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라는 희대의 위서가 판을 치게 된 근원을 알게 되면 매우 허탈해진다. 그것은 단지 글자 하나를 잘못 읽어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단군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책이다. <삼국사기>에는 왕검은 등장하는데, 단군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단군의 계보도 같이 나온다. 이 계보가 문제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인(桓因)이 있고 그 아들 환웅(桓雄)이 있다. 환웅의 아들이 바로 단군이다. 문제는 이 단군의 할아버지인 환인에게 있다. 환인의 ‘인’은 전해오는 <삼국유사>에 因이라고 되어 있지 않다. 어떤 판본에는 囯으로 나오고 어떤 판본에는 囗(큰입구) 안에 士(선비사)로 나온다(이체자라서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없는 문자이므로 앞으로는 '囗/士'로 표기). 이런 글자들을 일러 이체자(異體字)라고 한다. 한자는 오랜 세월을 두고 발전한 문자로 한 글자가 여러 모양을 가지고 있다가 점차 하나로 통일 되었다. 지금도 體와 体처럼 같은 글자인데 다른 형태로 쓰는 것들이 많다. 옛날에는 이런 글자가 훨씬 많았다.
囯라고 되어있는 글자는 나라 국(國)자의 약자인 国자와 매우 흡사할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라 국(國)자의 약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환국이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囗/士'자는 國의 약자가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글자도 아니다. 이건 대체 무슨 글자일까? 그리고 두 글자 중 어떤 것이 더 오래 전에 만든 <삼국유사>에 실린 것일까?
'囗/士'와 因은 고려대장경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
'囗/士'이 더 오래된 판본에 등장하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囗/士'이라고 썼는데, 뒤에 이 글자를 잘 모르고 囯으로 잘못 쓰게 된 것이다.
그럼 무슨 근거로 <囗+士>자를 ‘국’이 아니라 ‘인’으로 읽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나라이름연구소 조경철 소장이 <단군신화의 환인ㆍ환국 논쟁에 대한 판본 검토>(한국고대사탐구23)에서 자세히 논증한 바 있다.
조경철 소장은 고려대장경에서 '囗/士'자를 찾아내서 그 글자가 因과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중국의 이체자자전에도 '囗/士'이 因의 이체자라는 것이 남북조 시대의 동위(534~550)에서 사용했다는 용례와 함께 실려있는데, 고려에서 사용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그 이체자를 고려에서도 사용했다는 것이 조경철 소장에 의해서 명백하게 증명이 된 것이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이도학 교수도 남북조 시대 북제 565년에 '囗/士'이 因의 이체자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 '囗/士'을 國으로 잘못 읽으면서 난데없는 ‘환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일부 조선 학자들이 '환인'을 '환국'으로 잘못 읽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 중에는 환인을 환국으로 읽은 사례가 발견된다. 남구만(1629~1711)은 <약천집>에서 <삼국유사>를 인용하면서 “昔有桓國帝釋 庶子桓雄”이라고 썼으며 이종휘(1731~1797)도 <수산집>에서 “朝鮮之初 有桓國帝釋 庶子桓雄”이라고 쓰고 있다.
두 사람 다 ‘환국’ 뒤에 ‘제석’을 붙이고 있다. ‘제석’은 불교에서 말하는 신의 이름 중 하나인데, 원래 <삼국유사>의 주석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삼국유사>에서는 환인 이름 밑에 “제석이라 일컫는다”라고 되어 있다. 본문과 주석을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환인을 그냥 환국으로 치환해버리면 이상한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문장은 이러하다.
환웅의 아버지 이름으로 환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환국으로 바꿔버리면 문장이 이렇게 꼬이게 된다.
환웅이 누구의 서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자 유학자들은 이 문장을 이렇게 매끄럽게 고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환국’이 탄생했다. 이 모든 것이 '囗/士'을 國으로 잘못 읽어서 발생한 일이다. 이런 사례가 흔한 것은 아니었다. 환인의 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독한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삼국유사>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제왕운기>에 환인의 ‘인’이 因으로 나와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환인의 경우 또렷하게 因으로 나와 있다. 세종실록에는 단인, 단웅, 단군천왕이 등장하는데 이때 단인의 ‘인’을 因으로 쓰고 있다. 환인의 다른 이름이다. 아예 단종실록에는 환인이 등장하는데 역시 因으로 쓰고 있다. 권람(1416~1465)의 <응제시주>에도 환인(桓因)이라고 나온다. 이처럼 고려, 조선 전기의 모든 자료가 환국이 아니라 환인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선조 때 사람 조여적이 지은 <청학집>과 숙종 때 승려 추붕(1651~1706)이 쓴 <묘향산지>에는 환인의 ‘인’을 어질 인(仁)으로 쓰고 있다. 같은 음가인 仁을 사용해서 因 글자를 대체한 것이다. 仁의 뜻이 더 좋기 때문에 같은 음을 골라서 차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제 때 민족주의 사학자들, 환국을 발견하다
동경제국대학에서 <삼국유사>를 활자본으로 1904년 만들었는데 이때 “昔有桓國(謂帝釋也)”이라고 나왔다. 그런데 1921년에 교토대에서 발간한 <삼국유사> 영인본을 보면 환인의 ‘인’자 위에 덧칠을 해서 因으로 보이게 만들어놓았다.
최남선은 1918년에 ‘환국’을 주장하면서 환국은 천국이라는 의미며 환 민족의 원 거주지라고 해석했다. 그는 1927년 <삼국유사> 교감본을 낼 때도 환인이 아니라 환국으로 썼다. 조선사편수회 회의 때도 환인이라고 쓰면 안 되고 환국으로 써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이능화도 환인은 잘못된 것이고 환국이 맞다고 주장했다. 신채호 역시 불교도들이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당대의 석학들이 ‘환국’을 주장했기 때문에 ‘환국’은 상당히 널리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대에 환인으로 읽는 것이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대종교는 환인-환웅-단군의 삼신일체설이 교리였으므로 환국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또한 최남선 역시 해방 후에 낸 <신정본 삼국유사>에서 기존의 환국을 버리고 환인(桓'囗/士')으로 똑바로 표기하게 되었다. 그는 1954년 ‘단군고기전석’에서 “昔有桓因”을 써서 완전히 환인으로 돌아섰음을 증명했다.
유사역사학, 환국이라는 사상누각에 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뿌리 내린 ‘환국’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66년에 문정창이 <단군조선사기연구>를 내놓으면서 일제가 ‘환국’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을 폈다.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사서를 변조해가면서 환국을 말살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반일감정에 편승해 시민들에게 먹혀들었고, 이후 유사역사가들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 <삼국유사>를 오독해서 ‘환국’이 등장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因의 이체자 문제를 넘어서서 당대의 많은 사료가 ‘환인(桓因)’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유학자들의 오독 때문에 ‘환국’이 등장하고 민족 자존감을 앙양시켜야 했던 역사가들이 ‘환국’을 주창하면서 잘못 읽은 단어가 널리 퍼지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이 과정이 바로잡혀가던 와중에 유사역사가들이 ‘위대한 환국’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그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이다. 애초에 잘못된, 있지도 않은, 사상누각이라는 말도 아까운 해프닝이 바로 ‘환국’이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했는데, '환국의 난'이야 말로 우리 역사상 사료 오독 제1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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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편집자, 게임기획자 등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며 90년대부터 유사역사학에 대한 탐구를 '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로그를 통해서 발표해왔다. <유사역사학 비판>라는 유사역사학 연구서를 내놓고 한국고대사학회 주최 시민강좌, 계간 역사비평 등을 통해 유사역사학 비판을 계속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