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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평문씨 세거지와 인수문고(요약) 본문
남평문씨 세거지 (南平文氏本里世居地)
문익점[文益漸 ]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서장관으로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의 보급에 크게 기여한 문익점 18대손인
인산재 문경호가 집을 짓고 그 후손들이 분가하여 집을 지으면서 세거지가 되었다.
문경호(1812~1874)가 61세(1872년)에 집을 짓고 그 후손 수봉 문영박(1880~1930) 아들들이
분가해 한 동네를 이루었다.
남평문씨 세거지 설경
남평문씨 세거지 토담길 능소화(매년6~7월)
문영박 (文永樸)
1880(고종17)∼1930년 독립운동가.
자는 장지(章之), 호는 수봉(壽峯). 일명 문박(文樸).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
영남의 거유(巨儒)로서 1919년부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전국 각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계속해서 송달해주어 임시정부를 크게 고무, 진작시켰다.
정임시정부에서는 문영박에게 추조문(조문)과 특발문(편지) 을 보냈다.
임시정부에서 보낸 추조문(조문)
임시정부에서는 문영박의 사망에 즈음하여 1931년 10월 임시정부 일동 명의로
특발(特發)과“대한국춘추주옹문장지선생(大韓國春秋主翁文章之先生)”이라는 조문(弔文)을 발송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31년 10월 상해 임시정부 일동 명의로 문영박의 조문을 보내왔다
(大韓國春秋主翁文章之先生)
임시정부에서 보낸 특발문(편지)
30년만에 전달된 추조문(조문)과 특발문(편지)
추조문과 특발문이 임시정부에서 밀파되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1887-1933) 선생에 의해 전달하려 했으나,이교재선생이 경남 창원 자택에 먼저 들렸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옥사했기 때문에 전달되지 못하다가. 해방 후 1963년 이교재 선생 후손들이 집수리를 하면서 천정에 숨겨둔 문건을 발견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임시정부에서 추조문을 보낸 지 30년이 훨씬 지나 이곳 후손에 전달되었습니다.
문태갑 옹 (文胎甲/前,서울신문사장)
수봉의 둘째 아들인 문진채의 둘째 아들이니,
인수문고의 전신인 만권당(萬卷堂)의 설립자 수봉 문영박의 손자이다.
현재 남평문씨 세거지에 거주하신다.
인수문고 (仁壽文庫)
서책2만권이 보관되어 있는 국내최대의 문중문고 이다.
1910년 나라를 잃은후 문영박文永樸 선생이 19세기 서적들과, 그의 3대 후손 문태갑씨(前,서울신문사장)가 20세기 책을 모아만든 문중문고로 국내최고 2만여 책을 소장하고 있다.
문영박, 호는 수봉(壽峰) 또는 수백당(守白堂), 자는 장지(章之)다. 서른 즈음인 1910년부터 타계한 30년 직전까지 20여년에 걸쳐 모아들인 것이다. 수봉은 허미수를 이은 남인 계열로 치주 손정은, 만구 이종기한테 배우고, 심재 조긍섭, 근재 정지순, 다곡 이기로, 백괴 우하구, 소암 김현동 등 거유들과 어울렸다. 일찌기 국토를 순례하며 견문을 넓히고 1910년 따로 광거당을 지어 만권당을 두었다. 그곳에서 매일 5~6명의 유림이 모여 필요한 책 목록을 만들고 하나하나 사들였다.
인수문고(仁壽文庫)의 기반이 된 만권당(萬卷堂)은 수봉 문영박(壽峯 文永樸, 1880~1930)이 나라가 망하던 1910년 무렵에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가 강점하여 신식 교육기관을 대거 설립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문씨 집안에서는 일제의 교육기관에 자녀를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문중에서 자녀들을 직접 교육하려고 설립한 일종의 사립학교이자 도서관이 바로 < 만권당(萬卷堂)>이라고 한다. 그는 구입할 책의 목록을 작성하여 대구와 서울을 직접 오가며 국내서적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수장하고 있는 서책 중에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고가의 전집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중국에 산재한 역사서·문집) 그리고 이 책을 수입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구한말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 1850~1927, 1908년 중국 망명)이었다고 전한다. 그는<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와 <한사계(韓史棨)>같은 저서를 남기는 등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니, 인수문고에 역사책이 많은 것도 아마 김택영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택영이 중국에서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에 싣고서 대구 인흥리까지 옮겨 왔다.
수봉정사壽峰精舍 (수백당守白堂)
수봉 문영박(1880-1930)의 아들5형제가 아버지를 위해 1936년 지었다는
수봉정사(수백당)는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거당(廣居堂)
1872년(고종9) 후은공 문봉성(後隱公 文鳳成 1854-1923)이 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한 교육 장소로 지었던 4칸 초가집을 헐고 1910년에 아들 수봉 문영박(壽峯 文永樸 1880-1930) 선생이 다시 지은 건물이다.
예전에는 "만권당" 으로 불리웠다.
문중의 자제들이 모여 학문과 교양을 수양하고,전국각지 에서 선비들이 모여 토론 할수있게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축물로 문중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장소였으며, 많은
서책을 소장하여 전국의 학자들이 찾아오고 강론하는 곳이었다.
고풍스런 분위기로 인해 1980년대 장미희가 주연한 영화 <황진이>의 촬영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강수연이 주연한 <씨받이>에서는 수봉 정사와 문씨 종가 죽헌종택이 촬영 무대로 등장했다
광거당(廣居堂)
맹자의 ‘천하의 넓은 곳에서 거처한다(居天下之廣居)’는글에서 따왔으며
편액의 글씨는 조선 후기 서화가였던 석촌 윤용구(尹用求) 선생의 작품입니다.
광거당(廣居堂)
임오군란 때 국내로 들어와서 활동했던중국의 정치가이며 교육자인 張鍵(장건)이란 분의 글씨입니다.
(광거당(廣居堂) 은 2개의 편액이 있습니다)
高山景行樓(고산경행루) 편액이 걸려 있는데
내용은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 길처럼 따라간다’는 뜻이며
중국인 서예가 장건張鍵 의 글씨입니다.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 수석과 오래된이끼,연못이 있는집/추사김정희서체
남평문씨 세거지는 일연스님이 머물었던 옛,인흥사 절터였다.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wD5DvDPLtxU 대구유교문화해설사 송은석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401-2번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01088.html#cb
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JOIg&articleno=7346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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