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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ㅏ진인생 2006. 4. 19. 23:07

 

10.26사태

 

1979년 10월26일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

당시 상황은 유신체제 이후 억눌린 소외계층들의 불만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1977년 출범한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유신정권이 반목하자 국내외로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79년 10월 16일 부마사태가 발생하고

계엄령과 위수령이 발동되었으며 부마사태에 대한 강경대응은

집권층 내부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유신체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정치적 위기상황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의 강경노선을 채택하자

위기감을 느낀 김재규가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현재까지 10·26사태의 진상이나 발생원인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12 ·12사태

1979년12월12일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된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2·12사태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 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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