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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 해체뉴스(김우중,강봉균,이헌재 발언정리) 본문
■ 대우그룹 해체
(김우중.이헌재 금감원장.강봉균 재경부장관)발언정리 ...
조진래 기자(jjr2014@dailian.co.kr)
[데일리안 = 조진래 편집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제하의 회고록을 내면서 대우 해체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 뜨겁다. 대우 측은 정부에 의한 ’기획 해체‘라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대우를 재평가해 달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에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었던 이헌재 씨와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강봉균 씨는 ”허튼 소리“라며 일축한다. 대우는 이미 시장에서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뜨거운 공방 만큼이나 '실체적 진실'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들끼리 대면해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전에는 진실 접근에 한계가 많다. 이에 대우 해체 과정과 쟁점이 되는 논란거리를 이들 3자의 가상 대담 형식으로 재구성해 본다. 이 3자 가상 대담은 당사자들의 회고록과 각종 관련 보도 내용 등을 참고했다. 언젠가는 실제 이런 3자 대면을 통해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대우 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편집자 주 >
“관료와 갈등이 그룹해체 한 원인” vs “도우려 했으나 대우가 비협조”
△사회 = 요즘 대우사태의 의미와 그룹 해체의 진실에 관해 논란이 뜨겁다. 김우중 회장은 당시 경제관료들과의 갈등이 대우를 기획해체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라 언급한 바 있다. 사실인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외환위기 초기부터 나와 경제관료들 간에 의견 차가 컸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국제통화기금(IMF) 하라는 대로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한 얘기들이 그 사람들을 자극한 것 같다. 그 때 나는 “관리들이 열심히 안한다. 제 할 일을 안하고 핑계만 댄다. 이래서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들이 못하면 자리를 비켜줘야지” 하고 얘기했다. 당시 관료들이 모두 후배들이기도 했고 선의에서 얘기한 것인데... 격식을 갖춰 대우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대우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불거진 1998년 상반기부터 6개월 동안 김 회장을 20차례 가량이나 만나 정부 방침과 국내외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마다 김 회장은 “금융 지원해 주면 대우는 아무 문제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어떻게든 대우를 도우려고 했지만 대우가 결국 구조조정을 늦추다가 불가피하게 해체된 것이다. 당시 경제관료들이 김 회장을 어떻게 하려 했다느니 기획 해체였다느니 하는 말은 틀린 말이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1998년부터 김 회장에게 누누히 “이번 위기는 간단치 않다.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시장에서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걱정말라. 대우는 괜찮으니 일부러 (자금줄을) 조이지만 말라”고 넘겼다. 김 회장은 당시 정부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구조조정 대신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추라고 계속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정부 구조조정 방향과 완전히 반대로 갔다. 그러니 대우가 구조조정을 않는다는 의심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대우가 자금이 급한 모양이라는 소문도 괜히 난 게 아니다. DJ(김대중)도 대우 지원을 여러 차례 지시했으나 우린 시장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강봉균 보고서가 지원 중단 결정타” vs “대우 현실 제대로 알렸다”
△사회 = 어쨌든 강봉균 수석이 1998년 11월 DJ에게 올린 보고서가 DJ의 대우 지원 의지를 막은 결정타였고 결국 이후 대우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는 게 정설이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당시 김 대통령은 대우를 돕고 싶어 했다. 그런데 대우의 실상을 잘 몰랐다. 그래서 대우 상황이 이렇게 심각합니다 하고 보고한 것이다. 대우를 죽이려 했던 게 아니다. 우리도 어떻게든 대우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대우는 시장에서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그달 29일 DJ와 면담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 며칠 전에 강 수석이 그런 보고를 올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수출해서 돈 벌어 부실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환율이 두 배나 뛰었으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GM과의 외자유치 협상도 진행되고 있었고... 그런데 보고서를 읽고 DJ가 마음을 고쳐 먹었는지 이후 수출금융이 막혔다. 기업을 살려야 할 상황에서 자금줄을 묶어 버리는데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사회 = 김 회장은 강 수석에 섭섭함이 많겠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강 수석에게 한 번은 심하게 질책한 적도 있다. 당시 환율이 두 배 정도 올랐으니 정부가 나서 수출을 늘리면 무역흑자를 500억 달러까지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외환위기 극복도 가능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강 수석이 이제 시장경제 중심으로 하니 정부가 나서서 못한다는 게 아닌가. 내가 그 때 참지를 못했다. “시장경제 하는데 무엇 때문에 거기 앉아 있나? 시장 중심이면 청와대 경제수석이고 비서관이고 필요 없겠네”하고 말해 버렸다. 그 때 끝까지 설득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대우는 이미 통제불능 상태” vs “금융지원 묶는데 어찌 사나”
△사회 = 당시 대우그룹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고 있었다. 부실도 계속 커져 갔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우 측과 정부 측 판단이 너무 달랐다. 대우는 정말 통제불능이었나?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대우가 진 빚 가운데 절반이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이었다. 그걸 사들인 건 일반 투자자들이다. (최근 동양증권 사태처럼) 시장이 완전히 마비될 위험이 컸다. 더군다나 대우는 채권 구조가 너무 복잡했다. 채무의 70% 가량이 수익증권 등을 통해 수백만 명의 일반 투자자들에게 전가되어 있었다. 해외 채무는 물론 국내 계열사간 채권 채무가 얽혀 채권자 파악도 쉽지 않았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대우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금융권이 이른바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맞추느라 기업 부문에 자금은 공급않고 회수만 해 갔다. ‘노무라 보고서’가 나온 직후 금융기관들은 1998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반년 동안 6조5000억원을 회수했다.
단자 그룹별 한도액을 만들어 6개월 만에 줄이라고 압박했고 수출금융까지 막아버렸다. 그리곤 우리가 워크아웃 들어간 다음에야 풀어줬다. 수출금융만 제 때 풀어 주었으면 회사채를 그렇게 많이 끌어 쓸 필요가 없었다. 그게 모두 단기차입금이 되어 버린 것이다. 1997년부터 1999년 9월까지 수출금융이 막혀 추가로 필요해진 자금이 16조원이었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1998년 10월29일 ‘대우에 비상벨이 올리고 있다’는 노무라 보고서가 나오기 한달 전 금감위가 파악한 대우의 채무는 47조7000억원이었다. 1년 새 19조원이 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우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시장에 개입해야 했다. 당시 대우를 가장 압박하던 김정태 주택은행장을 불러 에둘러 자금회수 자제를 요청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후 곧 삼성생명까지 대우 자금 회수에 나섰다. 노력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정부의 수출금융 규제로 대우의 단기차입금이 급증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된다. 수출금융은 대우에만 차별적으로 적용한 것이 없다. 다른 재벌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유독 대우만 왜 그랬을까? 거듭 얘기하지만 대우의 빚이 급증한 것은 수출금융 때문이 아니다. 금융권에서 대우가 불안하다고 판단해 돈을 안 빌려주니까 고금리 회사채를 발행한 결과다.
“대우가 구조조정에 가장 소극적” vs “가장 모범답안 낼 자신있었다”
△사회 = 당시 관료들은 한결 같이 대우가 구조조정에 가장 소극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시장의 신뢰를 잃었고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우리는 가장 모범적인 구조조정을 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IMF식 구조조정에 반대했지만, 나는 전경련 회장이었다. 아무 것도 안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사실 정부가 우리더러 자산 팔아 구조조정 하라고 말할 자격이나 있었나 묻고 싶다. 정부가 떠넘긴 대우조선을 정상화하느라 팔 수 있는 자산을 모두 팔아 7200억원을 투입했던 게 우리다. 그런데 나중에 대우조선을 6개월 안에 팔아 외자유치 실적 내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대우가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음은 분명하다. 자산 매각이든 외자유치든 5대그룹 중 꼴찌였다. 1998년 5월에 제출한 그룹별 구조조정 계획을 보면 삼성과 현대가 목표치 100%를 넘겼고 SK LG는 90% 넘게 자구노력을 달성했다. 그런데 대우는 고작 18.5%에 불과했다.
△사회 = 당시 대우가 부채비율이 가장 높아 대표 부실기업으로 공격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그건 대우의 사업 구조를 잘 몰라 하는 얘기다. 대우는 수출로 먹고 사는 그룹이었다. 당연히 무역 외상채권 등이 많았고 이것들이 부채로 처리됐다. 더군다나 당시엔 환율이 달러 당 800원에서 1600원이 되니 부채가 하루 아침에 두 배나 늘어난 상황이었다. 환율 때문에 부채비율이 올라간 것을 왜 기업 잘못으로 몰아 구조조정을 강제했는 지 묻고 싶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가장 먼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춘 기업이 삼성이었다. 삼성이 그것 때문에 나빠졌나? 오히려 좋아졌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그건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부채비율을 억지로 낮춰 그런 게 아니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정건전성 기준이 자기자본 부채비율 200%였다. 당시 우리 30대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이 518%였다. 우리도 거기에 맞추자는 것이었는데 대우만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그룹들은 2년 쯤 뒤 모두 맞췄다. 당시 그룹 전체 평균 200% 부채비율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재벌기업의 건전성 강화 차원에서 매우 유효한 정책이었다.
“IMF 구조조정 처방 옳았다” vs “알짜기업 헐값매각 누가 책임지나”
△사회 = 당시 IMF의 구조조정 처방이 옳았다고 보는가.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그 때 전방위적인 구조조정이 없었다면 1년 반 만에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당시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신인도를 회복해야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과거와 같은 방만한 투자를 계속하면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해 다른 재벌들은 모두 자구노력을 펼쳤다. 대우만 그러지 않았다. 그 결과가 그룹 해체였다. 다른 그룹들은 구조조정을 잘한 덕분에 이후 유동성 위기 없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잘 견뎌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나는 IMF 프로그램이 우리를 돕는 게 아니라 관리체제로 바꿔가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말해 왔다. IMF 사태는 기본적으로 금융이 잘못해서, 정부가 금융관리를 제대로 못해 온 것이다. 그런데 환율 때문에 피해를 본 기업들에 되레 책임을 뒤짚어 씌우려 했다. 기업에 구조조정을 너무 압박했다. 외국에서 그런 압력을 넣으면 정부가 막아줘야 하는데 오히려 앞장서 수출 못하게 하고 외국 압력을 핑계 대 국내 자산을 헐값에 넘겨 외국 회사들 배불려 주었다. 나는 수출을 늘리고 외환보유고를 높여 IMF 체제 빨리 벗어나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나와 생각이 너무 달랐다.
△사회 = 대우차를 GM에 헐값 매각했다는 논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GM으로부터 1997년 5월에 합작을 제안받았다. 1998년 1월에 스미스 GM 회장과 MOU(양해각서)까지 체결했다. 당시에는 대우차 국내지분의 절반을 50억~70억 달러 정도 받고 팔아 공동경영하는 쪽으로 얘기가 되고 있었다. 협상은 지연되었지만 나중에 GM 쪽에서 이헌재 위원장 앞으로 인수의향서까지 보냈다. 그런데 일찌감치 협상이 결렬돼 대우가 코너에 몰렸다는 식으로 정부가 얘기하고 다니니 제 값에 팔리겠는가? 정부가 대우차를 거의 공짜로 GM에 넘겨준 셈이다. 이로 인해 한국 경제는 21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고 본다. 대우차를 살렸더라면 지금쯤 현대차와 2사 체제를 유지하며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김우중 회장은 GM과의 전략적 제휴에 모든 걸 걸었던 것 같다. 그러면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불가능한 협상이었다. GM은 대우를 김 회장 만큼이나 잘 꿰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자기 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조건을 바꿔가며 질질 끌더니 1998년 7월에 협상을 깨고 만다. 그 때 이미 대우가 스스로 살아날 방법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본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대우차는 그룹 구조조정을 할 때 비싸게 팔았어야 했다. 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니 아무래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없었다. 매각 협상이 안 된 것일 뿐, 정부 방해는 없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남들은 없는 것도 잘 포장해 비싸게 팔려 하는데 한국 정부는 그 때 우리가 가진 좋은 물건도 쓰레기라고 대문짝만하게 얘기하고 다녔다. 그러니 GM도 대우차를 우리와 처음 협상하던 가격의 5분의 1에 사겠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를 워크아웃에 넣으면서 실사했을 때 대우차의 자산가치는 110억 달러였다. 청산가치로 나쁘게 평가했는데도 그 정도였다. 그런데 GM은 현찰 4억 달러 정도만 내고 가져갔다. 누가 책임져야 하나. 당시 매각 본계약을 체결한 정건용 당시 산업은행 총재는 “이 땅에 대우차 매각 같은 비굴한 협상은 두 번 다시 있어선 안된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구조조정안 너무 늦었다” vs “8개 계열사 경영권 보장 약속 안지켰다”
△사회 = 김 회장은 1999년 7월19일 계열사 구조조정 및 사재 출연을 골자로 한 ‘대우 유동성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당시 정부가 대우차를 비롯한 8개 계열사의 경영권 보장을 약속했었다는데 그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대우 측은 주장한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7월16일 힐튼호텔에서 김 회장에게 7개항의 구조조정안을 건넸다. 자동차 사업을 그룹의 중심으로 남기고 조선과 상용차, 힐튼호텔 등 주력 계열사를 매각하며 김 회장 소유의 주식 일부를 팔아 자동차 사업에 투입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것만 지키면 자동차 부문은 회장이 맡아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얘기했다. 이후 김 회장이 내놓은 사재를 담보로 대우가 4조원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다음 수순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이 위원장은 자동차를 포함해 8개 계열사의 경영권 보장을 약속했었다. 10조원도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그 정도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까지 우리가 발행한 채권 가운데 연말까지 갚아야 할 돈이 10조원이었다. 당장 갚아야 할 돈도 4조원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주일 간 시간을 끌더니 4조원만 주었다. 다시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놓고는 “시장이 대우를 해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나는 그해 5월에 재경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때문에 그 뒤 일어난 일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대우 측 주장대로 몇몇 관료가 일부러 대우를 망하게 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언제든 내용이 불거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안은 이미 대법원까지 가서 사법절차를 마쳤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김 회장 느닷없이 해외도피” vs “정부가 나가있으라 해 놓고는...”
△사회 = 1999년 7월19일 대우 유동성 개선 방안 발표와 함께 김 회장은 명예퇴진을 발표한다. 그런데 이후 김 회장이 출구했고 느닷없이 해외도피설이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당시 대우차를 살릴 사람은 김 회장 밖에 없다고 믿었다. 몇 차례 김 회장과 만났고 워크아웃도 그런 식으로 풀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김 회장의 ‘해외도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워크아웃 한 달 여 후인 1999년 10월11일 김 회장은 중국 출장길에 올랐다. 그리곤 6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궁금하다. 왜 그 때 김 회장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누가 그에게 해외도피를 권했는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유동성 개선방안을 발표한 후에도 채권단이 자금을 제대로 지원해 주지 않길래 내가 계속 항의를 했다. 그러니 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있으니 안된다며 해외로 좀 나가 있으라는 얘기가 전달됐다. 그래서 DJ에게 전화해 확인까지 했다.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정리행서 잘 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강 수석 후임인) 이기호 당시 경제수석과도 만나 잘 처리하겠다는 다짐까지 받았다. 한참 후에나 어긋난 결과를 듣게 되었다. 곧바로 들어오려 했으나 건강 등의 이유로 그러질 못했다. 그 때 들어왔어야 했다. DJ가 있을 때 들어와 제대로 얘기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DJ가 약속한 것도 있었고...
“대우 처리방법 옳았다” vs “기업가치도 엉터리로 평가했다”
△사회 = 대우그룹의 가치 평가도 상당히 차이가 났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1999년 12월 실사 결과 대우의 총 부채는 최대 89조원, 자산은 59조원으로 추산됐다. 시장의 신뢰를 잃어 파산할 수 밖에 없는 수치였다. 김 회장 출국 직후 삼일회계법인이 대우그룹 예비실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 때도 김 회장이 수십조원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멀쩡한 기업을 다 죽었다고 해 놓고 청산가치로 기업을 평가하니 제대로 가치가 계산되었겠는가. 금감위가 회계법인에 지시해 아예 제로(0)로 만든 자산도 있고 절반으로 깎은 것도 수두룩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산이 30조원 넘게 줄어든 것으로 나왔다. 1999년 6월말 현재 12개 계열사 장부상 자산이 91조9000억원이었는데 실사 결과는 61조2000억이었다. 나도 깜짝 놀랐다.
△사회 = 당시 상황에서 적절한 지원만 있었다면 대우가 살아날 수 있었다고 믿나?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IMF 경제위기는 우리나라 대기업들과 금융기관의 동반부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부실 대기업을 정부가 선별적으로 구제할 수 없었다. 만약 정부가 돈을 투입해 대우를 살렸다면 나라 전체가 망했을 것이다. 국내 금융기관들도 부실채권 정리 때문에 대우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정부가 나서 극복해 주길 원했다. 대우 해체는 정책 당국자들의 판단에서 초래된 게 아니라 시장의 신뢰를 상실한 김우중 회장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워크아웃을 통해 엄청난 채무를 탕감해 주지 않았어도 대우 계열사들이 잘 나갈 수 있었을까? 34조원에 이른 대우 채무 중 대우건설 등 굿 컴퍼니가 떠안은 부채는 7조원 뿐이었다. 엄청난 쓰레기 채권을 떼어 베드 컴퍼니에 안기지 않았다면 그렇게 빨리 정상화될 수 없었다. DJ정부가 대우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데 다 허튼 소리다. 대우는 시장의 신뢰를 잃어 망한 것이다. 당시 금감위가 대우를 처리한 방식은 당시로선 최선이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지금 대우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회사들을 봐라. 그 때 청산가치로 평가하는 바람에 아까운 많은 우리 자산이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진실을 제대로 알려 대우의 노력과 성과를 재평가받고 싶다.
뜨거운 공방 만큼이나 '실체적 진실'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들끼리 대면해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전에는 진실 접근에 한계가 많다. 이에 대우 해체 과정과 쟁점이 되는 논란거리를 이들 3자의 가상 대담 형식으로 재구성해 본다. 이 3자 가상 대담은 당사자들의 회고록과 각종 관련 보도 내용 등을 참고했다. 언젠가는 실제 이런 3자 대면을 통해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대우 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편집자 주 >
“관료와 갈등이 그룹해체 한 원인” vs “도우려 했으나 대우가 비협조”
△사회 = 요즘 대우사태의 의미와 그룹 해체의 진실에 관해 논란이 뜨겁다. 김우중 회장은 당시 경제관료들과의 갈등이 대우를 기획해체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라 언급한 바 있다. 사실인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외환위기 초기부터 나와 경제관료들 간에 의견 차가 컸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국제통화기금(IMF) 하라는 대로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한 얘기들이 그 사람들을 자극한 것 같다. 그 때 나는 “관리들이 열심히 안한다. 제 할 일을 안하고 핑계만 댄다. 이래서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들이 못하면 자리를 비켜줘야지” 하고 얘기했다. 당시 관료들이 모두 후배들이기도 했고 선의에서 얘기한 것인데... 격식을 갖춰 대우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대우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불거진 1998년 상반기부터 6개월 동안 김 회장을 20차례 가량이나 만나 정부 방침과 국내외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마다 김 회장은 “금융 지원해 주면 대우는 아무 문제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어떻게든 대우를 도우려고 했지만 대우가 결국 구조조정을 늦추다가 불가피하게 해체된 것이다. 당시 경제관료들이 김 회장을 어떻게 하려 했다느니 기획 해체였다느니 하는 말은 틀린 말이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1998년부터 김 회장에게 누누히 “이번 위기는 간단치 않다.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시장에서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걱정말라. 대우는 괜찮으니 일부러 (자금줄을) 조이지만 말라”고 넘겼다. 김 회장은 당시 정부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구조조정 대신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추라고 계속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정부 구조조정 방향과 완전히 반대로 갔다. 그러니 대우가 구조조정을 않는다는 의심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대우가 자금이 급한 모양이라는 소문도 괜히 난 게 아니다. DJ(김대중)도 대우 지원을 여러 차례 지시했으나 우린 시장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강봉균 보고서가 지원 중단 결정타” vs “대우 현실 제대로 알렸다”
△사회 = 어쨌든 강봉균 수석이 1998년 11월 DJ에게 올린 보고서가 DJ의 대우 지원 의지를 막은 결정타였고 결국 이후 대우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는 게 정설이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당시 김 대통령은 대우를 돕고 싶어 했다. 그런데 대우의 실상을 잘 몰랐다. 그래서 대우 상황이 이렇게 심각합니다 하고 보고한 것이다. 대우를 죽이려 했던 게 아니다. 우리도 어떻게든 대우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대우는 시장에서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그달 29일 DJ와 면담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 며칠 전에 강 수석이 그런 보고를 올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수출해서 돈 벌어 부실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환율이 두 배나 뛰었으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GM과의 외자유치 협상도 진행되고 있었고... 그런데 보고서를 읽고 DJ가 마음을 고쳐 먹었는지 이후 수출금융이 막혔다. 기업을 살려야 할 상황에서 자금줄을 묶어 버리는데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사회 = 김 회장은 강 수석에 섭섭함이 많겠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강 수석에게 한 번은 심하게 질책한 적도 있다. 당시 환율이 두 배 정도 올랐으니 정부가 나서 수출을 늘리면 무역흑자를 500억 달러까지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외환위기 극복도 가능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강 수석이 이제 시장경제 중심으로 하니 정부가 나서서 못한다는 게 아닌가. 내가 그 때 참지를 못했다. “시장경제 하는데 무엇 때문에 거기 앉아 있나? 시장 중심이면 청와대 경제수석이고 비서관이고 필요 없겠네”하고 말해 버렸다. 그 때 끝까지 설득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대우는 이미 통제불능 상태” vs “금융지원 묶는데 어찌 사나”
△사회 = 당시 대우그룹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고 있었다. 부실도 계속 커져 갔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우 측과 정부 측 판단이 너무 달랐다. 대우는 정말 통제불능이었나?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대우가 진 빚 가운데 절반이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이었다. 그걸 사들인 건 일반 투자자들이다. (최근 동양증권 사태처럼) 시장이 완전히 마비될 위험이 컸다. 더군다나 대우는 채권 구조가 너무 복잡했다. 채무의 70% 가량이 수익증권 등을 통해 수백만 명의 일반 투자자들에게 전가되어 있었다. 해외 채무는 물론 국내 계열사간 채권 채무가 얽혀 채권자 파악도 쉽지 않았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대우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금융권이 이른바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맞추느라 기업 부문에 자금은 공급않고 회수만 해 갔다. ‘노무라 보고서’가 나온 직후 금융기관들은 1998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반년 동안 6조5000억원을 회수했다.
단자 그룹별 한도액을 만들어 6개월 만에 줄이라고 압박했고 수출금융까지 막아버렸다. 그리곤 우리가 워크아웃 들어간 다음에야 풀어줬다. 수출금융만 제 때 풀어 주었으면 회사채를 그렇게 많이 끌어 쓸 필요가 없었다. 그게 모두 단기차입금이 되어 버린 것이다. 1997년부터 1999년 9월까지 수출금융이 막혀 추가로 필요해진 자금이 16조원이었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1998년 10월29일 ‘대우에 비상벨이 올리고 있다’는 노무라 보고서가 나오기 한달 전 금감위가 파악한 대우의 채무는 47조7000억원이었다. 1년 새 19조원이 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우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시장에 개입해야 했다. 당시 대우를 가장 압박하던 김정태 주택은행장을 불러 에둘러 자금회수 자제를 요청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후 곧 삼성생명까지 대우 자금 회수에 나섰다. 노력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정부의 수출금융 규제로 대우의 단기차입금이 급증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된다. 수출금융은 대우에만 차별적으로 적용한 것이 없다. 다른 재벌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유독 대우만 왜 그랬을까? 거듭 얘기하지만 대우의 빚이 급증한 것은 수출금융 때문이 아니다. 금융권에서 대우가 불안하다고 판단해 돈을 안 빌려주니까 고금리 회사채를 발행한 결과다.
▲ 사진 왼족부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데일리안 |
“대우가 구조조정에 가장 소극적” vs “가장 모범답안 낼 자신있었다”
△사회 = 당시 관료들은 한결 같이 대우가 구조조정에 가장 소극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시장의 신뢰를 잃었고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우리는 가장 모범적인 구조조정을 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IMF식 구조조정에 반대했지만, 나는 전경련 회장이었다. 아무 것도 안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사실 정부가 우리더러 자산 팔아 구조조정 하라고 말할 자격이나 있었나 묻고 싶다. 정부가 떠넘긴 대우조선을 정상화하느라 팔 수 있는 자산을 모두 팔아 7200억원을 투입했던 게 우리다. 그런데 나중에 대우조선을 6개월 안에 팔아 외자유치 실적 내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대우가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음은 분명하다. 자산 매각이든 외자유치든 5대그룹 중 꼴찌였다. 1998년 5월에 제출한 그룹별 구조조정 계획을 보면 삼성과 현대가 목표치 100%를 넘겼고 SK LG는 90% 넘게 자구노력을 달성했다. 그런데 대우는 고작 18.5%에 불과했다.
△사회 = 당시 대우가 부채비율이 가장 높아 대표 부실기업으로 공격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그건 대우의 사업 구조를 잘 몰라 하는 얘기다. 대우는 수출로 먹고 사는 그룹이었다. 당연히 무역 외상채권 등이 많았고 이것들이 부채로 처리됐다. 더군다나 당시엔 환율이 달러 당 800원에서 1600원이 되니 부채가 하루 아침에 두 배나 늘어난 상황이었다. 환율 때문에 부채비율이 올라간 것을 왜 기업 잘못으로 몰아 구조조정을 강제했는 지 묻고 싶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가장 먼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춘 기업이 삼성이었다. 삼성이 그것 때문에 나빠졌나? 오히려 좋아졌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그건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부채비율을 억지로 낮춰 그런 게 아니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정건전성 기준이 자기자본 부채비율 200%였다. 당시 우리 30대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이 518%였다. 우리도 거기에 맞추자는 것이었는데 대우만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그룹들은 2년 쯤 뒤 모두 맞췄다. 당시 그룹 전체 평균 200% 부채비율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재벌기업의 건전성 강화 차원에서 매우 유효한 정책이었다.
“IMF 구조조정 처방 옳았다” vs “알짜기업 헐값매각 누가 책임지나”
△사회 = 당시 IMF의 구조조정 처방이 옳았다고 보는가.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그 때 전방위적인 구조조정이 없었다면 1년 반 만에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당시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신인도를 회복해야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과거와 같은 방만한 투자를 계속하면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해 다른 재벌들은 모두 자구노력을 펼쳤다. 대우만 그러지 않았다. 그 결과가 그룹 해체였다. 다른 그룹들은 구조조정을 잘한 덕분에 이후 유동성 위기 없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잘 견뎌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나는 IMF 프로그램이 우리를 돕는 게 아니라 관리체제로 바꿔가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말해 왔다. IMF 사태는 기본적으로 금융이 잘못해서, 정부가 금융관리를 제대로 못해 온 것이다. 그런데 환율 때문에 피해를 본 기업들에 되레 책임을 뒤짚어 씌우려 했다. 기업에 구조조정을 너무 압박했다. 외국에서 그런 압력을 넣으면 정부가 막아줘야 하는데 오히려 앞장서 수출 못하게 하고 외국 압력을 핑계 대 국내 자산을 헐값에 넘겨 외국 회사들 배불려 주었다. 나는 수출을 늘리고 외환보유고를 높여 IMF 체제 빨리 벗어나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나와 생각이 너무 달랐다.
△사회 = 대우차를 GM에 헐값 매각했다는 논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GM으로부터 1997년 5월에 합작을 제안받았다. 1998년 1월에 스미스 GM 회장과 MOU(양해각서)까지 체결했다. 당시에는 대우차 국내지분의 절반을 50억~70억 달러 정도 받고 팔아 공동경영하는 쪽으로 얘기가 되고 있었다. 협상은 지연되었지만 나중에 GM 쪽에서 이헌재 위원장 앞으로 인수의향서까지 보냈다. 그런데 일찌감치 협상이 결렬돼 대우가 코너에 몰렸다는 식으로 정부가 얘기하고 다니니 제 값에 팔리겠는가? 정부가 대우차를 거의 공짜로 GM에 넘겨준 셈이다. 이로 인해 한국 경제는 21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고 본다. 대우차를 살렸더라면 지금쯤 현대차와 2사 체제를 유지하며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김우중 회장은 GM과의 전략적 제휴에 모든 걸 걸었던 것 같다. 그러면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불가능한 협상이었다. GM은 대우를 김 회장 만큼이나 잘 꿰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자기 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조건을 바꿔가며 질질 끌더니 1998년 7월에 협상을 깨고 만다. 그 때 이미 대우가 스스로 살아날 방법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본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대우차는 그룹 구조조정을 할 때 비싸게 팔았어야 했다. 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니 아무래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없었다. 매각 협상이 안 된 것일 뿐, 정부 방해는 없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남들은 없는 것도 잘 포장해 비싸게 팔려 하는데 한국 정부는 그 때 우리가 가진 좋은 물건도 쓰레기라고 대문짝만하게 얘기하고 다녔다. 그러니 GM도 대우차를 우리와 처음 협상하던 가격의 5분의 1에 사겠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를 워크아웃에 넣으면서 실사했을 때 대우차의 자산가치는 110억 달러였다. 청산가치로 나쁘게 평가했는데도 그 정도였다. 그런데 GM은 현찰 4억 달러 정도만 내고 가져갔다. 누가 책임져야 하나. 당시 매각 본계약을 체결한 정건용 당시 산업은행 총재는 “이 땅에 대우차 매각 같은 비굴한 협상은 두 번 다시 있어선 안된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구조조정안 너무 늦었다” vs “8개 계열사 경영권 보장 약속 안지켰다”
△사회 = 김 회장은 1999년 7월19일 계열사 구조조정 및 사재 출연을 골자로 한 ‘대우 유동성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당시 정부가 대우차를 비롯한 8개 계열사의 경영권 보장을 약속했었다는데 그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대우 측은 주장한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7월16일 힐튼호텔에서 김 회장에게 7개항의 구조조정안을 건넸다. 자동차 사업을 그룹의 중심으로 남기고 조선과 상용차, 힐튼호텔 등 주력 계열사를 매각하며 김 회장 소유의 주식 일부를 팔아 자동차 사업에 투입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것만 지키면 자동차 부문은 회장이 맡아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얘기했다. 이후 김 회장이 내놓은 사재를 담보로 대우가 4조원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다음 수순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이 위원장은 자동차를 포함해 8개 계열사의 경영권 보장을 약속했었다. 10조원도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그 정도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까지 우리가 발행한 채권 가운데 연말까지 갚아야 할 돈이 10조원이었다. 당장 갚아야 할 돈도 4조원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주일 간 시간을 끌더니 4조원만 주었다. 다시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놓고는 “시장이 대우를 해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나는 그해 5월에 재경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때문에 그 뒤 일어난 일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대우 측 주장대로 몇몇 관료가 일부러 대우를 망하게 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언제든 내용이 불거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안은 이미 대법원까지 가서 사법절차를 마쳤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김 회장 느닷없이 해외도피” vs “정부가 나가있으라 해 놓고는...”
△사회 = 1999년 7월19일 대우 유동성 개선 방안 발표와 함께 김 회장은 명예퇴진을 발표한다. 그런데 이후 김 회장이 출구했고 느닷없이 해외도피설이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당시 대우차를 살릴 사람은 김 회장 밖에 없다고 믿었다. 몇 차례 김 회장과 만났고 워크아웃도 그런 식으로 풀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김 회장의 ‘해외도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워크아웃 한 달 여 후인 1999년 10월11일 김 회장은 중국 출장길에 올랐다. 그리곤 6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궁금하다. 왜 그 때 김 회장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누가 그에게 해외도피를 권했는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유동성 개선방안을 발표한 후에도 채권단이 자금을 제대로 지원해 주지 않길래 내가 계속 항의를 했다. 그러니 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있으니 안된다며 해외로 좀 나가 있으라는 얘기가 전달됐다. 그래서 DJ에게 전화해 확인까지 했다.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정리행서 잘 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강 수석 후임인) 이기호 당시 경제수석과도 만나 잘 처리하겠다는 다짐까지 받았다. 한참 후에나 어긋난 결과를 듣게 되었다. 곧바로 들어오려 했으나 건강 등의 이유로 그러질 못했다. 그 때 들어왔어야 했다. DJ가 있을 때 들어와 제대로 얘기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DJ가 약속한 것도 있었고...
“대우 처리방법 옳았다” vs “기업가치도 엉터리로 평가했다”
△사회 = 대우그룹의 가치 평가도 상당히 차이가 났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1999년 12월 실사 결과 대우의 총 부채는 최대 89조원, 자산은 59조원으로 추산됐다. 시장의 신뢰를 잃어 파산할 수 밖에 없는 수치였다. 김 회장 출국 직후 삼일회계법인이 대우그룹 예비실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 때도 김 회장이 수십조원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멀쩡한 기업을 다 죽었다고 해 놓고 청산가치로 기업을 평가하니 제대로 가치가 계산되었겠는가. 금감위가 회계법인에 지시해 아예 제로(0)로 만든 자산도 있고 절반으로 깎은 것도 수두룩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산이 30조원 넘게 줄어든 것으로 나왔다. 1999년 6월말 현재 12개 계열사 장부상 자산이 91조9000억원이었는데 실사 결과는 61조2000억이었다. 나도 깜짝 놀랐다.
△사회 = 당시 상황에서 적절한 지원만 있었다면 대우가 살아날 수 있었다고 믿나?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 IMF 경제위기는 우리나라 대기업들과 금융기관의 동반부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부실 대기업을 정부가 선별적으로 구제할 수 없었다. 만약 정부가 돈을 투입해 대우를 살렸다면 나라 전체가 망했을 것이다. 국내 금융기관들도 부실채권 정리 때문에 대우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정부가 나서 극복해 주길 원했다. 대우 해체는 정책 당국자들의 판단에서 초래된 게 아니라 시장의 신뢰를 상실한 김우중 회장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 워크아웃을 통해 엄청난 채무를 탕감해 주지 않았어도 대우 계열사들이 잘 나갈 수 있었을까? 34조원에 이른 대우 채무 중 대우건설 등 굿 컴퍼니가 떠안은 부채는 7조원 뿐이었다. 엄청난 쓰레기 채권을 떼어 베드 컴퍼니에 안기지 않았다면 그렇게 빨리 정상화될 수 없었다. DJ정부가 대우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데 다 허튼 소리다. 대우는 시장의 신뢰를 잃어 망한 것이다. 당시 금감위가 대우를 처리한 방식은 당시로선 최선이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지금 대우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회사들을 봐라. 그 때 청산가치로 평가하는 바람에 아까운 많은 우리 자산이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진실을 제대로 알려 대우의 노력과 성과를 재평가받고 싶다.
http://www.dailian.co.kr/news/view/455981
[데일리안 = 조진래 편집인]
2014.8.30일 뉴스
1977년 6월 서울역 앞에 들어선 대우센터빌딩은 이후 주인이 금호그룹, 모건스탠리, 알파인베스트먼트파트너스, NH투자증권으로 네 차례 바뀌었다.
2003년 10월 발행된 대우건설 30년사는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 앞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하고 웅장한 모습의 빌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이 빌딩이 바로 수도 서울과 대우그룹을 상징하던 대우 가족의 총본산이었다"고 적었다.
대우센터빌딩은 대우그룹이 성장하게 된 초석이며 원동력이었고, 대우맨들의 꿈과 요람이며 심장이자 씽크탱크였다.
당시 공사비 200억원이 투입된 대우센터는 지하 2층∼지상 23층 높이에 대지면적 1만583㎡, 연면적 13만2천792㎡로, 서울 최대 규모의 빌딩이었다.
서울의 관문에 우뚝 솟아 있는 23층짜리 갈색 빌딩은 완공된 이후 대우건설, 대우자동차, 대우인터내셔널, 대우조선, 대우전자 등 대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이 빌딩을 거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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