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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 본문

역사_대한민국

한국전쟁6.25

ㅅㅏ진인생 2006. 4. 19. 12:40

 6.25 전쟁의 발발


 

[전후의 전개]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그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룩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분할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외상은 그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찬탁으로 선회함으로써 정치적인혼란을 가져왔다

.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소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해 5월에는 남한에서만의 선거가 행하여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그해 12월의 제3차유엔총회는 한국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제국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분단을공식화하였다. 정부수립을 마친 북한은 곧이어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소련은 그해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하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남한으로부터 철병을 완료하였다.


[남북한의 군사력증강]


미소에 의하여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아닌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분할독립과정에서 우선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북한은 이미 완전무장한 4개보병사단과 소련제 T-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기갑대대가 편성되었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또 3월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5000명이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10개사단 13만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조직이 완료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이어 국내외정세의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①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고,

②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③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Acheson, D.G.)
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④ 1949년말경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한 스탈린(Stalin, I.V.)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 국내적 요인으로는

① 남로당의 실질적 붕괴에 따라 남한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
어날 가능성이 희박하여졌고,

② 김일성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사로서의 경쟁’에 있어서 박헌영(朴憲永)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③ 남한이 아직도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고, ④ 국군의 병력.장비가 열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은 1950년 4월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이러한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한공산당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국회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벌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6년 1월에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는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각 육군.해군으로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리고 10월에는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은 약 1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비는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
에는 비할 수 없는 상태이었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사단 중 4개사단은 38도선으로부터 먼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게릴라의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유엔의 개입경위]


이렇게 하여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남침을 개시하였다. 전쟁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한, 유엔회원국들로 하여금 유엔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하여는 어떤 원조도 중었고, 6월 27일에 이르러 미국대통령 트루만(Truman, H.S.)은 미국의 해군.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곧이어 6월 28일에는 동경(東京)에 있던 미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D.S.)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방성에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에서의 유엔의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게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해군.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李承晩)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서 7월 14일에 수교되었다.

 

6.25 전쟁의 순서

 

1950.6.25 북한군의 남침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인민군은 7개 보병사단,1개 기갑여단 및 특수전부대를 포함, 총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시작 하였다.

1950.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한국의 사태를 보고 받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불법 남침 중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결의안을 찬성 9, 반대 0, 기권 1로써 가결하였다. 이 결의는 유엔이 집단안전보장조치로써 침략을 저지하고 평화의 회복을 달성하려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50.8.1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명령

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선정하고 이 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을 계획하였으며, 미 제 8군 사령관 워키중장은 8월 1일 전군에 낙동강방어선으로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1950.8.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

북한인민군은 8월 5일부터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하였다.이에 맞서 국군 및 유엔군은 왜관·다부동, 창녕,·영산, 마산, 포항, 안강 등에서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낙동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 일대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 하였다. 이것은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량의 융단폭격이었다

1950.8.31 ~ 9.8 인민군의 9월 공세

8월 공세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북한군은 다시 9월 공세를 시작하여 왜관·다부동,창녕· 영산, 마산, 포항 등을 공격하였다. 한때 영천과 경주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은 사투를 벌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이곳에서 반격할 기반을 조성하였다.

1950.9.15 인천상륙작전

1950.9.15 인천상륙작전맥아더 유엔사령관은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261척의 함선과약1천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인천으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전세는 반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과 추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50.9.28 수도 서울 탄환

인천에서 상륙한 미 제 10군단 주력과 낙동강전선에서반격을 실시한 미 제8군 주력이 적을 추격하여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9월 29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다.

1950.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반격을 실시한 국군 및 유엔군은 9월 30일 드디어 38도선에 도달하여 대망의 북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로부터는 정식 북진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명령에 의해 국군 제3사단 제 23연대와 수도사단의선두부대가 동부전선에서 38도선을 돌파함으로써 북진작전의 막이 올랐다.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야간행군으로 북한지역의 산악지대에 잠입한 중공군의 대군이 처음으로 공세를 개시, 국경선에 접근한 국군 및 UN군 부대들을 포위·격파하였다.

1950.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한만국경선으로의 공격명령을 받은 국군 중에서 제6사단 제7연대의 선봉부대가 26일 최초로 압록강변에 도달하였다. 9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지 41일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도 곧 중공군의공격을 받아 급히 철수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50.11.21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중공군의 공세를 받아 미 제8군이 청천강선으로 철수한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에서는미 제10군단이 계속 북진을 실시하여 미 제7사단의 선두부대가 국경도시 혜산진을 무혈점령하였고, 국군 제3사단은 합수, 백암까지, 수도사단은 청진까지 진출하였다.그러나 이들 부대들도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었다.

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워커 장군의 뒤를이은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은 위력수색 작전으로 적의 위치와 전투력을 확인토록 하면서 반격을 실시하여 전선을 북으로 밀어올리고, 3월 중순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38도선까지 진격한 후 이 선을 돌파하여 재차 북진하였다.

1951.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미 극동군사령관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6.25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북진하여 한만 국경선 가까이 도달함으로써 남북 통일의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던 국군과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적을 포기하고 정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과 중공도 이런 사태를 인식하였으며, 마침내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정전의사를 표시 하므로서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양측의 합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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