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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조의제문) 그날무슨일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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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조의제문) 그날무슨일이?

ㅅㅏ진인생 2010. 9. 6. 18:55

 

 

 

탁영선생(김일손) 은 "사진인생"의 16대 조부 이시다.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자계서원 이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498년 무오사화

(연산군 4년,김일손 35세 별세)

 

 █ 1498년 7월2일 에 사기(史記) 일로 체포되다.

 

명을 받든 사자(使者)가 청도에 도착했는데, 당시 선생은 함양에 있었다.

대유(김일손선생의조카)가 말을 달려 남계(藍溪)에 도착 이 변고를 고했는데,

선생은 안색도 변치 않고 말씀도 웃으면서 태연자약 했다.

마침  일두(一蠹)가 같이 앉아 있었는데 선생에게 이르기를,

 사림(士林)의 화(禍)는 이로부터 시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극돈(李克墩)이 일으키는 사기(史記)에 관한 사건일 것이다.

나는 거기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바라건데 백욱(伯;일두의 字)은 도(道)를 위하여 부디 자애(自愛)하시오.라고 하였다. 일두는 여러 말 하지마오. 나 역시 이 행차에 뒤따르게 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선생은 미소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의금부 도사가 도착하여 체포영장(拿命)을 제시하였다. 선생은 곧 뜰 아래에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를 올리고

평온한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이에 앞서 1457년 정축(세조 3년)

김종직 선생이 아직 진사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당함을 보고 「조의제문」을 지은 바 있다.

그 후 성종이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에게 명하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저술한 글을 찬집(撰集)하도록 했는데,

매계는 이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수록하여 올린 바 있다.

그리고 탁영 김일손 선생이 사관에 있으면서 이를 또한 사초에 실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닦는데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당상(堂上)이 되어 선생이 사초에 자기의 비행을 빠짐없이 수록한 것을 보고 이 「조의제문」을 가지고 자기의 사사로운 원한을 갚고자 마음먹었다.

 

마침내 이극돈은 「조의제문」을 가지고 유자광(柳子光,1439~1512)에게 급히 달려가 말하기를, 이 문장의 뜻은 광묘(光廟;세조)를 가르킨 것이다.

어찌 감히 이렇게 지을 수 있으며 어찌 감히 수록할 수 있는가?

이 모두가 대역(大逆)이다.라고 했다. 유자광은 음험하고 화 일으키기를 즐기는 자로서 함양(咸陽) 분시(焚詩)의 일[37] 이래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터라 크게 기뻐했다.

드디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차비문(差備門;궁궐 편전의 앞문)에 이르러 급변(急變)을 고하면서 선생이 허위로 세조를 헐뜯었다고 하였다.

그 편전에 드나드는 것은 오직 도승지 신수근(愼守勤)만이 관장하고 있었는데, 검열 이사공(李思恭)이 들어가 임금 뵙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연산주(燕山主)는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을 시켜 체포하여 오라하고 또 대궐 내의 일을 보는 관원(掖隷) 중에서 말 잘 타는 자를 뽑아 보내어 도중에 지체되지 않는가를 살피고 오게 했다.

그리고 급히 알리어 유자광과 이극돈으로 하여금 추관(推官;죄인을 국문하는 관원)으로

하여 옥사(獄事)를 전적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1498년 7월7일

 

의금부에 갇히고 밤에 대궐 뜰에서 국문을 받은 다음 진술서(供狀)를 올리다.

 수문당(修文堂) 앞에 설치된 국문장에 연산주(燕山主)가 나와 국문하여 묻기를,

 

 1) 무슨 까닭으로 선묘(先廟) 때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사초(史草)에 썼는가?

    이에 답하기를, 세조조(世祖朝)의 사실을 역사에 기록한 까닭은 임금의 선악과 신하들의 충간을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고 경계하고자 함이며

 

 2)「조의제문」은 왜 수록하였으며 거기에 찬동하면서 충분(忠憤)을 빗대어 나타냈다 함은 무슨 저의인가?

  이에 답하기를, 스승 김종직이 지은 이 글은 노산사건(魯山事件)에 느낀 바 있어 지었던 것이며 신(臣)이 이를 사초에 편집한 것은 천년 후세에까지 이를 보여 공론(公論)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3) 덕종귀인 권씨(權氏)에 관한 일은 누구에게 들었는가?

이에 답하기를, 덕종귀인 권씨에 관한 일은 귀인의 조카인 허반(許磐)에게서 들었으며

 

4) 소릉복위(昭陵復位)를 소청하였는데 무슨 뜻으로 썼는가?

이에 답하기를, 소릉복위(昭陵復位) 소청은 선왕께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후손을 봉하여 준 바 있는데 이는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신이 이 소청에서 바란 것은 성조(聖朝)에서 어진 정치를 펴고 폐례(廢禮)를 닦고자 함이었습니다.

 

5) 후전곡(後殿曲)에 관한 일은 무슨 견해로 적었는가?

이에 답하기를, 후전곡(後殿曲)에 관한 일은 신이 전에 서호(西湖)의 독서당에 있을 때 무풍부정(茂豊副正) 이총(李摠)이 가야금을 휴대하고 방문하여 후전곡을 탄 일이 있는데, 그 음이 심히 애절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데 쓸 만한 음이 아닌지라 아울러 언급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6) 사초를 같이 의논한 사람이 누구인고?

이에 답하기를, 모든 실정을 다 털어 놓았습니다. 같이 의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홀로 죽게 하여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선생 가택을 뒤져 색출한 문서 중에 이중옹(李仲雍)이 사초에 관해 말한 기록이 있었다. 홍사호(洪士灝)가 국문하기를, 아무개가 도(道)에 재직할 때․․․ 운운했는데 누구를 말함인가?라고 했다. 이에 선생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는 필시 이극돈이 사기(史記) 일로 해서 일으킨 일일 것이다.

극돈이 전라감사를 하고 있을 때 성묘상(成廟喪)을 당했는데도 장흥 기생과 놀아나고 또 뇌물을 탐하여 그 사실을 내가 사초에 실은 바 있는데, 극돈이 그것을 삭제하여 줄 것을 빌어왔으나 내가 들어주지 않아 그것으로 원한을 품게 된 것이다.

 

  선생의 진술은 명백하고 정직하였으며 한 마디도 앞뒤가 어그러지거나 그릇됨이 없었다. 추달과 신문을 받을 때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두려워 실색(失色)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의 언사는 강개하고 행동거지는 화평하고 조용하였으며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기절(氣節)이 있었다.

 

유자광(子光)과 이극돈(克墩)은 이 옥사가 저희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죄인들을 학대하고 괴롭힐 구실을 밤낮으로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조의제문」을 제멋대로 주(註)를 달아 풀이하고

임금으로 하여금 알기 쉽도록 하여 보이고 아뢰기를,

 김종직은 우리 세조를 흉보고 헐뜯었으며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 에게서 배운 바이므로

마땅히 대역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운운했다.

 

█ 1498년 7월27일 화(禍)를 입다

 

선생은 향지(嚮之;권오복), 자범(子汎;권경유), 중옹(仲雍;이목), 문병(文炳;허반)과 더불어 담소하며 평일과 같이 평온하고 의젓한 자세로 형장에 나아가니 때는 오정(午正) 일각(一刻)(낮 12시 15분)이었다.

이 날 온 천지가 그믐같이 캄캄하고 음침한 구름이 사방을 뒤덮더니 폭우가 쏟아지고 대풍이 동남쪽에서 일어나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왓장을 날렸다.

도성 안의 남녀치고 엎드려 벌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편 운계(雲溪,지금의 청도군서원리)의 냇물은 3일 동안 핏빛으로 흘렀다.(자계서원)

동창공(東窓公)과 대유(大有)도 다 같이 연좌되어 호남에 귀양 갔다.

이로부터 유림(儒林)은 기운을 잃고 학사(學舍)는 쓸쓸해졌다. 부형(父兄)들은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배워서 과거에 응할 생각은 이제 그만두어야 하고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 또한 말아야 한다. ․․․고 운운했다.

 

 출처참고:

<原文: 濯纓先生年譜 金大有 著  高宗11[1874]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2511-10-25, 參考譯文: 增補濯纓先生年譜 2006.9.30. 感慕齋宗中,

解釋 : 2008. 8. 15. 金順大, 編輯 :金乙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