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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의 기록"이 담긴사료 본문
1883년 단군 초상화 [단군학자료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후기인 1883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군 초상화가 일반에 공개된다.
단군 초상화는 20세기 이후에 제작한 그림만 존재한다고 알려져 이 그림이 현존 최고(最古) 작품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재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인 임채우 단군학자료원장은 23일 단군문화포럼 주최 '독립운동의 상징, 단군 영정 전시회'에서 1883년 10월 봉안한 단군 영정을 선보인다고 밝혔다. 전시회는 오는 26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다.
임 교수가 발굴한 단군 영정은 크기가 대략 가로 51㎝, 세로 80㎝이다. 초상화는 천에 그렸으며, 뒤쪽에 초상화 초본과 선관(仙官) 스케치 등 그림 3장을 배접했다.
오른쪽 하단에 그림에 관한 정보인 화기(畵記)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임 교수는 화기를 '광서구년 계미 10월 봉안단군화상/ 시주질/ 시주 을해생 김전 을축생 이두성/ 편수 을묘생 김관오'(光緖九年 癸未 十月 奉安檀君畵象/ 施主帙/ 施主 乙亥生 金奠 乙丑生 李斗聖/ 片手 乙卯生 金觀伍)로 해독했다. 광서는 청나라 광서제 연호로 보이며, 그렇다면 광서 9년은 1883년이라고 그는 전했다.
임 교수는 "편수는 불교에서 보조화사로, 김관오가 태어났다는 을묘년은 1855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다만 김관오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화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한 글씨가 있어 중복해 화기를 조성했을 수도 있다"며 "광서본 안료가 일제강점기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으나, 후대에 덧칠했을 확률이 높고 양식상 위작이라고 볼 근거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엇보다 단군 초상화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단군 화상(충남 문화재자료 제369호)과 비교하면 광서본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부여에 있는 초상화는 가로 53.3㎝, 세로 33.6㎝다.
임 교수는 광서본 초상화에서 확인되는 화풍도 다른 단군 영정과는 구분된다고 밝혔다.
그는 광서본 초상화 특징으로 색동치마, 씩씩하고 우람해 보이는 인상, 밑그림과 후광(後光)을 꼽고 "상의에는 꽃무늬가 있고, 하의는 색색으로 칠했다"며 "색동치마는 고구려 수산리 벽화에 나오는 의상과 형태가 비슷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광서본 초상화를 직접 살핀 이태호 명지대 초빙교수는 "단군을 위한 독립 공간보다는 여러 무속 신들이 함께한 민간 사당에 봉안한 것으로 짐작된다"며 "조선시대 불화와 제작방식이 유사하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얼굴에 대해서도 "좌우 끝부분을 살짝 올려 날카롭게 그린 눈썹은 불화에서 흔히 발견되며, 담홍색 선묘로 부드럽게 표현한 눈과 코는 조선 후기 초상화 기법"이라며 "신라 솔거가 그렸다는 단군 초상화에 근접한 작품이 발굴되고, 김관오라는 화가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출현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시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단군 초상화와 조각상, '광무 9년'(1905)이라는 명문이 있는 천부경(天符經) 각석, 대종교 독립운동가 나철 편지 등이 나온다. 오는 28일과 다음 달 4일에는 학술대회도 연다.
2019.9.23 연합뉴스
단군(壇君)
정의
초기국가시대 고조선의 제1대(재위:BCE.2333∼BCE.1122) 왕.
단군(壇君)은 단군왕검(壇君王儉)·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위서(魏書)』와 우리 나라의『고기(古記)』를 인용한『삼국유사』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정사인『삼국사기』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비된다.
한편, 고려시대의 기록으로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帝王韻紀)』가 있으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조선 초기의 기록인 권람(權擥)의『응제시주(應製詩註)』와『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반적으로 단군의 탄생과 고조선 건국에 관한 문제를 논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삼국유사』이다. 먼저『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주 02) 환웅이 자주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렸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 속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였는데 3·7일(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이것을 못 참아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해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壇君王儉)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주 03) 즉위 후 50년인 경인(庚寅)주 04)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주 05)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하였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나라 호왕(虎王)주 06)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임금으로 봉하였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한편,『제왕운기』에서는『본기(本紀)』(본기는 ‘단군본기’인 듯함)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 주고 있다. 단군본기인용
“상제(上帝)인 환인에게 서자인 웅(雄)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 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아 귀신〔鬼〕3,000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오니 이가 바로 단웅천왕이다.……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셔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조선 지역에 근거하여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시라(尸羅)주 07)·고례(高禮)주 08)·남북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扶餘)·예(濊)·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계이다. 1,038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죽지 않은 까닭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단군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두 기록은 기본적인 내용에서는 비슷하나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먼저 단군을 표현함에 있어『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로 단군을 기록하고 있고『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각기 다르게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후자로써 단군을 나타낸다.
한편,『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조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함께 기록하고 있으나,『제왕운기』에서는 전조선(前朝鮮)이라는 항목에서 단군에 의한 조선을 기술하고, 후조선(後朝鮮) 항목에서 기자에 의한 조선을 언급하여 후속하는 위만조선과 함께 삼조선(三朝鮮)으로 구분하여 파악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단군(壇君))]
오른쪽 하단에 그림에 관한 정보인 화기(畵記)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광서구년 계미 10월 봉안단군화상/ 시주질/ 시주 을해생 김전 을축생 이두성/ 편수 을묘생 김관오
'(光緖九年 癸未 十月 奉安檀君畵象/ 施主帙/ 施主 乙亥生 金奠 乙丑生 李斗聖/ 片手 乙卯生 金觀伍)로 해독했다.
광서는 청나라 광서제 연호로 보이며, 그렇다면 광서 9년은 1883년이라고 그는 전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단군 초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공개됐습니다.
임채우 단군학자료원장은 그림 오른쪽 아래 청나라 연호 '광서 9년'에 근거해 136년 전인 1883년
제작된 단군 초상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이 그림은 단군 초상화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부여박물관의 단군 화상보다 크기가 더 크고, 조선시대 불화 양식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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