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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_대한민국

연해주 독립운동가 최재형(페치카)

ㅅㅏ진인생 2019. 11. 17. 22:24

최재형(독립운동가)


출생1860년 8월 15일, 함북 경원
사망1920년 4월 7일
업적1908년 동의회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출, 대동공보 사장, 1911년 권업회 발기회 회장, 1914년 한인아령이주 50주년 기념회 회장,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선출, 사임
포상훈격 건국훈장 독립장 1962년
관련 인물/단체 동의회,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회,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

                    


1860년 8월 15일 함북 경원군에서 최흥백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이명은 최 표토르 세묘노비치(Цой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다. 부친 최흥백은 그 당시 경원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다.                                      

1869년 7월 함경도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동포들이 굶어죽는 참경이 벌어지자 부친은 가족을 인솔해 동년 9월 9일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 지신허로 이주하였다. 이후 연추(얀치헤, 煙秋, 현재 추카노프카) 마을로 이사하였다. 이어 20세기 초,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고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서 노보키예프스크(1905, 현재 크라스키노)로 이사하였고, 다시 1910년에는 슬라뱐카(1910년)로, 마지막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이사하였다.

이주한지 2년 후인 1871년 한인으로서 러시아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되었다. 소년시절 러시아상선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선원생활을 하면서 폭넓은 견문과 경험을 축적 하였다.

1878년부터 조선 ・ 중국 ・ 러시아 3국 국경이 접해있는 지역인 얀치혜에서 러시아병영의 통역으로 일하였다. 1880년 연추남도소의 러시아어 서기로 피선되어, 3년 동안 문서정리와 사무처리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 1~2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집과 기념동판

1884년 연해주 당국은 군사적 목적으로 조선 국경까지 군사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 도로는 블라디보스토크-라스돌리노예-바라바시-슬라비얀카-노보끼에프스크-크라스노예셀로 촌을 연결하는 군용도로였다. 군용도로 건설시 통역원으로 동원되었다.

연해주 당국으로부터 영군 300명을 거느릴 권한을 받아 연추에서 멍고개까지 도로를 건설하였다. 따라서 10년간 도로건설에 관여하는 통역으로 일하면서 많은 조선인들과 가까워졌으며, 그들의 신임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1893년 연추남도소의 도헌에 피임되었다. 이때 유실수를 이용한 녹지조성과 교육계몽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축적된 부와 러시아인 주류사회에서 얻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0년대 말 지금의 하산 지구 크라스키노의 노보키예프스크에 최초의 공원(과수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에서도 큰 업적을 세웠다. 해마다 성실한 많은 한인 젊은이들을 뽑아 러시아 대도시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외에도 넓은 인맥 덕분에 당시 큰 상업회사들이었던 ‘추린’, ‘쿤스트와 알베르스’, ‘퍈코프’, ‘마르코프’ 등의 지역판매상점이 포시에트 지구의 노보키예프스크, 슬라뱐카, 아디미 등에 유치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 건물들은 주변에서 가장 멋진 벽돌건물들이었고, 주문신청을 받은 상점들은 1주일 안에 주민들에게 필요한 상품들을 제공하였다.

1894년 페트로그라드에 가서 제1차 전러시아 면장대회에 참여하였고, 그 후 13년 동안 도헌(都憲)으로 일하였다.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의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에 참여하였다.

1890년대 하반기 재러동포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지원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건설청부업과 상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시기 연추지역은 조선, 중국, 일본과 관련된 러시아의 주요 군사지점으로서 다수의 러시아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수용할 막사 등 건축물과 이들이 거주하는데 필요한 연료, 상품 그리고 이들을 먹일 육류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특히, 의화단사건, 러일전쟁 등이 일어나자 더 많은 물류가 필요하게 되어,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한 바실리 루키치(Хан Василий Лукич)와 한 옐리세이 루키치(Хан Елисей Лукич) 형제, 김 표트르 니콜라에비치(Ким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최 니콜라이 루키치(Цой Николай Лукич) 등의 재력가들과 의형제 관계를 맺었다. 자신의 조력가들과 상업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를 통해 러시아 군(軍)에 대한 물품청부사업 등을 통해 성공적으로 물질적 기반을 다져놓을 수 있었다.

러일전쟁 후 1905년 말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데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을사늑약 체결로 인하여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데 더욱 놀랐다.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실상과 국제정세를 분명히 이해하고자 할 때에, 평소 “유신개혁 인물로 외국에 망명하여 세계대세를 통관하는” 인물로 알고 있던 박영효(朴泳孝)로부터 두어 번 일본으로 올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바로 일본 도쿄(東京)로 향하였다. 

일본에 반년동안 체류하면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았고, 세계정세의 흐름도 파악하였다. 그리고 박영효와의 만남을 통하여 국가의 위급함을 절실히 깨닫고 이에 민족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서약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와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계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李範允)과 연락하여 함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쓰고자 하였다.

『해조신문』에 소개된 동의회 취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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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4월 동의회를 조직한 이후 총재로서 내외에 이 조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해조신문』에 그 취지서를 게재하였다. 동의회는 1905년 이후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국권회복운동 세력을 총 망라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함께 한 중심인물은 이범진(李範晉), 이위종(李瑋鍾) 부자와 이범윤 등이었다. 많은 자산의 소유자였으므로 동의회의 조직과 운영, 활동에 드는 비용 대부분을 지출하였다.

러시아지역에서 한인들의 의병활동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8년 4월까지 연해주로부터 약 1천명의 의병이 함경도로 넘어들어 갔는데, 이 때 이범윤과 힘을 합해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부대를 100명 내외의 소부대로 나누어 비교적 일본수비대의 경비가 취약한 지점을 골라 산발적인 도강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국내진공에 성공한 각 부대는 함경도 갑산, 무산 등 예정 지점에 집결하여 장기적이며 항구적인 국내항쟁을 시도하였다.

최재형과 최재형의 형, 그리고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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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의병들의 국내진입에 국경지대의 일본인들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러시아 지역에 밀정을 파견하는 한편 군대를 전진 배치하여 재러의병의 국내진공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일본측의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이범윤과 함께 이끄는 연해주의병들은 6월말과 7월초에 두만강 하류에 있는 일본 소규모부대를 궤멸시키고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활동은 국내진공작전의 실패, 일제의 러시아에 대한 외교와 이범윤 등과의 갈등 ・ 대립 등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하게 되어 1908년 하반기 이후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러시아지역의 의병이 이범윤, 유인석(柳麟錫) 등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정치적 망명세력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던 시기에 다른 재러한인 자산가계급과는 달리 의병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일제의 조선강점이 다가오면서 더욱 무장투쟁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무장투쟁노선에서 계몽운동방향으로 운동 노선을 전환하였다.

한국어 민족지 『대동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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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한국어 민족지 『대동공보』 사장으로서 언론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장투쟁의 시기를 엿보았다. 『대동공보』는 일제의 조선침략이 더욱 노골화되던 시기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1908년 11월 18일 창간하여 1910년 9월 1일까지 약 2년 동안 발행한 한글 민족지였다. 이 신문의 종지는 동포의 사상을 계몽하여 문명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며 국가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의 내용 중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국권회복,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에 대한 소식, 국내 소식, 러시아의 한인 배척과 재러한인의 대응 등에 관한 것이다. 재러한인의 권익과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던 『대동공보』는 일제의 요청에 따른 러시아 당국에 의해 1910년 9월 1일 폐간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신문 간행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대양보』가 간행되자 신문의 발행소 건축에 기여하였다.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므로 일본에게는 최고의 경계대상이었다. 러시아 정부에 대한 일제의 끈질긴 외교적 간섭과 압박, 그리고 공작으로 인해서 한때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1910년 러일협정 체결 이후 비밀첩자들을 통해 일본과 비밀협정을 체결하였다는 거짓정보를 날조해 흘렸다.

일본 첩보기관에 의해 기만당한 극동 대군관구사령부는 이러한 거짓선전에 근거를 두고 1911년 러시아에서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도 이 문제는 우수리철도 헌병경찰국장 쉐르바코프(Р.П.Щербаков)가 연해주 군무지사 스볘친(И.Н.Свечин) 앞으로 “본인은 한인 최재형을 애국자이자 러시아에도 충성스런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옹호하는 내용의 협조서신을 보냄으로써 가까스로 일단락되었다.

1911년 12월 19일,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된 후 망국민이 된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동포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한인들이 러시아에서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고 조직한 최초의 한인 단체로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4년 동안 연흑룡주 지역의 대표적인 재러한인 권익옹호기관이자 독립운동단체로서 활동하였다.

1911년 6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 발기회가 개최되었다. 먼저 임시임원을 선출하였는데, 그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13년 10월 6일 특별총회에서도, 1914년 1월 19일 정기총회에서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최재형의 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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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권업회는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 절정에 이르러 다시 개전할 조짐이 있자 독립운동 지휘기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인들의 노령이주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그 시기를 이용하여 재러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이때, 한인아령이주오십년 기념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행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개최될 수 없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좋아지자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15년 8월 일본이 한인지도자 28명의 추방을 러시아측에 요청하였는데, 그 명단에 들어 있었다. 아울러 1916년 8월 러일신협약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어 주요 한인지도자인 김도여(金道汝), 이종호(李鍾浩)의 가택이 수색당할 때, 슬라뱐카에서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3일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압송되었다가 11일째 되는 날 석방되기도 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얀치헤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18년 6월 13일부터 22일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는 한인회임시중앙총회에서 보고위탁을 받아 초청받은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안건토의를 구성한 각 분과위원회 가운데 토지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회에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간부선출에서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만장일치로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일본군이 1918년 8월 러시아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침략해 오자 가족을 이끌고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우수리스크 군회(젬스트보) 의원, 검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대한국민의회는 회장 문창범(文昌範), 부회장 김철훈(金哲勳), 서기 오창환(吳昌煥) 등의 명의로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또한 3월 중순, 국민의회가 이동휘를 선전부장에, 김립을 이동휘의 부관에 선임해서 이동휘를 간도방면에 파견해 독립운동의 선전 선동에 종사하게 하였을 때,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을 논의하게 되었다.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조계의 김신부로에서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제1회 의정원회의가 개회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치 아니하였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연해주와 연흑룡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극동 공화국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 쉬코토보, 포시에트, 기타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세력에 대해 대대적 공격을 가해 왔다. 이때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황카피톤) 등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기 전날 밤 몸을 피신하라는 가족들의 간청이 있었지만, “만일 내가 몸을 숨기면 일본군은 엄마와 너희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할 것이다. 나는 일본군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지 보았고, 그들의 규율을 알고 있단다.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 속에 너희들의 목숨을 내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오래 살았고(당시 60세), 너희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다”고 말하며 죽음의 상황을 준비하였다고 후손들이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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