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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_대한민국

'대마도는 우리땅' 이다

ㅅㅏ진인생 2013. 5. 24. 22:58

  동국여지승람·해동지도에도 '대마도는 우리땅' 
 
현지에 신라불·고려불·조선 범종 곳곳 산재
고려부터 조선까지 관직 내리고 속주로 다스려
"대마도 되찾아 역사 바로 세우자" 여론 확산 
 
 금강일보 2012.08.16    최일 | choil@ggilbo.com    
  
‘독도는 우리땅’이란 명제에 더해 ‘대마도 역시 우리땅’이란 다소 도발적인 제언이 광복 67주년을 맞은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보 8월 15일자 1면 보도>

부산과 불과 49.5㎞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마도(일본 규슈 후쿠오카와는 147㎞ 거리)가 본래 우리땅이었다는 사실은 금강일보가 15일 보도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팔도총도(八道總圖) 외에도 여러 사료를 통해 입증된다.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을 펼치는 대전 반야사 무애 스님에 따르면 독도사랑회 등을 통해 반환운동이 전개되는 대마도의 사찰에선 신라불이나 고려불, 조선의 범종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 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 황제의 딸) 결혼봉축비 등이 대마도에 세워져 있다.


15세기 말 조선 성종 때 발간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중반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는 ‘(우리 영토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확산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져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 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했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宗貞盛)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島主)를 태수(太守)로 봉했다.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에는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라는 글귀가 있다.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가 자국 영토로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는 대마도에 대해 국내 사학계가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고집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 대마도가 우리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처럼 다양한 역사적 근거에 기인한다.

무애 스님은 “대마도가 우리땅이란 근거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중대한 사안에 대해 위정자들마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안타깝다”며 “국민들의 역사의식이 탄탄해져야 영토 분쟁 등 외교적 문제에 있어 일본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역사를 바로세우고, 널리 알리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