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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본문
원나라(1279년) - 명나라(1368년) - 청나라 (1644) - 중국(1949~현재)
원(元) (1271년 - 1368년)은
만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동유럽까지 지배한 몽골 제국의 적장자인 쿠빌라이 칸이 몽골고원, 만주, 화북을 아우르는 지역의 한족식으로 세운 국가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주원장이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몰아내고
명(明) (1368년 -1644년) 이라는 한족 왕조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외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과시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진왜란 등 외부 원정의 부담과 문화 침체로 쇠퇴하다가 사르후에서의 패배와 숭정제의 실책으로 멸망한다. 명나라의 몰락을 틈타 금나라의 후예인 만주족이 후금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청(淸) (1616년 - 1912년)은
후금을 계승한 왕조로, 초기에는 한족을 정책적으로 차별했으나, 전체적인 제도 및 왕조의 분위기는 명나라와 유사하였다. 양무 운동을 통해 근대 국가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서구 열강 세력들의 이권침탈이 심화되면서 더욱 더 쇠퇴하고, 1911년에 신해 혁명으로 멸망한다.
한편 남명(南明) (1644년 - 1662년)은 멸망당한 명나라의 왕실을 계승한 나라로, 명의 부흥을 기도하였으나 청나라에 망하였다. 남명의 신하였던 정성공은 타이난으로 건너가 정씨왕국을 설립하여 청나라에 대항하지만 3대째에 복속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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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中華民國) (1912년 - 현재)은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이다. 이후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군벌로 등장하였다. 특히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거느리는 북양 군벌을 이끌고 쑨원으로부터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았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 사망하자, 이후 그의 부하들이 할거했는데, 대표적으로 안휘파의 돤치루이, 직예파의 펑궈장, 차오쿤, 오패부, 봉천파의 장쭤린, 산시파의 옌시산 등이 중국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한편 중화민국 최초의 공화정 체제인 북양 정부는 1928년까지 존속했다. 그 후 북벌이 재개되고 모든 세력이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국 국민당 주도의 국민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한편 천두슈(陳獨秀)와 마오쩌둥(毛澤東)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냈으나, 북벌 과정에서 분열이 일어나,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 정부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시안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중일전쟁 중에 수도 난징이 점령당하고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해 옮겼지만, 끝내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난징으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내분이 생겨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였다.
한편 국공 내전 중에 정부는 새로운 중화민국 헌법을 통과시켜 국민 정부를 헌정 체제로 격상시킨다. 1949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수도 난징을 점령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기세를 몰아 중국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이후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중화민국 정부는 패닉 상태에 빠져, 국민당에 내분이 일어나 공산당 밑으로 들어가거나(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타이완, 영국령 홍콩 또는 국외 등지로 피난하는 국민당 관계자도 속출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은 장제스의 지도하에 타이베이로 정부를 이전하여 현재까지 중화민국의 법통이 계승되고 있다.
냉전 시대에 한국 전쟁 덕분에 중화민국은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어도 국제적 위상이 변함없었다.그러나 점차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실리 외교를 선호하는 세계 다수의 국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쪽으로 기울었다. 현재 중화민국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있는 나라는 30개국 미만으로 대폭 감소했지만, 서로 중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자처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중국’ 정부가 병립된 분단 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한편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정부로 왕징웨이 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국이 있으나 국민 정부에 통합된다.
국공 내전으로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주도로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1949년 - 현재)이 건국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의 유대 관계를 통해 여러가지 경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국경 분쟁을 일으키는 등 소련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1971년 국제 연합 총회 2758호 결의안을 통해 중화민국을 제치고 국제 연합에 입성하였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널리 인정받게 된다. 1971년 '핑퐁외교'로 불리던 리처드 닉슨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마침내 1979년 중화민국의 강력한 후원국이던 미국과도 수교하게 된다. 덩샤오핑(중국어: 鄧小平) 이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 대국 반열에 진입하였다. 1990년대에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차례로 편입하였다.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이, 2010년에는 상하이 엑스포가 개최되었다.
중국 역사
(다음오픈지식) 글,용지니요 | 2006-05-11 10:47 |
1927년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저우커우뎬[周口店]의 동굴에서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Homo erectus pekinensis]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에 인간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시기가 3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준다. 중국문명의 요람은 황허 강임이 분명하다.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최초의 중국문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유물들이 허난[河南]·산둥·산시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최초의 왕조는 은(殷:또는 商, BC 18∼12세기)이라고 할 수 있다. 은은 중국 청동기문화의 기반 위에 선 왕조로, 서쪽으로는 산시[山西], 남쪽으로는 양쯔 강, 북쪽으로는 허베이 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 은대에 들어와 달력이 사용되었고 문자가 도입되었으며 청동기 제조술이 발달했다. 그 기원이 불분명한 주는 BC 1111년에 은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다. 주는 그뒤 여러 차례의 군사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주는 정복에 의해 획득된 새 영토를 통치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지에 동족 또는 이족 공신들을 제후로 봉했다(봉건제).
제후들에게는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게 하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의무를 지웠다. 주의 말기에는 흉작과 천재가 이어져 민심이 불안정해진데다 후계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에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BC 771년 수도를 함락당했다. 이로써 서주(西周)는 멸망하고 주 왕실은 동도(東都) 성주(成周)로 도읍을 옮겨 동주(東周)를 다시 일으켰지만 옛날과 같은 위세는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이때부터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동주는 약 500년간 존속했으며,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으로 농업생산력이 현저히 증대되었다. 또한 상공업도 발달했으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상과 문화가 꽃피었다. 공자(BC 551∼479)는 이 시대에 태어나 그후 중국문명의 규범이 된 사회적인 개념을 제정했다. 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진(秦)은 BC 221년 중국을 통일했다. 시황제(始皇帝)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으며(군현제),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도량형,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나아가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들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했다. 장대한 능묘와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고, BC 214년에는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했으며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또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 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대에 설정된 중국 국경이 후대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신성한 국경으로 여겨졌다.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대규모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어 시황제 사후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國運)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등의 연합세력에 패하여 결국 멸망했다(BC 206). 항우를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한 유방(즉 高祖)은 BC 202년 한(漢)을 세웠다. 진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다.
한의 제7대 황제 무제(武帝:BC 141∼87)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관학으로 정해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다. 이 체제는 그후 2,000년간 중국 각 왕조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대에는 종이와 지진계의 발명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AD 220년 한이 붕괴하자 혼란과 분열의 시기가 뒤따랐는데, 이 시기를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또는 육조시대라고 일컫는다. 군벌들이 들끓었고 화북지역은 다수의 비한족(非漢族) 침입자들에게 유린당했다.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 남부와 북부에 전파되었다. 수(隋:581∼617)에 의해 중국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수는 중요한 행정개혁을 이루었으나 무모한 군사적 원정을 계속하여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단명하게 끝났다. 618년 수를 이어 당(唐)이 들어섰다. 당은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전문관료제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돌궐, 투르판, 철륵(鐵勒), 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고 토번(吐蕃)을 정복하는 한편, 서역의 요지에 전진기지들을 설치하는 등 한대 이래 보기드문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 환관의 전횡 등으로 국력이 쇠하고, 크고 작은 병란·민란 들이 일어났다. 당이 붕괴되자 또다른 분열기(907∼960)가 시작되어 군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960년 마침내 송이 70년 만에 전국을 통일했다. 송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그러나 국초 이래의 문치주의는 한편으로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내치(內治)와 외교상에서 폐해가 누적되어 힘이 약해진 송은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남부로 수도를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쯔 강 이남에 자리잡은 남송은 국토가 북송때보다 반으로 줄었으나 경제력면에서는 북송시대를 능가했다. 남송은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에 의해 멸망당했다. 원은 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이·일의 4한국(四汗國)을 포괄하는 몽골 제국의 종주국이고 또 중국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로서 세조 쿠빌라이 칸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황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으나, 중국의 문명·제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거대한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면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다. 원은 계속해서 한족을 차별하여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음으로써 한족이 세운 명에게 98년 만에 타도되었다(1368). 명도 원대의 이민족 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조는 중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전제적인 명대에 들어와 반외세 감정이 절정에 달했는데 사실상 중국은 세계 각지의 세력들과 담을 쌓는 쇄국정책의 길을 걸었다. 사적인 해외무역과 해외여행은 엄금되었다. 1644년 만주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족(옛 이름은 여진족) 왕조인 청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청은 만주와 중국의 문명을 함께 섞어가면서 그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는 중국에게 있어서 비운의 연속이었다. 아편전쟁(1839∼42)·태평천국운동(1851∼64)·청일전쟁(1894∼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1898년의 변법자강운동은 청정부에 어떠한 변화의 바람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1900년의 반외세·반그리스도교를 표방한 의화단사건은 열강의 군대가 중국 땅에 진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는 1911년에 붕괴되고 쑨원[孫文]의 지도 아래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인 배신과 지역 군벌주의에 의해 공화국은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을 재통일하려고 노력했다. 1920년대에는 장제스[蔣介石]의 노력하에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어느 정도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곧 공산당 세력과 갈라섰고 이들 공산당은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했다.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세력은 남부 허난 성에서 북부 산시 성에 이르는 9,700km의 대장정(1934∼35)에 성공하면서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때 마오쩌둥[毛澤東]은 공산혁명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을 대신하는 협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공산당은 국민당 군대와 연합국 군대와 동맹하여 항일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자 공산당은 세력을 재조직하여 일본군의 무기를 탈취하고 장제스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섰다. 그결과 1946∼49년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달아났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1958년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중국 지도부 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1966년 마오쩌둥은 과격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혁명의 열기를 부추기고자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결과 혼란과 폭력만이 뒤따라 과격파들은 조락하게 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 장칭[江靑]이 이끄는 4인방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저지른 실수라고 비판되었으며, 4인방은 1981년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온건한 지도노선 아래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급진주의와는 영원히 결별하는 새로운 당헌을 제정했다. 이후 중국은 경제 현대화에 진력하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1989년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이로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비극적인 텐안먼(天安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당시 총리이던 자오쯔양[趙紫陽]을 퇴진시키고 장쩌민[江澤民]을 등용했다. 장쩌민은 1989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0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3년 국가주석직에 차례로 오르는 등 덩샤오핑의 후원 아래 국가 최고지도자로 성장했다. 대외적으로 중국 당국은 톈안먼 서건 이후 악화된 서방국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1990년 6월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반테제인사 팡리즈[方勵之]교수 부부의 출국을 허용하는 한편, 그해 9월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개최해 대외 이미지 재고에 힘썼다. 그리고 1992년에 톈안먼 사건을 '반혁명폭란'에서 단순한 '정치풍파'로 재평가하고 이듬해에는 이 사건을 주도했던 학생지도자를 가석방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정치·경제적으로 중국은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및 개혁·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은 가운데 높은 경제성장 가도를 달렸다. 1997년 2월 덩샤오핑이 사망했으며, 그해 7월 1일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는 홍콩이 1842년 난징[南京]조약으로 영국에 할양된 지 155년, 1898년 조차된 지 99년만의 일이었다. 중국은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초대 행정장관에 퉁치화[董建華]를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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