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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ㅏ진인생/DS5ZWK
탁영선생(김일손金馹孫 1464년~1498년) 약력 본문
탁영선생(김일손1464-1498).
본관이 김해인 탁영선생(김일손金馹孫) 은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세까지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 <동사강목> <사서> 등을 배우고
이어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 정여창, 강혼 등과
함께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
23세 되던 해인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
1491년(성종 22) 장래가 촉망되는 문신(文臣)에게 주어지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혀 학문연구와 독서에 매달리는 영예를 누린다.
이어 정언, 이조좌랑 · 정랑 등을 두루 거치면서 공직자로서 자질을
더욱 향상시켰다.
한 때 글의 음운이나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가서 알아오는 임시직인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정유라는 사람이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를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이렇게 공직자로서 직무에 충실할 즈음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종은 세조 때부터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에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 사림파의 의견을 수용해 주어 여러 면에서 성리학을 접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곧은 관료이자 부정과 비리를 적발하고 시정하는 직책인 정언과 이조(吏曹)에 근무하면서 기득권층의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비판했던
탁영( 길일손의 호)은 유자광, 이극돈 등 권신들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었다.
스승 김종직 또한 남이장군의 옥사(獄事)가 간신 유자광의 무고로 생각하는 등 훈구 세력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동안 사림파를 옹호해주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1498년( 연산군 4) 때마침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설치되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던 탁영은 스승 김종직이 중국의 초나라 의제가 항우에게 내 ?긴 사실을 애도해서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극돈이 이를 알고 세조를 비방하는내용이라며 간신 유자광에게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엇보고 있던 훈구파들은 김종직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도모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하니 대노한 연산군은 죽은 김종직은 관을 쪼개어 목을 잘랐을 뿐 아니라
그가 쓴 책마저 불살라 버리고 관련자를 처형했다.
이 때 희생되거나 죄를 받아 처벌된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한 사람은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고,
곤장 100대에 3천리 유배된 사람은 표연수, 정여창, 홍한, 이총, 강경서, 이수공, 등이며,
이주, 김굉필, 박한주 등은
장 80대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밝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보려던 선비 탁영은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러나 훗날 바른 평가가 내려지면서 순조 대에 이르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 회로당기(會老堂記)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선생이 생전에 아끼든 거문고 일명 탁영금(濯纓琴)은
우리나라에서 악기로는 유일하게 보물 제957호로 지정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 글출처 :나무이야기,꽃이야기 ![]() 글쓴이 : 이팝나무 사진은 "사진인생"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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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10 1464(1세) - 淸道郡 雲溪里 少微洞에서 태어나다.
성종 2 1471(8세) - 부친이 예문관 봉교로 부임하자 外家 근처인 龍仁 鴨皐里로 이사하다.
- 玉樹精舍에서 형들과 함께 독서하다.
성종 9 1478(15세) - 성균관에서 독서하다.
- 3월, 丹陽 禹氏와 결혼하다.
성종 10 1479 (16세) - 기해 成化 15 16 8월, 仲兄 金驥孫과 漢城府 進士初試에 합격하다.
성종 11 1480(17세) - 경자 成化 16 17 3월, 양친을 따라 雲溪로 돌아가다.
- 9월, 密陽에서 居喪中인 金宗直에게 학문을 배우다.
이때 金宏弼ㆍ鄭汝昌 등 12명과 神交를 맺다.
성종 12 1481(18 세) - 신축 成化 17 18 2월, 김종직에게 韓愈의 글을 배우다.
- 7월, 남효온과 龍門山을 유람하다.
- 8월, 原州의 酒泉山으로 元昊를 방문하다.
성종 13 1482(19세) - 10월, 庭試에 응시하여 두 兄의 장원급제를 위해 병을 핑계하고 退場하다.
이때 두 형이 1, 2등을 하다.
성종 14 1483(20세) - 9월, 부친상을 당하다.
- 11월, 淸道 水也山에 장사 지내다.
성종 17 1486(23 세) - 淸道郡學이 되다.
- 8월, 生員ㆍ進士가 되다.
- 10월, 文科覆試에서 〈中興策〉으로 장원하다.
- 12월, 承文院正字가 되다.
성종 18 1487(24세) - 홍문관 정자가 되다.
- 4월, 부인상을 당하다.
- 9월, 부모 봉양을 위해 晉州牧學이 되다.
성종 19 1488(25 세) - 3월, 牧使 慶太素 및 遊官諸公 21人과 矗石樓에서 修禊하고 序를 짓다.
- 7월, 병을 핑계로 敎授職을 그만두다.
- 9월, 舊室의 동편 臥龍峯 아래에 雲溪精舍를 세우고 이에 ‘臥龍樵夫’로 號를 삼다.
성종 20 1489(26세)- 4월, 藍溪에 가서 鄭汝昌을 방문하고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頭流紀行錄〉
- 6월, 예문관 검열이 되다.
- 〈送崔玉果序〉를 짓다.
- 7월, 忠淸道 木川에서 禮山 金氏와 결혼하다.
- 사직소를 올리고 三事(酒色射)를 아뢰어 加資되다.
- 朱溪君 李深源과 治道를 논하다.
- 경연에 入侍하여 李胄와 함께 史官의 記事之規를 논하여 윤허받다.
- 9월, 차자를 올려 治道에 관한 12事를 아뢰다.
- 10월, 탄핵을 받고 金寧(金海)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田里로 돌아가다.
- 11월, 遼東質正官이 되어 중국에 가다.
성종 21 1490(27세)- 烏蠻館에 머무르다. 이때 입고 있던 옷으로 周旺이 소장한 古畫 14幅과 바꾸다.
- 2월, 귀국하다.
- 3월, 駱山의 園亭을 하사받다.
- 承政院注書가 되어 檢閱을 겸하다.
- 金宗直의 〈吊義帝文〉을 史草에 싣다.
- 4월, 史館과 本院의 일기를 참조하여 남효온의 〈六臣傳〉을 改撰하다.
- 모친의 병으로 사직하다.
- 5월, 김굉필과 伽耶山을 유람하고 釣賢堂에 머물며 講學하다.
- 8월, 홍문관부수찬 지제교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이 되다.
- 9월, 中興寺에 있던 金時習을 방문하다.
- 성균관 전적이 되다.
- 10월, 사헌부 감찰이 되다.
- 11월, 陳賀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가다.
성종 22 1491(28세)- 禮部員外郞 程愈에게서 「小學集說」을 얻다.
- 3월, 귀국하여소학집설」을 바치자, 상이 校書館에 명하여
中外에 간행ㆍ반포하도록 하다.
- 사간원 정언이 되다.
- 4월, 홍문관 수찬이 되다.
- 5월, 龍驤衛司正으로서 「綱目」을 校讐하다.
- 10월, 「강목」의 교수를 마치고 箋과 함께 올리다.
- 忠淸都事가 되다.
성종 23 1492(29세) - 木川 別墅에 ‘竹林精舍’를 짓다.
- 4월, 수찬이 되다.
- 7월,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 8월, 성균관 直講이 되다.
- 9월, 사간원 헌납이 되다.
- 李克墩ㆍ成俊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다.
- 사가독서하다.
- 11월, 김종직의 시호를 ‘文正’과 ‘文忠’으로 논의하다.
성종 24 1493(30세)- 홍문관 교리가 되다.
- 頒諭御史로 嶺南에 가다.
- 3월, 密陽에 가서 김종직의 墓에 제사하다.
- 5월, 서울로 돌아와 백성의 고통을 아뢰고 時政을 논하다.
-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가 되다.
- 7월, 사가독서하다.
- 8월, 〈御製四十八詠詩〉에 和答하고 跋文을 짓다.
- 9월, 〈秋懷賦〉를 짓다.
성종 25 1494(31세)- 獻納이 되다.
- 3월, 병조정랑이 되다.
- 5월, 홍문관 교리가 되다.
- 7월, 모친의 병으로 사직하다.
- 9월, 이조정랑이 되다.
- 11월, 本職으로써 兩館應敎, 經筵侍講, 史官編修, 春坊弼善을 겸하다.
- 12월, 編修官으로서 史草에 이극돈의 醜行을 直書하다.
연산군 1 1495(32세) - 戒辭 10條를 상소하다.
- 사직소를 올리고 田里로 돌아가다.
- 10월, 〈疾風知勁草賦〉를 짓다.
연산군 2 1496(33세) - 獻納이 되다. –
- 昭陵復位를 청하다.
- 2월, 사직하고 雲溪로 돌아가다.
- 3월, 모친상을 당하다.
연산군 4 1498(35 세) -무오 弘治 11 35 1월, 〈遊月宮賦〉를 짓다.
- 6월, 風疾이 있어 靑溪精舍에서 調養하다.
- 7월, 김종직의 〈吊義帝文〉을 史草에 실은 일로 국문을 받다.
- 7월 27일, 저자에서 權五福ㆍ權景裕ㆍ李穆ㆍ許磐과 함께 화를 입다 (卒)
- 楊州의 石橋에 가매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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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 1506 병인 正德 1 - 9월, 伸寃復爵되다.
○ 10월, 木川 鵲城山에 改葬하다.
○ 伯兄의 둘째 아들 金大壯이 奉祀하다.
중종 3 1508 무진 正德 3 - 8월, 水也山에 返葬하다.
중종 7 1512 임신 正德 7 - 9월, 홍문관 직제학에 추증되다.
○ 10월, 선생의 遺文을 구하라는 敎旨가 내리다.
중종 13 1518 무인 正德 13 - 2월, 자손을 錄用하게 하다.
○ 4월, 淸道의 儒生이 선생의 故宅인 雲溪精舍를 고쳐 紫溪祠를 세우다.
중종 14 1519 기묘 正德 14 - 2월, 문집이 初刊되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 가을, 紫溪祠를 書院으로 만들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 봄, 紫溪書院이 중건되다.
현종 2 1661 신축 永曆 15 - 4월, 도승지에 추증되고, 紫溪書院으로 賜額되다.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 3월, 木川 竹林祠에 배향되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 5월, 문집이 重刊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 가을, 竹林祠가 道東書院으로 사액되다
순조 27 1827 정해 道光 7 - 문집이 三刊되다.
순조 30 1830 경인 道光 10 - 12월, 이조판서에 추증되다.
순조 34 1834 갑오 道光 14 - 6월, ‘文愍’(博聞多見曰文 使民悲傷曰愍)의 시호가 내리다.
헌종 4 1838 무술 道光 18 - 문집이 四刊되다.
고종 11 1874 갑술 同治 13 - 年譜가 처음 간행되다.
고종 40 1903 계묘 光武 7 - 本集ㆍ續集ㆍ年譜ㆍ年譜續이 간행되다.
1925 - 문집이 간행되다.
1962 - 石印本이 간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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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위키백과,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1],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禍)를 입었다.
생애[편집]
출생과 수학[편집]
효성의 귀감으로 후세에 알려지는 김극일(金克一 1382~1456?)의 손자이며 집의를 지낸 김맹(金孟 1410~1483)의 아들이다. 어려서〈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478년 15세 단양 우씨와 혼인하고, 선산의 이맹전을 찾아 배알하였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이맹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함양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1483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정여해·강혼(姜渾)·남곤·정광필 등과 사귀었다. 이 중 남곤은 또다른 동문인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하기도 한다.
2년간 이맹전과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맹전이 병사하자 김종직의 문하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며 그에게서 성리학과 글, 사물을 배웠다. 그 당시 사림의 대표적 으뜸이던 김종직의 문하생인 그는 오래 스승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486년(성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관료 활동[편집]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편집]
상경한 뒤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다.
그 뒤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을 거쳐 1489년 음력 11월 요동질정관으로 1차로 북경을 다녀왔다. 1490년 음력 3월 노산군 입후치제를 주장하고 음력 4월 《육신전》을 첨삭하였으며 음력 11월 진하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그도 서장관으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1]
언관 활동[편집]
1491년(성종 2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하였고, 한치의 굽힘이 없었다.
성종 때 춘추관 헌납(獻納) 재직시에 이극돈과 성준(成俊) 등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의 원한을 샀다. 그 뒤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을 때는 정유(鄭愈) 등의 중국 학자와 교유하며 사상을 주고 받고, 정유가 지은 〈소학집설 小學集說〉을 가지고 귀국하여 조선에 전파했다.
사관 활동[편집]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또한 세조 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다. <조의제문>은 그의 스승 김종직이 항우(項羽)가 초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죽이고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은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었다. 이 조의제문과 기타 여러가지 사건이 빌미가 되어 후일 1498년(연산군 4년)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
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덕종의 후궁인 소훈 윤씨(昭訓尹氏)에게 이유 없이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家舍)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세조가 소훈 윤씨와 소의 권씨 등 장남 덕종의 후궁을 범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기록했으며, 〈조의제문〉을 그대로 사초에 기록하였다.
1496년 음력 1월 소릉복위 상소를 올리고 음력 3월 모친상을 당했다. 3년상을 마치고 1498년초 공직에 복귀했다.
부패, 간통 승려 비판[편집]
학조가 왕실의 위세를 업고 해인사 주지를 자신의 수하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2] 또한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도 문제가 된 기록이었다.[2] 승려 학조는 세조의 불사에 참여하여 총애를 받았고, 세조의 측근인 공신 김수온의 형제였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3] 그는 학조와 대방군부인 송씨의 간통 사실을 성종의 면전에서 직접 언급하며 이를 비판하였다.
또한 무오사화 당시 이 사실도 사초에 들어 있었다.[3]
생애 후반[편집]
훈구파 비판[편집]
그는 세조의 꿈 때문에 어이없이 부관참시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였고,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고, 숙의권씨(淑儀權氏)의 노비와 토지를 권람(權擥)이 가로챘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동료들로부터도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정광필이나 남곤, 김굉필, 김전, 김안국 등은 그런 신랄한 지적을 한 그에게 되도록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충고하거나, 오히려 그를 나무라고 질책했다.
그의 직언을 비판한 정광필과 김안국, 남곤, 김전, 김굉필 등은 살아남았지만, 그의 직언에 동조했거나 긍정적이었던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대부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희생된다.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상중에 전라도관찰사 이극돈이 기생을 불러다가 술을 마신 것을 사초에 기록했다. 이것이 동료 사관을 통해 이극돈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사초에서 상중에 기생과 어울린 내용을 빼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일손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무오사화와 죽음[편집]
무오사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만년의 그는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 유자광 등을 통해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그 내용인 즉, 세조를 비방하고,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던 것이다. 곧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대역죄로 음력 7월 광통방(廣通坊 : 조흥은행 본점이 있던 광교 네거리 근처)에서 능지처참되고, 권경유 · 권오복 · 허반 등 다른 많은 사류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무오사화라 한다. 이를 계기로 세조 때 등장하여 성종 때에 날개를 펴며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신진 사림은 집권층인 훈구파에게 숙청되었다.
사후[편집]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윤필상·이극돈(李克墩)·임사홍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과 학조 등 승려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신랄하게 지적, 규탄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증 승정원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저서[편집]
-
《탁영문집》
평가와 비판[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일찍이 스승인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불의와 부패를 규탄하였다.
패관잡기에는 그를 평하기를 "계운(季雲·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고 애석해 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은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이하 중략)...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라고 연산군을 비판하고 있다.
지족당 남곤은 그의 문장력과 시 재주가 동문 수학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났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음을 당했다며 항상 애통해하였다.
부정적 평가[편집]
그러나 과격하다는 비판도 있다. 후대에 월정 윤근수가 지은 <월정만필>에 의하면 "김일손이 정광필과 양남어사(兩南御史)가 되어 용인의 객관에 같이 묵었을 때 ‘시사를 논하는데 강개하여 과격한 말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정광필 등은 그가 너무 과격하다며 이를 나무라고 했다고 한다.
사상과 신념[편집]
학조의 월권 행위 비판[편집]
세조와 정희왕후의 총애를 받던 승려 학조에 대한 사초의 기록도 중요한 추궁사항 중의 하나였다.[4] 학조가 대비의 위세를 등에 업고 해인사의 주지를 자신의 수하 인물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했던 것이다.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을 기록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4]
그는 성종에게 여러번 불사의 부당함과 소격서의 잘못[5]을 여러 번 간하였고, 학조의 간통 행위를 공개적으로 언급, 지적하였다. 성종은 학조를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으며, 훈구파와 사림파 모두 정파를 초월하여 그의 불사 중단과 학조의 비리, 엽색행각 비판에 적극 공감하였다.
학조와 대방군부인 간통 논란[편집]
승려 학조는 왕실의 후원을 믿고 여러가지 월권행위를 자행하다가 영응대군의 미망인인 대방군부인 송씨와 간통하였다.
후일 박경은 김일손과 기맥이 통하여 홍인문 밖에서 '영응대군(永膺大君) 부인 송씨가 중 학조(學祖)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방문(榜文)을 보고 알렸다가, 김일손이 사초에 적는 바람에 호된 고문을 당하고 겨우 살아난 적이 있었다.[6]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군장사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시비가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는 것이다.[4] 이는 하녀에 의해 발설되어 알려졌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었다.
스승인 김종직은 이를 비판했고, 그는 박경 등으로부터 학조의 비행을 듣게 된다. 나중에 사림이 기록한 실록에는 학조가 세종의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와 사통(私通)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4][2] 김일손은 이를 박경에게 들었다고 공초했고, 박경이 잡혀와 국문을 당한다.[4]
학맥[편집]
학통상으로는 정몽주의 학파였다. 학맥상으로는 백이정과 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일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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