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8.16)일본에서 삼국 이전 가야족의 일본지배 기록 발견
neowave 2013.08.27. 16:16 http://cafe.daum.net/hanryulove/5Qxi/9653
20년전 mbc 뉴스 영상: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8/1812825_6052.html
[일본서 삼국 이전 가야족의 일본지배 기록 발견] ●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88년 8월 16일 화요일 밤 MBC뉴스데스크입니다. 오늘 뉴스데스크 머리기사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나라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된 시기가 백제시대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삼국시대 이전의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서 나라를 세우고 일본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나와서 학계에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일본 현지를 취재한 황 헌 기자의 보도입니다.
● 기자: 여기는 일본의 천황이 살고 있는 도쿄의 황궁 앞 입니다. 세계적인 경제 대국 일본의 상징적인 존재 천황. 그 천황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지금도 일본 열도 각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매일 이 곳을 찾고 있습니다. 이는 곧 천왕이 일본인의 자존심이자 살아있는 신으로 나아가서 일본 역사의 뿌리로 인식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 이 같은 천황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료가 나와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파문은 일본 후지산 북동쪽 살리현 의 아스미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 마을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는 미야시다시 가문에서 보관해 온 고문서의 내용이 밝혀 진 것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문제의 미야시다 문서가 비밀리에 오랫동안 보관되었던 장소입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4백여 개의 문서 가운데는 백제시대 이전인 기원전 7세기경에 한반도에서 건너 온 유민들이 우가야라는 왕국을 세워 일본을 지배했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이 문서의 앞부분인 개벽펴는 일본 서기나 고사기가 기술하는 최초의 천황인 서기 270년대의 응신천황을 인황 즉 사람의 왕으로 격하시키는 반면에 BC 7세기경의 한반도에서 구주로 건너 간 사람들이 옹립한 왕을 최초의 천황으로 기술하고 있어 일본 천황의 뿌리가 한반도에서 건너왔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박성수 교수(한국 정신문화연구원 편찬부장): 지금까지 알려지기는 일본 천황이 일본을 처음부터 통치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온 미야시다 문서는 이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천황을 인황 이라고 사람인자를 써서 인간 황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직접 천황을 부정하는 그런 이름으로 풀이 할 수가 있습니다. 또 둘째는 천황이 이 나라를 다스리기 이전에 가야족인 우가야 왕조가 그것도 한 천년동안 일본 열도를 먼저 통치했다.따라서 일본의 통치자는 천황 이전에 가야족 이 지배했다고 하는 그러한 폭탄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기자: 소장자인 미야시다씨 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이 문서가 아스미의 아소산 에 있는 한 신사에서 보관되어 왔으나 그 내용의 불온함 때문에 일본 정부 당국이 이 문서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탄압을 했으며 어용학자들을 통해 이 문서를 미서로 규정하도록 함으로서 그동안 공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 소장자(일본 사리현 아스미); 신사에 있언 이 문서들을 부친이 보관해 오다 대정 12년(1925년) 화재가 나면서 이곳에 옮겨와 현재까지 안전하게 보관해 왔다. 이 문서의 내용 가운데는 일본역사에 불리한 부분이 많아 최근까지 학자들이 부정했으며 발표하기를 꺼려왔다.
● 기자: 취재진과 함께 이 문서를 조사한 정신문화연구원 박성수 교수는 삼국시대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조상들이 우가야 왕조를 세우고 약 천년동안 일본을 통치했으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일본으로 온 유민들의 새 세력에 밀려 우가야 왕조는 이 문서가 발견된 후지산 북동쪽에 아스미 지방으로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는 또 아스미라는 지명과 아소산 이라는 이름이 모두 단군 왕조의 수도인 아사달에서 유래되었으며 부사산 역시 단군 2대왕인 부루왕 에서 파생된 점. 그리고 아소산 정상에 삼신암이 있고 아스미 지역 일대에 일본에서는 드물게 100개가 넘는 신사가 있는 점 등이 이 사실을 뒤받침 해 준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신황기를 쓴 미와시 등 일본의 일부 학계에서도 이 문서에 대한 재평가와 새로운 해석의 움직임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일본의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이 문서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 침탈을 정당화 하는 등 왜곡된 역사 교육을 고집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미야시다 문서의 공개가 가지는 뜻은 자뭇 큰 것으로 평가되며 한일 양국의 고대사 재정립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정신문화연구원측은 오는 10월 서울에서 이 문서의 해석을 놓고 두 나라의 연합 세미나를 갖고 객관적인 평가를 시도할 계획이라고 알려졌습니다. 도쿄에서 MBC뉴스 황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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