) : 진주목사(晋州牧使) 경태소(慶太素公)을 비롯한 관리 등 21인이 더 불어 촉석루에서 수계(修稧)하였는데, 선생이 그 서문을 지었다. (문집 2권, 『속동문선(續東文選)』16권 참조)
<1488년>25세 3월 기묘일(15일) : 함양 남계에 가서 정백욱공(鄭伯勖公)을 방문하다.
정여창 은 백욱(伯勖)의 이름은 여창(汝昌)이요 호는 일두자(一蠹子)인데, 일찍이 두류산(頭流山 ; 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 불출 독서에 전념하여 성리학에 통달한 분이다.
선생과는 도의의 교유를 해왔는데, 이번 방문에서도 3일간 『대학』을 강(講)하고 진양에 귀환하였다.
선생이 한훤당(寒暄堂)에게 보낸 서신에서 일두(一蠹)와 강학(講學)한 일을 말하고, 인하여 일두(一蠹)를 칭찬하기를 “(학문이)점진적으로 고루 충실하게 성취되어 가는 사람은 우리 무리 중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두 선생의 교유에서 서로 권면하고 격려함이 절실하였고 뜻이 계합(契合)하였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다.
<1488년>25세 가을 7월 을축(4일): 상소하여 학직(學職)을 사임하고 다음 날 떠나다.
당시 매헌공은 고을 치적이 불량(殿縣)하다 하여 고향에 돌아와 있었고 선생은 병을 칭탁, 관직을 버렸다.
<1488년>25세 7월 무진일(7일) : 김해 저복산(儲福山)에 있는 조묘(祖墓)를 성묘하다.
<1488년>25세 7월 신미일(10일) : 제문을 지어
시조 왕릉(김수로왕릉)에 제사 지내고 정축일(16일) 운계에 귀환하다.
김해는 본래 가락(駕洛)의 옛터로서 시조 수로왕은 이곳에서 서기 42년 임인에 개국하여 158년간 재위하였고, 168년을 향수(享壽)하였으며 김해부 서쪽 300보 지점에 있는 납릉(納陵)에 모셨다.
왕은 하늘이 내린 성신으로서 보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는데, 인의를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크게 행하여 농자(農者)는 경작을 서로 양보하고 행자(行者)는 길을 서로 사양하였다 한다.
바른 혼인으로서 허후(許后)를 맞아들였고 바른 적통으로서 원자(元子)를 세웠으며 바른 종파와 지파로서 오왕(五王)을 봉하였고, 바른 관원으로서 구간을 세웠다. 사라 십제(斯羅, 十濟) 지방의 사벌(沙伐), 장산(萇山) 등 수십 소국이 모두 와서 조공을 바쳤으며 진변(辰弁) 양한(兩韓)의 땅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실로 단군과 기자 이후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서 해동에서 제일가는 대국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방의 인문이 미개하여 두터운 사기(史記)를 남기지 못하여 성덕(聖德)과 인정(仁政)이 민멸(泯滅)하고 전하지 못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선생은 이미 저복산(儲福山)에서 성묘를 하고 김해 왕릉하에 이르러 제문을 짓고 제수를 갖추어 제향하면서 모부인의 수(壽)를 기원하였다. (제문은 문집4권 참조)
<1488년>25세 8월 병신(5일) : 남백공(南伯恭), 홍여경(洪餘慶), 우자용(禹子容) 등이 내방하여 운문산을 유람하고 기유일에 운계에 돌아와 같이 유(留)하면서 학문을 강(講)하는 등 3일 동안 사귀고 헤어지다.
백공(伯恭)은 추강(秋江)의 자(字), 이름은 효온(孝溫)이고, 여경(餘慶)의 이름은 유손(裕孫) 호는 소총(篠叢)인데, 남양공생(南陽貢生)으로 진사에 합격한 분이다. 역시 점옹(佔翁)한테서 수업하였는데, 점옹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기던 곳을 본 것 같다. 아무 구애․ 구속받음이 없이 물질적 세계를 떠나 자유로이 방랑하며 세상일을 경시하고 도도하며 영리(榮利)에 개의하지 않는 사람이다.” 라고 했다.
선생과 백공과 자용은 다 같이 그와 신교(神交)를 맺어왔다. 백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여경의 글은 칠원(漆園 ; 莊子)과 같고 시는 섭산곡(涉山谷), 숨긴 재주는 공명(孔明), 행위는 유만(類曼) 같아 참으로 이인(異人)이다.”라고 했다.
자용(子容)의 이름은 선언(善言)이요 호는 풍애(楓崖)인데, 뜻이 크고 지조와 기개가 있으며 문학을 즐겨하였다. 신축년 효려 (孝廬 : 집상 중 거처하는 곳)에서 점옹(佔翁)을 뵈온 후로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며 항상 백공(伯恭)을 좇아 유람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번에도 함께 내방하여 운문산을 같이 유람하게 된 것이다.
운문산은 운계(雲溪)에서 동쪽 100리에 있는데, 산의 기운이 준엄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나며 그 터전이 여러 군의 경계에 걸쳐 있고, 그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며 기암과 맑은 못이 많은 절경지이다. 그때의 기행록이 남아 있다.
<1488년>25세 9月 임신(12일) : 운계정사가 완공되다.
선생이 진주목학(晋州牧學)에서 돌아온 후 옛집 동쪽 와룡봉(臥龍峯) 밑에 새로 터를 잡아 지었는데, 준공에 이르자 외헌(外軒)의 편액(扁額)을 ‘운계정사(雲溪精舍)’라 하고 소루(小樓)는 ‘영귀루(詠歸樓)[17]라 하였는데, 용헌(慵軒) 이중균(李仲鈞)이 썼다.
[17] 영귀(詠歸)란 교외의 풍경을 완상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말로 ‘풍류를 즐김’을 이름.
또 집 동쪽 기슭에 대(臺)를 축조하여 ‘탁영대(濯纓臺)’라 써서 새기고 대 앞에 네모난 연못을 파서 냇물을 끌어와 누각 밑으로 흘러가 모이게 하였는데 ‘청운담(天雲潭)’이라고 하였다. 끌어온 물은 ‘활수(活水)’라 하고 작은 돌에 새겨 누각 앞에 세웠다.
선생이 손수 쓴 정사(精舍) 상량문과 누기(樓記), 대기(臺記)가 남아 있다.
○ 1489년26세 기유 (성종 20년) 선생 26세
<1489년>봄 2월 정사(29일) : 정일두공(鄭一蠹公)이 내방하여 두류산(頭流山) 유람을 약속하고 3일간 묵은 다음 돌아가다.
<1489년> 3월 계유(15일) : 선교랑, 예문관[18] 검열 겸 경연의 전경,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고 독촉하는 교지가 있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8] 조선시대 임금의 칙령(勅令)과 교령(敎令)을 기록하던 관청. 제학(提學)이상은 타관으로 겸임했다. 관원은 領事, 大提學, 提學, 直提學, 應敎 각 1명, 奉敎, 待敎 각 2명, 檢閱 4명을 두었다.
이는 한림(翰林 : 예문관 검열의 별칭) 조지서(趙之瑞)와 신종호(申從濩) 등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1489년> 여름 4월 기해(11일) : 함양에 가서 영남도백(嶺南道伯) 김은경(金殷卿) 을 뵙다.
김공은 평소 선생과 친한 사이여서 본도(本道)를 안찰한 후 누차 서로 만나기를 기약하는 서신이 있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마침 순찰 일행이 천령(天嶺 ; 咸陽)을 향하고 있어서 그 일행을 뒤쫓아가 만났다.
<1489년 4월> 경자일(12일) : 남계(藍溪)에 가서 일두(一蠹,정여창1450∼1504)를 방문하다.
<1489년 4월> 임인일(14일) : 일두(一蠹)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유람에 나서다.
김공은 자기와 동행하기를 원했으나 선생은 산행 선약으로 이를 고사했다. 김공은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노자를 준 뒤 송별하였다. 군수 이잠(李箴)도 노자를 후하게 주었으며 선비 임정숙(林貞叔)을 따르게 했다. 이때의 기행록이 남아 있다. (文集 5卷 및 續東文選 21卷 참조)
<1489년 4월> 정사일(29일) : 악양성(岳陽城)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 아래로 내려가다.
배 안에서 시를 지어 창수(唱酬)하였는데 선생과 일두(一蠹)의 시는 다음과 같다.
“滄波萬頃櫓聲柔(푸른 물결 드넓고 노 젓는 소리 부드러운데)
滿袖淸風却似秋(소매 가득 맑은 바람 도리어 가을같아라)
回首更看眞面好(고개 돌려 다시 보니 그 참모습 아름다운데)
閒雲無跡過頭流(한가한 구름은 자취도 없이 두류봉을 지나가네)”
“風蒲獵獵弄輕柔(바람결에 부들잎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四月花開麥已秋(四月이라 화개 땅엔 보리 이미 익었네)
看盡頭流千萬疊(천만첩 두류산을 모두 구경하고)
孤舟又下大江流(외딴 배로 큰 강 따라 또 내려가네)”
위의 시에서 두 선생의 도에 임하는 기상을 대강 엿볼 수 있다.
<1489년> 5월 기미(2일) : 진주에 도착, 강사호(姜士浩)를 방문하다.
사호(士浩)는 혼(渾)의 자(字)요 호는 목계(木溪)인데 문장에 능하여 선생에 버금갔다. 이때 그는 승정원 주서직을 사임하고 돌아온 지 이미 수일이 되었다.
일두(一蠹)와 같이 방문하여 밤새 더불어 시문을 강론(講論)하였다.
<1489년 5월> 임술일(5일) : 밀양에 도착하여 김선생을 뵙다.
이번 여행에서 산천을 두루 관람하고 강론도 거두지 아니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목계(木溪,강사호)도 함께 스승의 집에 가게 되었다. 당시 점필재(佔畢齋) 선생은 병환으로 형조판서를 사직,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집에 누워 있었는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그 무리가 더해갔다.
선생 등은 이곳에서 15일간 유숙하며 가르침을 받고 귀환하였다.
<1489년 5월> 무인일(21일) : 운계에 귀환, 기묘일(22일)에 일두(一蠹)에게 송별연을 베풀고 창녕에 이르러 헤어지다.
<1489년 5월> 신사일(24일) : 또 임금의 부름(承召)이 있었다.
<1489년> 6월 경인(3일) : 비로소 명령을 받들고(拜命) 계사일(6일)에 옥과현감(玉果縣監)에 부임하는 최탁경(崔倬卿)을 전송하다.
탁경(倬卿)의 이름은 한(漢)인데 문장에 능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사헌부 감찰로 있다가 정사(正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온 뒤 이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모두들 애석해했다.
선생은 집정자를 풍자하는 서문을 지어 그를 위로했다. (서문은 문집2권 및 『續東文選』16권 참조)
<1489년> 7월 경신(4일) : 부인(夫人)을 맞는 일(娶妻)로 직무를 다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사직코자 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휴가가 주어졌고 거듭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올라오라는 명령이 내리다.
<1489년 7월> 계해일(7일) : 호서(湖西) 목천(木川)에서 예안 김씨를 재취 부인으로 맞아들이다.
부인(夫人)은 신라 경순왕의 후예인 중랑장(中郞將) 김로(金輅)의 후손이며 영릉참봉(英陵參奉) 김미손(金尾孫)의 따님이다. 집은 현동(縣東) 일원면 번곡리에 있었다.
<1489년 7월> 임신일(16일) : 서울에 귀환하고 을해일(19일) 한원(翰苑 : 예문관)에 입직(入直)하다.
<1489년 7월> 경진일(24일) : 밤 경연에 입시하였다가 어주(御酒)와 초를 하사받고 귀환하다.
이날 밤 주상의 특명으로 경회루에서 경연을 열었는데 부시(賦詩)에 대한 계획된 강(講)을 마친 다음 술을 내림에 잔뜩 취하여 물러나오니 이미 오고(五鼓 : 새벽 4시 전후) 때가 되었다.
<1489년 7월> 병술일(30일) :소를 올려 경계해야 할 3개항을 계진(啓陳)하고 인하여 사직을 청하다.
주상은 술을 너무 좋아하고 희첩(姬妾)을 가까이 하였으며 더러는 종척(宗戚)을 불러 후원(後苑)에서 활을 쏘고 그런 다음에는 반드시 주연을 베풀고 기악이 뒤따랐다. 선생은 극간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언사가 심히 간곡하고 지극 하였다.
주상은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비답(批答 : 신하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대답)을 내리며 말하기를, “김일손은 진실로 나를 아끼는 사람이다.”라 하고 한 품계 올리도록 명했다.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을 방문하여 치도(治道)에 대하여 논(論)하다.
심원(深源)의 자는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으로 호령대군(孝寧大君)의 후예이다.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성리학이 깊으며 강직하고 감언(敢言)을 좋아했다.
선생은 일찍부터 교유했는데 「동산문답(東山問答)」이 남아있다.
<1489년> 추 8월 경자(15일) : 임금의 명령에 따라 조정의 공경과 양관의 여러 학사와 더불어 장악원(掌樂院)에서 완월(玩月;달구경)모임을 가지다.
이날 주상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를 상고하건대 월수로 보아 한서(寒暑)가 고루 취해졌다. 달이 만월이 되면 옛사람들은 달구경을 즐겨했는데, 이는 참으로 뜻이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풍속이 없지만, 마침 가절을 맞았으니 임금의 은혜를 빌어 시원한 곳을 골라 즐긴다면 이 얼마나 태평스러운 형상이며 아름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인하여 명하기를 정부 육조의 당상관, 홍문관 및 예문관원, 승지, 주서 등으로 하여금 장악원에서 달을 완상하게 하고 술과 주악을 내려 즐기게 하였다.
선생은 한림(翰林 : 예문관 검열)으로서 여기에 참여하였다.
<1489년 8월> 병오일(21일) : 또 명을 받들어 이곳에서 종척(宗戚), 문무 이품 이상 대신, 양관(兩館), 정원(政院)의 사람들이 회연(會宴)하다.
이날 주상은 후원에서 두 자전(慈殿)에게 잔치를 베풀어 올렸는데 내외명부 모두 참석했다. 그런데 다시 돈녕부 영사 이상의 종친, 정부 육조의 참판이상, 충훈부, 한성부, 의빈부의 당상관, 정원, 홍문관, 예문관 관원, 도총관 등을 불렀고 모두 함께 이곳 모임에 참석했다.
술과 음악이 내려지고 거듭 명하여 활쏘기와 투호(投壺 : 화살을 병속에 던져 넣는 놀이)를 하게 하였다. 또 어서를 내리고 진찬을 하사하여 모두 흠뻑 취하였으며 꽃을 꽂고 돌아왔다.
<1489년 8월> 무신일(23일) : 이주(李冑)와 더불어 경연에 입시하여 사관이 기사하는 규범에 대하여 주청하다.
주상은 자주 경연에 임석하고 강(講)이 끝날 때마다 여러 강관으로 하여금 시정의 득실에 이르기까지 문답하고 논란하게 하였다. 참으로 성덕 스르운 일이었다.
이날 선생은 한림, 이주(李冑)는 사관으로서 입시하여 함께 아뢰기를, “국사는 귀중한 것이므로 그 기록은 충실해야합니다. 고사를 살펴보면 ‘발끈 성내어 안색이 변하였다.’, ‘음성과 안색이 모두 험악했다.’ 또는 ‘용모가 태연자약했다.’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관이 만약 안색을 보지 못한다면 무슨 근거로 이와 같이 기술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에서는 사관들이 붓을 잡고 황제 좌우에 서서 기록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관이 엎드려서 기사합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는 불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했다. 이에 주상은 명하여 “지금부터 사관은 앉아서 기사하라.”라고 하였다.
<1489년> 9월 경신(5일) :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로 주상에게 치도(治道)에 대하여 진언하고 인하여 모친 병환을 이유로 사직코자 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휴가가 주어져 돌아가 간호하다.
선생이 주상을 보니 천성적으로 성지(聖智)가 총명하고 문학을 좋아하며 어진 이를 존대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니 지극히 잘 다스려진 세상으로 부흥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마침내 다음의 치도(治道) 12조항을 진언했다.
제목만 간추리면
․ 학문을 권장할 것(勸學問)
․ 기호(嗜好)와 욕망을 절제할 것(節嗜欲)
․ 관직 임명을 대범하게 할 것(簡辭命)
․ 궁중을 엄하게 다스릴 것(嚴宮禁)
․ 간쟁을 수납할 것(納諫諍)
․ 버려진 유능한 사람을 등용할 것(擧遺逸)
․ 충신(忠臣)과 간신(奸臣)을 분별할 것(辨忠奸)
․ 학교(學校)를 일으킬 것(興學校)
․ 풍속을 바르게 할 것(正風俗)
․ 이단을 물리칠 것(闢異端)
․ 목민관(牧民官)은 가려서 뽑을 것(擇司牧)
․ 민생고를 구휼할 것(恤民隱) 등인데,
무릇 5천여 단어의 글 속에는 뿌리 깊은 시폐를 바로 잡으려는 말씀이 많았다.
주상은 친히 비답하면서 칭송하여 말하기를, “너는 신진으로 아직 연소한데 세상 다스리는 방법(治體)에 통달하고 시무에 대하여 알기를 이와 같이 능하니 나는 심히 기쁘도다. 너의 창언(도움이 되는 좋은 말)에 대한 포상의 표시로 표리(表裏 : 겉 옷감과 안감)를 특별히 하사하노라.
내 들으니 친병(親病)이 있다 하니 너는 사직하지 말고 지금 곧 속히 가서 양호하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추강(秋江,남효온1454~1492)이 일찍이 말하기를, “계운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사(才士)요 정승의 그릇(廟堂之器)이다. 국사를 논의하고 인물의 시비를 논할 때는 마치 청천백일과 같이 밝도다. 붕우 가운데 제일인이로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입조한 지 9년 남짓 동안 울린 소(疏)와 차자(箚子)는 부지기수요 몇 천만언(千萬言) 이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화를 입어 거의 다 불타 없어지고 전하지 못하니 이 애석함을 어찌 감당할꼬!
지금 견문에 이거하여 근근이 기록에 올리는 것은 그 대강에 지나지 않는다.
<1489년 9월> 계미일(28일) : 예문관 검열로써 승훈랑이 더해지고 홍문관 정자를 겸하도록 교지가 내렸는데 또 친병을 이유로 고사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1489년> 겨울 10월 정해(3일) : 탄핵을 받아 금녕(金寧;김해)에 유폐되었으나 갑진일(20일)에 왕은(王恩)을 입어 방면, 고향집으로 귀환하다.
김일손 선생 의 탄핵에 대해
당시 요로에 있는 권세 가진 자가 선생의 명성이 높아짐을 시기하여 장령(掌令 : 사헌부 정4품관) 이승건의 경쟁심을 이용, 사주하여 무고로 탄핵하기를 “자기 재주를 믿고 임금에게 오만하고 교묘히 속여 명예를 구(釣名)하며 임금의 총애를 얻으려 한다.”는 등 몇 가지 사항을 들었다.
이에 주상이 “내 이 사람의 충직함을 잘 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대론(臺論)에 위법이 무겁다 하니 삭직하여 금녕(金寧; 즉 김해)에 가두어라.” 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17일 만에)주상은 죄가 아님을 살피고 특명을 내려 방면,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1489년 10월> 임자일(28일)(방면 8일 후) : 다시 정자(正字)에 제수됨에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고 면직을 구걸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또 고사하다.
선생은 멀리 고향에서 상소하기를 “소신은 외람되이 높은 요직을 탐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인하여 대죄(待罪)하게 되었으며 관직을 얻었으되 그 직책을 불안하게 하였으므로 거듭 사면(辭免)을 청하는 글을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1489년>겨울 10월 11월 무오(4일) : 중국의 요동 질정관(質正官)[19]으로 제수하는 특별 교지가 내려 역마로 상경, 병인일(12일)에 배명하고 정묘일(13일)에 조정에 고별한 후 즉행하다.
[19] 질정관(質正官): 조선시대 임시관직, 글의 음운이나 기타 사물의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시비를 바로잡는 일을 맡았다. 중국에 사신이 갈 때 함께 가기도 하였다.
사안이 나라 밖으로 떠나는 중요한 일이고 또 재차 제수하므로 감히 고사하지 못하고 배명하였다.
요동은 중주(中洲)에 있는데, 의주와는 다만 한 줄기 강물이 그 사이에 있는 곳으로서 얼어붙으며 평지가 되어 잇닿아지므로 피차의 인민이 서로 왕래 교통하면서 매매하였다. 임금은 이곳에서 사단(事端)이 야기될까 염려하여 일찍이 요동도사(遼東都司)에 공문을 보내어 서로 뒤섞여 사는 것을 방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잘 금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임금은 선생이 혼자 능히 응대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판단, 천자(天子)의 조정에 주청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하고 특별히 소환하여 파견한 것이었다.
황제는 요동도사에게 유시하여 “장차 요동민으로 하여금 임자의 승낙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짓거나 같이 거주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진력하라. 비석을 세워 금지조항을 약정하고 종족의 혼거(混居)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고치도록 하라.”하였다.
○ 1490년 경술 (성종 21년) 선생 27세
<1490년> 봄 1월 : 연경(燕京) 오만관(烏蠻館 : 지금의 옥하관:중국)에 머물다.
<1490년> 3월 계축(3월 1일) : 연경으로부터 귀국, 갑인일(3월 2일)에 비현각(丕顯閣)에서 임금을 뵙고 복명(復命)하다.
선생이 중국에서 유한 곳은 옥하관이었다. 선생은 황제가 하사한 물건으로 몽땅 경적(經籍)을 사들였다. 그리고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고화(古畵) 14폭을 가지고 와서 사기를 청함에 마침내 떨어진 옷과 황제가 하사한 명주옷을 벗어주고 고화와 바꾸었다. 귀국 후 그 고화로 작은 병풍을 만들어 큰형 준손(동창공)에게 드렸다.
공은 당시 걸양하여 함양군수를 하고 있었는데, 상군(上郡)으로 일으켰다. 성생은 서문을 지었었다. (문집 2권 참조)
<1490년> 3月 정사(5일) : 낙산(駱山)의 원정(園亭)을 하사하는 교지가 있어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동창공이 을유년(1465년) 봄 홍문관 응교로 있다가 귀양(歸養)하기를 간곡히 주청하였으나 주상은 허락하지 않고 도지부(度支部;戶曹)에 명하여 성동(城東)에 있는 한 구역을 매입 하사하고 모친을 모시고 여기에 와서 살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이 집에서 거처해 왔는데, 함양에 부임하게 되므로 상소하여 하사받은 집의 반환을 주청하였다.
주상은 이 집을 다시 선생에게 하사하였다. 선생은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당시 선생 부인 김씨는 목천(木川)의 친정에 있다가 빠른 길로 상경하여 선생의 귀국을 기다리면서 머물고(留) 있었으므로 같이 입거(入居)하게 되었다.
이 별장(園)은 낙산 밑 영천동(靈泉洞)에 있었는데, 녕성군(寧城君) 최항(崔恒 : 세조 때의 영의정)의 옛집이었다. 바위와 샘과 화목이 있어 경관이 좋았고 샘 위에는 이화정(梨花亭)이라는 한간의 초가 정자가 있었는데, 인재(引齋) 강희안(姜希顔)이 이름 짓고 쓴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내력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선생이 비로소 작문하여 기록하였다.
<1490년 3月> 경신일(8일) : 통선랑, 승정원(承政院)[20] 주서 겸 예문관 검열에 제수됨에 세 번씩이나 소를 올려 명을 거두어줄 것을 주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20]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임금의 비서실). 관직은 都承旨, 左(右)承旨, 左(右)副承旨, 同副承旨, 注書, 政注書 등이었다.
선생은 힘을 다하여 주청하기를, “재학(才學)이 천박하여 사관직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례를 보더라도 한림(검열)과 주서직을 겸직한 예가 없고 기사직(記史職)은 참으로 중요한 직임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일과 결코 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쪽 직임을 깎아주소서.” 하고 세 번씩이나 고쳐 주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90년 3月> 을축일(13일)에 비로소 정중히 사례하고 경연에 입시하여 노산군(魯山君) 후사(後嗣)를 세울 것을 주청하고 다시 사임 소를 올렸으나 모두 윤허되지 않다.
이날 아침 강(講)에 주상이 나왔는데, 강은 춘추자시전(春秋左氏傳)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은 사관으로서 입시하여 주청하기를, “끊어진 세계를 이어주는 것은 어진 임금이 행하는 매우 훌륭한 전례(典禮)입니다. 당초 노산은 유약(幼弱)하여 맡겨진 책무를 이기지 못하였을 뿐 종사(宗社)에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의 고혼(孤魂)은 의탁할 곳이 없이 떠도는지라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靈)이 이 모양의 자손을 본다면 어찌 근심이 없고 마음이 편하겠으며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는 대부의 무후에도 영을 내려 제사를 지내주게 했는데 하물며 이전에 임금이었던 분이 의지할 데 없이 고독해서는 어찌 성조(聖朝)의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무왕(武王)은 은(殷)나라 토왕(討王)을 정벌하였으나 그의 아들에게 봉록을 주어 아비를 이어 은의 선대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주공(周公)은 채숙(蔡叔)을 추방하고 그의 아들 호(胡)를 봉해 주었습니다. 토왕(討王)의 악행은 하늘과 사람에 미쳤으며 채국의 죄 또한 종사와 유관하여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세종(世宗)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공순공(恭順公) 방번(蕃芳)과 소도공(昭悼公) 방석(芳碩)은 모두 가까운 친척인데 불행하게도 후사가 없다.’ 하시면서 명하여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를 공순공 후,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소도공 후사로 정하고 사당을 세워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인(仁)의 지극함이요 의(義)의 극진함이었습니다. 고인의 말에 요순(堯舜)의 법은 따르려 애써야 하나 조종(祖宗)의 법은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에 관련하여 신은 ‘무왕과 주공의 법은 따르려 애써야 하나 세종대왕의 법은 반드시 따라야한다.’ 고 말하고자 합니다. 전하, 어찌 되었든 지금 노산(魯山) 부인 송씨(宋氏)는 아직 생존해 있는데 만약 후사를 세워 봉사케 한다면 이는 곧 전하의 지극한 덕(德)이 삼성(三聖)에 이어지고 나라의 명맥이 연장이 되는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이는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조종조(祖宗朝)의 일이라 가벼이 논의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 곧 해당 부서에 명하여 몰수된 송현수(宋玹壽 : 魯山 夫人의 아버지)의 가산과 노비를 송씨에게 환급하여 그의 생계와 노산군 봉사(奉祀)의 자산으로 삼게 하라 명하였다. 강(講)이 끝난 다음 다시 나아가 힘을 다하여 직접 상소하였으나 주상은 친히 비답하시되 심히 두터운 은총을 쏟음이 큰지라 마침내 다시 감히 아뢸 수가 없었다.
대체로 주상은 선생이 사기(史記)에 대한 재주가 있음을 익히 알고 있어서 사간원(司諫院)[21]과 사헌부(司憲府)[22]의 매우 바쁜 직책에 보임되어 있어도 사관직은 반드시 겸임하도록 했다. 그래서 선생이 누차 사면의 소를 올렸으나 끝내 윤허되지 않곤 했다. 참으로 세상에 드문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선생이 한림(翰林)과 사관직에 근무한 것은 전후 무릇 6년간이나 되었으며 근간의 기사(記事)는 시정(市政)의 득실, 인신(人臣)의 충간(忠奸)을 직필하는데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본받아 거리낌 없이 행하였다. 이에 군자들은 양리(良吏)라 칭송하였으나 소인배들은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21]사간원(司諫院) : 조선시대 간쟁(諫爭), 논박(論駁)을 맡은 관청. 여러 관청에서 각 도에 명령을 내릴 때는 먼저 사간원에서 논의하였다. 諫言을 듣는 것은 임금의 의무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관원은 大司諫, 司諫, 獻納, 正言 등과 書吏가 있었다.
[22]사헌부(司憲府) :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시정을 비판하고 모든 관리를 규찰하여 억울한 것을 바로잡아 주는 관청. 지금의 감찰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憲府, 柏府, 靈臺, 烏臺, 御史臺, 監察司라고도 불렀다. 직제는 大司憲, 執義 1명, 掌令 2명, 持平 2명, 監察 13명이고 書吏가 13명이었다.
그 후 병자년(중종 11년)에 이르러 노산군(魯山君) 후사 세우는 문제를 여러 신하와 논의 하였다. 경연관 채침(蔡忱), 기준(奇遵) 등은 모두 수사를 세워 봉사하게 함은 선왕(先王)의 끊어진 대를 잇는 대의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대신 정광필(鄭光弼)과 유순(柳洵)은 조조조(世祖朝)의 일이라 가벼이 고칠 것이 아니라 하여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입후 문제는 파론(罷論)되고 다만 제수를 관급(官給)할 것을 명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한산(韓山)군수 이약빙(李若氷)이 또 소청을 올렸다. 이에 대간(臺諫)에서 그를 체포하고 파직할 것을 주청함에 이르러 필경 일이 성사되지 못하였다.
<1490년27세 3月> 병인일(14일) : 사관(史館)에 입직하여 사초(史草)를 닦으면서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조의제문」을 수록하다.
임신년(1452년, 문종 2년) 문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 원년, 즉 계유년 겨울에 수양대군(세종의 2子)이 정난(靖難)의 뜻이 있어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과 모의 고명대신(顧命大臣 : 임금의 임종에 유언으로 후사를 부탁받은 대신)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및 정분(鄭苯),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 세종3子),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허후(許詡) 등을 살해했다. 을해년(단종 3년, 세조 원년) 여름 수양대군은 왕위를 선양(禪讓)받고 단종(端宗)은 상왕(上王)이 되었다.
병자년(1456년 세조 2년) 여름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이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다가(단종복위사건)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에 상왕(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출거(出居=유배)하게 되었다.
노산군(단종)은 「자규사(子規詞」두 편을 지었는데, 이를 본 나라 안 사람치고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457년 정축(세조3년)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 세종 6자)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노산군(魯山君) 복위를 모의하다가 일이 또 발각되어 모두 죽었다. 이때 부원군 송현수(宋玹壽), 녕양위 정종(鄭悰) 등도 아울러 피살되었다.
신숙주(申叔舟)가 홀로 아뢰기를,
“지난해 이개(李塏) 등이 노산(魯山)을 위한 언동을 하더니 이제 유(瑜) 역시 이에 끼이고자 하니 노산은 난(亂)을 불러일으키는 유인(誘因)이 되는지라 노산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해다. 이에 정인지(鄭麟趾),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이 이어서 말하기를, “노산은 종사에 죄를 지었는데, 만약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부귀를 도모하려는 자들이 이를 빙자하여 마을 꾸며댈 것이니 죄 사함은 불가하다. 노산을 처단하여 민망(民望)을 단절케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드디어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영월에 이르렀는데,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나장(羅將 : 의금부의 하급관리)들만 재촉하였다. 이때 상왕에게 늘 시중드는 한 유생이 나와서 칭하기를 스스로 당하시게 해달라고 했다. 이때 상왕의 연세는 겨우 17이었다. 유생이 문을 나가기도 전에 상왕은 아홉 구명에서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셨다. 시녀와 중인들은 다투어 동강(東江)에 몸을 던지니 그 시신이 강에 가득하였다.
이날 큰 뇌우와 열풍이 일어나 나무가 뽑히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퍼져 밤이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읍장(邑宰)과 종인들은 감히 수렴(收殮)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군호장(郡戶長 : 아전의 우두머리) 엄흥도(嚴興道)가 와서 슬피 울면서 몰래 관(棺)을 거두어 군북 5리에 있는 동을지(冬乙旨)에 장사 지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교지가 내려 소릉(昭陵)의 변이 생겼다. 즉 조정에서는 능을 파서 강물에 던지라 명하였다. 엄흥도(嚴興道)는 묘를 팠다가 도로 묻은 것처럼 가장한데 대하여 참지 못했다. 읍 사람들은 애통해하면서 제(祭)를 지냈다. 길흉화복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인가? 제사에 영검이 나타났다.
이때를 당하여 시골 아낙네와 길거리의 아이들이 비록 군신간의 도리를 모르지만 차마 보지 못할 흉변을 보고는 울분을 터트리지 않은 자 없었으며 “정인지(鄭麟趾) 간적배들이 차마 하지 못할 흉악한 짓을 우리의 착하신 임금을 거스르고 핍박했다.”고 하고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을 저절로 내뱉으며 소리 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 사관이 기록하기를, “노산은 영월에 있으면서 금성대군 유(瑜)와 송현수(宋玹壽) 등이 형벌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여 세상을 마침에 예로서 장사지냈다.”고 했다. 이는 여우와 쥐새끼 같은 무리들의 간사한 허위의 사필(史筆)이었는데 후에 실록을 편수한 자 역시 모두 아첨을 좇았다.
신축(1481년18세때) 가을 탁영 선생이 주천(酒泉) 산중에서 원(元)자허(子虛)공을 만났을 때
원(元)공은 선생에게 그때의 사실(단종복위사건)을 매우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점옹(佔翁,점필재 김종직)이 아직 진사로 있을 때인 1467년(당시 탁영선생 4세) 정축(세조 3년) 겨울 밀양에 있으면서 노산의 변고를 듣고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그 까닭은 충분을 (義帝事에) 빗대어 은연중에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선생은 사관(史館)에서 사기(史記)를 기초(起草)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기록하고[1] 점옹의 글을 실었는데, 이는 후세 사람들에게 절의(節義)를 복돋우는 데 털끝만큼의 도움이라도 주기 위한 것이라 했다.
[1]어떻게 위에 언급한 사실들을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이를 빗댄 조의제문 하나로 사화가 일어났는데 사실을 기록하기란 불가능하였으리라 짐작된다.
<1490년27세> 여름 4월 정해(5일) : 정원(政院;승정원)에 입직(入直)하다.
<1490년27세> 4월 기축일(7일) : 『육신전(六臣傳)』을 완성하다.
추강(秋江;남효온)은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다. 거기에 수집, 수록된 전문(傳聞) 중에는 꽤 많은 착오가 있었는데, 매양 바탕에 한을 깔고 있어서 선생은 상세한 진상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은 사관(史館)과 『승정원 일기』를 조사하고 원래의 초고를 참작하여 고쳐지었다. 그리고 이 전(傳)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위하여 집에다 갈무리하고 후세의 자세한 역사가 되도록 기다리기로 했다.
<1490년27세 4월> 병신일(14일) : 한원(翰苑:예문관)에 입직 중 모부인의 병환으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린 후 곧바로 출발, 함양에 가다. 무신일(26일)에 모부인을 모시고 운계에 귀환하다.
선생이 한원(翰苑)에 숙직하고 있는 동안에 모부인의 병보(病報)를 듣고 즉시 사직의 소를 올리고 출발하여 별이 총총한 밤중에 함양군에 당도하였다. 이틀이 지난 후 예문관 관리(館吏)가 비교(批敎:사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과 교지)와 삼료(蔘料)를 받들고 역마를 달려 도착했는데, 교지의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듣컨대 너의 친병(親病)이 매우 극심하다 하니 심히 염려되어 특별히 관리를 파견, 약료(藥料)를 내린다. 모름지기 급히 가서 호양(護養)하고 곧 속히 올라와 나를 보좌해 주기를 갈망하노라.”
대부인(大夫人)은 전부터 풍환(風患)을 앓고 있었는데 ,매양 발병하면 위독해지고 며칠이 지나면 차츰 나아져 평상과 같이 편안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선생이 도착하니 이미 병이 나아 고향집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말씀하시기를, “우리 시골 늙은이들은 지방 수령의 봉양이 분에 맞지 않는다. 곧 운계(雲溪)에 돌아가자.”고 하였다.
<1490년27세 4월> 신해일(29일) : 한훤(寒喧.김굉필)이 내방하여 가야산 관광을 약속하다.
한훤당(寒喧堂.김굉필)은 김대유(金大猷)의 호이고 이름은 굉필(宏弼)인데, 은거하면서 학문을 즐겨했다. 선생과는 도의(道義)의 교유(交遊)를 하는 사이인데, 대구 현풍(玄風)에 살면서 선생이 귀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내방하여 가야산 유람을 약속한 것이다.
<1490년 5월> 갑인일(5월3일) : 영산(靈山:지금의 창녕 영산면) 부로(父老)들의 부탁으로 신담(申澹) 생사당기(生祠堂記)를 짓다.
신담(申澹)의 자는 청경(淸卿)인데, 독서를 좋아하고 시 읊기를 잘했다. 영산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떠나게 되었는데, 현의 부로들이 그의 초상을 그려 생사당을 세우고 당기(堂記)를 선생에 청하였던 것이다. {기문은 문집 3권 및 『속동문선』 14권 참조}
<1490년> 5월 갑자(13일) : 초계(草溪)에 가서 순상(巡相) 정괄(鄭佸)을 뵙고 종행(從行)하다.
정공(鄭公)의 자는 경회(慶會)인데, 기절이 있고 세상 다스리는 방법(治體)에 밝았으며 항상 점옹(佔翁)과 종유(從遊)했다. 선생은 공에게 인척이 되고 또 평소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지금에 이르러 공은 도백(道伯)으로서 그의 순시 일행이 우도(右道)를 향하면서 선생에게 서신을 보내어 도중에서 만나기를 초청해 왔다.
선생은 말을 달려 초계(草溪)에서 공을 뵈고 며칠 동안 종행(從行)하였다.
<1490년 5월> 무진일(17일) : 합천에 도착, 매월누(梅月樓)에 오르고 경오일(19일) 운계에 돌아오다.
군수 김영추(金永錘)가 객관의 동북에 새 누각을 세웠는데, 마침 완성되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정공(鄭公)이 매월누(梅月樓)라 명명하고 선생은 누기(樓記)를 지었다. (기문은 문집 3권 참조)
<1490년 5월> 신미일(20일) : 통덕랑 홍문관 저작 겸 경연 설경에 전직인 주서와 검열직을 겸직하도록 제수하고 독촉하는 교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다.
<1490년 5월> 병자일(25일) : 한훤과 함께 야성(冶城)에 가서 가야산을 유람하고 조현당(釣賢堂)에 머물면서 강학하다.
방태화, 송구보, 이호원, 안시숙, 하응기 등도 와서 같이 놀았다. 그리고 함께 머물면서 춘추에 대한 강을 했으며 나중에 하산하여 부도(浮屠)에 은거 중인 노승 라화상(螺和尙)의 강설도 있었다.
선생은 당기(堂記)를 지어 게시하였다. (문집 3권 참조)
<1490년> 가을 7월 병진(6일) : 홍문관 박사 겸 경연의 사경, 춘추관 기사관, 세자시강원[25] 설서에 승직하고 이전의 주서, 검열직은 그대로 겸하도록 하는 교지가 내려 고사하였는데 윤허되지 않았다.
[25]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 태조 초에 설치한 세자관속(世子官屬)을 후에 개칭한 것으로 왕세자를 모시고 經書, 史籍, 道義를 가르치는 임무를 맏은 관청, 관직은 師, 傳, 貳師, 左(右)賓客, 左(右)副賓客, 贊善, 輔德, 進善, 弼善, 文學, 司書, 說書, 諮議 등이 있었다.
<1490년 7월> 을축일(15일) : 부름을 재촉(促召)하는 교지가 내려 신구직(新舊職)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경오일(20일)에 부름의 명을 받아 기묘일(29일)에 비로소 배명하고 다음날(30일) 또 힘껏 고사하다.
<1490년> 8월 계미(3일) : 교지가 내려 주서와 설서직이 경질되고 조봉대부(朝奉大夫),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왕의 교서 등을 초안하여 올리는 관직) 겸 경연의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으로 승직되고 예문관 검열직은 그대로 가지게 되다. 이에 전과 같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직임에 나아가다.
선생 이후 지제교(知製敎)와 경연(經筵), 춘추관의 직함을 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종의 치세에 비록 옥당(玉堂:홍문관의 실무직)에서 다른 직책을 배수하더라도 종전 직책을 아울러 겸대(兼帶)하였는데, 이는 모두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의한 것으로서 신하된 사람으로 이 이상의 영예가 있을 수 없었다.
<1490년> 9월 경신(11일) : 추강과 함께 삼각산에 있는 설잠(雪岑)스님 김열경(金悅卿)을 방문하다.
열경(悅卿)의 이름은 시습(時習)[24]이요 호는 동봉(東峰) 또는 매월당(梅月堂)인데 고려 명신 김태현(金台鉉)의 후손이다. 5세 때 시에 능하여 신동으로 이름나서 세종대왕 앞에 불려가 시작(詩作) 시험을 받은 바 있다.
1455년 을해(단종 3년, 세조 원년) 산사(山寺)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중 단종의 왕위 선양 소식을 듣고는 즉시 문을 닫고 대성통곡하며 그의 책을 불살라 측간에 처넣고 달아나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중이 되어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방랑했다. 외견상으로 그의 사람됨은 호탕하고 재기가 뛰어나며 대범하고 솔직하며 뜻이 굳고 곧았다. 당시의 세속에 대하여 슬퍼하고 분통해하며 거짓 미친 체하고 스스로 은둔하였다.
[24]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달 밝은 밤을 만나면 매양 「이소경(離騷經)」[25]을 노래하고 노래가 파하면 통곡했다. 나무를 마주 대하고 제시(題詩)를 지어 읊조리기를 즐겨했는데, 한참 지나서는 문득 통곡하고 지워버리거나 간혹 종이에 써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참으로 세상을 숨어사는 절의지사(節義之士)였다.
[25]이소경(離騷經) : 옛날 전국시대 초나라 충신 굴월(屈原)이 참소로 쫓겨난 몸으로 연군(戀君)의 정을 읊은 부(賦).
선생과는 <29세의> 나이 차이를 불고하고 허교(許交)하여 서로 깊이 맺은 사이였다. 이때 설잠(雪岑 : 일찍이 인제 설악에 오래 은거한 연유로 지은 자호)이 중흥사(重興寺 : 북한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추강과 더불어 술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사람들을 물리치고는 세 사람이 둘러앉아 밤새 담소하고 드디어는 함께 백운대(白雲台)에 등정하였으며 도봉(道峰)에 이르기까지 무려 5일동안 같이 지내고 헤어졌다.
세 분은 다 같이 절조가 높고 행실이 고상하며 박학하고 웅변이었으며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에서 교유했다. 그 담론 속에는 필시 상하, 고금, 종형, 그리고 하늘과 사람에 관한 것이 있어 가히 세상에 전하여 후생들로 하여금 행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없애고 기록에 남기지 않았는데, 그 말씀 속에는 기휘(忌諱)하는 바에 저촉되는 것이 많아 그렇게 한 것인지 후생들이 감히 엿볼 바가 아니다.
<1490년 9월> 병자일(27일) : 성균관 전적 겸 중학 교수로 이동 보직 명이 내려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1490년> 윤9월 정해(8일) : 또다시 한원(翰苑)의 겸직을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1490년> 10월 병진(8일) : 조산대부 사헌부 감찰이 종전 직함에 추가하여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 무오일(10일)에 시정(時政)의 폐단 7개 사항을 논하는 소를 올리다.
<1490년 10월> 무인일(30일) : 다시 검열직을 사임하고 대신 일두(一蠹)를 천거하여 윤허를 받다. 기묘일(11월1일)에 검열직이 경질되고 대교(待敎 : 검열의 상위직)로 승직됨에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배명하다.
선생은 일두(一蠹, 정여창 1450~1504)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 대신 국사를 관장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하고 자기 대신으로 추천하였는데, 그 소장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새로 급제한 신 정여창은 도가 천인에 통하고 학문은 체용(體用 : 原理와 運用)을 갖추었으며 성정(性情)은 욕심 없이 담담하고 기질(器質)은 단정하며 몸가짐은 청렴결백하여 곤궁을 견디고 모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질고 너그러우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진실과 믿음이 있어 가히 풍속을 바르게 할 만하고 그의 도타운 겸양은 가히 백성을 교화(敎化)할 만하옵니다. 또한 깊고 넓은 학문과 공평무사한 논의는 모두 그의 경학(經學)에 바탕을 두고 있어 가히 고문(顧問)의 자격을 갖추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깊고 밝으며 문장의 어휘가 풍부하여 예스런 면모가 있어 가히 제찬(制撰 :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 짓는 일)을 맡길 만하고 뿐만 아니라 말을 받아 기록하는 데 있어서는 세사(細史)를 다룰 재주가 뛰어납니다. 그 외의 일은 모두 하찮은 재주에 속합니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행실의 평판은 온 유림에 빛나고 있고 시대적 인망(人望)과 연배(年輩) 모두 신보다 앞서있습니다. 전하,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 대신 이 사람을 뽑아 등용하소서. 그리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문신을 중히 여기며 어진 이가 진출하고 불초(不肖)는 물러가게 하는 정사를 펴시어 성조(聖朝)를 빛나게 하소서.”
이에 주상은 그 말을 깊이 납득하여 선생을 대교(待敎)로 승진시키고 일두(一蠹)를 검열로 보임시켰다.
<1490년> 11월 기축(11일) : 본직을 가진 채 진하사(陳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명나라 서울에 가다.
○ 1491년 신해 (성종 22년) 선생 28세
<1491년> 봄 1월 :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 오만관(烏蠻館)에 체재하다.
<1491년> 2월 경술(4일) :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 정유(程愈)를 만나 『소학집설』를 얻다.
선생은 몸은 비록 동방의 한쪽에 치우쳐 살고 있으나 뜻은 중화(中華)의 군자들, 즉 위로는 정주(程朱 : 程子와 朱子)로부터 아래로 김허(金履詳과 許衡 : 모두 元대의 유학자)에 이르기까지 흠모하면서 항상 이들과 동시대(同時代)가 아니라서 서로 만나보지 못함을 한탄하곤 했다. 또한 현재 중국에 있는 현사(賢士)들을 생각하고 한번 만나볼 생각이 있었는데, 전번에 왔을 때 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번에도 천자를 알현하기 위하여 힘들여 방문해 와서 끝내 못 보고 곧 귀국하는가 했는데 반송(伴送 : 호송관) 류월과(劉鉞果)가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그중 한사람은 도(道)를 좋아하는 정유(程愈)요 또 한 사람은 박학한 주전(周銓)이었다.
유(愈)는 당시 예부 원외랑(員外郞)이었는데, 선생이 가서 만나보고 그의 도의 깊이를 시험해 보기 위해 천근한 말로 구도(求道)의 질문을 하였다. 유는 자기가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과 회옹(晦翁;朱子)서 한 첩을 선생에게 주었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이는 망중엄(茫仲淹;북송의 학자)이 횡거(橫渠;북송의 학자 張載)에게 『중용』을 읽을 것을 권하고 병학(兵學) 논하기를 허락하지 않은 것과 같은 뜻이라 생각했다. 이별함에 이르러 선생이 시문을 지어 증정하였더니 유는 이에 화답하는 시와 서를 지어 전별의 징표로 주었는데, 한구(韓歐;당나라 한유와 북송의 구양수)풍의 문장과 낙민학(洛閩學;程朱學)에 연원을 둔 어휘가 있었다.
또 한 사람 순천부 학사 주전(周銓)은 박학하고 시 읊기를 즐겨하며 정연한 모습은 고인의 풍모가 있고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선생이 패도(佩刀 : 허리에 차는 칼)를 풀어주고 글을 지어 그에게 증정했더니 전은 도서와 배율(排律;한시의 한 체) 한편을 답례로 주었다. 전은 말하기를, 한림 이동양(李東陽)의 문망(文望)이 세상에 높다 했다. 선생은 전을 중개자로 하여 한 번 만나보고 싶었으나 귀국할 기한이 이미 촉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연경(燕京)에 가는 인편이 있을 때마다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두 사람에게 전하게 했다. 대체로 선생은 어질고 착한 이를 좋아하고 더불어 즐기기를 좋아했는데, 이런 정성은 천성에서 타고난 것이었으니 이른바 천하의 선사(善士)라면 그의 벗 또한 천하의 선사이렷다.
<1491년> 3월 계묘(27일) : 연경(燕京)으로부터 귀국, 복명하고 『소학집설(小學集說)』을 진상하니 주상은 교서관(校書館)에 하명,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하다.
선생은 『소학주소(小學註疏)』(註를 달아 본문을 해설한 것)로서 이 집설과 같은 것이 없다고 발문을 지어 책 끝에 첨부, 주상에게 입대(入對)하여 아뢰었다. 주상은 이를 열람하고 기뻐하며 즉석에서 간포할 것을 명하고 선생에게는 이 공로를 기려 말안장을 특별히 하사하여 포상했다.
우리나라에 집설이 있게 된 것은 여기서 연유된 것으로서 『소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1491년 3월> 을사일(29일) : 전 직함에 겸하여 사간원 정언이 추가로 제수됨에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병오일에 취임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정사를 논한 후 귀근(歸覲)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다.
선생은 정언직을 배명한 후 “관직 정언이란 이름을 가지고 부정언(不正言)을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차자로 다음 네 가지 사항을 아뢰었다.
첫째, 임금의 면학(勉睿學)에 대해서는 정심 성의(誠意;대학의 修身)의 중요함을 말하였고
둘째, 조정을 바르게 함(正朝廷)에 대해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간신배를 멀리 (親賢遠奸)하는 계책을 말하였으며
셋째, 동궁(東宮)의 양육을 돕는 일(輔養東宮)은 궁관을 가려 써서 국본(國本;세자)을 튼튼히 하는 길을 논하였고
넷째, 인재를 양성(作成人才)하는 일은 학교를 일으키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그 내용에서 바른 점과 빠지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한 말은 매우 적절했다. 주상은 따뜻이 비답(批答)하고 칭찬하며 차례대로 시행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권세 있는 간신배들은 심히 꺼려하였다.
<1491년> 여름 4월 무신(3일) : 운계(雲溪)에 귀향하다
<491년 4월> 정묘일(22일) : 종전 직함에 겸하여 봉열대부(奉列大夫), 홍문관 수찬에 제수됨에 모친 병환을 이유로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는데, 또 사양하였다.
<1491년> 5월 신사(6일) :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 종사관(從事官)으로 부름이 있어 상경하는 도중에 면직을 청하는 글을 연이어 올리고 서울에 이르러 또 힘껏 고사하다.
기축일(14일)에 용양위(龍驤衛) 사정직(司正職)에 보직변경이 되어 삼가 받겠다는 글(拜章)을 올리고 곧 돌아오다.
야인(野人)들이 경원(慶源;함경북도 북단, 6진의 하나)을 침범함에 주상은 허종(許琮)을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로 임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허공은 선생이 병략(兵略)에 정통함을 알고 종사관으로 주청하였는데, 주상이 수락하고 역마를 타고 속히 서울로 올라오라는 교지를 내렸다. 선생은 전쟁의 대사라 앉아서 사면만 청할 수가 없어서 상경하면서 또 소를 올리고 서울에 도착하여 친병(親病)이 극히 위독한 상태이니 마지막 봉양을 하게 해줄 것을 간곡히 걸청(乞請)하였다.
이에 주상은 부득이 사정(司正)직에 직함을 붙여두고 귀양(歸養)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사은하고 곧 귀향하였다.
<1491년> 5월 을미(20일)에 본직으로 교서관 박사에 보직하고 강목 교수청(校讎廳)에 예속시키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부름에 고사하였으나 을사일(30일)에 또 부름이 있어 6월 갑인(9일)에 비로소 배명하다.
주자(朱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거 강목(綱目)을 지었는데, 강(綱;大要)은 『춘추(春秋)』를 준거하고 겸하여 여러 사기의 장점을 채록하였으며, 목(目;細目)은 『좌씨전(左氏傳)』을 준거하였다. 그 후 여러 유학자의 빼어난 저작들을 고찰․ 규합하여 다시 정하였는데, 대서(大書;本文)와 분주(分註)에서 미완성된 것, 빠진 것들이 있고 간혹 모순된 점도 있었다. 주상은 문학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선발 설국(設局;임시기구를 설치하는 것)하여 교정하게 했다.
선생은 첫 번째로 선발되었는데, 이때 자당의 병환은 이미 나은 상태라 부름에 응하여 교수청(校讎廳)에 부임하였다.
선생은 논의가 맑고 밝으며 의리가 엄정함이 동배(同輩)들 가운데 우뚝 뛰어나 주자(紫陽)의 지은 뜻에(筆意)에 매우 환하게 밝았다. 여러 명공은 모두 절조(節操)를 꺾고 아랫 사람의 눈치만 보았다. 고찰하여 결정할 즈음에는 반드시 선생의 말에 좇으니 그 명성이 조정 안에 가득했다.
이에 간당(奸黨)들은 눈을 흘겼다.
<1491년> 가을 8월 경오(17일) : 전직에 겸하여 병조좌랑이 제수되고 거듭 강목교수(綱目校讎) 직임에 임명함에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임신일 배명하다.
<1491년> 9월 계미(10일) : 백운동의 조백부(趙伯符)를 방문하다.
부(符)의 이름은 지서(之瑞)인테, 문학에 능하고 성격이 강직하며 기절(氣節)이 있었다. 선생과는 교수청에 같이 예속되어 서로 깊이 경애하는 사이였다.
이날 휴일이어서 목욕하고 이중균(李仲鈞)과 더불어 그의 셋집을 방문하여 산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며 종일 즐겁게 놀고 헤어졌다.
<1491년 9월> 신묘일(18일) : 동료들과 더불어 돈의문(敦義門) 밖에서 서평사(書評事) 유지옹(柳智翁)을 송별하다.
지옹(智翁)의 이름은 순정(順汀)이고 진주인(晋州人)인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고 병략(兵略)이 우수하여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었다. 선생은 평소 서로 좋아하고 장상(將相)의 그릇이라 믿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북도 평사(評事)를 하고 있을 때 그 직임을 매우 칭찬한 바 있는데, 이번에 또 서막(西幕; 평안도 兵營)에 보직된 것이었다. 이에 양관(홍문관 및 예문관) 및 교수청의 여러 료우(僚友)가 서대문 밖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선생은 여기서 서(序)를 지어 송별했다. (문집 2권 참조)
<1491년 9월> 기해일(26일) : 전직함에 겸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이 제수되고 강목교수의 직임도 그대로 보임함에 재차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임인일에 배명하다.
이는 전 전랑(銓郞)[27] 홍한(洪瀚), 이종준(李宗準) 등의 천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27] 전랑(銓郞)이란 이조의 정낭(正郎)과 좌랑(佐郞)을 일컫는 말. 내외 관원을 추천, 전형하는데 가장 많은 권한이 있었다. 조선시대 관원의 등용은 이조(吏曹)에 속해 있었는데, 이조의 권력이 너무 커질 것을 참작하여 당시 가장 중시되던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임명은 이조판서 아래에 있는 전랑이 좌우했다. 이런 이유로 이조정랑의 실권이 방대하여 이 자리에는 삼사 중에서 특히 명망이 높은 관원이 뽑혀 임명되었다. 전랑의 임면(任免)은 이조판서도 관여하지 못했고 전랑(銓郎)이 스스로 후임을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랑법(銓郞法) 또는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이러고 하였다. 전랑직을 거치면 큰 과실이 없는 한 대개는 재상(宰相)까지 될 수 있는 요직이었다.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을 초래한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도 이 전랑(銓郞)직을 둘러싸고 있어났다.
<1491년> 겨울 10월 정미(4일) : 강목교수(綱目校讎)가 완성되어 주상에게 보고하였다. 선생은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진되고 전랑직은 그대로 가지다.
<1491년 10월> 무신일(5일) : 중훈대부(中訓大夫) 충청 도사(都事) 겸 춘추관 서기관이 제수되어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1491년 10월> 경신일(17일) : 밤에 흰 무지개가 달을 관통하는 현상이 생겨 임금은 직언을 구하는 교지를 내렸다. 임술일(19일)에 소를 올려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선생은 언젠가 전에 추강과 이야기하던 중에 소릉(昭陵) 사건에 화제가 미치자 문득 눈물을 흘리며 소릉을 복위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가의 흠전(欠典 : 典禮上의 결함)이요 백성들의 한 맺힘이 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주상이 직언을 구하는지라 상소로 그 복위를 청하였는데 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국가는 금단지(金甌 : 영토와 주권의 완전하고 견고함의 비유) 같이 반듯하고 이지러지거나 빠짐이 없사온데 다만 신이 보는 바로는 한 가지 결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강상(綱常 : 삼강과 오상)이 무너진 가운데서도 전 조정의 신하 되 사람들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서서 희희낙락 즐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무엇이 이지러지고 빠진 것인지 모르고 있으니 가히 통탄할 일입니다.
자고로 제왕의 묘(廟)에는 독주(獨主:홀로 있는 신주)가 없는 법이온데 유독 우리 문종묘에만 독주입니다. 이는 강상(綱常)의 결함이요 전례(典禮)의 결함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습니다.
광묘(光廟;세조)는 세상을 구제할 지략을 감추어왔으나 뭇 사람의 마음(衆心)이 다그쳐와 부득이 보위(寶位)를 선양받게 되었고 소릉(昭陵)을 폐한 것도 광묘의 본의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신이 듣기로는 문묘(文廟)가 동궁일 때 소릉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여서 노산(魯山)의 모의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노산의 어머니라는 연고가 그 까닭이라면 당시 수모자(首謀者) 여러 사람들의 자식은 벌을 받았으되 여식들은 바깥일에 무관하다 하여 죄를 용서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송현수(宋鉉壽)는 노산의 장인이온대 그의 아들 거(琚)와 조카 영(瑛) 등은 이미 선왕의 죄 사함의 은총을 입어 여러 왕조에 관직을 가졌습니다. 그러하온즉 어찌 소릉을 다시 죄 사(赦) 할 수 없겠습니까?
옛날 중국 한나라 소제(昭帝)는 상관왕후(上官皇后)의 부친 안(安)이 복종을 거역하는 모의를 하다가 주살(誅殺)되었는데, 황후는 나이 어려 모의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폐위를 당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친은 경부인(敬夫人)으로 추봉(追封)하고 원읍(園邑;묘 주위에 있는 묘지기의 마을)을 두어 향사(享祀)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아조의 소헌왕비(세종 비)의 부친 심온(沈溫)이 사사(賜死)되고 그의 처 송씨(宋氏)는 관천(官賤)으로 이적되었는데 당시 죄인의 여식으로 왕비(王妃) 됨은 불가하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오, 이 무슨 말인고! 공비(恭妃)는 동요할 이유가 만무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종조에 이르러 대신들이 말하기를, ‘한 나라 왕후의 모친을 천인으로 지내게 함은 은의상(恩誼上) 불가하오니 천적(賤籍)을 특별히 제거하고 작첩(爵牒)을 환급함과 아울러 그들의 자녀들도 같이 면제하여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친(私親)의 죄가 무관한 왕후, 왕비에게 미칠 수 없으며 왕후, 왕비의 은혜는 이미 죄를 입은 부모에게도 두루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소릉이 생전에 곤위(壼位)에 계실 때는 충심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문종의 치세에는 폐하여 내치라(廢黜)는 명이 있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지 15년이 지나서 어머니와 아우라는 연고로 해서 그 능묘(陵廟)를 추후에 훼손하였으니 이는 한나라 소제(昭帝)의 상관황후(上官皇后) 사죄(赦罪)와 공비(恭妃)에 대한 태종의 처리와는 크게 어긋나옵니다. 이 어찌 강상(綱常) 전례(典禮)의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조(聖朝)는 어지심이 깊고 은택이 두터워 가히 오제 삼왕과 비견되오나 정사의 처리는 오히려 한나라의 잡스런 패왕(覇王)에도 미치지 못하온 즉 신은 남몰래 통탄해 마지않습니다.
성현의 말씀에 ‘3년을 두고 선친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효(孝)라 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식 된 사람은 그 아비의 도에 옳지 않은 점, 마땅히 고쳐야 되고 급히 고쳐야 될 참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해도 반드시 3년을 기다린 연후에 서서히 개정하도록 하라는 것이며 선친의 도가 비록 옳지 않아도 종신토록 고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3년 동안 관망하라는 자구에 가히 성인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소릉(昭陵)의 폐위는 전적으로 옳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미 3세대를 지나면서 37년 동안을 보아왔은즉 ‘삼년무개(三年無改)’의 교훈에 미룰 수는 없습니다. 소릉이 있음으로써 뒤를 잇는 왕위 계승의 명분이 선다는 점에 개정의 뜻이 있습니다. 지금의 북위는 명분이 바르고 언론이 순탄할 것이며 아무도 의심쩍어하는 자 없을 것입니다.
신은 원하옵니다. 속히 소릉을 복위하시어 (묘역에서) 땔나무 베고 가축 방목하는 것을 금하여 주시고 신주를 문묘에 같이 모시게 하소서. 그러면 이는 나라의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
이에 주상이 친히 비답하여 말하기를, “너는 다른 사람들이 능히 말할 수 없는 바를 능히 말하는구나. 충경(忠鯁 : 충성스럽고 강직함)함이 가상하다. 나 역시 여러 해 마음이 편치 못하였도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중차대한 일인 만큼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거기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돌아가서 기다려라.” 라고 하였다.
선생은 사기를 읽을 때마다 간흉배들은 권세에 아부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은 해를 입는 사실(史實)을 접하게 되며 이때는 미상불 격앙되고 강개(慷慨)할 뿐 아니라 마치 몸소 당한 것 같아 굳건한 의기(剛大之氣)와 충의심(忠義心)이 생기고 이 마음은 곧 그의 한 몸을 강상(綱常)이 만세에 존중되도록 하는데 바쳐야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소릉(昭陵)이 폐함을 입은 지 30여년, 추강이 일찍이 말하기를 “복위에 대한 주청이 여러 조목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오르게 되더라도 간당(奸黨)들이 헐뜯고 무고하여 몇 번이나 함정에 빠뜨릴지 예측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조야(朝野)에서 모두 기피하고 두려워 위축되어 감히 복위에 대하여 말을 꺼내지를 못했는데 선생 홀로 개연(慨然)히 진소(陳疏)하였던 것이다. 그 언사는 매우 극진하고 격력하며 간절하여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상은 너그럽게 가납(嘉納)하는 비답(批答)을 하였는데 한편에서는 저지하기 위해 요란을 떠는 자가 많았다.
결국 사안은 잠잠해지고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1491년 10월> 갑자일(21일) : 주청한 사안이 채용되지 않음을 보고 스스로 탄핵한 다음 모든 직명을 사면하여 줄 것을 주청하였는데, 윤허되지 않고 속히 부임하라 재촉하는 영이 내렸다. 정묘일(24일)이 지난 다음 비로소 배명하고 공주(충청도 감영 소재지)에 갔다. 갑술일(5월2일)에 또다시 사직을 상소했으나 윤허되지 않다.
<1491년> 11월 병자(4일) : 친질(親疾)로 또 사직 소를 올리고 곧바로 운계에 귀향하였는데, 윤허를 받다.
<1491년 11월> 정해일(15일) : 김해에 가서 납릉(納陵)을 배알하고 「회로당기(會老堂記)」를 짓다.
옛날부터 늘 행하여 오던 일로서 동지일에 부로(父老)들이 모여 능에 제사를 지내고 제사에 사용한 태뢰(太牢 : 소, 돼지, 양을 갖춘 제물)는 향리인들이 다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이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전 현령 김계금, 현감 백계영, 인의 배형, 참군 송숙형, 그리고 선생의 종형 진사 백견 등이 향정(좌수)으로서 향리 부로들과 함께 당에서 모임을 갖고 선생에게 당기(堂記)를 청함에 「회로당기(會老堂記)」를 지었다. (문집 3권 및 『속동문선』 14권 참조)
○ 1492년 임자 (성종 23년) 선생 29세
<1492년> 봄 1월 기축(18일) : 목천에 있는 별서 (別墅 : 일종의 별장)에 가다.
별서(別墅)는 목천현(현 충남 천원군 목천면 일대) 동쪽 작성산(鵲城山) 밑 번곡, 즉 선생 계배부인 본댁 인근에 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 산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계곡 위쪽에 작은 별서를 지어 노비 두 사람을 두고 왕래하면서 휴식소로 사용하여 왔는데, 이번에 또 정사(精舍)를 지어 편액에 ‘죽림(竹林)’이라 새기고 그 오른쪽에 주자를 우러러본다는 뜻으로 ‘우모(寓慕)’라 다시 새겼다.
<1492년> 2월 임자(11일) : 홍문관 수찬에 제수하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불렀으나 사양하는 소를 올리고 취임하지 않다.
<1492년 2월> 계해일(22일) : 운계에 귀향, 모부인을 뵙고 기사일(28일)에 밀양에 가서 김선생을 배알, 7일간 『주역』을 강한 다음 돌아오다.
<1492년 2월> 신미일(30일) : 다시 재촉하여 부르는 교지가 있었으나 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다.
<1492년> 3월 경진(10일) :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상소하여 사가독서를 청하다.
상소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신은 어린 나이(23세)에 등과하여 벼슬하고 있사온데, 배움은 아직 임금을 섬기는 방법도 알지 못하고 진언(進言)은 물론 계옥(啓沃 : 사심없이 충성된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임금에게 사뢰는 것)의 실적도 볼 수 없으며 처세에서도 입을 열면 기휘(忌諱)하는 바를 범하여 시기하고 배척하는 원한을 많이 쌓아왔습니다. 수신(修身)도 다할 수 없는 몹이 어찌 치인(治人)을 한가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고인(古人)이 훈계한 바에 의하면 ‘소년등과(少年登科)는 일불행(一不幸)’이라 했는데, 이는 신을 두고 이르는 말 같습니다. 옛말에 ‘40세는 되어야 벼슬살이에 힘쓸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신이 도(道)를 이루고 덕(德)을 세운 연후에 벼슬살이에 나아가기를 바라는 소이(所以)이옵니다. 지금 신이 나이 30 미만(29세)이온데, 화려한 요직인 한원(翰苑:예문관). 옥서(玉署:홍문관), 사관(史官)과 이조(吏曹)의 전랑(銓郞) 등을 거치면서 승진해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청선(淸選)이라고 합니다. 신이 이런 직책을 모두 겸하고 있는데 신이 무슨 재능이 있어 이 분에 넘치는 직책들을 감히 차지하겠습니까? 비할 데 없이 과분한 은총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화복(禍福)은 무문(無門)이라 오직 사람이 부르는 바에 따를 뿐이며 사람의 재앙이 없으면 반드시 천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미칠 때마다 공연히 두려워집니다. 오직 성상(聖上)께서 보전하신 이 태평 세상에 신이 태어나 일찍이 학업에 힘쓰고자 하였으나 벼슬살이에 여가가 없어 실은 평소의 뜻을 어기고 있습니다.
엎드려 성상의 자애를 걸구하오니 속히 신의 직임을 교체하여 전야(田野)로 물러나게 하여주소서. 그리고 10년의 여가를 주시어 독서함으로써 수도(修道)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착한 천성을 기리고 학업의 발전을 얻은 다음 종사(從仕)하게 하시어 전화위복되게 하여주소서...”
이에 주상은 너그러이 비답하되 허락하지 않았다.
<1492년 3월> 병술일(16일) : 또 부름이 있어 신묘일(21일)에 비로소 배명하다.
임진일(22일)에 다시 상소하여 하사받은 저택을 반환하고 전리(田里)로 퇴거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1492년> 여름 4월 을묘(15일) : 종전에 직함을 더하여 수찬(修撰)직이 다시 제수되어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1492년> 5월 을해(6일) : 단오 첩자 12장을 응제(應製 : 왕명에 응하여 시문을 짓는 일)하다.
이날 주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와 교시하여 말하기를, “최근 많은 첩자(帖子:帖子詞)[28]들을 보았는데 내 뜻을 전하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문신들을 궐 안에 모이게 하라.” 라고 하고, 시에 능한 재상에게 영을 내려 고하(高下) 등급을 매기고 으뜸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게 하였다.
선생은 첩자(帖子) 열두 편을 지어 사전(四殿)에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칭송, 축도, 찬미하는 말이 극진하고 여기에 경계(箴誡)하고 바르게 간(諫)하는 말이 이어졌다. 명을 받은 재상은 선생의 글을 제 3위의 서열에 올렸다. 주상은 이를 살펴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고체시(古體詩)를 쓴 사람은 여기에 충성과 사랑의 마음을 끼쳐놓았다.”고 하고, 제 1위로 뽑아 안감을 갖춘 녹색 비단 옷감 한 벌을 포상으로 하사하였다.
[28] 帖子詞(첩자사) : 명절날 궁중 연회에서 한원(翰苑)의 선비들이 지은 사장(詞章)
<1492년> 가을 7월 계미(15일) : 중직대부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의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예문관 봉교로 승진되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1492년> 8월 정미(9일) : 어가(御駕 : 임금이 타는 수레)를 수행, 성균관에 이르러 석전(釋奠 : 문묘에서 공자를 제사하는 의식)을 지내고 백관 및 유생과 함께 하련대(下輦台)에서 연회에 참석한다.
이날 주상은 성균관에 거동하여 친히 선성(先聖)에 석전을 지내고 이어 하련대에 임하여 백관과 유생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재상급 문신들이 전내(殿內)에서 입시하고 당하관 문신들이 뜰 아래에 나누어 앉았으며 연회에 참석한 유생 3천여 인은 교문(橋門)을 둘러싸고 앉았다. 구경꾼들이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상하가 모두 꽃을 꽂았다.
이에 앞서 홍문관에 명하여 대사예악장(大射禮樂章)[29]을 본떠 새로 악장(樂章)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제 악공들로 하여금 그 노래를 부르게 하고 각 부서에서 맡아 준비한 음식들을 권하여 먹게 하였다.
[29]大射禮樂章(대사예악장) : 석전을 지낸 다음 임금이 활을 쏘는 예를 행할 때 부르던 악가(樂歌)
<1492년 8월> 임자일(14일) : 종전 직함에 겸하여 성균관 직강(直講)이 제수되다.
<1492년> 9월 기사(1일) : 점필재 김선생의 부음이 다다라 글을 지어 요곡(遙哭 : 멀리서 곡함)하며 예에 따라 심상(心喪:제자가 스승의 상을 입는 것)을 행하다.
김종직선생은 1489년 기유(성종 20년) 형조판서직을 마지막으로 벼슬살이를 마치고 밀양에 돌아가 지금에 이르렀는데, 향년 62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은 당장 관직을 풀고 달려가 곡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매헌공(梅軒公) 상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92년29세 9월> 갑신일(16일) : 매헌공을 곡(哭)하다. 사망
매헌공은(탁영 김일손의 둘째형)
1455년? 을해(세조 1년) 11월 11일 출생하여 28세 때인
1482년? 임인(성종 13년)에 문과에 장원한 후 관직에 종사, 형조좌랑까지 역임하고
지금에 이르러 38세로 졸하였다.
선생의 송종(送終) 제문이 남아 있다.(문집 4권 및 『속동문선』19권 참조)
<1492년 9월> 무자일(20일) : 종전의 직함에 더하여 사간원 헌납(獻納)이 제수됨에 형의 장례를 이유로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말미가 주어졌다. 신묘일(23일)에 재차 사양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92년 9월> 계미일(15일) : 사간원에 취임하여 망헌(忘軒)과 더불어 차자(箚子)를 올려 권세를 다투고 분당을 획책하는 이극돈(李克墩)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
이에 앞서 이극돈이 병조판서를 하고 있을 때 성준을 북도 병사로 임명하였는데, 이에 성준이 노하여 극돈의 아들 이세경(李世經)을 그의 휘하 평사(評事)로 징용하여 극돈 역시 노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권세 있는 간신으로 서로 세력을 기울여 다투게 되었다. 자기편에 붙는 자는 후대하고 떨어져 나가는 자는 배척하여 제각기 당의 무리를 나누고 있었다.
망헌(忘軒)은 당시 사간원 정언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이 사람과 더불어 차자를 올려 탄핵하기를 소인배들이 서로 공격하고 있어 그대로 두면 우이(牛李)의 당(黨)[30]과 같이 될 것이니 모두 먼 곳에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주상은 이를 좇아 당장 극돈과 준을 파직하고 관직자 명부에서 빼버렸다.
이극돈과 성준은 크게 앙심을 품었다.
[30]우이(牛李)의 당(黨) : 당나라 우승유(牛僧儒)와 이종민(李宗閔) 두 사람의 당파 싸움.
<1492년 9월> 병신일(28일) : 종전 직함에 겸하여 다시 부교리가 제수되고 사가호당독서(賜暇湖堂讀書)[31]를 하게 되다.
[31]사가호당독서(賜暇湖堂讀書) : 젊고 유망한 학사를 뽑아 휴가를 주어 홍문관 독서 장소인 호당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한 제도.
독서당(讀書堂)은 한강 북쪽 기슭 구(舊) 용산 폐사(廢寺)에 있었는데, 성종 19년에 홍문관의 독서 장소로 쓰기 위하여 개축한 것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대제학 어세겸(魚世謙)에게 명하여 선생과 이종준(李宗準) 등 10인을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대체로 세종조의 고사(세종이 인재양성을 위하여 집현전 학사에게 사가독서하게 한 전례)를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서 당시 이들을 호당학사(湖堂學士)라 칭하였다. 명절 때마다 임금은 이들 학사에게 꼭 술을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주어 당시 사람으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1492년> 겨울 10월 계묘(6일) : 호당(湖堂)에서 추강(秋江)의 부음(訃音)을 듣고 곡하다.
추강은 그의 모친의 훈계에 따라 진사만 하고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는데, 행주(杏洲)에 있는 그의 시골집에서 이제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선생은 통곡하고 애통해했다. 빈소가 마련된 뒤에 또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잔을 올렸다. 강신할 때 조그마하고 희미한 광채의 서쪽 별자리(奎宿) 하나가 깊은 하늘 속으로 떨어졌다. 사문(斯文)(유학자의 경칭)을 잃고 누구와 더불어 강명(講明)의 말을 나눌꼬!
<1492년 10월> 임자일(15일) : 누님의 아들 조여우(趙如愚)로 하여금 제문을 가지고 가서 김선생의 제를 지내게 하다.
점옹(佔翁)의 장기(葬期)가 곧 다가오는데 마침 매헌공 장사를 당장 해야 하므로 선생은 갈 수가 없어서 제문을 지어 여우(如愚)를 보내어 전례(奠禮)를 행하게 하였다.
그 제문에는 “선비들은 대경(大經 : 경서와 같은 큰 스승)을 잃었고 나라에 전형(典刑)[32]이 없어졌습니다. 형제의 일이 급하여 전당(鱣堂 : 講堂)에 나아가지 못하옵니다.”라는 말이 있다.(제문은 문집 4권 참조)
[32]전형(典刑) : 일정불변의 法典인데 여기서는 법전과 같은 훌륭한 사람 佔翁을 지칭.
<1492년> 11월 경오(3일) : 매헌공(梅軒公)을 용인의 개곡(介谷)에 장사 지내다.
장지는 개곡에 있는 외조 참의공 묘의 서쪽 베갯머리의 언덕이었다.
선생의 「유전제문(遺奠祭文)」이 남아있다.(문집 4권 및 「속동문선」19권 참조).
형조판서 소은(蘇隱) 이봉(李封)이 지문(誌文)을 짓고 선생이 전서(篆書)하였다. 비석에는 ‘황갑제일명급제청춘삼십팔부생’이라 했다.
<1492년 11월> 계유일(6일) : 정이신(鄭而信), 신덕우(辛德優), 이낭옹(李浪翁)이 내방하다.
이신(而信)은 성근(誠謹)의 자(字)다. 그는 문학에 능하며 충효가 돈독하였다.
신덕우(辛德優)의 이름은 영희(永僖)요 호는 안정(安亭)인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대절(大節)이 있고 과거나 명예에 개의하지 않았다.
이낭옹(李浪翁)의 이름은 원(黿)이요 호는 재사당(再思堂)인데, 성품이 호탕하고 인품과 재능이 유달리 뛰어나 세인들이 그의 문장과 행의를 추앙하고 존경하였다. 이분들은 모두 선생과 신교(神交)를 맺고 있었는데, 함께 복사(服舍;직장)로 선생을 방문하였다. 점옹과 추강 그리고 매헌공이 연이어 서거한 터라 서로 마주 대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심히 탄식하기를, “이는 우리 도(道)의 외로움을 더하는 일이요 조야(朝野)의 불행이다.”라고 하였다. 화제가 점옹의 시호를 의논하는 사안에 이르자 선생이 ‘문정(文正)’아니면 ‘문충(文忠)’이 적당하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기로 확론을 지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낭옹이 태상(太常 ; 太常寺 : 제사와 贈諡 일을 담당한 관청)에 있었는데 과연 ‘문충’으로 의결하였다. 이 일로 해서 낭옹은 뒤에 갑자사화에서 화를 입었다.
<1492년 11월> 을해일(8일) : 박희인(朴希仁)을 곡하다.
희인(希仁)의 이름은 증영(增榮)이요 호는 눌재(訥齋)인데, 선생과는 동갑이었다. 효성과 우애가 두텁고 문학을 쌓았는데 거상(居喪) 중에 지나친 슬픔으로 성명(性命)을 잃어 2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선생은 애석해하고 그의 아들을 거두었는데 선생의 감화로 가르침을 받은바 되어 후에 천거와 과거를 통하여 명신(名臣)이 되었다.
선생의 애사(哀詞)가 남아있다. (문집 4권 참조)
○ 1493년 계축 (성종 24년) 선생 30세
<1493년> 봄 1월 계미(17일) : 홍문관 교리(校理)에 승진하는 발령을 받아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갑신일에 또 다시 소를 올려 해직과 귀근(歸覲)을 주청하였으나 병술일(20일)에 반유어사(頒諭御史)[33]의 특명을 받게 되어 가는 길에 고향에 귀성하다. 가는 도중 정해일(21일) 용인관(龍仁館)에 유숙하면서 정광필(鄭光弼)과 시사(時事)를 논하다.
[33]반유어사(頒諭御史) : 임금의 유시를 널리 반포하기 위해 파견되는 어사.
이 때 광필(光弼)과 더불어 영 ∙ 호남에 반유(頒諭)의 명을 받아 조정에 고하고 가던중 용인 객관의 한 방에서 같이 유하면서 담론하였는데, 선생이 시사를 논하면서 강개하여 언사에 격렬한 바가 많았다. 그런데 광필이 저지하면서 언사가 그렇게 과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에 선생은 분연히 힐책하여 말하기를, “사훈(士勛 : 光弼의 字) 마저 비굴한 논리를 편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기절(氣節) 없는 썩은 선비가 되도록 참아야 한단 말인가! 선비가 어릴 적부터 학업을 닦는 것은 장년이 되어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의 조정에 들어와서 임금의 녹을 먹고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같이, 우리 백성을 요순시대의 백성같이 되게 하지 못하고 그저 분주히 뛰어다니며 잔심부름이나 하고 받들어 순종하면서 녹 먹는 자리나 채우고 있는 것은 곧 자기의 직위 잃을 것만을 걱정하는 소인배가 할 일이다. 임자는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본받게 하려는 것인가!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검소하고 총명하며 용기와 지혜가 있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여색을 가벼이 여기며 간언(諫言) 좇기를 물 흐르듯이 하고 삼대(三代 : 夏, 殷, 周의 3王朝)의 정치에 관심을 두고 뜻을 펼쳐 일으키시는데 지금의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모든 관료와 뭇 선비들은 학문이 저급하고 재주와 식견이 천박하여 아직 임금의 덕치(德治)를 보필할 좋은 계책 하나 제대로 올렸다는 말을 못 들었으며 시정(時政)의 폐단을 교정할 직론(直論)을 한번 제대로 발의했다는 말을 못 들었다. 이래 가지고는 비록 성인(聖人)이 임금 자리에 있을지라도 빛나고 융성한 치세에는 이르지 못 할 것이다.
천자(天子)의 사신(使臣) 동월(董越)이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임금은 있으되 신하는 없다.’ 고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한데도 임자 말대로 봉록을 구하고 영화를 탐하는 따위의 행세를 취할 수 있겠는가. 장차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도를 행해야 할 사람으로서 괴이하지 않은가. 권세에 쏠리고 세력에 부화하는 풍조가 온 세상에 퍼지면 혹 맑고 바른 논의가 있어도 반드시 말이 그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고 온 세상을 몰아세워 결국은 의혹과 아첨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파리처럼 악착스럽게, 개처럼 닥치는 대로 부끄럼 없이 오직 자기의 부귀만을 도모할 것이며 그 말세적 풍조의 폐단은 조정의 반열(班列)을 시정(市井) 정도로 보고 임금과 어버이를 길 가는 사람 정도로 보게 되는 데까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다.
고인(古人)이 말한 바 ‘나라를 잃어 없어진 다음에야 가까워지려 하는가?’ 라는 말을 사훈은 어찌하여 범하려 하는가? 임자의 평생사업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성품과 행실이 선량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언론이 법도에 맞고 점잖으며 여기에 겸하여 문학이 넉넉하고 견식이 매우 넓으니 가히 일대의 위인이 될 만하지 않은가. 나라에 도덕이 무너져 없을 때는 입을 다물고 침묵함으로써 용신(容身 : 세상에 겨우 몸 붙이고 살아가는 것)에 만족해하고 나라에 도덕이 행해지면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은 벼슬을 가지는데 만족해한다 했는데 여기에 빠진 것은 강직(剛直)함일세.
그대가 가령 재상(宰相)의 자리에 있어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할 때 임금이 간사한 말을 잘못 믿어 충성(忠誠) 서럽고 어진 이를 욕되게 함을 본다 해도 그대는 반드시 죽음을 무릅쓰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려 임금의 마음을 돌려 간흉(奸凶)을 내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관직이 온전하고 몸뚱이가 백세에 보전된다 해도 어찌 장우(張禹) 호광(胡廣)의 꾸짖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사훈(士勛)은 훗날 내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날 밤 일경(一更 : 8시 전후)에 이르러 마침내 돌아서고 말았다. 그 후 광필은 폐조(廢朝 : 燕山朝)에서 삼사(三司)를 두루 거치고 양관(兩館)을 출입하였는데, 근신하고 침묵함으로써 무오, 갑자의 양 사화에서 화를 면했다. 기묘사화 때는 광필이 영의정이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하여 조광조(趙光祖) 등을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야심한 밤 옥중에서 광필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계운(季雲)은 나의 앞일을 마치 본 것 같이 헤아렸다. 참으로 이인(異人)이다.”라고 했다.
<1493년> 2월 병진(21일) : 운계(雲溪)에 이르러 모부인을 뵙다.
모부인을 뵙는 일이 비록 주상의 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왕사(王事)가 정체해서는 안 되었으므로 겨우 3일 머문 다음 다시 행차하였다.
<1493년> 3월 기사(4일) : 밀양에 도착해서는 제문을 지어 김 점필재선생 묘에 제사를 지내다.(제문은 문집 4권 참조)
<1493년 3월> 임신일(7일) : 김해관(金海館)에 도착, 임금당(臨錦堂)에서 당기(堂記)를 짓다.(문집 3권 참조)
<1493년 3월> 갑술일(9일) : 저복산(儲福山)의 선조 묘를 성묘하다.
<1493년 3월> 정해일(22일) : 하동을 지나다가 섬진의 은거 처에 있는 일두(一蠹)를 방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다.
일두(一蠹)는 일찍이 악양동(岳陽洞)의 절경을 사랑하여 섬진(蟾津)어귀에 집을 지었다. 이때 그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설서(說書)직을 사임하고 돌아와 죽(竹)을 심고 매화(梅花)를 모종 내머 상송(講誦 : 뜻을 새기며 읽는 것)하고 시를 읊으며 아주 벼슬을 마칠 것 같았다.
선생은 이곳에 도착하여 하루를 유(留)하며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근본을 강하였다.
<1493년> 여름 4월 계묘(9일) : 창녕(昌寧)에서 다시 운계(雲溪)에 돌아오다.
<1493년> 5월 경진(17일) : 문경(聞慶)에 이르러 반유(頒諭) 임무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향하다.
<1493년 5월> 갑신일(21일) : 편전에서 주상을 뵙고 복명한 다음 백성들의 민생고에 대하여 조목조목 아뢰고 거기에 관련된 시정을 논하다. 을유일(22일)에 전 직함에 겸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이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선생의 이번 행차는 비록 감찰하는 임무는 아니었지만 한 도(道)를 두루 여행하면서 여러 지방장관들의 청렴과 탐욕, 민생에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등을 분명하게 살펴보고 자세하게 조사하여 조목조목 열거한 책자를 만들어 주상에게 입대(入對)하여 보고하였다. 인하여 말씀 올리기를, “치국의 요체는 안민에 있고 안민의 계책은 어진 이를 임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함(任賢遠佞)에 있으며 임현원녕(任賢遠佞)의 길은 성정격치(誠正格致 : 聖意, 正心, 格物, 致知 :大學의 修身)에 있고 성정격치의 방법은 강학(講學)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은 허심탄회하게 듣고 받아들였다. 선생은 또 당세(當世)의 급선무는 안으로는 궁중(宮中), 밖으로는 조정에서 항간에 이르기까지 풍속에 대한 임금의 심술(心術)이라 하고 정치와 교육에 관련된 여러 실례를 일일이 모두 사뢰었다. 가슴속의 진심을 모두 털어놓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충성스럽고 강직함이 극진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송연(竦然)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주상 역시 안색을 고치고 선생이 퇴장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멀리 물러간 뒤에 곁에 있는 신하들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지략이 깊고 원대하며 언론이 정대하다. 참으로 재상의 재목이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지평(持平)직을 제수하였다.
선생은 먼저 사뢴 내용을 소장으로 다시 품신하였고 주상은 친히 비답하고 포상하며 총애하여 특별히 작위를 한 품계 올려주었다.
<1493년 5월> 기축일(26일) : 다시 이전 직함에 겸하여 통훈대부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다.
<1493년> 가을 7월 무술(6일) : 본직으로 예문관 응교를 맡고 사가독서 하도록 교지가 내리다.
대재학 홍귀달(洪貴達)이 옥당(玉堂:홍문관) 학사 중 연소하고 재명(才名)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번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도록 주청하여 시행되었는데, 선생은 신용개(申用漑), 강혼(姜渾), 이희순(李希舜)과 함께 피선되어 호당에서 독서하였다. 이때에 쓰던 오현금(五絃琴), 육현금(六絃琴), 거문고걸이(琴架), 책상(書案), 책장(書架), 짧은 등잔걸이(短檠) 등에 명문(銘文)을 지어 남겼다. (문집 4권 및 속동문선 11권, 18권 참조)
∙<1493년 7월> 정사일(25일) : 하사주(下賜酒)를 받고 전문(箋文:길흉의 일이 있을 때 임금께 아뢰던 四六體의 글)을 올려 사은(謝恩)하다.
주상은 중사(中使:내시)를 보내어 술을 내리면서 손수 쓴 글을 함께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희 문학사들은 모두 이 다음에 크게 쓰일 재사(才士)들인 만큼 마땅히 학업에 더욱 힘써서 나의 육영(育英)하는 즐거움에 부응하라. 특별히 술을 보내어 뜻을 표하는 것도 그 즐거움의 하나로다.” 이에 일동은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했다.
호당(湖堂)에는 전부터 하사된 수정잔(水晶盞)이 있었는데 소반이 없었다. 이제 와서 동(銅) 바탕에 황금 도금을 하여 소반을 만들었는데, 소반 가운데(盤心)와 사주(四周)에 명문을 새겼다. 명문은 선생이 짓고 임희재(任熙載)가 반심(盤心)에 ‘내사독서당(內賜讀書堂)’ 이라는 다섯 자를 팔분서체(八分書體)로 써서 양각하고 그 주위의 명문은 강사호(姜士浩)가 전자체(篆字體)로 써서 음각하였다. (명문은 문집 4권 참조)
<1493년> 8월 무자(26일) : 어제(御製) 48영(詠;詩)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그 끝에 발문(跋文)을 지어 올리다.
당시 대궐 뜰에 있던 사람에게 벼락이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주상은 교지를 내려 간언을 구했다. 그리고 임금이 지은 시 48영에 대하여 호당에 하문하고 화답 시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시는 전에 비해당(匪懈堂 ; 안평대군)이 읊은 시의 제목을 취하고 그 운(韻)을 따서 주상이 지은 것으로써 화훼(花卉), 죽석(竹石), 조수(鳥獸), 연운(煙雲) 등의 48종을 읊었기 때문에 48영이 된 것이다. 선생은 그 시가(詩歌)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그 끝에 발문(跋文)을 지어 이었는데 거기에는 빗대어 표현한 경계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는 문집 4권, 발문은 문집 2권 참조)
주상은 친히 스스로를 비평하고 극진히 칭상(稱賞)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붓을 잡았다 하면 규간(規諫 : 옳은 도리로 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포용하고 이해하며 허락함이 크도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참으로 뜻 맞는 임금에게 쓰임을 당한(遭遇) 분이었다. 주상은 예사로운 사부(詞賦)에까지도, 선을 베풀고 사악(邪惡)을 막으며 덕을 닦는데 힘쓰고 충신의 의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을 빗대어 표현한, 올바르면서도 완곡한 간언을 반드시 올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발문을 보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1493년> 9월 기묘(?) : 용인(龍仁)에 가서 제문을 지어 매헌공(梅軒公) 소상(小祥)을 지내다. <※1492년 9월 갑신일(16일) 졸임>
선생은 두 형과 세 누이에 대한 우애가 지극히 두터웠는데, 그중에서도 중씨(仲氏)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선생은 슬프게 울부짖으며 오직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그 제문 두 편을 읽으면 참으로 슬프고 애절하며 측은하고 통한(痛恨)스러운 정이 문면에 넘쳐흐른다.
사람들은 이 제문을 중국의 문장가 한창려(韓昌黎)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에 비견된다고들 하였다.(문집 4권, 속동문선 19권 참조)
<1493년> 경신일(29일) : 선생은 「추회부(秋懷賦)」를 지어 뜻을 보이다.
선생은 독서당(讀書堂)에서 달 밝고 고요한 밤을 만날 때면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문득 거문고를 잡고 부(賦)를 노래하며 슬프게 타고 강개(慷慨)하곤 했는데,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훗날 정암(靜菴)이 말하기를, “선생의 이 부(賦)는 문장의 품격이 천고(千古)에 드물 뿐 아니라 그 품은 뜻이 강개하면서도 격앙하고 그 기개가 웅장하면서도 분방함이 출가 이후의 평생의 심적(心迹)을 토로한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고 했다. (문집 1권 및 속동문선 2권 참조)
<1493년> 겨울 10월 기유(?) : 무풍부정(茂豊副正) 이총(李摠)이 내방, 거문고 곡(曲)에 대하여 논하다.
무풍(茂豊)은 태종대왕의 증손으로 자는 백원(百源)이다. 시문에 뛰어나고 음률에서는 당세의 으뜸으로 수천부정(秀泉副正) 이정은(李貞恩)과 그 명성을 나란히 했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문하에서 교유했는데, 선생과는 신교(神交)를 맺은 사이였다.
집이 서호(西湖)에 있는데, 이날 밤 달이 밝아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탔다. 그런데 그 곡의 음률이 심히 애절하여 선생이 말하기를, “이 곡은 태평한 세상의 음이 아니다. 악(樂)은 음(音)에서 비롯되며 그 근본은 만물에 대하는 사람 마음의 느낌에 있다. 그런고로 슬프게 느낄 때는 그 소리가 느긋하지 못하고 낮아지며(噍殺) 즐겁게 느낄 때에는 가락이 화평하고 한가로우며(嘽緩) 기쁘게 느낄 때는 그 소리가 높아져서 흩어지고(發散) 분노를 느낄 때는 거칠고 사나우며(粗厲) 경건할 때는 진지하고 분별이 있으며 애정을 느낄 때는 그 소리가 온화하고 유순하다(和柔). 또 대체로 성음의 도는 정치와 통한다. 치세(治世)의 음은 편안하고 즐거우니 이는 그 정치가 화평한 때문이며 난세(亂世)의 음은 원망과 분노가 차 있으니 이는 그 정치가 도리에 어그러진 까닭이다. 망국의 음은 슬프고 시름에 잠겨있으니 이는 그 백성이 곤궁한 까닭이다. 그런고로 그 악(樂)을 들으면 그 정치를 알 수 있고 그 음을 살피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곡을 들어보니 애절하여 거부감을 느끼게 하고 변조(變調)의 궁음(宮音 : 5음의 제1음)은 희미하고 상음(商音 : 5음의 제2음)은 사나우니 그중에 살벌함이 들어 있다. 생각건대 이 곡을 만든 사람은 우환과 분노를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라고 하였다.
백원(百源)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선왕께서 작곡한 것으로 그 음의 근본은 쾌활하고 온화하며 화평함을 북돋우는데 어찌 그대의 소론(所論)과 같은 사실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위난한 때에 작곡했을 것이다.”라고 하고, 육현금(六絃琴)을 취하여 한 곡 타 보였다. 백원이 말하기를, “나는 이 곡을 배운지 오래되었으나 이 곡이 이렇게까지 애절하고 소리가 죽어간다던가 심히 반항적이라던가 하는 사실을 내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선생은 거문고를 밀쳐놓으며 말하기를, “내가 들은 바로는 간사한 음악은 사람을 감동시키나 그 거스르는 기운은 큰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여 훗날 즐거움이 지극해지면 슬픔이 생기는 반응이 일어난다고 했다.” 고 하였다. 백원은 그러하겠다고 수긍했다.
선생은 이 일로 해서 근심스럽고 두려운 기색을 띠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1493년> 11월 정해(?) : 「의별지부(擬別知賦)」를 지어 진주에 귀성하는 강사호(姜士浩)를 송별하다.
<1493년> 12월 경술(?) : 남원으로 귀성하는 이사성(李師聖 ; 希舜)에게 「취산(聚散)」이란 글을 지어 기쁘게 해주다.
○1494년 갑인(성종 25년) 선생 31세
<1494년> 봄 1월 무오(28일) : 종전 직함에 겸하여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다.
<1494년> 2월 계미(24일) :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을 배수(拜受), 교지에 응하여 천재시변(天災時變)을 논하는 소장을 올리다.
당시 혜성이 나타나 기성(箕星) 별자리에서 그 꼬리가 갈라진 기현상이 나타났다. 주상은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풍악을 거두며 직언(直言)을 구하는 교지를 내렸다.
선생은 소를 올려 정권을 쥐고 있는 재상 이하 10여 인을 탄핵하고 변방으로 내치는 법(屛裔之典)을 시행하도록 주청하였다. 이에 주상은 친히 비답하였는데, 직성(直聲)에 대한 권장의 유시가 온 조정을 진동시켰으며 간당(奸黨)들은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조였다.
<1494년> 3월 임자(23일) : 전직함에 겸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겨 제수되다.
<1494년> 여름 4월 계유(15일) : 귀근(歸覲)을 위해 사직, 윤허를 받고 드디어 부인과 함께 운계(雲溪)에 귀향하다.
<1494년> 5월 경인(3일) : 다시 홍문관 교리, 지제교, 수예문관(守藝文館) 응교 등의 문신겸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1494년> 6월 갑자(7일) : 또 임금의 부름을 받아 임신일(15일)에 배명하고 경인일(7월4일)에 사직을 주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1494년> 가을 7월 기해(13일) : 어모장군 충무위의 부사직, 지제교 겸 세자시강원 문학, 춘추관 기주관으로 이직 명을 받아 고사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계축일(27일)에 사은(謝恩)하다.
<1494년 7월> 갑인일(28일) : 동궁에 진강(進講)하고 을묘일(29일)에 친질(親疾)로 인하여 사직서를 내고 곧바로 귀향하다.
당시 조백부(趙伯符;之瑞)가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하고 허헌지(許獻之;琛)가 필선(弼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세자였던 폐주(연산군)는 매일같이 하는 일이 그저 유희나 즐기고 학문에는 뜻이 없었으며 다만 주상의 훈계와 배움에 힘쓸 것을 타이르는 어서(御書)에 대해서만 두려워하였다. 연궁관(筵宮官 : 시강원의 관원)이 비록 온 마음을 다해 강(講)을 베풀어도 그저 귀 밖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백부(伯符)는 천성이 아주 강직하여 매번 진강(進講)할 때마다 책을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저하, 학업에 힘쓰지 않음이 이 지경에 이르면 마땅히 주상에게 고해 올려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폐주는 매우 고민스러워했으며 그는 마치 원수같이 보았다.
그러나 헌지(獻之)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고 순한 말로 조용히 개도(開導)했는데 이에 폐주는 그에게 매우 너그러웠다. 이날 선생은 궁료(宮僚)와 더불어 강(講)에 나가 입시했는데 벽 위를 보니 ‘조지서(趙之瑞)는 대소인(大小人)이고 허침(許琛)은 대성인(大聖人)이다.’ 라고 크게 써 붙여놓았다.
선생은 전부터 폐주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으며 일찍이 동궁의 보양(輔養)을 청하는 소를 올린 바도 있었는데 오늘 여기서 벽서를 보고는 크게 놀라고 염려되었다.
다음 날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서 우인들에게 말하기를, “주상이 돌아가신 다음에 반드시 분갱(焚坑)의 변(變)[34]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34]焚書坑儒(분서갱유)란 학문과 사상이 탄압당하는 일, 즉 진시황이 詩書六經을 불태우고 유학자 460명을 생매장한 일.
<1494년> 8월 신미(15일) : 다시 교리(校理) 겸 문학(文學)에 제수되었으나 재차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다.
<1494년> 9월 병신(11일) : 이조정랑, 지제교 겸 승문원 교리,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이 제수되고 역마를 타고 속히 부임하라는 영이 내려 경술일(25일)에 일단 배명하고 계축일(28일)에 사임코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93년> 겨울 10월 계미(28일) : 구도차(求道次) 연경(燕京)에 가는 이중옹(李仲雍)을 송별하면서 「감구유부(感舊遊賦)」와 서(序)를 짓다.
중옹(仲雍)의 이름은 목(穆)이요 호는 한재(寒齋)인데 어릴 적부터 점필재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문학에 능하고 지절(志節)이 있으며 약관(20세) 전에 진사에 올랐다. 일찍부터 중국을 한 번 둘러보고자 했는데 이번에 하정사(賀正使)를 수행하여 연경(燕京)에 가게 된 것이다. 선생은 부(賦)와 서(序)를 지어 송별했다.(문집 1, 2권, 속동문선 2권 및 16권 참조)
<1494년> 11월 갑진(19일) : 본직으로는 양관(홍문∙예문)의 응교(應敎)를 겸하고 거기에 경연의 시강관(侍講官), 사관(史館)의 편수관,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의 필선이 제수되어 세 차례나 고사했으나 윤허되지 않아 무신일(23일)에 배명하다.
<1494년> 12월 경신일(5일) : 경연에 진강(進講)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에 관하여 강하고 하사주를 받다
선생은 경연에서의 직책을 오래 가졌는데, 매번 당직 때마다 강할 서적을 가지고 동료 관원들과 질의하고 토론을 밤새 철야로 하더라도 명쾌한 해답이 나와야 일을 마쳤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군데 미흡하거나 의문스러운 점이 있을 수 없었다. 단지 읽기만 하고 책장에 표를 붙여두기만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본받지 않았다. 선생은 눈앞의 이런 소홀한 처사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이천(伊川) 선생(송나라 程頣 : 程子)은 매번 진강할 때마다 반드시 서재에서 자면서 미리 재계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사색하고 정성을 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정녕 강을 맡은 신하의 모범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명을 받들어 주상을 모시고 대좌하였는데, 주상은 특히 여러 서적에서 발췌한 것을 가지고 글의 뜻이 가장 어려운 대목에 대해 선생으로 하여금 강하게 하였다. 선생은 조용히 풀어서 읽은 다음 자세히 뜻을 풀이하고 추리하여 밝히며 논설(論說)하였는데 막힘이 없었다.
좌우의 모든 사람이 탄복하고 주상은 크게 칭찬하며 술을 내리게 했고 선생 또한 임금에게 잔을 올렸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물러 나왔다.
<1494년 12월> 병인일(11일) : 편수관(編修官)으로서 사관(史館)에 당직하라는 특별교지를 받아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경오일(15일)에 또 고사하였는데,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주상은 질환(疾患)이 있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고 시사(時事)가 장차 변고가 있으리라 내다보고 극력 사양하였는데 허락되지 않았다.
<1494년 12월 > 기묘{24일} : 성종대왕의 승하(昇遐)를 당하여 예에 따라 복상(服喪)하다.
선생은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시정(時政)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전라감사를 하던 이극돈(李克墩)이 분향은 올리지 않고 기생을 태우고 행락(行樂)한 사실을 곧이곧대로 기록하였다.
이 사실을 극돈이 듣고 사람을 시켜 삭제하여 주도록 청을 넣어왔으나 선생은 이에 불응하여 말하기를, “공자는 『춘추(春秋)』를 지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불효 불충하는 자들을 두렵게 했는데, 나는 이러한 공자를 배운 사람이다. 이 일은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이 책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극돈은 감히 두 번 다시 말을 하지 못하고 심히 원망하며 중상할 뜻을 품었다.
<탁영선생연보 상권 끝>
탁영선생<김일손>연보 하(1/2)
<原文: 濯纓先生年譜 金大有 著 高宗11[1874]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2511-10-25,
參考譯文: 增補濯纓先生年譜 2006.9.30. 感慕齋宗中,
解釋 : 2008. 8.15. 金順大, 編輯 :金乙泰>
○ 1495년 을묘 (연산군 1년) 선생 32세
<1495년> 춘 2월 병자(22일) : 질환(疾患)이 있어 사직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성묘(成廟)가 하늘의 빈객(賓客)으로 오르니 선생은 애통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였고 거기다가 폐주(燕山)가 거상(居喪)하는데 많은 실덕을 하여 근심과 탄식을 더 함으로써 병이 되어 마침내 해직을 청하게 되었다.
폐주는 “대행대왕(大行大王 : 죽은 임금의 시호 올리기 전 존칭)이 아직 빈소에 계신데 신하 된 사람들이 사직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성묘(成廟)에 뜻이 맞고 인정을 받아 은총을 입었었다. 진언할 때마다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너그럽게 비답(批答)하며 친찬하고 총애했다. 관직을 제수할 때도 특별한 은총을 베푼 적이 많았다.
주상은 경연에서 참찬관 조위(曺偉;1454~1503)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문장과 학문이 모두 뛰어나며 재능과 기량을 겸비하였고 풍채가 장대하며 기절이 바르고 곧으며 논의 또한 준엄하고 정연하여 가히 대각(臺閣 :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솔할 풍모가 있고 지략이 넓고 깊어 가히 낭묘(廊廟 : 의정부의 별칭)의 직책(즉 재상)을 맡길 만하다. 나는 그의 언론을 듣고자 하여 누차 백부(栢府 : 사헌부의 별칭)의 요직을 맡긴 바 있고 그의 학문을 연구하고자 경연의 직임과 한원(翰苑)의 직위에 오래 있게 했으며 비록 다른 관직에 제수하더라도 반드시 경사(經史)의 직임(홍문관과 춘추관의 직임)을 겸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장차 보상지관(輔相之官 : 대신을 거느리고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관원, 즉 수상)으로 크게 쓰고자 함이다. 그런데 다만 그의 나이가 젊어 그의 뜻은 크고 성품은 너무 준엄하고 기상은 너무 날카롭고 언론은 심히 곧으며 행적은 너무 고상하니 마땅히 그의 노성(老成)을 기다려 쓸 수밖에 없구나.”
선생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뼈에 새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 굳게 하였다. 선생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하게 되면 다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생각한 바를 논하고 간(諫)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간곡하고 극진하여 예스러운 대신의 풍모가 있었다.
이제 주상이 하늘의 빈객(賓客)이 되어가니 선생은 실성통곡하며 울부짖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우리 동국(東國;조선)으로 하여금 요순(堯舜)의 치세(治世)를 다시 보려 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는고!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는고! 오직 창생(蒼生)의 무복(無福)만이 아니라 그 누구의 무복이라 해도 이것은 너무 하오이다!”
이로 인하여 병이 발생하고 퇴관(退官)할 것을 간절히 주청하였던 것이다.
<1495년> 3월 기축(6일) : 상소하여 10개 조목의 경계해야 할 사항을 진언하고 인하여 면관(免官)을 주청하였으나 회답이 없다.
새 정사에서 궐하였거나 잘못된 점들을 일일이 열거하여 심히 절실하고 정직한 언사로 상소하였는데 폐주는 마음 언짢아하면서도 속으로 묻어둔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1495년 3월> 계사일(10일) : 스스로를 탄핵하며 직명(職名)을 깎고 향리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주청하는 소를 올려 윤허를 받다.
선생은 소(疏)의 언사가 매우 강직하여 폐주를 거슬렸다. 드디어 진언(進言)으로써 임금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녹 먹는 자리만 채우고 있다고 스스로를 탄핵하고 대죄(待罪)하며 파직을 주청하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1495년 3월> 갑오일(11일) : 또 상소하여 하사 받은 저택의 반환을 주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자 다음 날 바로 귀향길에 오르다.
임금의 하사물이므로 중히 여겨 집을 지킬 노비(奴婢) 두 사람을 남겨두고 떠났다.
한강을 넘을 때 지은 시 한 수가 남아있다.
<一馬遲遲渡漢津(필마로 느릿느릿 한강 나루 건너니),
洛花隨水柳含嚬(떨어진 꽃잎 물 따라 흐르고 버들은 찌푸린듯․․․)>
⇒추록2구절
微臣此去歸何日(미신 이제 가면 언제 또 돌아오리까!)
回首終南已暮春(남산을 돌아보니 이 봄도 이미 저물어가네.)
이 시구를 읽으면 한없이 감개가 일고 한없이 구슬퍼진다.
<1495년 3월> 경자일(17일) : 제천현(提川縣)을 지나면서 권자범(權子汎)을 방문, 「치헌기(癡軒記)」를 짓다.
자범(子汎) 또는 군요(君饒)는 경유(景裕)의 字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고 의연하며 가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축년에 홍문관 교리를 사임하고 외직을 구걸하여 제천현감(提川縣監)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 선생은 교화설(敎化說)을 지어 송별한 적이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객관 서쪽 채를 새로 신축하여 선생에게 헌기(軒記)를 청함에 치헌(癡軒)이라 이름하고 헌기(軒記)를 지었다. (敎化說은 문집 1권 및 속동문선 18권, 癡軒記는 문집 3권 및 속동문선 14권 참조)
<1495년 3월> 정미일(24일) : 운계에 당도하다.
선생은 자신의 점대 점을 쳐본 적이 있는데, 벼슬살이 초반에는 편안하겠으나 일신은 순국(殉國)할 운세가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선생은 세상 도의(道義)가 유익한 일을 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서는 두문불출, 호연한 심정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을 뜻을 가졌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단 하루도 버리지를 못하였다.
선릉(宣陵 : 성종의 연호) 만사(輓詞)를 지었으나 올리지 못하다.
선릉(宣陵)의 인산(因山;國葬日)일이 가까워옴에 선생은 시종하던 신하로서 마땅히 「만사회(輓詞會)」에 나아가야 하나 퇴직 명을 받은 터라 「만사(輓詞)」를 올리지 못했다.
「만사(輓詞)」는 무릇 다섯 편으로 애통하고 측은하며 슬퍼하는 정성이 넘쳤으며 그 표현 속에는 감히 할 수 없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성은(聖恩)의 대답 말씀을 듣게 해줄 이가 없었다.
<1495년> 동 10월 갑자(15일) :「질풍지경초[35]부」를 짓다.
[35]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란 강한 바람이 불 때 약한 풀은 다 쓰러지므로 비로소 굳센 풀이 눈에 뛴다는 뜻으로 ‘간난(艱難)을 당하여 비로소 굳은 절개를 알게 됨’을 비유한 것.
당시 많은 소인배가 정사를 어지럽히고 임금으로 하여금 악정(惡政)을 행하도록 인도하며 온 조정을 휩쓸고 있었으나 감히 말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생은 이 부(賦)를 지어 탄식하였다. (문집 1권 참조)
<1495년> 12월 경신(11일) : 사간원 헌납에 제수하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이조판서 어세겸(魚世謙,1430~1500)이 등용하도록 추천했다. 어공(魚公)은 선생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여 어떤 사건에 당하면 반드시 진언(進言)하는 쟁신(諍臣)의 풍모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물러난 유능한 인사로써 신정부(新政府)를 보필하도록 차자(箚子)를 올려 강력히 추천, 재가를 받음으로써 이 명이 내려지게 된 것이었다.
○ 1496년 병진 (연산군 2년, 선생 33세)
<1496년> 춘 1월 신묘(12일) : 재촉하여 부르는 교지가 또 내려 임진일 역마를 타고 상경, 경자일(21일)에 성 밖에서 묵고 신축일(22일)에 배명한 다음 시정(時政)에 대한 상소문을 직접 올리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선생은 곧 강력히 사직하려 하였으나 어공(魚公)이 또 서신을 보내어 관직에 출사(出仕)할 것을 권하므로 부득이 부름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정중한 사례를 다한 다음 입시(入侍)하여 직접 소장(疏章)을 올려 시정의 잘못되고 모자라는 점을 논하고 임사홍(任士洪,1445~1506), 윤필상(尹弼商,1427~1504), 이극돈(李克墩,1435∼1503) 등 간사한 무리들을 탄핵한 후 사직을 청하였는데, 너그럽게 비답하며 사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1496년 1월> 계묘일(24일) : 간료(諫僚 : 사간원 관료)들과 더불어 차자(箚子)를 올려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주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다.
선생은 성묘조(成廟朝) 때 충청 도사(都事)로 있으면서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소청한 바 있었는데, 그 사안은 잠잠해지고 행하여지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또 다시 대사간 김극뉴(金克忸,1436~1496), 사간 이의무(李宜茂,1449∼1507), 정언 한훈(韓訓, ?∼1504), 이주(李冑,?~1504) 등과 연대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문종 원비(元妃) 권씨(權氏)는 노상군(魯山君)의 손위(遜位)가 있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나 그 뒤에 폐위되어 종묘에서 문종 홀로 향사를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법상의 흠결이며 사리(事理)상으로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성종은 일찍이 몰수한 재산을 도로 환급하게 하시어 노산부인(魯山夫人) 송씨(宋氏)의 생계의 자산으로 하게 하시었으며 그 친족들을 용서해 주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시었는데, 이는 성종의 지극한 뜻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속히 소릉(昭陵)을 복위(復位)하시고 묘주(廟主)를 문묘(文廟) 감실 배위(配位) 자리에 돌아가게 하소서. 그러면 심히 다행하겠나이다.”
이에 예조판서 한치형(韓致亨,1434~1502) 등이 임금의 재가를 받아 회신하여 이르되, “자고로 묘(廟)에는 독주(獨主)가 없는데 문종만이 종묘에서 독향(獨享)되니 의리상 미안하지 않은 바 아니나, 다만 소릉(昭陵)은 조종(祖宗)께서 폐한 지 이미 오래된 일이라 지금 경솔하게 바꾸어 복위(復位)함은 불가하다. ․․․” 운운하였다.
<1496년 1월> 병오일(27일) : 밤 문종(文宗) 묘실(廟室)에서 불빛이 나타난 일이 생겨 다음날 상소하여 전에 올린 차자(箚子) 내용을 다시 품신했는데, 회답이 없어 무신일(29일) 또 상소하고 사직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좌의정 어세겸(魚世謙)이 문종(文宗) 묘실(廟室)에서 있은 불빛이 괴이하여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위안제를 올리도록 임금에게 주청하였다. 선생은 또다시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소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공자(孔子)는 선인(先人)의 유지(遺志)를 이어 받들고 선인의 사업을 이어 완성한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을 달효(達孝 : 한결같이 변함없는 효도)라 했는데 대체로 이 말은 선인의 유지와 사업이라도 계승할 만한 것이어야 계승하는 것이지 꼭 계승될만한 것이 아닌 것도 계승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저 일이란 본디부터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시기(時期) 역시 실행할 수 있는 때가 있고 실행할 수 없는 때가 있는 법인데 어찌 선인들의 일이라 핑계하여 지체하고 미루어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臣)이 삼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현덕왕후(顯德王后), 즉 문종(文宗) 원비(元妃)는 덕망과 예의를 다 같이 크게 갖추었었는데 영묘(英廟 : 세종) 치세 시 연세 24에 노산(魯山)을 낳고 병을 얻어 7일 만에 별세하여 안산에 장사 지내고 소릉(昭陵)이라 하였습니다. 소릉이 폐위된 지 이미 40년이나 지나 신(臣)은 그 폐위가 무슨 사단(事端)에서 연유된 것인지 잘 모르오며 그 사건에는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신이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정신을 본받으면서 감히 나라를 위하여 기휘(忌諱)하지 아니하고 존상(尊上)을 위하여 기휘(忌諱)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엎드려 생각하니 현덕왕후(顯德王后)는 처음부터 종사에 죄를 지은 바 없는데 태묘(太廟 : 종묘)에서 내쳤으니 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또한 문종에 의하여 내침을 당한 사실이 없는데 서인(庶人)으로서 장례하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생전에 문종에게서 내침을 당한 바 없어 배위(配位)의 몸으로 지존(至尊)한데 후에 광묘(光廟 : 세조)에 의하여 폐함을 당하였고 화는 무덤길까지 거듭하여 미쳤습니다. 비록 육신(六臣)의 모변(謀變)에 연유한 것이기는 하나 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은 모두 처형을 당하였고 훈신(勳臣)들의 비밀폭로로 노산군(魯山君)이 중도에 서거하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사람의 나라가 생긴 이래 전례가 없는 대변고(大變故)이었습니다. 신이 은밀히 들은 바로는 능을 파헤칠 때 밤에 곡성이 있었고 바닷가에 옮겨 묻을 때에는 매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토착 촌백성들이 단지 언덕 같은 한 무덤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을 강에 뿌린 죽누(竹淚 : 피눈물)는 오래도록 문인들의 시구(詩句)에 오르고 식은 음식, 보리밥은 속절없이 시골 늙은이의 목소리를 삼켰습니다. (그 무덤이) 쑥대 풀에 파묻혔고 여우와 토끼들이 어슬렁거리니 하늘이 황폐하고 땅이 늙어도 애절한 한은 끝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한(恨) 많은 원혼(冤魂)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다가 지하에서 답답해함이 없는지 어찌 알겠으며 하늘에 계신 문종(文宗)의 영혼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르내리며 사시(四時)의 제사(祭祀 : 禴嗣烝嘗)에 흠향하실 때 눈물을 삼키며 외로운 고혼(孤魂)을 슬퍼하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습니까?
예(禮) 근본은 정(情)에서 비롯되고 정은 예에서 베풀어진다는 것은 고금을 통하여 통용되는 이치입니다. 천자(天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사당의 제도를 세우고 있는데 비록 오묘칠묘(五廟七廟 : 제후, 천자의 廟에서 일세(一世) 삼세(三世)를 제거한 예는 있지만 배위(配位)가 없는 사당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평소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성조(聖祖)께서 천명(天命)을 받아 오례(五禮 : 吉禮, 凶禮, 軍禮, 嘉禮, 賓禮)를 모두 갖추어 거행하시었고 열성(列聖)이 이어 내려오면서 이를 계승 발전시켜 중국의 그것과 비견되는 전장(典章), 법도(法度)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종묘 안에서 배위가 없는 묘실(廟室)이 있어서 인정이 무너지고 묘례(廟禮)의 결함이 되고 있사온데, 이를 미적미적 미루어 삼세(三世)에 이르도록 아직 추복(追復)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 이 과오에 대하여 의아해하지 마십시오. 뭇 신하들이 이 옳지 못함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는데 신은 참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천지와 같고 천지는 부모와 한가지입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없는데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없는데 자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왕(帝王)은 백성의 부모입니다. 그 아버지에 대해서는 향사(享祀)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향사하지 않으며 또한 그 아버지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그 어머니에 대해서는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고로 그 유례가 없습니다.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하면 가령 어머니에게 죄가 있어서 아버지에게서 내침을 당했다면 부명(父命)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죄 없는 어머니를 추폐(追廢)하고 묘실(廟室)에서 내치어 받들지 않는다면 이는 정례(情禮)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옵니다. 예전에 유신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이 일을 여러 조목의 말미에 간신히 끼워 소론(疏論)하였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1445~1506), 이경(李瓊)과 그에 따르는 같은 무리들이 가로막고 헐뜯으며 말하기를, ‘소릉(昭陵) 복위(復位) 문제는 신자(臣子)들이 감히 언급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고, 붕당(崩黨)을 조성하려 한다는 억설로 없는 죄를 얽어 꾸미고 그 죄 지극하다며 국문할 것을 청하여 사림(士林)의 화(禍)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성종께서는 일월과 같이 밝으시어 이를 불문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감히 다시 복위문제를 진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방에 둘러진 국토 수 천리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모든 신자(臣子) 가운데 어느 누가 소릉 일을 탄식하지 아니하며 어느 누가 태묘(太廟)일을 애석해하지 않겠습니까?
세종은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 고려 왕족) 후손을 봉하여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 제사를 받들도록 했습니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일에서 나온 대성인의 지극한 인(仁)이며 성덕(盛德)으로 오랜 세대를 두고 흠숭하고 우러러볼 일입니다. 전조(前朝)의 사당이 오히려 이와 같이 후하게 대접받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선왕(先王)의 묘(廟)에 대한 예우(禮遇)야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로 의심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권자신(權自愼)은 소릉(昭陵)의 형이고 송현수(宋玹壽)는 노산(魯山)의 장인이온데, 예종(睿宗)은 일찍이 현수(玹壽)의 아들 거(琚)와 조카 영(瑛)을 조적(朝籍 : 관리 명부)에 올리게 하였으며 성종 역시 권자신(權自愼) 가적(家籍)의 가산(家産)과 노비들을 환급해 주어 노산부인 송씨의 여생의 생계 자원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에 관련한 두 성상(聖上)의 숨은 뜻이 매우 컸음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3세에 걸쳐 행하지 못한 바를 지금 뒤쫓아 거행할 수 없다면 신 역시 남효온(南孝溫)의 설(說)을 좇아 광묘(光廟 : 세조)의 가르침(訓)을 살피실 것을 간청하옵니다. 세조(世祖)께서 예종에게 내리신 말씀은, ‘나는 마땅히 어려움에 시달리고 싸워야 하지만 너는 당연히 태평(泰平)하여야 한다. 만약 나의 행적(行迹)에 연유하여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당하였을 때 이를 변통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나의 뜻을 따르고 내 사업을 계승하지 아니한 까닭일 것이다. 일이란 어찌 행할 수 없는 때가 있고 또한 행할 수 있는 때가 있지 아니하겠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흠명(欽命)하시고 인효(仁孝)하시어 등극하신 초기에는 모든 면에서 훌륭하게 닦아 덜고 더함으로써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시었으며, 모든 시책이 정도(正道)에 귀결되지 않는 바 없었는데 유독 이 일만은 어렵사리 신중하여 결말을 보지 못하는 까닭을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 무엇을 꺼려 할 수 없으시며 무엇을 기대하여 하지 않으십니까? 행할 수 있는 일을 마땅히 행할 수 있는 시기에 간사한 논의(論議)에 저지당하여 단연히 결행을 감행하지 아니함은 이른바 할 수 없음이 아니라 하지 아니함이옵니다.
전자에 명나라 헌종(憲宗) 황제가 경태제(景泰帝)를 추복(追復)한 선행은 천지간에 있는 일성과 같이 밝고 빛나옵니다. 비록 이 일과 견주어 서로 같은 점이 적기는 하오나 가히 본받아 행할 만합니다.
신리(神理)와 인정은 본래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니 인정이 편안한 연후면 신리 또한 편안할 것입니다. 신리가 불안한데 인정이 편하다든지 인정이 불안한데 신리가 편안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엎드려 듣자옵건대 지난밤 문종 묘실(廟室)에 심히 괴이한 불빛이 나타나 예관을 보내어 위안의 제를 올린 바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문묘의 신령이 어두운 저승에서 필시 편치 못한 바 있을 것이고 전하에게 신호를 보인 것은 전혀 무간(無間)한 사이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은 이미 청복(請復)의 소와 차자(箚子) 올리기를 재삼 하였사오며 앞으로도 그치지를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바라옵건대 우리 성조(聖朝)에서 성덕(盛德)의 일을 행하여 주십시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 광묘(光廟)의 뜻 깊은 가르침을 따르시어 문종의 외로움과 돌아가신 왕비의 원통한 저승의 원한을 마음으로 살피소서. 그리고 중국 조정의 성대한 제도를 본받아 묘실과 능원(陵園)의 예를 속히 추복(追復)하게 하소서. 전하, 이 거사는 백왕의 으뜸이 되시어 가히 천지의 바탕을 세우실 수 있을 것이며 귀신도 이에 좇을 것입니다. 또한 공자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 선계선술(善繼善述)하여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달효(達孝)하게 된 일과 부합되는 일이옵니다. 신이 천박하고 외람됨을 헤아리지 아니한 소로서 성총(聖聰)을 모독한 죄 만사(萬死)에 해당한 줄 아오나 간절히 기원하는 격절한 마음 삼가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이 소장(疏章)은 연산군(燕山君)에게 올려졌으나 그는 좋아하지 아니하고 보류한 채 아무런 회보도 없었다.
그 후 중종(中宗)8년에 이르러 연신(筵臣) 소세양(蘇世讓,1486~1562)이 진언하기를 소릉(昭陵)이 미복(未復)되고 문종묘실(文宗廟室)에 배위(配位)가 없는 것은 종묘의 예에 크게 위배된다고 했다. 주상은 실록을 상고하여 진언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조원기(趙元紀,1457∼1533), 신용개(申用漑,1463∼1519) 등이 극력 찬동하였다. 때마침 태묘(太廟) 마당의 큰 나무에 벼락이 떨어진 일이 생겨 주상은 특명을 내려 예관으로 하여금 택일하여 묘(廟)에 고하고 복릉(復陵)과 부묘(祔廟 : 신주를 사당에 합사하는 것)의 예를 행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선생의 말씀이 크게 행하여졌는데, 위로는 학사(學士) 대부(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아녀자와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슬퍼하고 탄식하며 해와 별과 은하수같이 빛나는 선생의 이름을 사모하고 선생이 오늘의 이 결과를 보지 못함을 애석해하여 마지않았다.
아, 선생은 온 세상 사람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을 때에 세 번씩이나 궐문(闕門)에서 절규하였으니 그 의리가 우주에 가득차고 그 충성이 일월을 꿰뚫어 사람들을 격앙시키고 감동, 분발케 하여 생기가 일고 늠름하게 하였다! 비록 선생의 진언이 수용되지 못했을지라도 천하 후세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만으로 족한 일인데 황차 선생이 돌아가신 지 1기(紀;12년) 만에 옛날과 같이 다시 고쳐 시설하고 왕후의 약사(禴祀 : 종묘 제사의 한 가지)를 지내게 되었음은 선생의 뜻과 사업이 영광스럽게 종결됨이요 일국의 떳떳한 윤리를 다시 폄이었다. 이것은 선생의 진언이 비록 일시적으로 꺾였지만 실상 선생의 의리는 만세에 펼쳐진 것이었다. 선생에 대항하여 저지하고 배척하며 거짓 죄를 꾸며 끝내 선생을 형륙(刑戮)에까지 이르게 한 짓은 선생의 충절을 드러내고 선생의 인(仁)을 완성시키는 데 적당히 이바지한 꼴이 되었다.
<1496년> 2월 신해(3일) : 모부인 병환으로 사직서를 내고 직행, 정사일(9일)에 운계에 도착하였는데 경신일(12일)에 윤허를 받다.
<1496년 2월> 정묘일(19일) : 권향지(權嚮之,권오복,1467∼1498)와 같이 관수루(觀水樓)에서 유람하다.
향지(嚮之)의 이름은 오복(五福)이요 호는 수헌(睡軒)인데, 교리(校理)로 있다가 함창현감(咸昌縣監)으로 걸양하여 갔었다. 그간 누차 서신으로 선생을 초청한 바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향지가 달성(達城)에 와서 또 편지를 보내왔다. 때마침 모부인 병환은 이미 회복되었고 하여 마침내 향지와 함께 함창에 가게 되었다. 도중에 낙동원(洛東院)을 지나다가 관수루(觀水樓)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시창(詩唱)을 주고받았다.
곧 현에 다다라 3일간 머물다가 이별에 임하여 또 시의 창화(唱和)가 있었다.
(시문은 모두 문집 1권에 실려 있다.)
<1496년 2월> 신미일(23일) : 임호(臨湖)의 고향집에 와 있는 함허당(涵虛堂)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선생을 방문하다.
홍공(洪公)의 자는 겸선(兼善)인데 대대로 살고 있는 집이 함창(咸昌)에 있었다. 그는 박학하고 문학이 능했으며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절개가 대단하여 참으로 재상(宰相)의 재목이었다. 이때 병으로 사퇴하고 귀향한 지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 선생이 지나는 길에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공은 손을 잡고 기뻐하며 선생에게 말하기를, “군(君)이 입조(立朝)한 이래 충직함이 널리 알려졌고 사양함과 받아들임(辭受), 나아감과 물러남(進退)이 적지 아니하니 이 구차한 노부(老夫)가 미치지 못한다. 군은 충의에 더욱 힘써 조야(朝野)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란다.”라고 했다.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사례하고 물러 나왔다.
<1496년 2월> 갑술일(26일) : 운계(雲溪)에 돌아오다.
<1496년> 3월 병술(8일) : 이조정랑(吏曺正郞) 겸 지제교(知製敎)에 다시 제수하는 부름이 있었으나 친질(親疾)을 이유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다.
<1496년 3월> 갑진일(26일) : 「비호인대(非鄠人對)」란 제목의 글을 짓다.
선생은 선천적으로 순수한 효성을 타고나 어릴 때부터 효동(孝童)으로 칭송 받았다. 모부인은 평상시 병환이 잦았는데 맛있는 음식으로 조양(調養)할 때 극진하게 안 써본 것이 없었다. 이제 또 친질(親疾)로 조정에 고한 다음 모부인 곁에서 주야로 의대(衣帶)를 풀지 않은 채 시중들었다.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몸소 탕제를 올리며 의원을 맞아 문약(問藥)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면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이 무렵 비호인대(非鄠人對)」란 글을 지었다.(문집 1권 및 속동문선 18권 참조)
<1496년> 윤3월 정축(29일) : 모부인(탁영 김일손 모친) 용인 이씨(李氏) 상을 당하여 거상하다.
부인은 형조참의 양(讓)의 따님으로 1424년 갑진(세종 6년) 2월 24일 탄생하였고
세종 26년에 남계공(南溪公)에게 시집와서 이제 향년 73세로 졸하였다.
<1496년> 하 5월 무자[1] : 이부인(李夫人)을 남계공 왼편에 부장(祔葬)하다.
묘지(墓誌)는 선생이 짓다.
[1] 3월에 윤달이 들어 4월11일에 해당.
1497년 정사(연산군 3년, 선생 34세)
○ 1498년 무오(연산군 4년, 선생 35세 별세)
<1498년> 춘1월 임자(16일) : 「유월궁부(遊月宮賦)」를 짓다.
선생은 임금의 음탕하고 포학함이 날로 심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종사의 장래가 위태롭다고 느껴 근심한 나머지 이 부(賦)를 지었다. (문집 1권 및 속동문선 2권 참조)
<1498년> 하 6월 정축(12일) : 복(服)을 벗다.
선생은 거상(居喪)에서 상(喪), 장(葬), 제(祭), 전(奠)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준거하고 최선을 다하여 기거동작을 삼가며 쾌한 마음을 가지도록 힘썼으나 지나치게 슬퍼함으로써 심신을 상함이 도를 넘어 거의 멸성(滅性 : 哀毁로 성명을 잃는 것)에 이르렀다. 동창공(東窓公)과 서로 교대로 왕래하면서 한 달의 반은 집에, 반은 묘막에 있었는데 삭망(朔望) 때는 돌아와 영연(靈筵 : 빈소)에 전(奠)을 올렸다.
향리의 친구들은 선생의 행의를 예의 모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498년 6월> 경진일(15일) : 병중에 있는 부모님을 뵙게 김숙인(金淑人)을 목천(木川) 번곡(磻谷)에 보내다.
<1498년 6월> 임오일(17일) : 김해에 가서 조묘(祖墓)를 성묘하다
<1498년 6월> 계미일(18일) :분산(김해) 별서(別墅)에 머물면서 「함허정기(涵虛亭記)」를 짓다.
별서는 조상의 산소(祖塋) 곁에 있었는데, 부사 최담(崔澹)이 찾아와 선생에게 새로 지은 정자의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선생은 사양하여 성내(城內)에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글을 지어주었다. (문집 3권 및 「속동문선」14권 참조)
<1498년 6월> 병술일(21일) : 함양(咸陽)에 가서 일두(一蠹) 를 방문하다.
일두(一蠹)는 을묘년(1495년,연산1) 여름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남계(藍溪)의 옛집에 돌아와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병진년(1496년,연산2)가을 운계(雲溪)에 조문 온 바 있고 지금은 선생이 또 방문 간 것이다.
<1498년 6월> 경인일(25일) : 풍질(風疾)이 있어 청계정사(靑溪精舍)에서 조양하다.
선생은 일찍이 그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또 일두(一蠹)와 교유하면서 즐기기 위해 을묘년 가을, 사람을 보내어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일두(一蠹)에게 제호를 청하였는데 편액(扁額)을 ‘청계정사(靑溪精舍)라고 했다. 남계 가에 있었다.
<1498년> 추 7월 갑오(?, 계산상 6월 29일) : 「취성정부(聚星亭賦)」를 지어 일두(一蠹)에게 보이다.
선생은 일두(一蠹)와 더불어 밤낮으로 학문을 강마하거나 대화하곤 하였는데, 말씀이 시사(時事)에 이르러서는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날도 이 부(賦)를 지어 보이며 말하기를, “옛날 주선생(朱子)이 취성정찬(聚星亭贊)」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아마 말하려는 뜻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이 또한 나의 우의(愚意 : 다른 사물에 붙여서 그 뜻을 암시한 것)이다.”라고 했다.
일두가 말하기를 “너무 지나친 염려가 아닌가?” 라고 하니 선생은 “그대는 대유(大猷 : 김굉필,1454~1504)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대유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다. 전에 그가 덕우(德優:辛永僖)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선비들의 기상(氣象)을 보면 동한말(東漢末) 때와 아주 유사하다. 백원(百源;李摠,?~1504), 백공(伯恭;南孝溫,1454~1492), 정중(正中;李貞恩), 문병(文炳;許磐,?~1498) 등 모두가 진(晋)나라의 풍모가 있으며 10년에 아니나올 선비들인데 화(禍)는 이들에게 있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참으로 그러하다. 내가 말하기를 ‘비단 사기(士氣)만이 그러한 게 아니다.’ 라고 했다. 선왕(先王)은 어진 선비 좋아하기를 여색 같이 하고 간언(諫言)에 따르기를 물 흐름과 같이 하여 우리 젊고 뜻있는 선비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밝은 주상을 만나 포부를 펴고 업적을 쌓아 당우(唐虞)의 치세(治世;堯舜時代)를 금일에 다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극언을 거리낌 없이 하였는데 한편으로는 권간(權奸;權臣과 奸臣)들의 미움을 쌓아왔었다. 불행히도 하늘은 복을 주시지 않고 졸지에 황천(黃泉)의 빈객(賓客)으로 모셔 갔구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사태가 변하여 뭇 간신배가 뜻을 얻었으니 지금 화(禍)가 이미 박두하였다. 어찌 이를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일두(一蠹)도 과연 그렇다 하고는 서로 더불어 오래도록 슬퍼하고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선생이 저번에 귀향했을 때 지은 「질풍지경초부」에 이르기를, “한 나라무가 수풀 가운데서 빼어나면 바람이 반드시 꺾을 것이나 꺾는다고 또한 어찌 (지조마저) 상하리오. 내 힘이 이를 지탱하지 못함을 한하노라.” 라고 하였다. 또한 「취성정부」에서는 “위에서는 임금이 혼미하고 아래에서는 선비들이 격(激)함에 당고(黨錮)의 화(禍)[36]를 일으키어 불구자(환관)를 떠받들고 삼백년 길러온 인재들을 초개만큼도 보지 않네.”라고 하였다. 이 두 부(賦)를 보면 선생의 견해가 무오사화(戊午士禍)와 실제로 꼭 들어맞았으니, 아! 선생께서 선견이 있어서 이를 빗대어 문장화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연한 영감(靈感)이 있어서 마침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인가?
아, 참으로 슬프도다!
[36] 당고(黨錮)의 화(禍)란 중국 후한의 환제(桓帝) 때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전단(專斷)하므로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이들을 몹시 공격하였는데, 환관들이 도리어 그들을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黨人)들이라고 하여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 사건을 말한다.
<1498년> 7월 병신(初5일)[1] : 사기(史記) 일로 체포되다.
[1] 계산상으로는 7월 2일에 해당.
명을 받든 사자(使者)가 청도에 도착했는데, 당시 선생은 함양에 있었다.
대유가 말을 달려 남계(藍溪)에 도착 이 변고를 고했는데,
선생은 안색도 변치 않고 말씀도 웃으면서 태연자약했다.
마침 일두(一蠹)가 같이 앉아 있었는데 선생에게 이르기를,
“사림(士林)의 화(禍)는 이로부터 시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극돈(李克墩)이 일으키는 사기(史記)에 관한 사건일 것이다. 나는 거기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바라건데 백욱(伯勗;일두의 字)은 도(道)를 위하여 부디 자애(自愛)하시오.”라고 하였다. 일두는 “여러 말 하지마오. 나 역시 이 행차에 뒤따르게 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선생은 미소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의금부 도사가 도착하여 체포영장(拿命)을 제시하였다. 선생은 곧 뜰 아래에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를 올리고
평온한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이에 앞서 1457년 정축(세조 3년)
김종직 선생이 아직 진사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당함을 보고 「조의제문」을 지은 바 있다.
그 후 성종이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에게 명하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저술한 글을
찬집(撰集 시,·문장 등을 모아 편집하는 것. 또는, 그 책. )하도록 했는데,
매계는 이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수록하여 올린 바 있다.
그리고 탁영 김일손 선생이 사관에 있으면서 이를 또한 사초에 실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닦는데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당상(堂上)이 되어 선생이 사초에 자기의 비행을 빠짐없이 수록한 것을 보고 이 「조의제문」을 가지고 자기의 사사로운 원한을 갚고자 마음먹었다.
마침내 그는 「조의제문」을 가지고 유자광(柳子光,1439~1512)에게 급히 달려가 말하기를, “이 문장의 뜻은 광묘(光廟;세조)를 가르킨 것이다.
어찌 감히 이렇게 지을 수 있으며 어찌 감히 수록할 수 있는가?
이 모두가 대역(大逆)이다.”라고 했다. 유자광은 음험하고 화 일으키기를 즐기는 자로서 함양(咸陽) 분시(焚詩)의 일[37] 이래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터라 크게 기뻐했다.
드디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차비문(差備門;궁궐 편전의 앞문)에 이르러 급변(急變)을 고하면서 선생이 허위로 세조를 헐뜯었다고 하였다.
그 편전에 드나드는 것은 오직 도승지 신수근(愼守勤)만이 관장하고 있었는데, 검열 이사공(李思恭)이 들어가 임금 뵙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연산주(燕山主)는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을 시켜 체포하여 오라하고 또 대궐 내의 일을 보는 관원(掖隷) 중에서 말 잘 타는 자를 뽑아 보내어 도중에 지체되지 않는가를 살피고 오게 했다.
그리고 급히 알리어 유자광과 이극돈으로 하여금 추관(推官;죄인을 국문하는 관원)으로
하여 옥사(獄事)를 전적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1498년 7월> 신축일(7일) :
의금부에 갇히고 밤에 대궐 뜰에서 국문을 받은 다음 진술서(供狀)를 올리다.
수문당(修文堂) 앞에 설치된 국문장에 연산주(燕山主)가 나와 국문하여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선묘(先廟) 때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사초(史草)에 썼는가?
또 「조의제문」은 왜 수록하였으며 거기에 찬동하면서 충분(忠憤)을 빗대어 나타냈다 함은 무슨 저의인가? 덕종귀인 권씨(權氏)에 관한 일은 누구에게 들었는가?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소청하였는데 무슨 뜻으로 썼는가?
후전곡(後殿曲)에 관한 일은 무슨 견해로 적었는가?”하였다.
이에 선생이 진술하기를,
“사법(史法)에, 이전에 기록이 시작된 사례에 대해 추가로 기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조조(世祖朝)의 사실을 역사에 기록한 까닭은 임금의 선악과 신하들의 충간을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고 경계하고자 함이며 스승 김종직이 지은 이 글은 노산사건(魯山事件)에 느낀 바 있어 지었던 것이며 신(臣)이 이를 사초에 편집한 것은 천년 후세에까지 이를 보여 공론(公論)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덕종귀인 권씨에 관한 일은 귀인의 조카인 허반(許磐)에게서 들었으며 소릉복위(昭陵復位) 소청은 선왕께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후손을 봉하여 준 바 있는데 이는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신이 이 소청에서 바란 것은 성조(聖朝)에서 어진 정치를 펴고 폐례(廢禮)를 닦고자 함이었습니다. 후전곡(後殿曲)에 관한 일은 신이 전에 서호(西湖)의 독서당에 있을 때 무풍부정(茂豊副正) 이총(李摠)이 가야금을 휴대하고 방문하여 후전곡을 탄 일이 있는데, 그 음이 심히 애절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데 쓸 만한 음이 아닌지라 아울러 언급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사초를 같이 의논한 사람이 누구인고?”라고 함에, “모든 실정을 다 털어 놓았습니다. 같이 의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홀로 죽게 하여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선생 가택을 뒤져 색출한 문서 중에 이중옹(李仲雍)이 사초에 관해 말한 기록이 있었다. 홍사호(洪士灝)가 국문하기를, “아무개가 도(道)에 재직할 때․․․ 운운했는데 누구를 말함인가?”라고 했다. 이에 선생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는 필시 이극돈이 사기(史記) 일로 해서 일으킨 일일 것이다.
극돈이 전라감사를 하고 있을 때 성묘상(成廟喪)을 당했는데도 장흥 기생과 놀아나고 또 뇌물을 탐하여 그 사실을 내가 사초에 실은 바 있는데, 극돈이 그것을 삭제하여 줄 것을 빌어왔으나 내가 들어주지 않아 그것으로 원한을 품게 된 것이다.”
<1498년 7월> 을사일(11일) : 또다시 이중옹(李仲雍) 및 허문병(許文炳)과 함께 남빈청(南賓廳)의 국문에 나가다.
문병(文炳)이 진술하기를, “덕종소훈(德宗昭訓;세자궁에 딸린 정5품 궁인) 윤씨(尹氏) 일을 말했는데 아무개는 필시 권씨(權氏)로 잘못 들은 것 같다.”고 했고, 중옹(仲雍)은 “노산(魯山) 숙의(淑儀) 권씨는 곧 권람(權擥1416~1465)의 일족인데, 그의 전택(田宅)과 노비들을 모두 몰수당하고 지급되지 않아 굶주리는 곤궁한 처지에 이르러 마음은 항상 각박하였다. 그런 연고로 해서․․․.” 운운하였다.
선생의 진술은 명백하고 정직하였으며 한 마디도 앞뒤가 어그러지거나 그릇됨이 없었다. 추달과 신문을 받을 때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두려워 실색(失色)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의 언사는 강개하고 행동거지는 화평하고 조용하였으며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기절(氣節)이 있었다.
유자광(子光)과 이극돈(克墩)은 이 옥사가 저희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죄인들을 학대하고 괴롭힐 구실을 밤낮으로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조의제문」을 제멋대로 주(註)를 달아 풀이하고 임금으로 하여금 알기 쉽도록 하여 보이고 아뢰기를, “김종직은 우리 세조를 흉보고 헐뜯었으며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종직에게서 배운 바이므로 마땅히 대역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운운했다.
<1498년 7월> 무신일(17일)[1] : 형명(刑名)을 논의하라는 교지가 내리다.
[1]戊申은 계산상으로 14일, 17일은 신해일이며 연산군일기 제30권 19쪽의 신해일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신해일(17일)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산주(燕山主)는 자광(子光)의 계장(啓狀)을 보고 내린 교지에 이르기를, “ 김종직은 초야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조에 등제한 후 성종이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앉히고 형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정을 기울일 만큼 은총을 받아왔고, 병으로 퇴임하기에 이르러서는 성종께서 향리 지방관으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미곡을 특별히 하사하도록 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 김일손이 닦은 사초 안에는 부도한 말로써 선왕조의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적고 그의 스승의 「조의제문」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의제문 <吊義帝文>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孫心爲西楚覇王項籍所弑沉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距不啻萬有餘里世之相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寢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屍于水歟是未可知也
정축년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星州)으로 가는 도중 답계역(踏溪驛)에서 자게 되었는데,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제왕복)을 입고 근심스런 모습으로 다가와 혼잣말로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이 서초(西楚)의 패왕(覇王) 항우(項羽)에게 시해되어 침강(郴江)에 던져졌도다.’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 깨어나서 말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의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조선)의 사람이며 지리적으로도 서로 일만여 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세대 역시 천여 년 뒤가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꿈에 보이니 그 무슨 조짐인고?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어찌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 은밀히 격살하고 그 시체를 물속에 던졌단 말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로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글을 지어 조상(弔喪)하노라. 오직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제정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사대(四大;道, 天, 地, 王) 오상(五常;仁, 義, 禮, 智, 信) 의 존귀함을 모를 것인가. 중국에는 넉넉하고 동이에는 인색할 이 없으며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어찌 없을 수 있는고? 그러므로 내 동이인(東夷人)이요 또 천년 후세의 사람이지만 공손히 초나라 회왕(懷王)을 조상(弔喪)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진시황의 별칭)이 그의 이빨과 뿔(武力)을 희롱하니 사해에 풍파 거칠고 가득하게 하였도다. 비록 칠갑상어, 다랑어, 미꾸라지, 도롱뇽 같은 작은 물고기라도 어찌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해 그물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그때 육국(六國)의 유손(遺祚)들은 몰락하여 유랑하고 약간은 평민이 되기도 하였다. 항양(項梁;항우의 숙부)은 남국(南國)의 장수 무리의 한 사람으로서 어호(魚虎)의 뒤를 이어 거사하였다. 백성들의 소망을 좇아 임금을 구해 모시니 웅역(熊繹;초나라 시조)의 끊어진 제사를 이었도다. 임금의 옥새를 쥐고 남쪽으로 향해 앉으니 천하에 진실로 우씨(芋氏 : 초나라 임금의 성)보다 존귀한 이 없었더라.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가게 하였으니 또한 그의 인의를 보기 족하였도다. 시랑이처럼 사납고 이리같이 탐욕스러운 자 함부로 관군(冠軍;총대장 宋義)을 죽여 없앴으니 어찌하여 그들을 먼저 잡아들이어 도끼를 (피에) 적시지 않았던고. 아, 슬프도다! 대세가 그러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왕에게 더욱 송구할 뿐이로다 베풀어준 은혜 갚음이 도리어 식혜와 식초처럼 먹히고 말았으니 과연 천도(天道)는 거꾸로 도는도다. 산은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를 듯, 태양볕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침강(郴江)은 주야로 흘러 물결이야 일건만 다시 오진 못하도다. 하늘 같이 깊고 땅같이 오랜 한이 언제나 다할손가. 혼백이 지금까지도 정처 없이 헤매고 떠돌리라. 나의 마음 금석이라도 뚫었음인가 임금님이 홀연 꿈속에 임하셨도다. 자양(紫陽 : 朱子의 호)의 노필(老筆)을 좇으려니 생각은 두렵고 불안하며 근심만 되네. 그름 무늬 술잔 들어 고신(告神)하니 영령(英靈)이시어 오시어 흠 향하소서.
여기에서 ‘조룡(祖龍)이 그의 이빨과 뿔을 희롱한다.“고 하였는데 조룡은 진시황으로 종직(宗直)은 진시황(秦始皇)을 세조(世祖)에 비겼고 또 ‘백성들의 소망을 좇아 임금을 구해모시다.’라고 한 대목의 임금은 초(楚)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을 말한 것이다. 처음에 항양(項梁)은 진(秦)을 치고자 하여 심을 구하여 의제(義帝)로 삼았었는데,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 비하였으며 또 ‘시랑이(豺狼)처럼 사나고 이리처럼 탐욕스러운 자 함부로 관군(冠軍)을 죽였다.’고 한 대목을 시랑이와 이리는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함부러 관군을 죽였다 함은 김종서(金宗瑞,1383∼1453)를 목 베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또 ‘어찌하여 그들을 먼저 잡아들이어 도끼를 (피에) 적시지 않았던고.’라고 한 것은 노산이 어찌하여 세조를 잡아들이지 아니했는가를 지칭한 것이며 ‘도리어 식혜와 식초처럼 먹혔다.’고 함은 노산이 세조를 잡아들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식혜와 식초처럼 먹혔다는 말이다. 또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좇으려니 생각은 두렵고 불안하며 근심만 되네.’라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고 이 부(賦)를 지어 강목(綱目)의 필법(筆法)을 모방하려 한 것이다.
김일손은 이 글에 찬동하여 말하기를, ‘충성된 울분을 빗대어 표현했다.’고 했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대왕은 국가가 위태롭고 장래가 매우 불확실할 즈음 간신들이 난을 모의하고 화의 시기가 거의 미치려 할 때 발기하여 역도들을 베고 제거하여 위태로운 종사를 다시 안정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자손들이 대를 이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그 공업(功業)이 매우 크고 높으며 그 덕은 백왕의 으뜸이로다. 그런데 뜻밖에도 종직이 그의 문도(門徒)를 움직여 성덕(聖德)을 헐뜯는 논의를 하였고, 김일손으로 하여금 사기에 거짓된 글을 싣게 함에 이르렀으니 어찌 일석일조의 일이겠는가. 그동안 불신의 마음을 은밀히 품고 삼조(三朝)를 내리 섬겨왔도다. 내 지금 생각하니 그동안 이를 깨닫지 못했음이 슬프고 두렵도다. 형명(刑名;형벌의 종류와 명칭)을 논의하여 아뢰어라. ․․․” 운운했다.
<1498년 7월> 정사(26일)[1] : 형명(刑名)을 논의, 보고서를 올리다.
[1]정사일은 23일임. 26일은 경신일. 형량에 대한 내용이 연산군일기 제30권44쪽의 경신일에 나오니 경신일(26일)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자광(柳子光) 등은 정당한 법률조항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여 논의를 반역(反逆)으로 이끌어갔다. 노사신(盧思愼,1427~1498)만이 홀로 말하기를 문자(文字)의 사건을 반역에까지 처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 과중하다고 하였다. 이에 자광은 안색을 붉히며 힐난하였다. 결국 하나하나 그의 뜻대로 보고되었는데, 자광이 올린 그 보고서(啓本)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김종직은 은밀히 화심(禍心)을 품고 몰래 결당하여 흉모(凶謀)를 퍼뜨리고자 한 지 오래되었다.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시해한 사건을 빌려 거기에 의탁하여 갖은 문자로써 선왕을 흉보고 헐뜯었으니 그 죄는 하늘에 사무칠 죄악이라 용서할 수 없어 대역(大逆)으로 부관참지(剖棺斬屍)해야 한다고 논의되었다. 그 문도 김일손(金馹遜,1464~1498), 권오복(權五福,1467~1498), 권경유(權景裕,?~1498)도 그 붕당이 간악하고 한 뜻이 되어 서로 돕고 그 글을 충성된 울분이 넘친다고 칭송, 이를 사초(史草)에 실어 영구히 남기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종직과 같아 모두 능지처사(陵遲處死)해야 한다. 김일손은 또 이목(李穆,1471∼1498), 허반(許磐,(?~1498), 강겸(姜謙,∼1504) 등과 더불어 선왕의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서로 전하고 알려 사초에 기록했다. 이목과 허반은 다 같이 참수에 처하고 강겸은 장형(杖刑) 100대를 집행하고 가산을 몰수하며 최변방(極邊)에 노예로 보낸다.
표연말(表沿沫,1449∼1498), 홍한(洪瀚,1451∼1498), 정여창(鄭汝昌,1450∼1504), 무풍부정(茂豊副正) 이총(李摠,(?~1504) 등은 난언(亂言)을 범한 죄가 있고, 강경서(姜景叙,1443∼1510) , 이수공(李守恭, 1464∼1504), 정희양(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으니 장형 100대를 집행하고 삼천 리 밖으로 유배(流配)시킨다. 이종준(李宗準) , 최보(崔溥), 이원(李黿), 이주(李冑),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은 모두 종직(宗直)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며 국정을 비방하는 논의를 하고 시사(時事)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임희재는 장형 100대를 집행한다. 이주는 장형 100대를 집행하고 최변방에 부처(付處)하며, 이종준 , 최보, 이원, 이주(李冑),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모두 장형 80대를 집행하고 먼 곳에 부처한다. 귀양 가는 사람은 모두 봉수대(烽燧台)의 노지기(爐干) 역으로 정한다. 수사관(修史官) 등 김일손 등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아니한 어세겸(魚世謙), 유순(柳洵), 윤효손(尹孝遜)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침(許琛), 안침(安琛) 등은 좌천한다.
<1498년 7월> 무오(27일)[1] : 화(禍)를 입다.
[1] 무오일은 24일이며 27일은 신유일이다. 연산군일기 제30권 47쪽에 ‘辛酉告誅馹孫等’ 으로 되어 있으니 신유일(27일)이 맞을 것이다.
선생은 향지(嚮之;권오복), 자범(子汎;권경유), 중옹(仲雍;이목), 문병(文炳;허반)과 더불어 담소하며 평일과 같이 평온하고 의젓한 자세로 형장에 나아가니 때는 오정(午正) 일각(一刻)(낮 12시 15분)이었다. 이 날 온 천지가 그믐같이 캄캄하고 음침한 구름이 사방을 뒤덮더니 폭우가 쏟아지고 대풍이 동남쪽에서 일어나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왓장을 날렸다. 도성 안의 남녀치고 엎드려 벌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편 운계(雲溪)의 냇물은 3일 동안 핏빛으로 흘렀다. 동창공(東窓公)과 대유(大有)도 다 같이 연좌되어 호남에 귀양 갔다. 이로부터 유림(儒林)은 기운을 잃고 학사(學舍)는 쓸쓸해졌다. 부형(父兄)들은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배워서 과거에 응할 생각은 이제 그만두어야 하고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 또한 말아야 한다. ․․․”고 운운했다.
이날 종묘에 고하고 한편 죄사(罪赦)하는 교지를 반포했는데, 그 교문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국가가 위태롭고 앞일이 혼미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기반을 굳히려 하는 때를 당하여 깊은 생각과 밝은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쳐서 평정하시니 천명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된 바 있었고, 그의 성덕과 신공은 백왕의 으뜸으로 조종(祖宗)에서 하기 어려운 일을 더욱 빛나게 하였고 자손에게는 연익의 법(燕翼之謨 : 제비처럼 자손을 품어주는 지혜)을 끼쳐주어 계계승승(繼繼承承;잇고 이어)지금에 이르렀는데 불의에 간신 김종직․․․운운. (이하는 유자광이 올린 계문을 적었음).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여 그 사유를 종묘사직에 삼가 고하였다. 생각건대 나는 과매(寡昧)한 사람으로 간당들을 자르고 제거하니 떨리고 두려운 생각이 심히 깊으나 다행한 마음 또한 절실하다. 이에 금 7월 27일 새벽 이전의 강도와 절도 그리고 강상(綱常)죄인 이외에는 기결(旣決)이나 미결(未決)을 막론하고 모두 그 죄를 사해주는 것이니 감히 사면 교지가 내리기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를 다스릴 것이다.
아, 백성들은 거역함이 없고 부도(不道)한 죄는 이미 처결하였으니 뇌우(雷雨)가 인 다음에 풀리듯 마땅히 유신(維新)의 은혜를 흠뻑 받을지어다!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이 올린 축하의 글(賀箋)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거역의 뜻을 같이한 무리들이 어찌 감히 방자하게 배반으로 기울어 요망한 사건을 가탁(假託)하여 모반의 마음을 싸려고 사기(史記)에까지 전파하여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죄에까지 끌고 갈 수 있으리까? 노소 다 같이 분개하고 모든 백성이 원수로 여기니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하늘이 내리는 벌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벼락이 쳐서 숨은 죄악의 기운이 준동하는 것을 없애니․․․ 운운.
유자광(柳子光)이란 자는
경주 부윤(府尹)을 지낸 유규(柳規)의 서출 소생으로 몸이 민첩하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무뢰한(無賴漢)이 되어 도박으로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에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다가 여인을 만나면 낚아채어 폭행하곤 하였는데, 유규는 여러 차례 매를 때리고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처음에 갑사(甲士, 義興衛의 군사 : 주로 都城을 지킴)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경복궁의 동문)을 지키던 중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이 난의 평정군에 참가하겠다는 자천서(自薦書)를 올렸다. 세조는 기이하게 생각, 그를 불러 궁전 앞뜰에서 시험해 보았는데 마치 원숭이같이 재빨랐다. 결국 정벌에 종사하게 되었고 돌아와서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병조좌랑으로 보임되고 무과에도 으뜸으로 급제하였다.
예종(睿宗) 초에는 남이(南怡)장군을 무고하여 죽이고 그 공훈으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그는 항상 자칭 호걸이었으며 성품이 음흉한 도적 같은 해물(害物)로서 다른 사람이 재능이 있어 명망과 직위가 자기보다 뛰어나면 모든 흉계를 다 써서 중상하곤 하여 모든 사람들이 흘겨보았다. 성종이 간언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자광(子光)은 기회를 잡아 자기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 한명회(韓明澮)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상소문을 올려 논박하고 다시 임사홍(任士洪)과 더불어 현석규(玄錫圭)를 물리치기 위해 모의하다가 도로 패하여 동래(東萊)에 귀양을 갔다. 그 뒤 곧 방면되어 돌아와 은택(恩澤)을 엿보고 바라면서 있는 계교를 다 썼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항상 앙앙(怏怏)한 마음을 품고 있던 중 이극돈(李克墩)이 조정에서 권세를 잡는 것을 보고는 몸을 굽혀 거기에 붙었다.
그는 일찍이 함양을 유람할 때 시 한 수를 지어 그곳 군수에게 부탁, 목판에 새겨 벽에 걸게 한 바 있었는데, 나중에 점필재(佔畢齋) 선생이 군수로 가서 이를 보고 “자광이 어떤 물건인데 너 감히 현판을 달다니!”라고 하며 즉시 명하여 철거해 불살랐다. 이에 자광은 분함과 원한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점필재가 왕의 극진한 총애를 입어 바야흐로 우뚝 뛰어난 위치에 오르자 도리어 자광은 이에 아부하였다. 점필재가 돌아갔을 때만 해도 그는 조상(弔喪)하는 글을 지어 이르기를, 왕통(王通;隨나라의 대학자)과 한유(韓愈)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이극돈은 일찍이 권력을 농간하고 분당(分黨)을 하여 선생의 탄핵을 받은 바 있으며 또한
전라감사를 하고 있을 때 국상(貞憙王后喪)을 당하였는데도 향을 올리지 않고
기생을 태우고 행락한 비행을 선생이 책에 기록하였는데,
극돈이 삭제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은 일이 있었다.
성종실록』을 편수함에 이르러 극돈이 춘추관 감사(監事)가 되어 선생의
사초에 자기의 죄상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모두 알게 되었고 또 세조조의 정사편(政事編)에 「조의제문」이 수록된 것을 보고
이것으로써 자기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다. 어느 날 주위 사람을 모두 물리치고 사국(史局) 총재관(摠裁官)인 어세겸(魚世謙)에게 말하기를, “김모(金某)가 선왕을 거짓으로 헐뜯었는데 주상에게 알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글(史草)을 봉인하여 올려 임금의 재가를 받는 것이 우리들에게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어세겸은 크게 놀라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극돈은 곧 유자광과 모의했는데 자광은 팔을 걷어 올리며 “이 어찌 의심의 여지가 있는 일인가!”라고 하였다. 바로 그날 저녁 술을 가지고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등을 찾아가 술이 얼큰히 취했을 때 조용히 말을 꺼내어 세조로부터 입은 은혜는 죽어도 잊을 수 없다는 둥 하며 서로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감동하게 한 다음 그 일을 털어 놓으며 말하기를, “김모(金某)가 감히 선왕을 거짓으로 적어 악인으로 표현하고 저희는 곧 사람인 양 떨치려 했는데 신하 된 사람으로 이런 무도한 일을 보고도 어찌 덮어둘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세 사람은 과연 모두 그 말을 따랐다. 대체로 윤과 노는 세조의 총신(寵臣)이었고 한치형은 궁중과 인척으로 연결된 터라 반드시 따르리라 짐작되었다.
드디어 모두 함께 차비문(差備門)에 이르러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 꽤 오랫동안 귓속말을 한 다음 왕에게 아뢰었다. 처음에 신수근이 승지가 되려 할 때 대간(臺諫)과 시종신(侍從臣)들이 신수근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점차 권세를 얻어 세력 다툼할 염려가 있어 불가하다고 간하였는데, 수근이 원한을 품고 말하기를, “조정이 문신들 손안에 있는 물건인가! 우리들은 무엇을 하란 말이냐!” 라고 한 적이 있다.
이때를 당하여 원한을 품은 무리들이 모두 모였고 주상 또한 시기하고 난폭하며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문사(文士)들이 자기 마음대로 방종할 수 없게 구속한다고 미워했다. 늘 말하기를, “이름나기를 구하고 임금을 능멸하며 나로 하여금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자는 모두 이들 무리이다.”라고 하며 울적하고 즐겁지 않으며 한 번 시원하게 해치울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감히 하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영을 내려 남빈청(南賓廳)에서 국문하고 가두게 했다. 또 내시 김자원(金子猿)으로 하여금 출납을 관장하게 하고 여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옥사(獄事)를 자임하고 나서서 매양 자원이 전교를 받들고 올 때마다 반드시 나아가 맞으며 그 앞에 구부리고 아부하는 태도를 취했다. 만약 전교(傳敎)가 엄하게 처리하라고 하면 스스로 왕의 뜻을 얻은 듯이 기뻐하고 다시 부복하며 사례하였다.
퇴청한 후 싱글벙글 자부(自負)의 안색으로 좌중에 큰 소리로 “오늘은 조정을 고쳐 바로잡는 때이다. 모름지기 이와 같은 큰 처리가 있어야 할 것이니 보통 죄로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또 왕에게 아뢰기를, “이들 도당(徒黨)은 매우 번성하므로 방비를 엄중히 함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금위군(禁衛軍)을 뽑아 궁문을 파수 보게 하고 죄인이 국문에 나올 때에도 군사로 하여금 압송하도록 하였다. 또 치옥(治獄)이 조금이라도 해이하여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인을 학대하고 괴롭힐 방법을 모의하였다. 하루는 자기 소매 안에서 한권의 책, 즉 점필재(佔畢齋)의 문집을 꺼내어 그 안에 수록된 「조의제문(弔義帝文)」과「술주시(述酒詩)」를 국문하는 관원들에게 지적하여 보이면서, “이는 모두 세조를 지칭하여 지은 것이며 아무개의 죄악을 모두 종직(宗直)이 가르쳐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유자광은 스스로 구절 하나하나 주석을 달고 풀이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여 아뢰기를, “김종직은 우리 세조를 헐뜯고 흉보았으니 의당 대역(大逆)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글들이 널리 전파되는 것이 옳지 못하므로 그 문집들을 불살라 없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연산주(연산군)는 이 주청을 좇아 조익의 시문(詩文)을 가진 자는 3일 안에 각자가 스스로 가지고 와서 바치고 남빈청(南賓廳) 앞뜰에서 불사르며 각 도의 관(館)과 역(驛)의 현판에 실린 글들은 해당 관장으로 하여금 철훼하도록 하라 하고 명령하였다.
성종이 점필재에게 명하여 「환취정기(環翠亭記)」를 지어 문설주 위에 걸어놓은 현판까지 철거했는데, 이는 유자광이 함양의 원한을 갚고자 한 소치였다. 유자광은 이 기회를 타서 일망타진하려는 흉계를 도모하고자 윤필상(尹弼商) 등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악은 신하 된 사람으로 같이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이 무리들을 몽땅 뿌리째 파내어야 조정이 비로소 맑고 밝아 질 것이다. 만약 그러하지 못할진대 나머지 무리들이 다시 일어나 머지않아 화난(禍亂)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했다. 좌우의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는데, 노사신이 손을 저어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무령(武靈;子光의 封號)은 무엇 때문에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는가? 유독 그대만이 한말(漢末)의 당고(黨錮) 사건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선비들의 발붙일 곳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한나라가 멸망의 길을 가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이에 자광은 다소 움찔했으나 그래도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체포된 사람들은 꼭 추궁하여 다스리고자 했다. 노사신이 또 제지하며 말하기를, “사초(史草)에 간여하지 않은 지엽 말단의 사람들을 가두고 얽어맴이 날로 많아지는데 이는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지 않은가?”라고 했다. 자광은 불쾌해했다.
죄를 정하는 날에 이르러 노사신만이 동의하지 않는 논의를 폈다. 자광은 얼굴을 붉히며 힐난하였고 결국 하나하나 그의 뜻대로 보고되었다. 연산주는 자광의 논의를 좇아 7월 27일 종묘에 고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는 다 같이 능지처참, 이목, 허반, 강겸 등은 선왕의 없는 사실을 허위로 사초에 기록했다 하여 이목과 허반은 처참, 강겸은 공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최변방에 노예로 부처하고 표연말, 홍한, 정여창, 무풍부정 이총 등은 난언을 범한 죄로, 강경서 , 이수공, 정희양, 정승조 등은 난언을 알고서도 고발하지 않은 죄로 다 같이 곤장 100대에 삼천 리 밖으로 유배, 이종준 ,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강백진, 박한주, 임희재, 이계맹, 강혼 등은 다 같이 점필재의 문도로서 서로 칭찬하고 혹은 시정을 질타하는 논의를 한 죄로 임희재는 곤장 100대에 삼천리 밖 유배, 이주는 곤장 100대에 최변방 부처, 이종준, 이원, 김굉필, 최보,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다 같이 곤장 80대에 원방부처하되 모두 봉수대의 노지기역에 처하고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 조익정, 허침 등은 좌천시킨다.
그 뒤 살상이 뒤따라 시행되어 거의 끝나는데, 이날 낮에 그믐밤같이 어두워지더니 큰비가 쏟아지고 대풍이 동남에서 일어나 나무가 뽑히고 가옥이 무너졌으며 백성들은 엎드려 벌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유독 유자광만이 의기양양하여 귀가하였는데 조야의 사람들이 그를 독사(毒蛇) 보듯 하였다.
이후 학사(學舍)는 적막하였고 수개월 동안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식자들은 심히 한탄하여 말하기를, “무술의 옥사는 정류(正類)가 사당(邪黨;간사한 무리)을 쳤고(1478년 무술 5월 任元濬, 任士洪 및 柳子光을 귀양 보낸 사건), 무오의 옥사(1498년 7월)는 사당(邪黨)이 정류(正類)를 함락하여 20년 동안에 일승일패 하였는데, 다스림과 변란(變亂)이 이에 수반되었다. 대저 군자의 형벌운용은 항상 너그럽고 느슨한 데에 잘못이 있고 소인의 원한 갚음은 반드시 잔혹하게 멸함으로써 끝을 낸다. 만약 무술년의 옥사에서 군자들이 적용할 수 있는 법률을 다 운용했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 화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이상은 남곤(南袞)이 지은 「자광전(子光傳)」이다. 남곤은 「자광전」에서 자광의 죄악이 극진하였음을 남김없이 기록하였다. 남곤은 기묘사화 때 북문에서 고변(告變)하여 당시의 청류들을 일망타진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발자취는 유자광과 흡사하다. 이런 그가 스스로 「자광전」을 지어 자기의 죄악을 자기 스스로 기록하여 뭇 사람들로 하여금 일독(一讀)하게 한 한 꼴이 되었으니 팔을 걷어붙이고 발끈할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음인가. 이 전기(傳記)에 사화의 전말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지금 여기에 수록하는 바이다.
<1498년 7월> 경신(29일)[1] : 양주(楊州)의 석교원(양주 남쪽 50리)에 임시 장례를 지내다.
[1] 경신일은 26일이다. 앞의 글에서 날짜가 3일씩 밀리는 것으로 보아 29일 계해일이 될 것 같다.
선생과 정신적 교우 관계에 있던 박기수(朴期叟;兆年)가 선생이 옥에 갇히던 날 의금부 문 밖까지 와서 문안한 바 있었는데 처형당한 지금에 와서도 위기를 피하지 아니하고 선생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양주에 무덤을 만들었다.
1506년 병인 (중종 1년, 선생 사후 8년)
<1506년> 가을 9월 무인(2일) : 세원(洗寃 : 억울한 죄를 벗겨줌)과 관작(官爵)을 회복하는 교지 내리다.
이 무렵 동창공은 호남 남원의 적소(謫所;유배지)에 있었는데, 연산군의 정치가 어지러워 장차 사직이 위태할까 염려되어 유빈(柳濱;형조참판으로 갑자사화 때 역시 호남에 유배), 이과(李顆) 등과 모의하여 중종(中宗)을 추대하기로 하고 격문(檄文)을 서울에 전하였던 바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옥새를 잡으시고 천명(天命)을 받아 창업하심에 온갖 어려움과 고초를 겪으시었고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린 성지(聖智)로 덕치(德治)와 교화(敎化)를 훌륭하게 베푸시었으며, 성종(成宗)은 모범된 법을 세워 이를 일관되게 준수하시었고 스스로 절용(節用)하며 선비를 아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었으며, 또한 물자를 넉넉하게 하고 세상을 더욱더 평화롭게 하셨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뒤를 이은 군주가 황음멸덕(荒淫滅德)하고 포학무도하여 부왕(父王)의 후궁을 매질하여 죽이고 옹주와 왕자를 귀양 보내고 형벌로 죽이니 이에 누가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로다. 대간(臺諫)의 바른 말 하는 자를 귀양 보내고 목을 베며 직필(直筆)하는 사관(史官)을 능지처참하고 대신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해치고 부자 형제를 잡아 문초하는데, 심하게는 옛 중국 진나라의 연좌법(緣坐法)을 원용하는가 하면 스승과 벗과 문도들을 꾸며 엮은 죄로 일망타진하였으며 심지어 한(漢)나라 때부터 발굴이 금지되어 온 사람의 무덤에까지 화를 입히어 해골을 말라비틀어지게 하였다. 백성들의 가산을 몰수하고 어린아이까지 귀양 보내는 벌을 내렸으며 사람을 토막토막 베고 해골을 부수는 형벌이 이 무슨 형벌이란 말인가!
남의 처와 여식을 탈취하여 음욕을 자행하고 남의 살림집을 허물어 후원(後苑) 동산을 넓혔으며, 선왕의 능침(陵寢)은 여우와 산토끼들의 놀이마당이 다 되었고, 옛 성인의 사당은 개조하여 곰과 호랑이의 우리로 만들었으며 채청사(採靑使)의 발길이 마을마다 미쳤고, 취홍원(聚紅院;잡아온 미녀들을 수용한 곳)이 대각(臺閣;사헌부와 사간원)보다 존귀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부역을 빈번하게 일으켜 팔도의 지역이 피폐해졌도다. 또한 우편의 소통이 어긋난 채로 방치되고 있으며 어느 한 군데도 징험(徵驗)이 보이는 곳이 없어 재주 없는 백성들은 삶에 대한 애착을 잃었도다. 이 뿐만 아니라 종실의 부녀를 꾀어 은밀히 추잡한 짓을 행하는가 하면 형제들의 처첩을 핍박하여 서로 간통하게 하였다. 차마 할 수 없는 3년상 제도를 단축하게 하는가 하면 부모의 기제사 역시 모두 파(罷)하였으니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가 이미 무너지고 인도(人道)가 파멸되었도다.
그 외에도 토목역사(土木役事)는 가무와 여색을 즐기기 위한 대(臺)와 연못, 뱃놀이와 사냥놀이, 금수와 화석등을 완상(玩償)하는 데 필요한 공사에 집중되고 있도다. 이와 같이 모든 계통의 난정(亂政)은 갈피를 잡을 수 없으며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과 허물이 정사에 광범하게 충만하여졌으니 그 죄는 걸주(桀紂 : 폭군인 하의 걸왕과 은의 주왕)와 그 궤를 같이하도다. 살아 있는 백성들의 일시적 고통은 아직도 말로는 부족하다. 만에 하나 큰 간신이 보위를 엿보아 하루아침에 급거 봉기한다면 역성의 화(禍 ; 타성에 의한 왕위 찬탈)도 가히 염려되는 바이다. 생각건대 우리 성종께서 26년 재위하시는 동안 공경과 대부를 예로써 대접하시고 충의를 함양하신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진성대군(晋城大君)은 성종대왕의 적자로서 어질고 덕이 있어 내외의 촉망과 칭송을 받으시니 이는 천명이 따르심이라. 이에 모모(某某) 등은 모월 모일 의병을 일으켜 격서(檄書)를 각도에 이첩 날짜를 기약하여 서울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조정에 있는 공경과 여러 집사들은 속히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종사의 위기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운운.
이 격서(檄書)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박원종(朴元宗,1467~1510), 유순정(柳順汀,1459~1512), 성희안(成希顔,1461~1513) 등이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의 명을 받들어 연산(燕山)을 교동(喬桐;江華內)으로 추방하고 진성대군을 받들어 즉위하게 하니 이가 곧 중종대왕(中宗大王)이다. 중종은 폐정 혁신에 진력하였는데, 먼저 무오(戊午)의 억울한 사람들에게 죄를 씻어주고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그 자손들에게 녹을 주었다, 또한 귀양 간 사람들에게는 죄를 사해주고 귀환하게 하였으니 강경서(姜景叙,1443∼1510), 신용개(申用漑,1463~1519) 등이 이들이다.
<1506년> 동 10월 경오(24일)[1] : 목천(木川)의 작성산(鵲城山)에 개장(改葬)하다.
[1] 庚午는 25일임
처음 선생의 피체(被逮) 사실을 부인 김씨가 목천(木川)에 있으면서 듣고 울면서 10일 동안 식음을 끊었으나 죽지 않음에 할 수 없이 다시 음식을 들게 되었는데, 선생이 해를 당하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피눈물을 흘리다가 여러 차례 기절하곤 하였다. 3년 내내 베옷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곡제(哭祭)에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였다. 지나친 슬픔으로 몸이 쇠잔하고 피골이 상접하여 부축해야만 겨우 기동하게 되었다.
탈상하는 날 대유(大有)가 호남에서 당도하였는데, 부인(김일손의 부인 김씨)이 대유에게 말하기를,
“나는 자식이 없으니 원컨대 너의 아우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너의 계부(季父)의 제사를 받들게 해주기 바란다.”고 하고,
또 “내가 죽거든 꼭 나를 너의 계부 유해 옆에 묻어다오.”라고 하였다.
말을 다 마친 다음 통곡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자리에 바르게 눕더니 조용히 운명하였다.
아, 참으로 절개가 굳으시도다! 아, 애통하도다! 부인은 1470년 경인(성종 1년) 12월 25일 출생하여 1500년 경신(연산 6년) 7월 27일 졸하니 향년 31세였다. 장지는 현동(縣東) 15리의 동면 작성산(鵲城山) 시목동(柿木洞) 남향의 언덕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부인 묘 오른편에 선생의 유해를 이장(移葬)하였다. 천묘(遷墓) 때 남곤(南袞)이 만시(輓詩)를 지어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신이 견문이 없어 세상일에 캄캄함(茫昧)인가. 천도(天道)는 참으로 알기 어려워라. 좋아함과 미워함이 사람과 달라서 화복을 항상 어긋나게 베푸는고! 유구한 이 우주에 길거나 짧거나 그 수명 한가지로 멸망으로 탄식뿐일세. 어찌 알랴, 저승의 낙이 이승의 제왕자리와도 바꾸지 않을 만한지. 달관자(達觀者)는 아득히 먼 뜬구름이라 일소(一笑)에 붙이리라. 오직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이름 드날릴 사람은 그 나타남이 매양 더디고 더디어서 수백년 만에야 겨우 한번 얻어보게 되었는데 나타났어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지극히 잘 다스려질 날을 어찌 기약할 수 있으리오. 내 그대와 같은 시대를 더불어 하였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대의) 문장은 한서경(漢西京;前漢時代)의 문재(文才)요, (그대의) 인물됨은 송(宋)나라 풍희년간(豊熙年間)의 제현(諸賢;張橫渠, 程明道, 程伊川 등) 같도다.
크게 탄식하고 통곡하면서도 인(仁)에 당면하면 감연(敢然)히 행하였는데, 강권(絳權)의 무리들이 이를 갈며 곁에서 엿보더니 줄줄이 묶인 죄인(囊頭)이 되어 급거 동시(東市)에서 죽임을 당할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만사(萬事)가 왜 이리도 사리(事理)가 없는고. 동해가 넓고 가없듯 세상은 평정되고 법도 완화되어 선과 악이 스스로 가려졌는데 어찌하여 꽉 막힌 억울함을 아직도 크게 펴서 풀지 못하였는고. 춘추에 기휘(忌諱)하는 예(例)를 일으켜서 정공(定公)과 애공(哀公)에게 은밀한 뜻의 말이 많았도다. 성인(聖人)은 하늘과 한가지이니 후세에서 감히 좇을 수는 없으리라. 붓을 잡고들은 바를 적은 것은 사가(史家)의 떳떳한 규범이며 그 들은바가 옳고 그름이 있음은 일가(一家)의 사사로운 일이로다. 사초(史草)를 엮고 다듬기 위해 의당 사국(史局)을 열게 되며 거짓된 것이 있으면 사국(史局)에서 삭제함이 옳은 법인데 오직 뱃속에 칼이 있어서 억지로 머리털 밑의 흠집을 찾았도다. 어찌 원위(元魏)의 사람(옛 堯舜 治下의 都市人)이 장도규(張道逵)의 죄악을 나열한 것에 비하랴. 담당관원이 그 직무를 다하지 않음이 있으면 그 죄는 정녕 태형(笞刑)에 마땅하고 어질고 유능한 이에게 또 죄를 감하는 것은 팔의(八議 : 옛날 죄를 감면하는 여덟 가지 재판상의 恩典)에 법받을 바가 있는데 이 말을 가지고 구중(九重;임금을 일컬음)의 의심을 풀어준 이가 없었도다.
세성(歲星)이 일주(一周)하려(12년이 되려) 하는데 식자의 슬픔은 길이길이 맺히는구나. 비탈진 성(城) 동쪽 땅에 간신히 시신 덮여 있어 사랑하는 자질(子姪)이 터를 잡아 옮기기(移葬)를 도모했도다. 그대 지금 구천에서 내려다보시는가? 서로 탄식을 내쉬고 있는 이 광경을. 이미 까마귀와 솔개들의 노리는 바도 아니니 황차 여기와 저기를 물어 무엇하랴. 인간은 스스로 구구(區區)하게 세시(歲時)의 제사를 편하게 하기 위함이로다. 처량하도다. 목천현(木川縣) 가운데 굼틀거리는 산이 있으니 뒷날 지지(地誌)를 다시 편찬할 제 이묘의 기록 의당 빠짐없이 하리라.
남곤(南袞)은 기묘사화 때 원흉의 한사람인데도 지금 이 연보에 그의 시문 두 편을 수록하였다. 그 이유는 「자광전」은 무오사화의 사실을 소상하게 싣고 있어서 그것을 취함이요 천묘시(遷墓時)의 「만시(輓詩)」는 그 뜻이 너무도 절실(切實)한지라 그 글을 취함에 있다. 군자는 그 사람됨이야 어떠하든 그 주장하는 바가 이치에 맞으면 그 말을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논어』). 뒷날 이를 읽어보는 사람 가운데 혹 악인(惡人)의 글을 취한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이는 남곤이 젊었을 때 지은 것이다. 남곤은 문학적 소질이 있어 당시의 촉망을 받았었는데, 기묘 때 여러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이를 갈며 분개하다 마침내 망측한 화를 일으키고 즐기다가 만고의 흉인(凶人)이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전부터 나는 남곤의 처음과 나중은 서로 다른 두 사람 같다고 생각했었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의 왕안석(王安石)의 난을 두고 천하의 명도 선생(明道先生;程顥:程子) 은 우리도 그 과실의 일부를 마땅히 나누어 져야 된다고 했다. 기묘사화에 있어서도 나 또한 같은 말을 하고 싶다.
묘(廟)에 비로소 신주(神主)를 세우고 조카 대장(大壯)이 제사를 받들다.
선생이 사화로 돌아가신 이후 여태 신주(神主)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관작이 회복되고 개장(改葬)할 때 비로소 신주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대유(大有)가 동창공(東窓公)에게 아뢰어 둘째 아우 대장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니 이는 선생 부인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었다.
1507년 정묘 (중종 2년, 선생 사후 9년)
<1507년> 여름 5월 갑진(2일) : 가산환급(家産還給)의 교지 내리다.
濯纓先生年譜 下
탁영선생<김일손>연보 하(2/2)
1507년 정묘 (중종 2년, 선생 사후 9년)
<1507년> 여름 5월 갑진(2일) : 가산환급(家産還給)의 교지 내리다.
이 해 봄 어느 날 주상이 아침 강(講)에 임했을 때 영사(領事) 성희안(成希顔,1461~1513)이 아뢰기를, “무오사화 이후 사림(士林)은 아직까지 위구심(危懼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자형제 간에 서로 조심하라고 말을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추관(推官)은 모두 죽고 오직 신(臣)과 유자광(柳子光,1439∼1512)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일 신이 말씀 올리지 않으면 전하께서 어찌 아시겠습니까. 그 대강을 말씀드리면,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아직 유생일 때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이 이를 펴냄으로써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발달의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즉, 성종조(成宗朝)에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병조판서를 하고 있을 때 성준(成俊,1436~ 1504)을 북도 절도사(節度使)에 임명하였는데, 성준이 노하여 극돈의 아들 세경(世經)을 평사(評事)로 징소해갔습니다. 그 뒤 김일손이 헌납(獻納)을 하고 이주(李冑)가 정언(正言)을 하고 있을 때 상소하여 논박한 일이 있었는데 극돈과 준은 이 두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중상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 극돈이 춘추관 감사(監事) 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할 때 김종직의 글을 보고 그 사건을 발단시키려 했는데 어세겸(魚世謙,1430~1500)이 말하기를, ‘이 글을 다 믿을 수는 없다. 사초(史草)를 닦을 때 아울러 삭제함이 마땅하다. 사초 내용을 누설함은 불가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치형, 윤필상, 유자광 등은 그 말을 듣고 곧 주상에게 상달하여 옥사(獄事)를 일으켰습니다. 추관(推官)들은 종직의 문도들도 아울러 벌주려 했는데 유독 노사신(盧思愼,1427~1498)만이 반대하면서 한(漢)나라 때의 당고(黨錮)의 화와 같이 될까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오사건(戊午事件)의 대강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글자를(書契)를 만듦으로써 사학(史學)이 있게 되고 사학이 있음으로써 후세에 시비(是非)가 밝혀지고 시비가 밝혀짐으로써 천하 만세에 공론(公論)이 없어지지 않사옵니다. 옛날 우하(虞夏;堯舜帝의 국호)의 사기(史記)에 고수(瞽䏂 : 舜임금의 父)와 백곤(伯鯀 : 禹임금의 父)의 부끄러운 사실들을 기록하는 데 꺼리지 않았으며 상(商), 주(周)나라의 사기에는 걸주(桀紂)와 유여(幽厲)(모두 폭군과 망국 군주의 전형)의 사실을 꺼리지 않고 기록했고 위(衛)나라의 공자완(公子頑)의 음탕한 추태를 다스린 사실을 성인들은 경서에 밝히고 있습니다. 당나라에서는 여취(麗聚)의 난을 사씨(史氏)가 특별히 책에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기에 관한 일로 형벌을 받고 그 화가 후계자들에게까지 미쳤다는 전례는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삼가 생가하옵건대 아조의 역대 성상(聖上)께서는 사기(史記)를 계속하여 기록하시었고 사학(史學)을 매우 중히 여기시었는데, 폐조(연산조) 때 두세 사람의 간신이 임금으로 하여금 사학을 혐오하게 유도하여 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 대란의 뒤를 이으시어 폐조의 신법(新法)을 폐기하시고 조종(祖宗)의 구장(舊章;옛 법조문)을 회복하시어 죽은 사람들에게 관작을 봉하고 표창하시니 만백성이 매우 기뻐 서로 경하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종직 등의 일에서는 신 등은 남몰래 절통해하고 있습니다. 옛날 성종대왕께서 「조의제문」을 친히 읽어보시고 가상히 여기시며 혐오하지 않은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대신들이 도리어 사사로운 혐오심을 품고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분노를 부추겼습니다. 유자광이 두세 대신과 같이 모의하여 밀계(密啓)함으로써 결국 대역으로 처치하였는데, 이는 곧 그들의 허물을 엄폐하려는 음흉한 욕심에서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엄폐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널리 후세에 폭로하게 하였습니다. 그 누(累)는 선왕(成宗)에게까지 미쳤고 그 화는 갑자사화에까지 만연되어 선비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종사가 위태하게 기울고 국운이 중도에 끊어질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화의 근본인 간신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며 내려진 상은 도로 회수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심히 우려되는 것은 사가(史家)의 필법(筆法)이 이 일로 해서 모두 폐하여지고 만세의 공론이 민멸(泯滅)하여 전해지는 바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전하, 원하옵건대 과조(科條 : 법규, 명령 등의 조항)를 세우시어 상으로 하사하였던 가산을 속히 환수하여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시고 사법(史法)을 범하여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경중에 따라 형법을 바르게 집행하시며 사기(史記)일로 형벌을 받은 사람은 모두 봉작을 높여주어 공론의 법칙이 쾌유하게 하여주소서. 전하, 이러한 조치는 천고(千古)에 뛰어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에 정원(政院)과 대간(臺諫)에서도 서로 연이어 아뢰기를, “사기에 관한 일은 지극히 엄중하고 누설할 수 없습니다. 간사한 사람들이 안팎으로 누설하여 마침내 무오(戊午)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는 마땅히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대신 박원종 등도 또한 아뢰기를, “김종직 등에 대하여 당시 정당한 법률 조항을 찾을 수 없었는데도 반역으로 논의한 것은 참으로 과중한 처사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곧 명하기를, “글로 해서 죄를 입은 사람들의 관작을 회복하고 이극돈의 관작을 추탈(당시 이미 죽었음)하라.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강겸 등에게는 가산을 다시 돌려주고 추관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유자광 등에게 상으로 내렸던 전답과 종복을 모두 환수하라.”하였다.
그 이듬해(戊辰年)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교대로 글을 올려 유자광의 죄악을 탄핵함으로써 그는 훈작이 삭탈되고 호남에 귀양가서 죽었다.
유자광은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을 많이 해쳐 죽였다. 중종반정 때에도 많은 일에 관여하고 모의에 참여하여 논공행상할 때 사람을 보내 밝혀 부자(父子)가 나란히 유공자로 책봉되었다. 생각건대 이는 박원종 등이 유자광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삼사(三司)에서 그의 죄악을 탄핵하였는데 자광은 원종을 찾아가 떨면서 말하기를, “나와 공은 다 같이 바른 무인(武人)인데 입술이 망하면 이빨이 시리게 마련(唇亡則齒) 아니오.”라고 하였다. 이에 원종이 웃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를 간 지 오래요. 공이 좀 더 빨리 물러가지 않음이 한 될 뿐이오.”라고 했다. 자광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이날 자광은 총부(摠府) 청사에 입직(入直)하려고 나가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부채를 찾아 쥐고 보니 부채 면에 가는 글씨로 ‘기화입지(奇禍立至 : 기이한 화가 곧 다다른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잠시 후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관리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대간에서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했다.
마침내 그는 호남에 귀양 가 두 눈이 완전히 멀어 몇 년 살다가 죽었다. 이때 그의 아들 유진(柳軫)과 유방(柳房) 모두 북도에 귀양 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돌아와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유진은 슬픔을 잊은 채 여색을 가까이 하고 거상(居喪)에 임하지 않았으며, 유방 역시 손님을 상대로 술을 마시는가 하면 병을 칭탁하고 달려와 상을 치르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는 그들을 논죄하여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다.
○ 1508년 무진 (중종 3년, 선생 사후 10년)
<1508년> 가을 8월 병자(11일) : 수야산 술좌의 언덕에 반장(返葬)하다.
장지는 선영(先兆)의 동편 언덕이다. 선생의 구묘(舊墓) 비석에는 ‘濯纓先生金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는데, 지금 부인의 묘소를 같이 옮길 수 없으므로 인하여 그 비석을 부인 묘 앞에다 세워두었다.
○ 1512 임신 (중종 7년, 선생 사후 14년)
<1512년> 가을 9월 계축[1] : 통훈대부 홍문관 직제학 겸 예문관 응교, 경연 시독관, 춘추관 편수관으로 증직하는 교지 내리다.
[1]1512년은 5월에 윤달이 들어 있으며 이를 감안하더라도 癸丑은 10월 13일에 해당
이에 앞서 주상이 경연(經筵)에 임했을 때 지사(知事) 신용개가 주청하기를, “근래에 사관의 직필이 김일손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무오 이후 사필이 공변되지 못합니다. 청하옵건대 증직으로 포상하시어 사필을 잡은 신하들을 격려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하교하기를, “사관은 직필하여 천년 후세에까지 전함으로써 임금과 신하가 그 사실(史實)을 통하여 권장 또는 경계할 바를 스스로 헤아리도록 하라. 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은 모두 직필하여 그것을 경계하였다. 사필을 잡고 쓰는 사람에게 이르노니 무릇 임금의 선악과 신하의 충간을 직필하지 아니하고 허위, 은폐 또는 기피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고 마침내 이 증직 교지를 내렸다.
<1512년> 겨울 10월 임오(11월 12일에 해당) : 유문(遺文)을 구하는 교지를 내리다.
주상이 경연의 신하들과 동인(東人;조선)의 시문(詩文)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중국 사람으로부터 김일손의 글이 당나라 한유(韓愈)의 글과 비견된다고 들었는데 내 아직 보지를 못했다. 과연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참찬관 조원기(趙元紀;趙光祖의 叔父)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비단 그 문장뿐만 아니고 글의 사상 또한 애독할 만하며 그 사람됨과 학문, 그리고 절행은 일대의 명류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즉시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그의 가정에서 유고(遺稿)를 구하라 하였다. 그러나 사화 이후 거의 전부 산실(散失)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겨우 천백(千百)에 하나 둘 정도였다.
○ 1518년 무인 (중종 13년, 선생 사후 20년)
<1518년> 봄 2월 경진(11일) : 자손을 등용하는 교지 내리다.
주상이 아침 강(講)에 임했을 때 당고(黨錮)에 관하여 말이 미치자 부제학 조광조(祖光祖)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한나라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 조정에 공론이 없는 까닭으로 환관(宦官)들이 그 기회를 타서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난세(亂世)때뿐만 아니었습니다. 송나라 인종(仁宗)은 어진 임금이었는데도 사마광(司馬光) 등이 오히려 당인(黨人)이란 명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대개 예로부터 소인들이 군자를 배척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당(黨)’자로서 죄를 엮은 다음 다른 사람과 임금이 믿어 행하도록 하는 것이 술책이었습니다. 아조의 성종(成宗)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시어 한때 착한 선비들이 요순의 치세가 가히 다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극진한 간언에도 꺼리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세도를 휘두르는 흉험(凶險)한 대신들은 분하고 답답한 심정을 은밀히 품고 있다가 연산주(燕山主)를 만나게 됨에 그동안 쌓였던 한을 모두 풀었습니다. 어진 사람과 착한 선비는 한 사람 남김없이 무오(戊午)와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 다 없앴습니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소인들이 군자들을 풀 베듯 베어 없앴습니다만 종내 그들 역시 일신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대접이 돌고 도는가 봅니다. 옛사람의 말에 ‘죄를 씌우려 들면 무슨 화근인들 꾸며댈 말이 없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이승건(李承健,1452∼1502)이 한림을 하고 있을 때 김종직, 김일손 등을 시기하여 국사에 ‘남쪽 사람들이 스승과 제자들 서로가 칭찬하고 밀어주어 스스로 일당을 꾸몄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극돈이 항상 말하기를 ‘언젠가는 내손에 직필이 들어올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후 아무개의 문도들은 나란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직필로서 기사(記事)함은 사신(史臣)의 직분이옵니다. 무오의 변은 옛날까지 더듬어 올라가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써 김일손은 이 변에서 으뜸으로 참화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현저한 증작으로서 항천(黃泉)의 원혼을 위로한 바 없습니다. 사림의 소망에 부응하여 봉작을 더해주시기 청하나이다.”라고 했다.
이에 주상은 “이미 직제학(直提學)으로 증직하였다.” 하고 이어서 “자식이 있는가?” 물음에 광조(光祖)가 자식이 없어 조카 대장(大壯)으로 계자(繼子)하였다고 아뢰니 주상은 선능(宣陵) 참봉 자리를 비우고 거기에 그를 등용하라 명하였다.
<1518년> 여름 4월 경술(5월12일에 해당) : 청도의 유생들이 자계사(紫溪祠)를 세우다.
본군(本郡)의 사림이 선생의 유풍을 흠모하여 선생의 옛집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사우(祠宇)로 쓰기로 하고 이름을 ‘자계사(紫溪祠)’라 하였다.
이 이름은 선생이 화를 입을 때 앞 시냇물이 혈류(血流)로 바뀐 이변이 있었는데 거기서 취한 것이다.
○ 1519년 기묘 (중종 14년, 선생 사후 21년)
<1519년> 봄 2월 을사(3월12일에 해당) : 문집(文集)을 간행하게 되다.
대유(大有)가 선생의 유고를 찾아 모았는데 몇 권을 얻어 본사(本祠)에 주어 침간(鋟刊 : 목판에 새겨 발간하는 일)을 시작했다.
관찰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넉넉하게 출연(出捐)하여 이 일을 도왔고 또 서문을 지었다.
○ 1548년 무신 (명종 3년, 선생 사후 50년)
<1548년>봄 1월 신축(24일) : 연보 초본을 완성하다.
대유는 선생의 수필일기에 따르고 견문한 바를 참고하여 선생연보를 편찬하였다. 지금까지 위에 적은 것이 바로 나의 돌아가신 계부 탁영 선생의 연보이다.
선생은 세상에 드문 재주를 타고나시어 점옹문(佔翁門)에서 교유하면서 성리학의 연원을 힘써 탐구하시었으며 문장 영역에서는 뛰어나셨다. 한훤(寒暄,김굉필1454∼1504), 일두(一蠹,정여창1450∼1504, 주계(朱溪,이심원1454∼1504)와는 도의(道義)의 교유를 하였으며 재사(再思,이원?∼1504, 망헌(忘軒,이주1468∼1504)과는 문장(文章)의 교유, 동봉(東峰,김시습1435∼1493, 추강(秋江,남효온(1454~1492), 안정(安亭,?), 조총(蓧叢,?)과는 산림(山林)의 교유, 무풍(茂豊,이총?~1504), 수천(秀泉,이정은?)과는 음률(音律)의 교유를 하시었는데, 이러한 교유하신 바를 보면 가희 선생의 대략을 알 수 있다.
선생은 호탕하고 영매(英邁)하며 뜻이 크고 기개가 있는 성격과 도량을 타고나셨고 강직하고 정직하며 대범하고 고고한 천품을 타고나시어 재상의 그릇(公輔之器)이었고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經世濟民)할 지혜를 품고 계신 분이었다.
이른 연세에 입신양명할 즈음 성종(成宗)을 만나 세상의 도의를 회복하고 요순의 반열에 오르게 하려고 기약하셨다. 입조하여 정색을 하고 극언을 다하심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는데 한편으로 간사한 무리들은 눈을 흘기고 기회를 엿보며 벼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불행히도 나라의 운수가 중도에 막혀 기강이 풀어지니 홀연히 기회를 타고 두세 간흉이 사초 일로 변란을 일으켰고 그 화는 하늘에 사무치어 어진 이와 뜻있는 선비들의 통분을 더욱 오래, 더욱 깊게 하였다. 아, 애석하도다! 아, 애통하도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초기에 맨 먼저 모함으로 입은 원통함이 씻어지고 곧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중직이 더하여졌다. 또 이때 묘(廟)에 향사(享祀)하게 되었다. 선생의 도학과 문장, 기절과 행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에 해와 별과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다.
불초 또한 선생의 일로 연좌되어 호남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겨우 풀려났고 또 누차의 사화(士禍)로 두문불출, 숨어 산 지 40여 년, 이제 이미 늙었고 곧 죽을 것인즉 선생의 실적(實蹟)이 없어져 후세에 전하지 못할까 오직 이것이 걱정일 뿐이다. 그래서 사화 때 불타고 남은 선생의 수필일기를 수습하여 이를 취하고 힘 미치는 데까지 견문한 바를 참고로 약간의 부분은 다듬어 기술하여 편년체로 연보를 완성하였다.
이제 이를 동생에게 주어 상자에 간직하였다가 훗날 의견을 세상에 발표할 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릴 뿐이다.
1548년 무신(명종 3년) 죽취일(竹醉日;음력 5월 13일) 종자(從子) 대유가가 운문의 우연정사(愚淵精舍)에서 삼가 기록하노라.
○ 1578년 무인 (선조 11년)
<1578년> 가을 : 자계사(紫溪祠)를 서원(書院)으로 하다.
본군 유림에서 사우(祠宇) 중수를 계기로 그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으로 세웠다.
○ 1608년 무신 (선조 41년)
<1608년> 춘 : 자계서원(紫溪書院) 중건(重建)하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훼손된 후 지금에 이르러 사림(士林)에서 의논을 모아 중건하게 되었다. 1615년 을묘(광해군 7년)에 절효공과 삼족당 두 선생도 함께 향사하게 되었다. <상향축문(常享祝文)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찬하였다.>⇒추록
○ 1660년 경자 (현종 1년)
<1660년> 봄 2월 : 경상도 유생 이광정(李光鼎) 등이 서원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를 올리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당시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유생들의 상소에 인하여 경연에서 주청하기를, “선생의 도학과 문장, 정충과 직절이 일세의 으뜸이었는데 연산(燕山)을 만나 참혹한 사화를 입었습니다. 원액(院額)을 내리시어 사림을 교화함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라고 했다. 주상이 대답하기를, “이미 해당 조(曹)에 명하여 조처를 품신하라 하였으니 회계(回啓)를 기다려 시행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1660년> 여름 6월 : 예조에서 사액(賜額)을 청하는 회계(回啓)를 올려 주상의 윤허를 바다.
판서 송준길(宋浚吉), 참판 윤강(尹絳,1597-1667), 참의 조복양(趙復陽,1609~1671), 정랑 김수흥(金壽興,1626∼1690) 등이 회계(回啓)를 올렸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삼현(三賢)의 실행(實行)과 명절(名節)에 대하여 나는 존경하고 추앙하는바 특별히 사액(賜額)을 베푸노라.”라고 하였다.
○1661년 신축 (현종 2년)
<1661년> 여름 4월 : 특별히 명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에 증직하고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사액(賜額)하고 승지(承旨)를 보내 사제(賜祭)하다.
대제학이 액호(額號)를 자계(紫溪)로 상신하니 왕은 지제교 공조참의 이은상(李殷相)으로 하여금 유문(侑文)을 짓게 하고 승지 홍처량(洪處亮)을 보내어 향사하게 하다.
○1664년 갑진(현종 5년)
<1664년> 봄 3월 : 목천 죽림사(竹林祠)에 배향(配享)하다.
사당은 현동(縣東) 일원(一遠) 동쪽의 번곡(磻谷)에 있다. 처음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번곡에서 ‘죽림(竹林)’ 두 자가 새겨진 석각(石刻)을 발견하였는데, 주자의 정사 이름과 같음을 알고 거기에 사당을 세워 주(朱)선생을 향사(享祀)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학자들이 선생께서 『소학집설(小學集說)』 간행과 강목교정(綱目校正) 등 사문(斯文;儒敎文化)에 끼친 공이 크고 또한 그곳이 관직을 사직하였을 때 휴식하던 곳임을 알고 마침내 같이 받들어 향사(享祀)하게 된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토착 인사들이 전하는 바로는 사당을 세운 곳은 선생이 거처하던 죽림정사(竹林精舍)의 옛터이고 석각의 두 글자 역시 선생이 쓴 것이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강(寒岡)이 사당을 세운 것은 다만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옛 이름과 우연히 합치한 것만 알고 선생이 주자(朱子)를 의탁하고 추앙하여 생긴 유적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또한 배향하게 되었을 때도 다만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것만 알았지 선생이 주자(朱子)를 으뜸 스승으로 추앙한 본의는 널리 밝혀져 전해지지 못했다. 문헌을 없애고 징표가 없는 마당에 선생의 사실(事實)이 어찌 민몰(泯沒)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겠는가?
그러나 사당의 건립이 이제 이루어졌고 배향 또한 이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필연을 있게 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선생의 도가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타남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1668년 무신 (현종 9년)
<1668년> 여름 5월 : 문집(文集)을 중간(重刊)하다.
선생의 문집 간행본이 오래되고 많이 닳아서 관원과 유생들이 함께 의론을 모아 중간하였는데 그 서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이 썼다.
1676년 병진 (숙종 2년)
<1676년> 봄 : 충청도 유생들이 죽림사(竹林祠)에 사액(賜額)토록 상소하여 윤허 받다.
본 현 유생들이 향현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공과 후천(朽淺) 황종해(黃宗海,1579~1642)공을 추가로 배향하고 곧 청액의 소를 올렸다.
<1676년> 가을 : ‘도동서원(道東書院)’ 이란 현판이 하사되고 승지가 파견되어 향사(享祀)하다.
○ 1725년 을사 (영조 1년)
<1725년> 가을 9월 : 신도비명 완성하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8)선생이 본 군 군수로 있으면서 사림과 의논하여 비석을 새겨 묘도(墓道)에 세우기로 했다. 비명은 예조참판 포암(圃菴) 윤봉조(尹鳳朝,1680∼1761)가 찬하고 홍문관 부제학 퇴어당(退漁堂) 김진상(金鎭商,1684∼1755)이 쓰고 본도 관찰사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1691∼1767)가 전(篆)하였다.
○ 1830년 경인 (순조 30년)
<1830년> 봄 2월 : 경상도 유생 김상윤(金相閏) 등이 선생과 절효공, 삼족당 양 선생의 시호(諡號)를 소청하였으나 관철하지 못하다.
<1830년> 가을 8월 : 삼도(三道)의 유생 이준(李浚) 등이 세분 선생의 증시(贈諡)를 소청하였는데 주상은 이조(吏曹)에 조처를 품신하라 명하였다.
<1830년> 9월 : 이조에서 회계(回啓) 올리기를 대신회의에서 의결하도록 주청하였다. 판서 서능보(徐能輔,1769∼1835)가 윤허를 받다.
<1830년> 겨울 11월 : 대신들이 의논한 결과 선생의 증작과 증시를 먼저 하도록 건의, 윤허를 받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1760~1840), 좌의정 이상황(李相璜,1763∼1841), 우의정 정만석(鄭晩錫,1758∼1834)이 증작을 더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또 탁영선생을 먼저 시행함이 마땅하다는 의견도 같이 계진하여 윤허를 받았다.
<1830년>12월 :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춘추관 및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세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으로 증직되다.
○ 1834년 갑오 (순조 34년)
<1834년> 여름 6월 : ‘문민(文愍)’으로 시호(諡號)를 내리다.
‘견문이 깊고 넓으심에 일컬어 文이요 백성들로 하여금 슬프고 상심하게 하였으니 일컬어 愍이다).’ 이 시호는 규장각 전 직제학을 한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1782~1850)이 지었다. 태상(太常;제사와 諡號 일을 맡은 관청)에서는 문민(文愍), 문간(文簡), 문정(文貞) 3개안을 의논하여 이조에 보고하였고, 이조에서 결국 임금으로부터 문민(文愍)으로 낙점을 받았다.
○ 1835년 을미(헌종 1년)
<1835년> 여름 5월 : 선생 시호(諡號)를 배수하다. 주상은 예관으로 정랑(正郞) 장용팔(張龍八)을 파견 하여 시호를 내리고 제를 지내게 하였다.
○ 1838년 무술(헌종 4년)
<1838년> 봄 1월 : 문집 중간을 완성하다.
무진년(1808년)에 후손인 은(垽)이 선생 문집 구본에 누락된 글이 있어 족손(族孫) 재옥(再玉)으로 하여금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 선생에게 보내 빠진 글을 보태어 넣고 편집(編輯) 차례도 교정하게 하였다. 또 정해년(1827년)에 영남관찰사인 운석 조인영(趙寅永, 1782~1850)에게 발문을 청하여 받아 간행을 시작하였다.
○ 1872년 임신(고종 9년)
<1872년> 겨울 10월 : 정부인 김씨(金氏) 묘를 반장(返葬)하여 개수하다.
정부인 묘는 목천 작성산(鵲城山)에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수야산 선생 묘 오른편에 이장하였는데 지형에 따른 것이었다.
<翌年竪碣 : 그 이듬해에 비석을 세웠다.>⇒追錄
○ 1874년 갑술 (고종 11년)
<1874년> 여름 6월에 새로 간행하는 연보가 완성되었다. 선생의 연보는 집안에서 보관해 온지 300여년이 지났건만 비로소 활자를 사용하여 간행하니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참고 : ⇒변경 추록된 내용
여름 4월, 선생의 연보가 처음 나타난 지 300년 후에 서울에서 먼저 간행하였다.
가을 7월 17일 선생의 전부인인 안인우씨를 정부인(貞夫人)에 증직하기를 청하였다.
겨울 11월 본 군의 사림들이 자계사에 모여 교정하고 다시 간행하였다.
<年譜跋>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 연보발문)(1)
아! 탁영선생의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충성과(精忠) 위대한 절개는 우주와 하늘의 빛을 지탱하기에 충분함이 있다. 사림이 목이 메이고 눈물을 흘리는 한을 경험한 지가 수백년이 지났다. 일찍이 나의 선조이신 공숙공(趙益貞, 1436∼1498)이 선생과 같은 스승을 모셔서 곤란함을 겪으신 일을 생각하니 더욱이 비참하고 애절하며 그리움이 더해진다.
아! 선생의 행적이 역사에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남겨진 글이나 사적이 사화의 여파로 백가지 중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다행히 삼족당공이 저술한 연보가 비로소 지금 나타나 선생의 일에 대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후손들이 의논하여 장차 인쇄하기로 하고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아! 선생은 하늘로부터 받은 빼어난 귀인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재주로서 학문을 꾀하고 근본이 있고 축적된 풍부한 재주로 세상이 밝을 때는 나라안에 펼치고 떨쳤다. 화가 하늘에 까지 흘러넘쳤을 때의 붉은 글은 이미 치욕을 벗었으며 이에 더하여 시호를 내리고 또 사당에 배향하고 조정에서는 은덕을 갚았으니 서운함은 없어졌다 할 것이다.
그리고 반포된 현판의 글에는 임금의 칭찬이 빛나고 있고 전후의 선비들의 훌륭한 글들이 해와 별과 같이 많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군더더기 같은 말을 덧붙이겠는가마는 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살며시 나타내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중양(2월) 후학 풍양 조성하[1]근발
[1]趙成夏; 1845(헌종 11)∼1881(고종 18). 조선 말기의 문신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 연보발문)(2)
탁영선생은 나의 선조 재사당공(李黿, ?∼1504)과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었고 점필재(김종직) 문하에서 같이 수학하셨으며 무오의 화 또한 같이 입으셨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화의 참상은 원통하고 슬프고 분하기가 더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하물며 영원히 우호관계를 강구해야 할 양가의 후예로서야 그 슬픔이 어떠하겠는가?
아! 선생의 도학은 순수하고 문장은 웅장하고 넓으며(宏博) 언론은 정대하고 식견이 고명하셨음은 유명한 분들의 저술에서 대강 볼 수 있다. 추강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쓰기를 “세상에 드문 재사(才士)요 재상의 그릇(廟堂之器)”이라 했으며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살았을 때에는 서릿발보다 매서운 절개가 있었고 사후에는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있었다.” 라고 했다. 또한 중국 사람들은 동국의 창려(韓藰, 768~824, 당나라의 문인)라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지난 일인데 다시 군말을 붙여 무엇 하겠는가.
선생은 유집을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 몇 편에 그치었는데, 그 간 병화를 겪고 남은 것이라고는 등림(중국 襄陽縣의 큰 숲)의 나무한가지(一枝)요 곤산(곤륜산, 중국 북쪽의 산)의 한 조각 옥이라고나 할까? 거의 없었다. 소릉(昭陵, 문종의 정비, 단종의 생모)의 복위를 청하는 세 번의 상소는 가히 천지의 도리를 바로 세우고 일월과 다투어 빛날 일인데 만약 유집과 같이 연보에도 누락되었다면 아주 묻히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최근에 그의 후손인 진형(晋炯)의 집에서 보관해 오던 연보가 나옴으로써 세 번의 상소를 찾게 되었는데, 이는 곧 선생 조카 삼족당공이 손수 편집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는 실로 선생의 정치행적 본말의 일부로서 (그 내용이) 도타우면서도 간명하다.
다만 세대가 점차 멀어지고 후손들이 가난해져서 이 연보를 오늘날까지 보유만 하고 있었다. 만약 선조들의 음덕이 있다면 선생의 곧은 소리(直聲)와 의롭고 장렬함(義烈)은 후세에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참으로 훌륭하시도다.
연보를 삼가 살펴보니 중종반정 후 억울한 죄를 씻어 주시고 작위를 복권하여 주시며 주상이 묻기를 “김모(김일손)는 사자(嗣子)가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니 조정암(趙靜菴;조광조)이 대답하기를 “김모는 후사가 없어서 조카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봉사케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해다. 임금은 곧 특명을 내려 침낭(寢郎:능원관리 관원)으로 등용케 하였고 인하여 고을 수장(守長)까지 하시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옛 임금(先朝)의 포상과 은총은 매우 혁혁하였다.
순조 경인년(1830년)에 시호를 내려달라는 상소를 다시 올릴 때 후사를 정하고 관직을 내려 줄 것을 아울러 주청했는데, 이는 당시 연보가 출현하지 않았고 또 사실을 깊이 상고하여 밝히지 않은 이유이었다.
이제 여기 가승(가문의 역사)이 있어서 사실의 징표로써 족하고 여러 자료를 비교하여 살핌으로써 원집(文集)도 또한 누락된 것을 보완하고 틀린 곳을 정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한 집안의 사사로운 소장(所藏)의 공이 적지 않다 하겠다. 내 곰곰이 생각하니 이는 선생을 위해 다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문(斯文:유교계)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본손 창윤(昌潤)씨가 급히 인쇄를 의논하고 나에게 발문을 요청하여 왔는데, 서투른 글임에도 감히 사양하지 아니한 것은 이 연보에 의탁하고 참여하는 것이 다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월성 후학 이용우 근발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연보발) (3)
무오의 화는 차마 말 못할 일이다. 탁영 김선생은 점필재의 제자(高弟)로서 도학과 문장이 일세의 으뜸이셨고 국사를 관장하는 직무에 있어서는 오직 직필로써 올바르게 밝히시어 불충한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였으니 우리 도(道:유교)가 힘을 입고 어려움을 견디며 유지(扶持)되었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큰 화가 가득히 흘러넘쳐 선생이 첫 번째로 동시(東市)의 참화를 입으시고, 당시의 이름나고 덕있는 선비(名賢碩德)들이 연이어 처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으며, 학사(學舍)는 쓸쓸하여졌고 선비들의 사기는 허물어 졌었다. 지금에 와서도 이 말을 하는 사람은 화가 치밀어 간담이 떨기고 머리끝이 선다.
아! 선생은 하늘이 내린 정기를 타고나시어 일찍이 대가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으시고 한훤(寒喧;김굉필, 1454~1504), 일두(一蠹;정여창, 1450∼1504) 등 선배[1] 선생과 더불어 의기를 같이하고 도를 함께 하시어 천년동안 한번도 없던 좋은 인연(계통)을 얻으시었다. 그의 거동은 법도에 합치하고 발언은 문장을 이루며 조정에 들어가서는(立朝) 이치에 맞게 직언하시어 권세있고 지위높은 사람들의 반대를 피하지 않으시었다. 그리하여 이극돈(李克墩;1435∼1503) 무리들의 모함에 빠져 하늘에 닿을 거목이 한번 찍어 넘어지는바 되고 말았으니, 이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지는 것을 하늘이 원하지 않으심인가! 선생의 조기 등용(登庸)이 다행이 아니라 정말 불행일 뿐이었다.
[1]김일손의 생몰은 1464~1498
선생의 조카 삼족당공(김대유)이 선생의 연보 한권을 지어 보관하여 선생의 사우(師友)관계의 근원과 조정에 들어가서(立朝) 주청하고 상소를 올린일, 가정 안에서의 효도와 우애 등 아름다음 말과 선한 행동이 두루 실리지 않은 것이 없으니 문집과 더불어 더욱 소상하게 갖추어졌다.
그 가운데 중종 때에 정암(靜菴;조광조, 1482∼1519)선생이 건의하여 사자(嗣子;김대장)에게 선능랑(宣陵郎;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을 지키는 관직)으로 임명한 것은 높은 충성심과 곧은 절의에 대한 보답으로써 이는 도를 지키려는 후세의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되고, 큰 화를 겪으면서 문자를 두렵게 생각하고 자손들이 여러 곳에(江湖) 흩어져 몰락한 상황을 일신하려는 조치였다. 공의(公議)를 회복하고 더렵혀진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있어서 조선생과 같은 분은 다시는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300여년이 되었으나 그 당시와 같은 사람 한 사람 나오지 않았으며 세상의 도덕 또한 상하할 것 없이 개탄스러운 지경이다.
재주 없어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 하루는 반저(泮邸;성균관)로 선생 후손 창윤(昌潤)씨가 천리 길을 달려와 문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족당공이 손수 기록하신 연보인데 지금에야 비로소 춘천에 사는 조카뻘인 진형(晋炯)의 집에서 보관하던 것이 출현되었으니 참으로 천행이다. 이에 명공대인의 좋은 말씀을 얻으려 하니 생각하건대 이 계획은 길이 빛날 일이요 한훤당(寒喧堂)을 조상으로 모신 사람이 이 일에 한 말씀 없을 수 없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또 그대만한 사람이 없다. 어찌 끄트머리에 한 말씀 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두 손 받들어 읽고는 사양할 수가 없어 내가 말하기를 “선생의 행적이 여기에 빠짐없이 수록되었으니 삼족당공의 공이 매우 크다. 그대의 가문이 발전하는데 이 서책이 한 계기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문집의 예가 연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책을 펴내야 할 첫째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하루속히 간행을 도모하여 온 세상에 공포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서흥 후학 김석보 근발
濯纓先生年譜後叙(탁영선생연보 후서) (1)
나는 일찍이 탁영선생의 유집(遺集)을 읽고 한 되는 점 두 가지와 의문되는 점이 또 두 가지 있었다. 소릉복위(昭陵復位)에 대한 첫 번째 상소는 선생의 대절을 온 조야에 보여 준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장릉지(莊陵誌) 중에 실려 있어 그 행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소장의 본문이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한이 되고 48영(詠;시)은 성종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갱진(賡進 : 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지어 올리는 것)한 것인데, 지금은 다만 그 발문만 수록되어 있고 시는 다 볼 수 없으니 이 또한 한 되는 일이다.
선생이 당한 참화는 대체로 조의제문을 기록했기 때문인데 이는 점필재(佔畢齋;김종직,1431~1492)선생이 가난한 선비시절(韋布)에 지은 것이다. 한데 선생이 비록 국사를 관장하고 계셨지만 무슨 까닭으로 이 글을 국사에 실었는지? 현명한 선비가 그렇게 한 것에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었을 것이나 감히 알 수가 없다.
또 선생은 비록 혈윤(血胤:낳은 아들)은 없으나 형님인 직제학공(김준손)이 네 사람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삼족당공(김대유)이 어질고 집안일을 주관하였으니 어찌 차마 선생의 제사를 받들게 하지 아니 했겠는가? 그런데 신도비와 문집서문에 다 같이 후사가 없음을 한탄하는 글이 있으니 이 또한 의문스러운 점이었다. 나는 이 네 가지 문제를 가지고 의아해한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 일이 있어서 서울에 체재하고 있을 때, 유교의 선비(斯文)인 김천익(金天翼)이 그의 종친인 청도의 창윤(昌潤)씨와 춘천의 진형씨(晋炯)와 같이 반사(泮舍;성균관)로 나를 찾아와 소매속의 한 책자를 보이면서 “이것은 우리 탁영선조의 연보이다. 장차 인쇄하러 보낼까 하는데 그대의 한 말씀을 얻고자 한다.” 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묻기를 “선생의 연보가 어디에 있었기에 지금에야 말하는가!” 라고 했더니 창윤씨가 진형씨를 가리키며 “나와 이 종친은 탁영을 조상으로 모시는데 지금까지 10여 세대가 지나도록 서로를 알지 못했다. 이 유묵(遺墨)은 저 사람(진형)이 소장하고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얻어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우리 일가가 쇠잔한 탓이다. 불초등이 남몰래 슬픔과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비용이 얼마나 들든지 간행하여 배포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진형씨가 오래된 그 낡은 상자가 전해진 유래를 자세히 말하면서 구본(舊本)을 꺼내 보이는데 과연 먼지가 앉고 좀이 친 고책(古冊)이다. 나는 미처 사양하지 않고 급하게 한번 얻어서 받들어 보니, 선생의 조카 삼족당공이 선생의 일기를 기본으로 하고 보고들은 바를 참고하여 손수 간단하게 기록한 것이다. 선생의 처음부터 끝가지의 여러 가지 일들이 두루 갖추어 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정말 기이하다.
먼저 일찍이 의문되고 한 되던 곳을 살펴보니 성종 경술년(1490년)에 선생이 사관(史館)에 있을 때 초록에 조의제문을 실어 마침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선생이 여기에 덧붙여 한 말이 역사라는 것은 임금의 선악과 신하들의 충성심등을 기록하여 그 줄기가 드리워져 후세사람들에게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의 스승이 지은 이 글은 실제로 노산군(단종)의 일에 대한 느낌으로서 신이 이를 편찬하여 기록하는 것은 영원토록 일반적이고 공통된 의견으로서 나타내고자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였다. 선생의 말씀은 다 지나가고 없어졌으나 후학으로서 감히 군더더기 말을 할 바 못된다.
소릉복위를 청한 일은 연차(聯箚: 여러 사람이 연대하여 올리는 약식 상소) 한번, 독소(혼자 올리는 상소) 두 번이었는데, 올린 연월과 올린 사람의 직함 들을 하나하나 알 수 있고, 소장에 실린 말씀은 모두 명백하고 아주 적절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이 복받치고 사무치게 하여 세 번씩이나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천하 만세에 영원히 남을 말씀이다. 48영(詠)은 비단 시 뿐만이 아니라 성종이 지은 고귀한 글(雲章)도 찬연히 함께 실려 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 책은 매우 귀중하므로 별도로 한 책을 만들었으면 한다.
대(代)를 이음(嗣續)에 있어서는 경신년(1600년, 연산군 6년) 7월 27일 즉 선생 탈상일에 숙인 김씨가 조카 삼족당을 불러 이르기를 “나도 이제 죽을 것인즉 원컨대 너의 동생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너의 계부 제사를 받들게 하여다오. 또 한 가지 부탁은 <내가 죽거든> 유해를 계부 옆에 부장하여 주기 바란다.” 라고 하시고 통곡한 다음 옷을 갈아입으시고는 서거하셨다. 중종 무인년(1518년)에 정암(靜菴) 조문정공(趙文正公;조광조)이 선생을 위하여 증작을 주청하였을 때 임금이 이미 증직하였다 하시고 이에 묻기를 자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니 정암이 대장으로 후사를 이었다고 대답하였더니 임금은 곧 명하여 선능참봉(宣陵參奉) 자리에 등용하게 하시었다.
예전에 의심되고 한 되던 점이 하나하나 분명해지니 마치 덮개를 열고 밝은 햇살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외에도 본집(本集) 가운데는 없으나 이 연보 가운데 있는 것이 대단히 많아 수십 조항에 이른다. 행적은 놀랍고 공경스러우며 고상하고 기이하지 않음이 없어 보는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선생을 말하는 사람은 귀하거나 천하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를 막론하고 해와 별, 태산과 북두성 같이 우러러보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 이 연보를 지은 것이 명종 무신(1548년)년 이었는데 먼지 앉고 헤어진 상자 속에서 327년, 13세대를 묻혀 있다가 오늘 비로소 출현하였는데, 세상에 나타나고 감추어짐(顯晦)의 신기함이란 바로 대항두(大航頭)가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발견한 것과 다를 바 없다.[1]
[1]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대항두(大航頭, 큰 뱃머리라는 뜻의 지명)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었다는 말이나, 이 고문상서는 위조라는 설이 있다.
아! 고문상서가 나타나자 왕범(王范)[1]이 보충한 순전(舜傳)과 마융(馬融)[2]이 의심한 진서(秦誓)는 없애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졌다. 지금 이후로는 중간의 선조세대가 편찬한 부록 즉 선생이 돌아가신 후(龍蛇之後)에 조각조각 모여진 것에 대해서는 의당 가타부타 하지 말아야 하고 이 연보를 올바른 것으로 삼아 한결같이 이에 따름이 옳으리라.
[1]왕범(王范); 북송(北宋) 시대에 어진 재상이었던 왕단(王旦)과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2]마융(馬融); 79~166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학자
또 일설이 있으니 선생의 사자(嗣子;김대장)가 은혜를 입고 벼슬을 하여 군과 현의 수령을 지냈고 그 후 2대 또는 3대를 전하여 오면서 혹은 유일(遺逸)로써 일컬어지고 혹은 도의와 문장으로 유명해지기도 하였으니 탁영의 세계(世系)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병란(兵亂;전쟁 등)을 거치면서 흩어지고 헤어져 집에 있는 사람들은 광릉(廣陵)[1]의 탄식이 있었고 밖에 다니는 사람들은 옹문(雍門)[2]의 슬픔이 있었다. 그래서 서원을 건립하고 비를 세우고 또 문집을 중간하는 일을 모두 사림(士林)이 주관하고 본손(本孫)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이로서 선생의 덕이 사람들을 깊이 감화시켰음을 가히 엿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여러 선비들이 쓴 글이 후사(後嗣)가 없는 것으로 오인하게 된 근원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아! 중간 세대의 쇠퇴함이 여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1]광릉(廣陵); '광릉'은 양주(揚州)의 옛날 지명. 지금의 강소성 강도현에 해당한다.
[2]옹문(雍門);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거문고의 명인, 옹문주(雍門周. 옹문자(雍門子)라고도 한다. 거문고를 잘 타 맹상군이 그 소릴 듣고 울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무릇 사물의 이치는 극에 달하면 반드시 떨어져 나가게 마련이다. 지금 김씨의 여러 군자들을 만나보니 각자 그들의 고향에서 와서 서울에서 만나 3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이 연보를 얻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의논을 모아 책으로 간행함으로써 그 전승(傳承)을 넓히게 되면 선생의 후손이 장차 흥할 것이다.
이것이 이치로서 선생이 지은 중흥책에 ‘국가 통일의 대업(大統) 후에는 반드시 중간의 쇠퇴함이 있고 중간의 쇠퇴함 뒤에는 반드시 중흥이 있다.’는 설이 바로 이를 증명할 것이다.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후학 여강 이재희 근찬
(후서2, 보형)
사람에게는 한 번의 선으로 하나가 가능해지는 것이 있으니 능히 자손된 자로서는 이를 후세에 전하여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선조의 도덕과 학식과 행의와 업적이 후세에 빛날 수만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나 반드시 생각하고 있는 바가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 일의 성질이 내부의 일이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탁영선생은 점필재의 수제자로서 학문이 높고 절개와 행동이 탁월하여 나라의 역사책에도 실려 있고 사람들의 이목에도 밝게 빛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에서 그 우두머리로서 참화를 당하였다. 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선생에 관한 것은 없어져 버리고 실제의 자취는 흩어져서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 중종반정 이후에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탁영선생이 남기신 글을 구하라고 하여 선생의 조카인 삼족당공이 몇 편의 자료를 모아서 늦게나마 바치니 선생의 연보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동생인 창녕공 휘대장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것인데 이렇게 깊숙이 간직한 뜻을 대략 상상할 수 있다.
옛날 무오사화가 있던 해에 삼족당공의 부자형제는 모두 남원으로 유배를 갔었고 먼저 사면을 받고 돌아온 창녕공(대장)이 월곡(月谷)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임은공 휘치구, 즉 선생의 증손께서 월곡으로부터 호서(湖西)로 공부하러 떠나 문열공 조헌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이때 마침 왜구가 침입하여 홍주(洪州) 가림(嘉林)으로 피신하여 거처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도와 남원이 모두 왜적들로 부터 피해를 입어 마침내 오루산(烏樓山) 속에 숨어살게 되었다.
일찍이 시를 지어 자손들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고종(孤蹤;고독 단신)은 두려워하며 산속에 숨어살되 선조에 대해서 말하지 말 것이며 단지 김(金)자만 말하여도 두려움이 따르니 남기신 글은 소중하나 화를 부를 수 있으니 이것을 깊이깊이 간직하라고 가르쳐라.’ 고 하였으니 이는 선조의 가르침이다. 대개 대방(帶方?)이 분산된 후로부터는 서로 떨어져 남북이 편안하게 살 곳이 없었다. 이미 호서와 경기지방에서 거듭하여 병자년과 정묘년의 난[1]을 만나 또 한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서 의로움을 지켰다(?). 나라가 조용해지고 부터는 이를 감추어 알리지 않고 종적을 감추었으니 후손들이 이를 보존하지 못했고 더욱이 영남과 호남의 친족들이 서로의 소식은 들었으나 세대가 멀어지다 보니 마침내 선생에게 이런 손자가 있었고 우리들에게는 이런 선조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1]병자년(1456년)의 死六臣의 上王복위 모의사건과 정축년(1457년)의 魯山君(단종) 사망사건
<※ 위 문단의 뜻풀이가 어려우므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
금년 봄에 형님인 진형(晋炯)이 서울에 갔을 때 청도에 사는 아저씨뻘인 창윤(昌潤)씨가 부회(赴會;覆試)에 왔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만나 종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삼족당공이 쓴 탁영선생의 연보에 대해서 말했더니 <창윤씨가 하는 말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하면서 책에 기록된 글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전에 듣지 못했다. 지금 비로소 알게 된 것이 4가지인데 첫째는 선생(탁영)의 첫 부인이 단양우씨라는 것은 전해지지 않았고[1], 두 번째는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 7월27일 인데 17일로 잘못알고 있었고, 세 번째는 삼족당공이 선생의 다음번 부인인 예안김씨[2]의 유언을 지켜 그의 둘째 동생인 창녕공(대장)에게 선생의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고 또 정암 조선생(조광조)이 임금께 주청하여 대장에게 관직을 준 일이며, 네 번째는 선생이 소릉의 복위를 간청한 세 번의 상소에 대한 전말이다.” 라고 하였다.
[1]병조참판을 지낸 우극관(禹克寬)의 女
[2]참봉을 지낸 김미손(金尾孫)의 女
13세대가 지났으나 아직 여러 사람들에게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은 영남과 호남의 종중에 <이 연보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며[3] 이는 생각해 보면 선조의 교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일찍부터 <연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와 같이 된 것은(즉 알리지 않은 것은) 정녕 세상에 전하여 영원히 후세까지 알려지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3] 영남과 호남의 종중에서는 이 연보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으나, 이 연보를 가지고 있던 춘천의 진형씨는 ‘영호남의 종인들이 이런 연보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보가 있다고 알릴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는 뜻.
곰이 생각하면 책으로 간행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은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판각하는 사람과 계획하고 계속해서 사당을 세운 일, 액호를 받은 일, 거듭해서 증작을 받은 일과 시호를 받은 전후의 사실들을 수정한 후 완전한 연보를 완성하였다.
불초는 비록 감히 이 연보를 배포하지 못하겠으나 선조의 자취를 드높이고, 돌아가신 후로 400여년 동안 잊혀져 사라진 도학의 연원과 곧고 큰 충절을 모두 회복하고 세상에 나타내려 함이니 이러한 소임이 어찌 경사스럽고 다행이 아니겠는가. 다만 한번 이를 행함으로서 조상을 드높이고 자랑하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불초는 이것에 아주 슬프게 느끼는 바가 있는 바이다.
숭정기원후 5갑술(1874년) 계하(6월)13대손 보형근지
(후서3, 창윤)
불초가 선조의 유집(遺集)을 받들어 열람하면 항상 개탄하고 눈물을 삼킨다. 무오의 화를 당하여 자손들이 호남과 영남 각지에 달아나 숨고 선생의 문적은 모조리 수색되어 압수당하였다.
그러다가 중종반정이 이루어져 억울한 죄가 씻어지고 작위가 회복된 다음 특별히 유문(遺文)을 구하는 왕명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영남 안찰사가 서문을 지어 인쇄하여 발행하였으나 남은 것이라고는 열에 하나 둘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임진왜란의 병화를 거치면서 또 많은 것들이 없어졌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이번 회시(會試;覆試)에 나온 날 우연히 춘천의 조카뻘인 진형(晋炯)을 만났는데 진형은 나와 선조가 같은 친척이다. 진형이 묻기를 “원집에서 연보가 누락되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집에 탁영연보가 대나무 상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아! 기이하다. 300여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출현되다니 어찌 나타남과 감추어짐(顯晦)이 다 때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하여 살펴보니 삼족당공이 작성한 것이다. <탁영선생이 돌아가시고 1년 후인> 첫 제사 때 부인 김씨가 삼족당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원하건대 너의 둘째 동생 대장(大壯)을 너의 숙부의 후사로 삼아라.’ 고 말을 마친 후 돌아가셨다고 되어있다.
중종때에 아침 경연 때 김모는 자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고 물으니 정암 조선생이 대장이 뒤를 이었다고 대답하니 특별히 선능참봉에 임명하셨다. 조정에서 <명신을> 숭상하고 포상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나타났다.
연보가 어둠 속에 묻혀 있었고 문헌상으로 뚜렷한 증거가 없어 선생의 사실을 찬술할 때 간혹 무사(無嗣)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순조임금 때 <1830년> 시호를 청하는 상소에서 다시 조카 대장을 후로 잇도록 고한 것은 모두 연보를 보지 못한데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 연보(발견된 연보)를 가지고 정본(인쇄본)으로 만드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춰서는 안 될 것이라 드디어 조카(진형)의 형제들과 서울에 사는 친족인 천익(天翼)씨, 영훈(永薰)씨와 논의하여 판각하고 도학과 탁월한 충절을 세상에 전하도록 하였다. 불초가 간략히 일의 전말을 기록하였으나 감히 군더더기 말이 있지 않을지 모르겠다.
임금(고종)이 보위에 오르신지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후손 창윤근지
(후서3, 천익)
아! 이것은 삼족당공이 저술한 탁영선생의 연보이다. 선생의 학문과 절개있는 행실은 진실로 역사책에 빛나고 있으나 그 학문의 실제 자료들은 화(무오사화와 임진왜란 등)를 겪으면서 흩어지고 없어져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한이 오래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금년 봄에 비로소 조카뻘인 진형으로부터 이 책을 얻고 나니 300여년 후의 일이라 피눈물을 씻고서 들어도 보지 못한 것을 읽어 보았다.
대개 선생의 학문의 근본은 소학(小學)으로서 주자(紫陽, 朱子)[1]를 숭상하여 행실의 근본은 순수함과 효도로서 친구를 위하고 의례의 법도가 엄격한 주례의 규범이 있었다. 형식을 거부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흩어져 떨어지고(?) 경영하고 다스림에 큰 뜻을 세워 나중에는 즐기되 먼저 근심하고 제도와 행실은 나타난 곳이 고상하고(?) 나아가기는 어렵고 물러서기는 쉬운 세상의 도리를 근심하여, 즉 분명히 학교를 부흥시켜 이단을 피하게 하고 언로를 담당하여 현자들을 진출시켜 아첨배들을 멀리하고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조의제문을 실은 것은 이러한 도리 때문이었다.
[1]자양(紫陽);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 즉 주자(朱子, 1130~1200)를 말함. 평릉 주희(平陵朱熹), 단양 주희(丹陽朱熹), 오군 주희(吳郡朱熹), 신안 주희(新安朱熹), 자양 주희(紫陽朱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정의 회의에서 소릉의 복위를 상소한 것은 대의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고 또 노릉(노산군 단종의 능)을 세우기를 청하고 사육신전을 다시 쓴 것은 모두 천하 만세에 그의 말이 있어 충성과 절개가 하늘과 땅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산을 뒤흔드는 말과 귀신을 질책하는 지론은 해와 달같이 빛나고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책에 기록되어 소상히 실려 있다고 하나 전해지는 것은 없어 선생의 모든 것을 구하고 선생의 진실을 얻는 것이 이 책이 아니겠는가.
청도에 사는 일가인 창윤씨가 서울로 오게 되어 마침내 같이 의논하여 인쇄하여 전하게 되었다. 비록 불초가 미천하고 함부로 이 연보를 수정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간략하게 연보 속에 이를 기록하여 바른 학문과 높은 행실과 맑은 풍속과 높은 절개 등에 대해서 후세의 선비들이 알지 못하는 10여건의 선생이 하신 일을 준비하여 두니 군자들이 판단하여 선택할 것이다.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불초 후손천익 재배근지
(후서5, 영훈)
선생께서 일찍 계승한 가정에서의 훈계와 젊어서 얻은 명성과 학문과 덕망은 영원히 종친들에게 모범이 되는 바이고 특히 혼자서 행하신 일은 만세를 지나도 다시 볼 수 없다. 아! 원통하다. 무오사화는 차마 말로서 표현할 수 없다.
선생의 문학에서 풍부하여 저술하신 것이 많을 것이나 무참히 훼손되고 남은 것이 또 전쟁을 거치면서 경연(임금과의 회의)에서 지은 것과 스승과 친구들 간에 배우며 닦은 글들이 흩어지고 없어져 자료가 없으니, 이후에 이것을 모으는데 눈물과 탄식이 없지 아니하다. 후손들이 가진 한은 아주 오래되어 세대가 바뀐 것이 300여년이 지났다.
갑술년(1874년) 봄에 다행히 우리의 일가인 보형(普炯)씨가 보관해 오던 것이 란표봉박(鸞飄鳳泊)[1]중에 지금 비로소 나타나니 선생의 연보와 48영시이다. 이는 삼족당공이 친히 교정하고 편집하여 몇편으로 만들고 마지막에 발문까지 실은 것으로서 선생의 일생과 유적을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단지 한 가문만의 경사이겠는가.
1]鸞飄鳳泊(란표봉박) : 헤어지고 흩어진 것을 의미하는 말임. 한유의 구루산시(岣嶁山詩)에 "蚪蝌拳身虀倒披 鸞飄鳳泊拏虎螭"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구루산 신우(神禹)의 비가 산중에 자취를 감춘 것이 마치 난봉이 표박하는 것과 같다는 뜻임.
선생의 도학과 문장과 곧은 의견은 진실로 후생인 소자가 감히 자찬하여 드높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감히 군더더기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재빨리 인쇄를 결정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완성됨을 보고하니 이후에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다 존경과 숭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임금(고종) 11년갑술(1874년) 계하(6월) 후손영훈 근지
<濯纓先生年譜下卷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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